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K팝처럼 미술도”…K아트가 세계 주류 미술시장에 들어가는 법 [이코노 인터뷰]
- 이수령 예술경영지원센터 시각예술본부장
“미술은 속도보다 축적…담론·신뢰·미술관·컬렉터 인정 쌓여야”
"생태계 구축되면 서울이 아시아 미술시장의 중장기 거점 될 것"
[이코노미스트 서지영 기자] "미술은 속도보다 축적입니다. 담론과 신뢰, 미술관과 컬렉터의 인정이 함께 쌓여야 세계 시장에서 마침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수령 예술경영지원센터 시각예술본부장은 K-아트가 세계 미술시장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속도'보다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K-팝과 K-드라마처럼 단숨에 세계 시장을 사로잡는 대중문화와 달리, 미술은 작가와 작품을 둘러싼 담론과 거래, 제도권의 인정이 두터워질수록 시장에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재단법인 예술경영지원센터(예경)는 K-아트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예술 생태계의 기반을 만드는 공공기관이다. 시각예술본부는 개별 작가의 성장을 넘어 작품의 유통과 해외 진출, 인력·자본·네트워크·정보 등 예술산업 전반을 지원한다. 창작과 시장을 연결하고, 한국 미술의 지속적인 성장과 해외 확장을 뒷받침하는 역할이다.
여름의 초입이던 지난 6월,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위치한 예경에서 이수령 시각예술본부장을 만났다. 시종 차분하고 논리적이었지만 K-아트를 이야기할 때는 단단한 확신이 묻어났다.
K아트는 지금 '축적'의 시간
미술은 대중문화처럼 단기간에 시장을 장악하기 어려운 예술 분야로 꼽힌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이 시장에서 가치를 인정받기까지 필요한 시간이 그만큼 길기 때문이다. 작품 자체의 완성도뿐 아니라 ▲비평과 담론 ▲미술관과 갤러리의 평가 ▲컬렉터의 소장과 거래 등이 함께 쌓여야 한다. 작가가 어떤 전시에 참여했는지, 어느 미술관이 작품을 소장했는지, 어떤 갤러리와 컬렉터가 작품을 선택했는지 등이 오랜 시간에 걸쳐 작가의 시장성과 신뢰를 형성한다.
이수령 본부장은 K-아트를 단기간의 성과보다 장기적인 축적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제적 부와 국가 경쟁력이 높아질수록 제도권 미술도 함께 힘을 얻습니다. 한국의 경쟁력이 장기적으로 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K-아트의 시장 점유율도 커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꾸준히 쌓아가는 것입니다. 10년간 지수가 조금씩 오르듯이, 작가와 작품의 IP 경쟁력도 시간이 지나면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최근 몇 년 사이 해외 미술관과 갤러리, 아트페어에서 K-아트와 한국 작가를 소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예경에 따르면 지난 4월 미국 엑스포 시카고에 참가한 국내 화랑 12곳은 360여 점의 출품작 가운데 100여 점을 판매하며 전년보다 개선된 성과를 거뒀다. 5월 프리즈 뉴욕에서도 국내외 갤러리들이 하종현·이기봉·함경아·김홍석·김창열·이신자·이배 등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판매하며 해외 시장에서 거래를 이어갔다. 굵직한 스타 작가에 집중됐던 과거와 달리 세대와 경향이 다른 작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국제 무대에 진입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 밖에도 이우환·양혜규·서도호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 역시 해외 주요 미술관과 비엔날레에서 소개되는 사례도 이어지고 있다.
미술 생태계의 기반을 닦는 예경
K-아트가 글로벌 주류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몇몇 작가의 개인적 성과에만 기대서는 안 된다. 수준 높은 작품을 해외에 소개할 역량을 갖춘 갤러리는 물론 미술관과 컬렉터를 연결하는 글로벌 네트워크도 필요하다. 창작 이후 유통과 해외 진출이 맞물리는 구조가 갖춰져야 작품의 경쟁력도 시장에서 힘을 얻을 수 있다.
예경 시각예술본부가 맡고 있는 핵심적인 역할도 여기에 있다. 개별 작가의 성장을 지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유통·해외 진출·시장 정보·네트워크 등 미술 생태계가 작동하는 데 필요한 기반을 만들어간다.
"지원사업은 ▲인력 ▲자본 ▲네트워크 ▲정보와 함께 모두 인프라입니다. 작가가 초기 창작 기반을 갖춘 뒤에는 유통시장과 연결돼야 하고, 어떤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 유리한지도 알아야 합니다."
시각예술본부의 사업은 크게 국내 유통과 해외 진출, 시장 분석·데이터로 나뉜다. 국내 유통 부문에서는 화랑 등 유통 주체의 성장을 지원하고, 해외 진출 부문에서는 국내 작가와 해외 미술계의 접점을 넓힌다. 시장 분석 부문에서는 국내외 미술시장 데이터를 축적하고 보고서와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다.
예경이 궁극적으로 만드는 것은 특정 작가의 성공 자체가 아니라 예술 생태계를 구성하는 주체들이 각자의 역할을 하면서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시장의 구조다.
"전체 K-아트의 구조를 봐야 합니다. 화랑과 아트페어 등 시장을 구성하는 각각의 주체가 성장하면서 시장 자체가 건강하게 활성화되는 것이 핵심이죠."
이 본부장은 예술 현장과 행정을 두루 경험해 온 예술행정가다. 연세대 영문학과 재학 시절 문과대학 학보사에서 편집장을 맡아 미술 칼럼을 쓰면서 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졸업 후 대기업에서 5년여간 마케팅 업무를 하던 그는 "이제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며 대학원에 진학해 서양미술사를 공부했다.
"전시 하나를 기획하고 작품 하나의 미학적 가치를 설명하기보다는 미술계 전체의 생태계를 구축하고 작가의 성장을 도울 수 있는 정책적 방향에서 예술행정을 하는 것이 저와 더 잘 맞는다는 걸 알게 됐어요."
문체부와 예경 등 국가의 지원사업과 함께 서울은 세계 미술의 중심지로 성장 중이다. 특히 매년 가을 열리는 프리즈 서울과 키아프 서울은 국내외 갤러리와 컬렉터가 한자리에 모이는 국제 미술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프리즈 서울은 지난해 한국화랑협회와 공동 개최 계약을 2031년까지 연장했다.
가을은 K-아트가 국내외 미술계와 만나는 주요 행사가 집중되는 계절이다. 한국 작가와 작품이 세계 미술계와 만나는 기회도 넓어지는 시즌이기도 하다.
"서울은 앞으로 아시아 미술시장의 중장기 거점이 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우리의 저력 있는 K-아트 예술가들이 국제 미술계와 만날 수 있는 구조를 촘촘하게 만들어 나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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