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도박을 금융으로 정의하다 [허태윤의 브랜드스토리]
- 예측을 사고파는 시장의 탄생
위기의 순간 증명되는 업의 본질
[허태윤 칼럼니스트] 지난 7월 16일, 미국 언론이 일제히 한 백악관 직원의 이름을 보도했다. 가브리엘 페레즈. 트럼프 대통령이 연설할 때 원고를 화면에 띄우는 텔레프롬프터 담당자다. 10년 가까이 대통령 곁에서 연설 원고를 누구보다 먼저 읽어온 그는 그 원고로 돈을 걸었다.
미국의 예측시장 플랫폼 칼시(Kalshi)에는 대통령이 연설에서 특정 단어를 말할지에 베팅하는 상품이 있다. "트럼프가 오늘 연설에서 '가짜 뉴스'를 언급할까?" 같은 것이다. 페레즈는 석 달간 12건이 넘는 연설에 베팅해 10만 달러, 약 1억4000만 원을 챙겼다가 적발돼 무급 휴직 처분을 받았다. 주식시장으로 치면 내부정보를 이용한 불법 거래인 셈이다.
한국 독자에게는 사건의 부도덕성보다 대통령의 연설에 언급되는 말에 돈을 거는 시장이 있다는 사실이 더 생소할 수 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돈을 거는 시장이라니. 그런데 이 시장은 불법 도박도 아니고 베팅 회사도 아니다. '칼시'라는 이름의 이 기업의 정체는 '참여형 정보 플랫폼'이다.
이용자의 관심과 판단이 축적되면 데이터가 되고, 데이터가 모이면 여론조사보다 정확한 '집단지성의 가격표'가 된다. 칼시가 스스로를 베팅 회사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정확한 뉴스의 출처"라고 정의하는 근거다. 이렇게 성장한 회사의 기업가치는 현재 220억 달러, 우리 돈 30조 원이 넘는다. 창업 8년 차의 스타트업이다.
발레리나와 트레이더가 세운 거래소
칼시는 2018년 MIT 동창 두 사람이 세웠다. 골드만삭스에서 파생상품을 다루던 타렉 만수르와 발레리나 출신으로 수학을 전공한 뒤 헤지펀드에서 일했던 루아나 로페스 라라. 두 사람을 묶은 것은 '불확실성'에 대한 집착이었다. 세상의 모든 미래는 불확실한데 왜 그 불확실성을 사고파는 시장은 없는가.
플랫폼의 구조는 단순하다. "연준이 다음 회의에서 금리를 내릴까?",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은 이 영화가 받을까?", "이번 주말 뉴욕에 눈이 올까?" 세상의 온갖 질문이 상품으로 올라오고 이용자는 '예'와 '아니오' 계약을 사고판다. 맞히면 계약 하나가 1달러의 가치를 갖게 되고, 틀리면 휴지가 된다. 묘미는 가격에 있다. '예' 계약이 70센트에 거래된다면 시장은 그 일이 일어날 확률을 70%로 본다는 뜻이다. 주가가 기업의 가치를 반영하듯 이 가격은 미래에 대한 대중의 판단을 실시간으로 반영한다.
문제는 이 사업의 이름이었다. 결과에 돈을 걸고 맞히면 따고, 틀리면 잃는다. 이 행위를 부르는 오래된 이름은 도박이다.
여기서 두 창업자는 실리콘밸리의 문법을 배반한다. 우버와 에어비앤비가 증명해 온 성공 공식은 '일단 저지르고 나중에 허가받는' 것이었다. 실제로 경쟁사 폴리마켓은 그 길을 갔다. 칼시는 반대를 택했다. 제품을 하나도 내놓지 않은 채 2년 넘게 미국 금융당국인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라라는 훗날 "승인을 받지 못하면 회사는 그냥 제로가 되는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매출 없는 스타트업이 규제 승인 하나에 회사의 생사를 건 셈이다.
무모해 보이는 이 선택의 바닥에는 업에 대한 정의가 깔려 있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사업을 베팅업이 아니라 금융업으로 규정했다. 1848년 시카고에서 곡물 선물이 탄생한 이래 금융시장은 농산물에서 원자재로, 다시 금리와 환율로 거래 대상을 넓혀 왔는데 정보화 시대의 다음 거래 대상은 '사건' 그 자체라는 논리였다. 스스로를 베팅 업체가 아닌 '거래소'로, 상품을 '이벤트 계약'으로, 이용자를 '트레이더'로 명명한 것도 그 정의의 연장이었다. 그래서 이들이 찾아간 곳도 도박 당국이 아니라 금융당국이었다.
2020년 11월 CFTC는 칼시를 최초의 이벤트 계약 정식 거래소로 승인했다. 도박과 금융을 가른 것은 기술이 아니었다. 업의 본질을 무엇으로 정의하고 그 정의를 누구에게 승인받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칼시의 확신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선거 베팅 승인을 거부하는 CFTC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 2024년 항소법원에서 이겼다.
자신을 규제하는 당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승소한 회사. 그 직후 치러진 미국 대선에서 예측시장은 여론조사가 놓친 흐름을 먼저 가격에 반영하며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었다. CNN은 뉴스 화면에 칼시의 실시간 확률을 띄우기 시작했고, 메타는 유사한 예측 앱 개발에 뛰어들었다.
업의 정의(定義)가 기업의 운명을 가른다
물론 이 정의는 지금도 시험대에 있다. 칼시 거래의 대부분은 사실상 스포츠 베팅이고, 미국의 여러 주 정부는 이를 불법 도박이라며 소송을 진행 중이다. '금융'이라는 간판과 '도박'이라는 실체 사이의 긴장은 여전히 팽팽하다.
그래서 페레즈 사건이 흥미롭다. 그를 잡아낸 것은 FBI도, 백악관 감찰도 아닌 칼시 자신이었다. 자체 감시 시스템이 비정상적인 베팅을 포착했고 계좌를 추적해 규제당국에 넘겼다. 생각해 보면 도박판에는 내부자 거래라는 죄목이 없다. 내부자 거래를 적발하고 처벌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곳이 감시와 규율이 작동하는 금융시장이라는 증거다. 백악관발 스캔들이라는 최악의 뉴스 앞에서 칼시는 8년 전 스스로 내린 업의 정의를 행동으로 증명한 셈이다.
업의 정의가 기업의 운명을 가른 것은 칼시가 처음이 아니다. 100년 전 미국 대륙의 지배자는 철도회사였다. 그러나 자동차와 비행기가 등장하자 이들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시어도어 레빗은 1960년 발표한 논문 '마케팅 근시안'에서 몰락의 원인을 수요 감소가 아니라 정의의 실패에서 찾았다.
철도회사들은 스스로를 '철도업'으로 규정했다. 고객이 산 것은 철도가 아니라 '이동'이었는데도 말이다. 스스로를 운송업으로 정의했더라면 자동차와 항공기는 위협이 아니라 사업의 기회였을 것이다. 철도는 업을 좁게 정의해 눈앞에 다가온 시대를 놓쳤고, 칼시는 업을 새롭게 정의해 없던 산업을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사행행위 규제로 인해 이런 시장이 열리기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칼시가 남긴 질문은 예측시장 너머에 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파는 회사인가. 그 답을 간판이 아니라 위기의 순간 행동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도박을 금융으로 바꾼 것도, 대륙의 지배자를 무너뜨린 것도 결국 업을 정의하는 그 한 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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