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일반
“‘한국형 챗GPT’ 아닌 산업형 AI”…AI 세계 대전 한국의 생존 전략[막오른 AI 3차 대전…전선이 바뀌었다]③
- 범용 모델 대신 ‘산업 특화’ 선택한 한국 AI
제조·플랫폼 현장 파고드는 맞춤형 AI 전략
[이코노미스트 정길준 기자] 전 세계 인공지능(AI) 시장이 오픈AI·구글·앤트로픽을 손에 쥔 미국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한국이 같은 방식으로 ‘AI 3강’에 오를 여지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이에 제조 강국이라는 타이틀을 전면에 내세워 주력 산업에 깊게 파고드는 ‘산업 특화 AI’ 전략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을 실린다.
소버린 AI 한계와 산업형 AI의 부상
최근 글로벌 컨설팅 기업이 한국의 AI 확산 전략을 우수 사례로 꼽아 눈길을 끌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지난 3월 공개한 ‘소버린(주권) AI는 환상. AI 레질리언스(회복 탄력성)가 현실’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각 나라가 독자 초거대 모델을 구축해 완전한 AI 주권을 달성하겠다는 구상은 비용과 기술 격차를 고려할 때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중소기업에 AI 솔루션을 구매할 수 있도록 돕는 한국의 ‘AI 바우처’ 사업을 소개했다. BCG는 “기업의 비용 지출이 제한적인 국가에서는 거창한 정책보다 소액의 보조금이 AI 도입 속도를 더 빠르게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천문학적인 국가 재원을 투입해 독자 AI를 구축하는 대신 각 산업에 AI를 촘촘히 녹여 활용 역량과 데이터·인프라 통제력을 높이는 ‘AI 레질리언스’ 전략을 현실적인 해법으로 제시했다.
SK그룹의 싱크탱크인 최종현학술원 역시 AI 경쟁 환경이 새로운 국면에 진입한 것으로 봤다. BCG의 조언에서 더 나아가 ‘도메인 특화 AI 에이전트’가 한국에 최적의 선택지라고 강조했다. 학술원은 연초에 발간한 보고서에서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기술 역량을 보유하고 있고 제조 산업 전반에서 축적된 운영 데이터와 K컬처로 대표되는 독창적 데이터 자산을 이미 확보하고 있다”며 “소버린 AI는 ‘불가능한 도전’이 아니라 집중 투자와 명확한 목표 설정이 요구되는 국가 프로젝트에 가깝다”고 분석했다. 글로벌 빅테크의 대규모 언어모델(LLM)과의 정면 대결보다 제조·로봇·물류·게임·의료 등 한국이 강한 산업에 특화한 AI를 육성하는 전략이 유일한 생존법으로 부상한 셈이다.
이미 국내에서 산업 특화 AI를 적용해 업무를 혁신하는 사례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로봇 솔루션 기업 트위니는 물류센터 내 단순 반복 이동 업무를 로봇이 대신 하는 AI 기반 물류 자동화 솔루션 ‘나르고 오더피킹’으로 제조 현장을 혁신하고 있다. 해당 솔루션을 도입한 고객사는 6명의 인력 감축 및 26%의 비용 절감 효과를 봤다. 월급 300만원의 작업자 11명을 투입하는 대신 작업자 5명과 대당 월 90여만원의 로봇을 배치한 결과다. 글로벌 1위 중고 반도체 장비 유통 기업 서플러스글로벌은 내부 데이터를 학습시킨 AI 추천 시스템을 개발해 구매 확률이 높은 잠재 고객을 예측한다. 전체 거래 중 25%를 AI 추천으로 시작하는 단계에 도달해 기존 영업사원의 직관에서 벗어나 데이터 기반 영업의 틀을 다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국내 기업들도 전략 수정
우리 기업들도 범용 모델 실험에서 눈을 돌려 주력 산업에 특화한 AI를 내재화하고 있다. LG AI연구원은 자체 LLM ‘엑사원’을 전문 분야 특화 AI 모델을 빠르게 만드는 플랫폼으로 키우고 있다. 신소재·신약 개발 지원 기술인 ‘엑사원 디스커버리’는 화장품 소재를 개발할 때 약 22개월이 걸렸던 4000만건 이상의 물질 합성 결과물의 물성·합성 용이성·안전성 검토 작업을 하루 만에 끝냈다. LG생활건강은 AI가 발견한 신물질 기반 화장품을 조만간 선보일 계획이다. 고품질 데이터 생산에 특화한 ‘엑사원 데이터 파운드리’는 전문가 60명이 붙어 3개월을 작업해야 생성할 수 있는 데이터를 1명이 단 하루 만에 확보했다. 데이터 생산성은 최소 1000배, 데이터 품질은 평균 20% 이상 개선했다.
게임업계 맏형인 엔씨의 AI 자회사 NC AI는 국가대표 AI 프로젝트에서는 아쉽게 고배를 마셨지만, 소버린 AI를 외친 경쟁사들과 달리 처음부터 산업 특화 AI를 전면에 내세워 주목받았다. 막대한 자본이 필요한 범용 모델 대신 제한된 환경에서도 피지컬 AI와 가상 세계 모델을 안정적으로 구동해 제조·물류·국방 등 산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맞춤형 AX(AI 전환) 솔루션에 공을 들이고 있다. 여기에 수십 년간 쌓은 게임 개발·운영 노하우를 녹인 콘텐츠 특화 모델 ‘바르코’를 더해 커머스와 디지털 콘텐츠를 주춧돌로 국내외 파트너십을 점진적으로 넓혀 나가고 있다.
플랫폼 기업들도 ‘한국형 챗GPT’보다는 자사의 버티컬 서비스와 결합한 특화 AI에 무게를 두는 모양새다. 네이버는 한국어 초거대 모델 ‘하이퍼클로바X’를 뼈대로 한 대화형 AI 서비스 ‘클로바X’와 생성형 검색 ‘큐’를 운영해 왔다, 그러나 지난 4월 이들 실험적 서비스를 종료하고 커머스·비즈니스 영역에 AI를 깊이 심는 전략으로 방향을 틀었다. 쇼핑 영역에서 ▲상품 탐색 ▲비교 ▲리뷰 요약을 돕는 쇼핑 에이전트와 스토어 운영자를 지원하는 비즈니스용 AI 도구를 강화하면서 범용 챗봇이 아닌 ‘커머스 특화 AI 에이전트’로 하이퍼클로바X의 활용 방향을 재규정하고 있다.
카카오는 카카오톡을 중심으로 특화 AI 전략을 추진 중이다. 자체 경량 모델 ‘카나나’는 물론 외부 LLM을 순차적으로 결합해 메신저 기반 AI 에이전트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 향후에는 ▲금융 ▲모빌리티 ▲콘텐츠 소비까지 연결되는 ‘AI 슈퍼앱’을 구상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은 격차가 벌어진 글로벌 AI 시장에서 무분별한 추격에 힘을 쏟기보다 산업별 특화 솔루션을 중심으로 생존 전략을 짜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재성 중앙대 AI학과 교수는 “GPT와 같은 범용 모델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답을 주지만, 지금 국내 기업들이 구축하려는 건 각 회사의 주력 사업에 도움을 주는 특화 LLM이다”며 “때마침 우리나라는 수십 년 동안 제조업에서 쌓아온 숙련도가 전문가의 은퇴와 젊은 세대의 기피 현상으로 사라질 위기에 있는데 이런 노하우를 데이터와 모델 형태로 보존·전승할 수 있다는 점도 산업용 AI의 큰 의미”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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