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일반
미국은 인텔 ‘구하기’, 한국은 호남에 ‘베팅’…반도체 2차 패권전쟁
- [호남 반도체 선택일까 선물일까]③
美, 인텔 지분 인수 등 국가 자본주의 회귀
中, 성숙 공정 독점 전략으로 맞불
이재명 정부, 호남에 800조 투입해 최첨단 팹 4기 건설
[이코노미스트 원태영 기자]바야흐로 ‘기업 간 경쟁’ 시대는 막을 내렸다. 반도체와 인공지능(AI)은 이제 단순한 산업의 영역을 넘어, 국가의 주권과 안보를 담보하는 가장 치명적인 전략 자산이 됐다. 미·중 갈등의 심화 속에서 전 세계는 정부의 재정과 행정력을 남김없이 쏟아붓는 ‘국가 총력전’ 체제로 급격히 전환되고 있다.
미국이 강력한 자국 중심주의를 바탕으로 글로벌 공급망의 판을 흔드는 가운데, 중국의 기술 자립 의지 역시 한 치의 물러섬이 없다. 이 거대한 고래 싸움의 한복판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서남권 800조원 투자’라는 전례 없는 초대형 카드를 꺼내 들었다.
미중간 치열한 반도체 전쟁
글로벌 반도체 지형을 뒤흔드는 가장 큰 축은 미국의 거침없는 ‘제조업 재건’ 행보다. 트럼프 정부 들어 미국의 반도체 정책은 단순히 민간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투자를 유도하던 과거의 방식을 완전히 넘어섰다. 국가가 공급망의 핵심 기업을 직접 통제하고 육성하는 이른바 ‘미국식 국가 자본주의’ 체제로의 급격한 패러다임 전환이다.
그 정점에 있는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지난해 8월 미국 연방정부가 반도체법 보조금 지급 조건을 고리로 삼아 미국 반도체의 자존심인 인텔(Intel) 지분 9.9%를 직접 인수하며 최대주주로 등극한 점이다. 경영난에 빠진 자국 기업을 살리기 위해 약 12조3000억원 규모의 공적 자금을 투입, 사실상 인텔을 ‘국영기업’과 다름없는 형태로 전환한 전례 없는 초강수다. 백악관과 상무부는 이를 통해 인텔의 첨단 파운드리(위탁생산) 사업부 붕괴를 막는 안보 방어선을 쳤다.
여기에 마이크론(Micron)이 아이다호주에 초대형 메모리 팹(Fab)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대만 파운드리 기업 PSMC 등의 글로벌 자산을 공격적으로 인수합병(M&A)하며 미국은 ▲설계 ▲제조 ▲후공정(패키징)으로 이어지는 반도체 전 주기의 자체 완결형 생태계 복원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는 대만과 한국에 쏠려 있던 제조 주도권을 미국 본토로 끌어오겠다는 전략이다.
미국의 이 같은 노골적인 공급망 차단막에 맞서, 중국 역시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는 독자적인 ‘반도체 만리장성’을 구축하며 대치 중이다. 미국이 첨단 미세 공정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등의 중국 반입을 촘촘히 옥죄자, 중국은 거대한 ‘국가집성전로산업투자기금(일명 대기금)’ 제3기를 출범시켰다.
1·2기 펀드를 합친 것보다 큰 3440억 위안(약 78조원) 규모의 역대급 자금을 가동한 중국은 첨단 미세 공정 대신 성숙 공정(28nm 이상) 시장을 통째로 장악하는 우회 전술을 노골화하고 있다. ▲전기차 ▲가전제품 ▲로봇 ▲첨단 군사 무기 등 현대 산업의 모태가 되는 범용 반도체 공급망을 중국 주도로 독점해, 향후 다른 국가들이 중국산 범용 칩 없이는 고부가가치 완제품을 생산할 수 없도록 역(逆)인질극 체제를 만들겠다는 포석이다. 동시에 화웨이와 SMIC를 중심으로 첨단 패키징 기술을 고도화해 자체 AI 가속기(칩) 개발에 성공하는 등 기술적 자립도를 무섭게 끌어올리고 있다.
‘호남권 800조’ 메가 클러스터 노림수
미·중의 숨 막히는 압박 속에서 대한민국이 선택한 돌파구는 ‘정부 주도의 과감한 공간적 대전환’이다. 정부는 최근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를 발표하며, 그동안 용인·평택 등 수도권에 집중돼 있던 반도체 거점을 호남을 중심으로 한 서남권으로 틀어 총 800조원을 투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메가 프로젝트의 핵심은 서남권 지역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의 민관 합작 투자를 이끌어내 총 4기의 최첨단 메모리 팹(Fab)을 신설하는 것이다. 이는 전남·광주 지역이 수년 동안 총생산해내는 금액(연간 GRDP 약 160조원)을 압도하는 규모로, 국가 경제 지도를 아예 새로 그리는 수준의 파격적인 대수술이다.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이 국가 총력전으로 치닫는 가운데,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은 생존을 위한 명확한 나침반이 필요한 상황이다. 미국이 인텔 지분을 인수하며 자국 중심주의를 강화하고, 중국이 성숙 공정 독점으로 맞불을 놓는 상황에서 한국의 돌파구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대체 불가능한 ‘초격차 기술력’ 유지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HBM 등 차세대 첨단 메모리 분야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해야만 미·중 모두가 한국을 핵심 파트너로 인정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첨단 메모리 팹을 신설하는 등 양적 성장도 중요하지만 기술력 향상을 위한 질적 성장이 우선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김용석 가천대 반도체대학 석좌교수는 결국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술력 향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유능한 인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전력이나 용수 문제 등은 결국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인력”이라며 “좋은 인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고 그렇게 키운 인력들이 계속 근무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문제는 현재 반도체 석·박사급 인력의 대다수가 수도권 근무를 선호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800조원짜리 공장을 지어놓아도 우수한 설계 및 공정 엔지니어가 내려오지 않으면 최고 효율의 수율을 낼 수 없는 상황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공장 건설을 넘어 ▲주거 ▲교육 ▲의료 ▲문화 인프라를 결합한 ‘반도체 특화 도시’를 파격적으로 조성해야만 유능한 인재들을 유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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