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을 세일즈하라]⑤
제도 존재 아닌 작동 여부가 시장 평가의 기준
정책 일관성·예측 가능성 시스템 하나로 작동해야 신뢰 축적
[채남기 법무법인 지평 상장유지 지원센터장] 전인미답의 코스피 1만 시대를 향해 질주하던 한국 증권시장이 최근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얼마 전 코스피가 빠른 속도로 8000, 9000선을 돌파할 때만 해도 한국 증시가 마침내 선진 프리미엄 시장으로 재평가받기 시작했다는 기대감이 시장을 지배했다. 하지만 미국의 국채금리 상승과 이른바 ‘인공지능(AI) 혁명’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 그리고 미·이란 간 전쟁 장기화 조짐 등 대외 불확실성이 시장을 흔들며 주가 조정 국면이 이어지고 있다.
돌이켜보면 코스피가 장기간 3000선 부근에 머물던 시기를 벗어나 가파른 상승세를 보일 당시에도 글로벌 환경이 그리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보호무역 강화에 따른 국제 교역 불확실성 증대 ▲원·달러 환율의 고공행진 지속 ▲중동 지역의 정세 불안 등 시장을 둘러싼 여건은 지금 못지않게 녹록지 않았다.
상승장의 배경은 제도 개선 기대
그럼에도 한국 증시가 코스피 1만 시대에 근접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강력한 불공정거래 척결 의지와 이사의 주주책임 강화를 골자로 한 ▲기업지배구조 개선 노력 ▲자사주 소각 법제화 ▲배당 확대 등 주주가치 제고 정책이 한국 증권시장에 대한 투자자 신뢰회복 기대를 높였기 때문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 ▲중복상장 제도 개선 ▲상장폐지 기준 강화 ▲영문공시 확대 등 필요하다고 지적돼 온 과제들을 본격적으로 제도화했다는 점도 이를 더욱 확신시키는 계기가 됐다.
최근 다수의 해외 기업이 한국 시장 상장을 위해 거래소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한국 증시를 바라보는 글로벌 투자자의 시선이 달라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AI 투자 붐을 타고 반도체를 비롯한 한국 기업의 실적 전망이 개선되고, 기업들의 자사주 매입과 배당 등 주주환원도 눈에 띄게 늘었다. 실제로 주요 대기업들의 주주환원 규모 또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 증시는 글로벌 프리미엄 시장의 반열에 올랐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애석하게도 현재 한국 증시에서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꼬리표가 떼어졌다고 단언하기에는 다소 이르다. 기업의 이익이 증가하고 주가가 상승한다고 해서 프리미엄 시장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시장에 대한 신뢰’까지 자동적으로 높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는 과거 한국거래소에서 근무하면서 시장 인프라 개선업무를 다수 수행한 경험이 있다. 또한 MSCI 선진시장 지수 편입을 위한 해외 로드쇼에 참여해 글로벌 기관투자자들을 직접 만나 한국 시장에 대한 의견을 들을 기회도 있었다. 현재는 대형 법무법인 지평에서 상장유지요건 미달로 상장폐지 위험에 직면한 기업들을 대상으로 상장유지 컨설팅을 수행하고 있다.
서로 다른 현장에서 얻은 경험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시장 신뢰는 법과 제도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도의 예측 가능성 ▲기업의 행동 ▲시장 인프라의 편의성 등이 오랜 기간 축적될 때 형성된다는 것이다. ‘어떤 제도가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그러한 제도가 실제 작동하고 있느냐’가 시장을 평가하는 핵심 요소다. 한국 증권시장이 진정한 프리미엄 시장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제도 개선 그 자체보다 그 제도를 통해 축적되는 신뢰의 수준에 주목해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글로벌 투자자는 투자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기업의 수익성뿐 아니라 지배구조, 주주권 보호 노력, 경영 투명성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 특히 장기 투자자일수록 일시적 실적보다 기업이 얼마나 예측 가능하고 책임 있게 운영되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이러한 점에서 최근 이루어진 상법 개정과 지배구조 개선 노력은 한국 증권시장이 프리미엄 시장으로 나아가는 데 매우 중요하다. 개정 상법은 충실의무의 대상에 주주를 추가한 것이므로 일반주주의 권익 보호를 강화하려는 시도는 글로벌 투자자들이 오랜 기간 요구해 온 방향성과도 맥을 같이한다. 일각에서는 지나친 규제가 경영 위축이나 소송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기도 하나, 선진 자본시장으로 가는 길이 불투명한 지배구조를 용인하는 방향이 될 수는 없다.
상법 개정, 글로벌 투자자 요구와 방향 같아
최근 시행된 상장폐지 기준 강화 및 중복상장 제도 개선 그리고 영문공시 확대 등도 마찬가지다. 모두 선진 시장으로 가기 위한 핵심 요소다. 물론 시장 신뢰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상장폐지 강화는 ‘살릴 기업과 퇴출할 기업을 신속하고 정교하게 구별하는 시스템’으로 발전해야 한다. 썩은 과일을 골라내는 과정에서 단지 먼지가 묻었다는 이유로 성한 과일마저 썩은 과일로 취급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중복상장 규제도 새로운 자금 조달이 필요한 기업의 성장 가능성을 훼손하지 않도록 균형 잡힌 접근법이 반드시 필요하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는 정책이 규제의 양으로 평가될 수는 없다. ▲정책의 일관성 ▲예측 가능성 ▲기업의 주주가치 제고 노력 ▲투자자의 시장 접근성 ▲부실기업에 대한 신속하고 공정한 퇴출 시스템이 하나의 생태계로 작동하는지가 중요하다.
한국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라와 있다. 이제 남은 과제는 기업의 경쟁력에 걸맞은 자본시장의 신뢰와 제도적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다. 코리아 프리미엄은 정부의 선언이나 거창한 구호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업이 시장과의 약속을 지키고, 정부가 일관된 규칙을 운영하며, 투자자가 안심하고 자본을 맡길 수 있을 때 비로소 형성된다.
결국 한국의 자본시장이 지향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좋은 기업이 많은 시장’이 아니라 ‘좋은 기업이 제대로 평가받고 투자자는 안심하고 자본을 맡길 수 있는 시장’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넘어 코리아 프리미엄을 만들어내는 진정한 자본시장 개혁은 바로 여기서 시작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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