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근대의 엔진’ 영주, 철도 도시의 새로운 실험[김현아의 시티라이프]
- [지방의 시간을 기록하다]③
숲과 전통을 지나 마주한 '직선'의 도시
[김현아 가천대 사회정책대학원 초빙교수·정책평가연구원 연구위원·전 국회의원] 앞선 여정에서 봉화가 태고의 자연으로 치유를 건네고, 안동이 유구한 전통으로 정신을 압도했다면, 소백산맥을 넘어 마주한 영주는 사뭇 다른 공기를 품고 있었다. 이곳은 ‘속도’와 ‘직선’의 도시다. 1942년 개통된 중앙선 철도는 고요했던 농촌 마을 영주에 근대라는 엔진을 이식했다. 일제강점기 자원 수탈을 위해 깔린 차가운 쇠길이었지만, 해방 이후 그 길은 산업화의 동맥이 돼 영주를 경북 북부 내륙의 물류 심장부(Logistics Hub)로 재편했다.
영주역을 정점으로 사방으로 뻗는 도로망과 철도 관사(官舍)를 중심으로 구획된 주거지는 자연 발생적인 촌락이 아닌, 철도 중심 계획도시의 전형적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도시의 흥망은 인프라의 수명과 궤를 같이한다. 석탄 산업 합리화와 고속도로 중심의 국토 개발은 철도 도시에 가혹한 구조 조정을 강요했다. 여기에 인구구조 변화와 광역도시 중심의 성장 전략이 겹치면서 쇠퇴 압력이 커졌다. 2024년 초, 영주시 인구가 심리적 저지선인 ‘10만 명’ 아래로 붕괴된 사건은 단순한 숫자의 감소가 아니라, 지난 반세기 동안 도시를 지탱해온 성장 모델이 한계에 봉착했음을 알리는 구조적 경고음이다.
2021년 KTX-이음 개통으로 수도권 접근성이 1시간 40분대로 획기적으로 개선됐으나, KTX 개통과 별개로 인구 감소, 소비 패턴 변화 등과 맞물려 대학로 상권 공실이 늘고 있는데, 이는 고속철 개통 시 지적되는 빨대 효과(Straw Effect) 우려와도 맞닿아 있다 이제 영주에게 필요한 것은 물리적 연결을 넘어, 사람을 머물게 하는 ‘체류의 자석(Magnetism)’을 만드는 일이다.
하드웨어 재생의 한계와 ‘모지코’의 교훈
지난 10년간 영주의 도시재생은 ‘공간의 보존’에 방점을 뒀다. 후생시장, 중앙시장, 그리고 관사골로 이어지는 재생 사업은 쇠퇴한 구도심의 물리적 뼈대를 정비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점(點)이 아닌 면(面) 단위로 등록문화재를 지정한 ‘근대역사문화거리’ 전략은 도시의 맥락(Context)을 보존했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하드웨어 중심의 재생은 ‘지속 가능성’이라는 난제에 부딪혔다. 잘 지어진 건물도 콘텐츠가 없으면 유령 공간이 된다. 인근 안동이 고택 리조트로, 단양이 레저로 체류형 관광을 선점하는 동안, 영주는 대규모 인프라 확충에도 불구하고, 체류 시간이 길어지는 체험·숙박 콘텐츠는 여전히 더 보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잠시 일본 기타큐슈의 ‘모지코(Mojiko) 레트로’사례를 살펴보자. 이곳은 영주에 유의미한 벤치마킹 대상이다. 모지코 역시 석탄과 물류 기능 상실로 쇠락했으나, 붉은 벽돌의 근대 건축물을 현대적 감각의 F&B와 야간 관광 콘텐츠로 재해석하여 연간 200만 명이 찾는 명소로 부활했다. 핵심은 ‘과거의 박제’가 아닌 ‘현재적 활용’이다. 영주의 관사골 적산가옥과 풍국정미소 같은 산업 유산 역시 단순 관람용이 아닌, MZ세대가 소비하고 머물 수 있는 힙(Hip)한 상업 공간이나 스테이(Stay) 모델로 과감히 전환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로컬 스타트업이 쏘아 올린 희망
다행스러운 점은 최근 영주에서 감지되는 변화의 기류가 과거의 관(官) 주도 방식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민간 기업과 스타트업이 주도하는 바텀업(Bottom-up) 생태계가 싹트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영주시와 SK스페셜티, 임팩트 투자사가 협력한 ‘STAXX(스택스) 프로젝트’다. 이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 단순 기부를 넘어 지역 창업 생태계를 조성하는 공유가치창출(CSV) 모델로 진화했음을 보여준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빈집 재생 노하우를 이식해 공유 주거를 만드는 ‘블랭크(Blank)’, 영주의 풍부한 소나무 자원을 뷰티 제품으로 고부가가치화 한 ‘피노젠’, 지역 농산물로 새로운 F&B 문화를 만드는 ‘리쿼스퀘어’등 혁신적인 소셜벤처들이 영주에 둥지를 틀었다.
이들 청년 창업가들은 영주를 ‘소멸 위기 지역’이 아닌 ‘기회의 땅’으로 재정의한다. 수도권의 살인적인 비용과 경쟁에서 벗어나, 지역 고유의 자원(Local Heritage)을 비즈니스 모델로 연결할 수 있는 최적의 테스트베드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인구 10만 붕괴를 넘어, ‘강소(强小) 도시’로의 체질 개선
인구 10만 명 붕괴는 충격적인 지표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도시학적 관점에서 볼 때, 절대 인구수의 감소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활동 인구’와 ‘창조 계층’의 소멸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영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스타트업들의 도전은 도시의 체질을 바꾸는 중요한 변곡점이다. 봉화의 자연이 쉼을 주고, 안동의 정신이 뿌리를 확인시켜 준다면, 영주의 실험은 지방 도시가 나아가야 할 ‘미래의 생존법’을 제시한다. 과거 영주를 움직인 동력이 증기기관차였다면, 미래의 동력은 골목길 곳곳에서 혁신을 실험하는 로컬 크리에이터들이다.
도시재생은 끝이 없는 과정(Process)이다. 관사골 할머니들이 운영하는 ‘할매 묵공장’의 온기가 구세대 주민들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버팀목이라면, ‘스택스’를 통해 유입된 청년들은 도시에 새로운 혈류를 공급하는 펌프와 같다. 신구(新舊) 세대의 이러한 공존과 협업이야말로 지방 도시가 소멸의 파고를 넘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강력한 대안이다.
영주는 지금 쇠퇴가 아닌 ‘축소 균형’을 향한 과도기를 지나고 있다. 100년 전 기찻길이 도시를 낳았듯, 이제는 혁신적인 로컬 비즈니스가 영주의 다음 100년을 견인할 것이다. 위기 속에서도 움트고 있는 이 작은 변화의 싹들을 주목하고 응원해야 할 이유다.
영주의 철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내륙의 물자가 모이던 이 거대한 결절점(Node)을 지나, 이제 그 맥박이 닿았던 바다의 끝으로 향한다. 기찻길이 실어 나른 근대의 애환이 가장 짙게 남아있는 항구, 다음 여정은 ‘군산’이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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