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디지털 아세안이라는 거대한 파도에서 한국이 ‘키’를 쥘 시간 [동남아시아 투자 나침반]
- 2026년 필리핀 정상회의 목표 DEFA 협상 가속화
규범 수용자 넘어 ‘설계자’로 나설 때
[김상수 Hanbridge 대표] “한국의 첨단 기술력과 아세안의 역동적인 디지털 시장 잠재력이 결합될 때 강력한 시너지가 창출될 것이다.”
지난해 10월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제26차 한-아세안 정상회의에서 프라보워 수비안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이같이 발언했다. 아세안의 디지털 전환 파트너로서 한국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외교적 수사를 넘는 것이다. 아세안이 역내 통합과 디지털 전환을 동시에 추진하는 과정에서 기술력과 제도적 경험을 겸비한 협력국을 필요로 한다는 방증이다.
동남아시아 11개국으로 구성된 아세안은 현재 디지털 경제를 매개로 한 새로운 통합 국면에 진입했다. 2026년 초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도 아세안 각국 리더들은 ‘아세안 디지털 경제 프레임워크 협정’(DEFA)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글로벌 불확실성이 확대되는 가운데, 2030년까지 약 2조달러(약 2900조원) 규모로 성장할 디지털 경제를 아세안의 핵심 성장 동력으로 삼겠다는 목표다.
가속화되는 DEFA 시계, 쟁점은 '연결의 규칙'
DEFA는 이제 구상의 단계를 지나 현실적인 정책 과제로 구체화되고 있다. 아세안은 2026년 의장국인 필리핀에서 열릴 정상회의에서 최종 서명하는 것을 목표로 협상 속도를 높이고 있다. 올해 1분기까지 남은 핵심 쟁점을 정리한다는 로드맵 하에 각국 실무 협의가 긴박하게 진행 중이다.
현재 논의의 핵심은 ▲국경 간 데이터 이동과 저장 원칙 ▲전자결제 및 디지털 신원의 상호운용성 ▲중소기업(SME)의 디지털 참여 ▲소비자 보호 및 사이버 보안 기준 등이다. 이는 기술적 사안인 동시에 각국의 규제 철학과 주권 인식이 첨예하게 맞닿아 있는 영역이다.
아세안은 모든 쟁점의 완벽한 해결보다는 ‘실행 가능한 최소 공통 규칙’을 우선 마련하고 단계적으로 고도화하는 실용적 접근을 취하고 있다. 이미 금융 분야에서 QR 결제 연동 등 점진적 통합을 시도해 온 경험을 디지털 경제 전반으로 확장하려는 전략이다.
시장 개방이 아닌 '호환성'이 본질
DEFA를 단순한 ‘디지털 자유무역협정’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 협정의 본질은 시장 개방이 아니라, 상이한 디지털 경제가 맞물려 돌아가기 위한 ‘공통의 연결 규칙’을 정립하는 데 있다. 관세 철폐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 호환성, 그리고 예측 가능성이다.
아세안은 겉보기에 하나의 시장 같지만, 실제로는 국가별 디지털 성숙도와 규제 수준의 편차가 크다. 따라서 DEFA는 제도의 통일이 아닌 ‘연결’을 지향한다. 서로 다른 제도를 유지하면서도 경제 활동이 단절되지 않도록 하는 최소한의 프로토콜을 만드는 작업이다.
이 지점에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드러난다. 한국은 높은 디지털 기술 역량을 보유했을 뿐 아니라 ▲전자정부 ▲실시간 결제 인프라 ▲금융 보안 ▲데이터 활용 등 제도를 실제로 운영하며 숱한 시행착오를 겪어왔다. 아세안이 한국에 기대하는 것은 단순한 기술 공급이 아니라, 작동 가능한 디지털 질서를 설계하고 검증해 본 경험이다.
규범의 ‘설계자’로 전환할 기회
DEFA 체결 이후를 대비해 한국은 다음 세 가지 전략을 준비해야 한다.
첫째, 규범 수용자(Rule-taker)에서 공동 설계자(Rule-setter)로의 전환이다. 협정문 서명 이후 구체적인 가이드라인과 시범 사업이 추진될 때, 한국은 파일럿 프로젝트를 통해 협정의 실질적 작동 방식을 제안하고 주도해야 한다.
둘째, 디지털 금융과 중소기업을 잇는 협력 모델 구축이다. 아세안 디지털 경제의 병목인 SME의 금융 접근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이 축적한 정책금융, 기술보증, 데이터 기반 신용평가 노하우를 이식해야 한다. 이는 DEFA가 지향하는 포용적 성장의 핵심 도구가 될 것이다.
셋째, 데이터 상호운용성 확보의 선점이다. ▲국경 간 QR 결제 ▲디지털 고객확인(KYC) ▲ 자금세탁방지(AML) ▲무역 데이터의 디지털화는 DEFA의 성패를 가를 시험대이자 한국 금융·IT 산업이 경쟁력을 가진 분야다.
DEFA는 아세안이 단일 디지털 국가가 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각기 다른 국가들이 연결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제도화하는 과정이다. 2026년 1분기 협상은 그 성격과 범위를 결정짓는 분수령이 될 것이다. 한국에게 DEFA는 단순한 시장 접근의 기회를 넘어, 아세안과 함께 디지털 질서의 표준을 설계할 수 있는 드문 전략적 모멘텀이다.
필자는 삼정 KPMG∙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한국벤처투자 등 23년이상 다양한 사업경험과 더불어 벤처캐피탈∙회계법인∙인프라∙스타트업 등에서 경력을 쌓았다. 현재 싱가포르의 Hanbridge의 대표로 한국 중소∙벤처기업의 해외 진출 및 해외 자금 유치를 돕는 역할과 함께 한국과 동남아시아의 생태계를 연계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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