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수 전문기자의 은퇴 성공학 - 퇴직연금이 연금이 아닌 까닭은 -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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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수 전문기자의 은퇴 성공학 - 퇴직연금이 연금이 아닌 까닭은

서명수 전문기자의 은퇴 성공학 - 퇴직연금이 연금이 아닌 까닭은

가입자 98% 일시금으로 수령 ... 먼 미래보다 당장을 중시하는 본성 탓



올 초 평생을 다니던 직장에서 정년 퇴직한 김태홍(56)씨. 퇴직 전 회사가 적립해준 2억원의 퇴직연금을 어떻게 할지 고민이 많았다. 연금으로 받아야 할지 아니면 일시금으로 수령하는 게 좋은지 잘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을 탈 때까지 6~7년 동안 이렇다 할 소득이 없는 그로선 연금으로 받으면 노후생활비 걱정은 다소나마 덜 수 있다. 하지만 아직 큰 아이가 결혼 전인데다 은행 빚도 있었다. 결국 김씨는 연금을 포기하고 일시금으로 수령해 빚을 갚고 남는 돈은 펀드상품에 넣어두었다.



올 1분기, 신규가입 적고 이탈 많아국민연금의 중간계투라고 할 수 있는 퇴직연금이 겉돌고 있다. 퇴직연금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동안 퇴직 급여를 외부의 금융회사에 적립, 운용해 퇴직할 때 연금 또는 일시금으로 지급받는 제도다.

퇴직연금은 2005년에 도입된 이래 빠른 속도로 성장해 현재 적립금 규모가 85조원을 넘어섰다. 177조원으로 추정되는 퇴직금 시장의 48% 정도가 퇴직연금인 셈이다.

그러나 퇴직자들 대부분이 일시금으로 찾아 써버려 연금이란 말이 무색해 지고 있다. 올 1분기 중 연금 수급요건을 갖춘 55세 이상 퇴직자의 98%가 퇴직 급여를 일시금으로 수령하고 2%만 연금을 선택했다. 정부는 중도에 일시금으로 찾아 쓰지 못하도록 규제를 강화하고 개인형 퇴직연금제도(IRP)를 활성화하는 등 노력을 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특히 1분기에 대기업들의 잇단 구조조정으로 퇴직자가 급증하면서 퇴직연금 분기 적립금이 1조원 아래로 추락했다. 금융 당국에 따르면 지난해 말 84조2996억원에 달하던 퇴직연금 적립액은 3월 말 85조2837억원으로 9841억원, 1.2% 늘어나는데 그쳤다. 적립액 증가는 통상 추가 납입이 이뤄지는 연말에 집중되지만 비수기에도 1조~2조원은 꾸준히 유지돼 왔다. 퇴직연금 적립액이 줄어든다는 것은 신규 가입은 적고 가입자의 이탈이 많다는 뜻이다.

그럼 퇴직연금이 연금으로 이용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고용노동부가 최근 취업포털 잡코리아와 함께 20세 이상 직장인 남녀 2951명을 대상으로 한 노후와 퇴직 급여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절반을 웃도는 1775명(60.1%)이 은퇴 이전에 퇴직 급여를 받았다고 응답했다. 이 가운데 91.6%(1622명)는 가족생계 등 생활비(47.1%), 해외 여행 등 여가(23.4%), 전세·주택구입(15.9%), 결혼(6%), 기타(4.6%), 자동차 구입(3%) 등에 사용했다.

퇴직 급여를 받아 저축을 하거나 옮긴 직장으로 퇴직 급여를 넘긴 일부 직장인을 제외하면 전체 응답자의 56.3%가 은퇴 전 생활비나 여가, 주택자금 등으로 퇴직 급여를 써버린 셈이다. 그러나 퇴직 급여 사용 경험자 중 45.7%는 돈을 쓰고 난 뒤 후회했다고 답했다. 이유로는 목돈 마련을 위한 저축 기회를 놓쳤다(55.4%)는 점을 가장 많이 꼽았고 이어 노후준비 자금 소진(25.6%), 불필요한 곳에 소비(18.1%) 등이 뒤를 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전체 응답자의 86.9%가 노후를 위해 퇴직 급여가 중요하다고 답을 했지만 실제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행 퇴직금 관련 제도를 현실에 맞게 수정, 보완해제 기능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나온다. 퇴직연금은 노후에 국민연금으로 생활비 보장이 부족하니까 보완 차원에서 도입됐다.

은퇴전문가들은 노후엔 국민연금·퇴직연금·개인연금의 3층으로 설계해야 재무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중 퇴직연금은 퇴직 후 국민연금을 탈 때까지 5~10년의 소득공백기를 넘기 위한 다리로서 유용한 수단이 된다. 우리나라 퇴직연금의 소득 대체율은 35년 가입 기준 12.5%다. 퇴직 전 월 소득이 100만원이라면 퇴직연금은 12만5000원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그래도 소득 흐름이 확 줄어드는 노후에 이게 어딘가.

꼭 노후 보장 측면이 아니라도 연금은 저금리일수록 그 가치가 빛을 발하게 돼 있다. 금리가 높을 때에는 퇴직금을 일시에 수령한 다음 정기예금에만 맡겨둬도 됐다. 하지만 요즘 같이 시중은행 정기예금 금리가 3%에 훨씬 못 미치는 때에는 퇴직금을 일시에 수령해도 운용할 곳이 마땅치 않다.

김태홍씨 사례로 돌아가보자. 다달이 김씨가 받는 연금이 월 100만원이라고 할 때 이만큼의 소득을 창출하려면 은퇴할 때 목돈을 얼마나 쥐고 있어야 할까. 물가상승률은 3%로 가정한다. 김씨가 85세까지 산다고 했을 때 시중금리가 10%이면 1억5000만원이 있으면 된다.

하지만 금리가 5%일 때는 2억40000만원 있어야 하고, 금리가 3%일대는 3억원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현재 시중은행 정기예금금리가 3%가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김씨 입장에선 일시금으로 3억원 이상 받지 못할 것 같으면 퇴직금을 연금으로 수령하는 것이 이득이다.

연금은 평균 수명이 늘어나는 고령사회일수록 더욱 요긴하게 쓰인다. 과거 은퇴 후 10~20년 살았을 때야 연금의 필요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100세 시대를 말하는 요즘이 아닌가.고령사회에선 은퇴 자산의 크기가 아니라 얼마만큼 현금흐름화를 할 수 있느냐가 노후생활 안착의 관건이 된다.

연금의 가치도 수명에 비례해 늘어나게 돼 있다. 올해 60세로 연금 200만원을 받는 퇴직자가 75세까지 산다고 가정하고 15년 동안 수령한 연금을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3억1574만원이지만 80세에 사망하면 4억231억원, 85세 4억8094만원으로 현재 가치가 커진다.

사람들이 일시금을 선호하는 이유는 먼 미래보다는 당장을 더 중시하는 게 인간의 본성과 관련이 깊다. 연금이 필요하다는 건 알지만 먼 훗날의 일이라 그리 실감이 가지 않는다. 보다 급한 건 팍팍한 삶의 현실이다. 그래서 아쉬운 대로 목돈 활용이 가능한 퇴직연금에 손을 대게 된다. 노후 준비를 하지 않은 사람은 단기적으론 어떨지 몰라도 노년에 들어서면 빈곤에 허덕이면서 반드시

후회하게 돼 있다.



연금은 저금리 시대에 더욱 빛나 그러나 하지 않은 걸 후회해봤자 버스는 이미 떠나가 버렸다. 이런 상황을 피하려면 장기적 안목으로 노후생활비가 모자랐을 때 초래되는 결과를 상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노년에 돈이 없어 추해지고 친지·친구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지는 것을 미리 떠올려 보는 것이다. 눈 앞에 있는 목돈의 달콤함에 빠지지 말고 노년의 비참함을 상상하다 보면 연금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퇴직연금의 정상화를 위한 여러 방안이 강구되고 있다고 한다. 골자는 연금 수급에 강제성을 부여하고 세제 혜택을 부여하는 것 등이다. 연금 제도가 발달한 영국·호주 등에선 퇴직연금의 중도 인출을 금지하거나 퇴직연금을 평생 나눠 받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노인 빈곤율을 낮추려면 퇴직연금 중 일부는 평생 나눠서 받도록 의무화하는 게 옳다”며 “그렇지 않다면 연금소득세를 지금보다 낮춰 장기 분할 인출을 유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국민연금이나 공무원연금 같은 공적 연금과 달리 사적 자산인 퇴직연금에 강제성을 부여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가입자들 스스로가 고령화 시대에 연금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일시금의 유혹을 뿌리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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