산업 일반
‘물고기 잡는 법’을 남긴 경영자,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
-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 영면
50년간 한국 제련 산업 기틀 닦아
가르침 아래 성장 이어가는 고려아연

[이코노미스트 박세진 기자] '비철금속 업계의 거목'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이 지난 10월 6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4세. 최 명예회장은 고려아연을 세계 1위 비철금속 기업으로 성장시킨 인물이다.
고인은 1941년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났다. 1974년 고려아연 창립 멤버로 참여한 뒤 50년간 한국 제련 산업의 기틀을 닦았다. 당시 한국은 광산도, 기술도, 자본도 없는 자원 빈국이었다. 그러나 그는 “도전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다”는 신념 하나로 정부·금융권·국제기구를 설득하며 회사를 세웠다.
세계은행 산하 국제금융공사(IFC)로부터 1300만달러(약 185억원)의 자금을 유치해 제련소 건설에 착수했으며, ‘턴키 방식’을 거부하고 직접 구매와 시공을 맡아 7000만달러(약 996억원)로 예상된 공사를 4500만달러(약 640억원)에 완성했다. 이 ‘신의 한 수’는 이후 고려아연이 기술력과 자본을 모두 축적하는 전환점이 됐다.
그는 1980~1990년대 온산제련소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퓨머·DRS공법 등 첨단 기술을 도입해 환경친화적 제련공정을 확립했다. 1990년 기업공개를 통해 투명경영 기반을 마련했고, 영풍정밀·서린상사·코리아니켈 등 계열사를 설립하며 그룹 시너지를 구축했다.
그 결과 고려아연의 아연 생산능력은 창립 당시 연 5만톤에서 현재 65만톤으로, 매출은 114억원에서 12조원 수준으로 성장했다. 고인의 뚝심이 고려아연을 자원 빈국에서 세계 1위 기업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꾸준함으로 이룬 리더십
고인은 생전 “혁신이나 개혁은 이미 늦은 것이다. 매일 조금씩 발전하면 큰 변화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의 경영철학은 ‘개혁’보다 ‘꾸준한 변화’ ‘스타 플레이어’보다 ‘탄탄한 조직력’이었다.
2014년 창립 40주년 인터뷰에서 그는 “누구 한 사람의 영웅이 만든 것이 아니라 전 직원이 합심해 일군 성과”라며 “스타보다 조직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가 세운 조직문화는 1997년 IMF 외환위기 때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때도 단 한 차례의 구조조정이나 명예퇴직이 없었던 원동력이 됐다. 고려아연은 지금까지 38년 무분규, 102분기 연속 흑자라는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임직원들에게 "고려아연은 특정 가문의 회사가 아니라 모두의 회사"라고 말하며 동료애를 중시했다. 인재 양성에도 힘써 임직원 해외연수를 꾸준히 지원하고, 장학사업을 통해 인재를 키웠다.
그는 제련산업을 ‘공해산업’에서 ‘친환경산업’으로 바꾸기 위해 기술개발에 투자했다. 아연 제련 과정에서 발생하는 잔재를 ‘청정슬래그’ 형태로 전환해 시멘트 원료로 재활용하는 기술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다. 이 기술은 전 세계 제련소들의 난제를 해결하며 고려아연을 ‘친환경 제련소의 모델’로 만들었다.

2002년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뒤에도 그는 조용히 회사의 뒤를 받쳤다. 경영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신기술 개발과 해외 자원 확보, 희소금속 회수 시스템 구축 등 주요 현안에 끊임없이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금·은·인듐·안티모니 등 고부가가치 금속의 회수 체계를 정착시킨 것도 그의 구상에서 비롯됐다.
그는 "국내에 매장된 자원은 한정돼 있지만, 기술로 새로운 광맥을 열 수 있다"며 ‘도시광산’ 개념을 일찍이 제시했다. 이 철학은 현재 고려아연의 자원순환사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서도 그는 한결같았다. 1981년 명진보육원 후원을 시작으로 아동복지와 장학사업을 40년 넘게 이어왔고, ‘임직원 기본급 1% 기부 운동’을 주도해 전사적 나눔 문화를 정착시켰다.
그와 부인 유중근 이사장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으로 가입해 기업인의 사회 환원 모범을 보였다. 2013년에는 이러한 공로로 ‘대한민국 나눔국민대상’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그는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보다 잡는 법을 알려줘야 한다”며 단순한 기부를 넘어 자립을 돕는 ‘지속 가능한 나눔’을 강조했다. 복지시설 지원에서도 단발성 후원이 아니라, 자립 프로그램·직업훈련·학업 장학으로 이어지게 설계한 것도 그의 방식이었다.

무엇보다 최 명예회장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사람을 믿는 조직문화’였다. 그 믿음은 위기 때마다 회사의 버팀목이 됐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100년 가는 회사가 위대한 회사”라고 했다. “우리는 아직 배울 것도, 이룰 것도 많다. 한순간의 영광보다 꾸준함이 중요하다”는 말은 그의 경영철학이 단기 성과가 아닌 지속 가능성에 있었다는 걸 보여준다.
창립 50년을 넘어 100년 기업을 향해 달려가는 고려아연의 근간에는 개혁보다 변화, 개인보다 조직을 믿었던 최창걸 명예회장의 신념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가 남긴 ‘물고기 잡는 법’은 이제 후대의 경영철학으로 스며들었다. 최 명예회장의 철학은 장남 최윤범 회장에게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최 회장은 ‘현장 중심 경영’과 ‘트로이카 드라이브(신재생·이차전지·자원순환)’를 앞세워 고려아연을 글로벌 전략광물 공급망의 핵심 기업으로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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