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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반역 사이에서

번역과 반역 사이에서

나타샤 위머는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번역하는 동안 멕시코 시티에서 살았다. 그녀는 이 책이 지리적 상황에 신경을 쓴 작품이기 때문에 배경이 된 지역의 구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스페인어 문학 번역가 이디스 그로스먼(78)은 멕시코 작가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소설을 번역할 당시 툭하면 튀어나오는 속어와 은어 때문에 애를 먹었다. 그녀는 어느 날 푸엔테스와 점심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에게 “전에 들어본 적도 없는 그 추잡하고 저속한 속어들을 어떻게 그렇게 많이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젊은 시절 술집에 드나들면서 주워들은 것도 있고 내가 만들어낸 것도 있소. 당신도 만들어내면 돼요.” 그로스먼이 회상했다. “난 ‘만들어내셨다고요? 그렇다면 그 문구들의 의미를 내가 알 수 없었던 게 당연하네요’라고 대꾸했다. 그래서 나도 영어로

새로운 속어들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속어 번역에 참고하려고 지하철에서 10대 남자아이들 옆에 앉아 그들의 대화를 엿듣곤 했다.

이것은 그로스먼이 지난 40년 동안 번역을 해오면서 터득한 많은 요령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녀는 스페인어로 된 책 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들을 번역했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부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Love in the Time of Cholera)’까지.



위머가 영역한 로베르토 볼라뇨의 작품들. ‘2666’(왼쪽)과 ‘야만스러운 탐정들’.
뉴욕 맨해튼의 어퍼 웨스트 사이드 깊숙이 자리잡은 그로스먼의 사무실에서는 오래된 책에서 나는 것과 같은 냄새가 풍긴다. 신문 더미와 피카소가 그린 돈키호테와 산초 판자(돈키호테의 부하)의 일러스트레이션이 눈에 띈다. 그 앞쪽에 흑백 표지판이 하나 놓여 있다. 거기엔 ‘당신의 오자는 실수를 부추기는 사람들의 승리(Every time you make a typo, the errorists win)’고 쓰여 있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는 그 동안 살아오면서 경험한 모든 것이 반영돼 있다”고 그로스먼이 말했다.

그녀의 황록색 눈동자가 빛났다. “그것은 내 번역에 색깔을 입힌다. 그 일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가까이 놓여 있는 탁자 위에는 페루 출신의 노벨상수상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신중한 영웅(The Discreet Hero)’ 미출판 원고가 놓여 있다. 옆방에 켜놓은 라디오에서는 블루스 음악이 흘러나온다.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번역가로서 그로스먼만큼 성공한 사람은 별로 없다.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그녀는 루이스 데 공고라의 400년 된 시를 포함해 활자화된 원고 중 가장 복잡하다고 꼽히는 작품들을 번역했다.

“이디스 그로스먼은 미국에서 문학 번역으로 먹고살수 있는 열 사람 중 한 명이다.” 지리 스타이스칼 미국 번역가협회 대변인의 말이다. 하지만 그로스먼이 처음부터 번역을 생업으로 삼진 않았다. 그녀는 1988년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유명한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 번역

을 끝낸 뒤 편집자에게 전화해 직장을 그만두고 풀타임 번역가가 되겠다고 말했다. 편집자는 그렇게 해서 생계를 꾸려갈 수 있을지 염려했다.

그로스먼이 당시를 회상했다. “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콩으로 음식 만드는 법 2001가지를 알고 있으니 걱정 말아요. 모든 게 잘 될 거예요.’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됐다.”


우연히 들어선 번역가의 길스스로 공부가 내키지 않는 학생이었다고 말하는 그로스먼은 고교 시절 모든 선생님을 싫어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스페인어 선생님은 예외였다. “그 선생님은 나를 이해하고 받아줬다”고 그로스먼은 말했다. “선생님은 통찰력이 뛰어났고 난 그녀의 수업을 들을 때가 정말

행복했다.”

선생님과의 좋은 관계에 고무된 그로스먼은 대학에서 스페인어를 전공했고 대학원에서는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연구했다. 그녀는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연안, 캐나다의 문화적 이해증진을 위한 미주협회의 출판물 ‘리뷰(Review)’에 실릴 글들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에 살던 한 출판 에이전트가 그로스먼에게 전화해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을 번역할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난 ‘물론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고 그로스먼이 말했다. 그의 작품을 번역하는 일은 정말 멋졌다.”


새로운 언어에서 리듬을 포착하는 것이 가장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일이다. 언어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면 소설에 빠져들 수 없다.그로스먼은 곧 번역 일에 매료됐다고 말했다. “스페인어로 된 문장을 읽으면서 그것을 영어로 옮겨 읽으면 어떤 소리가 날까 생각하는 게 정말 좋았다. 대화의 수준은 어떻게 처리할까? 어떤 종류의 언어를 사용할까? 고상한 어법을 쓸까, 구어체를 쓸까? 원문의 스페인어가 길거리에서 쓰이는 언어인가, 학구적인 언어인가? 어떤 차원의 영어를 써야 원문의 느낌에 가까울까?”

나타샤 위머(40) 역시 그로스먼처럼 우연히 번역가의 길로 들어섰다. 위머는 바르가스 요사의 작품도 번역 했지만 칠레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의 작품 중 가장 호평을 받은 복잡한 소설 ‘야만스러운 탐정들(The Savage 출신인 그녀는 어린 시절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살았다.

위머의 어머니는 스페인어와 사랑에 빠졌고 그녀도 그 뒤를 따랐다. 위머는 한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할 때 쿠바 소설가 페드로 후안 구티에레스의 작품을 출판하게 됐다. 마땅한 번역가를 찾지 못하자 그녀는 자신이 직접 번역하기로 마음 먹고 그 일에 착수했다. 얼마 후 위머의 상사는 그녀에게 ‘야만스러운 탐정들’에 관한 보고서 작성을 요청했다. 출판사에서 그 책의 판권을 사들일지를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곧 그 소설에 매료됐다.

“내가 10년 동안 읽었던 책 (언어의 종류를 불문하고)중 최고라고 생각했다”고 위머가 말했다. “참고로 난 편집자로 일하면서 많은 책을 읽었고 책을 평가하는 기준이 꽤 까다로운 편이다.” 그녀는 그 책을 번역하기 시작했고 1년 반 만에 완성했다. 1998년 출판된 이 소설은

1970년대의 멕시코 시티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문자 언어(written word)에 매료된 젊은 시인들이 책을 훔쳐 시내의 우중충한 레스토랑에 모여서 카페콘레체(카페라테)를 마시며 토론을 한다.

“영어 독자로서 이 책을 읽으며 느끼는 기쁨은 순전히 번역자인 나타샤 위머 덕분이다. 그녀는 수다스럽고 속어가 많이 나오는 소설을 영어로 탁월하게 옮기는 방법을 번번이 찾아낸다.” 뉴욕타임스의 2007년 번역문학 논평에 실린 평이다.

위머는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번역하는 동안 멕시코 시티에서 살았다. 그녀는 주인공이 가장 좋아하는 커피숍 중 한 군데서 가까운 곳에 있는 아파트를 빌렸다. 위머는 이 책이 지리적 상황에 신경을 쓴 작품이기 때문에 배경이 된 지역의 구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또 볼라뇨의 학생 팬들을 만나 책에 나오는 속어의 의미를 논했다.

하지만 번역을 4분의3쯤 완료했을 때 위머는 처음부터 다시 작업하기로 결정했다. 자신의 문장 흐름이 볼라뇨의 원문과 매우 다르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언어에서 리듬을 포착하는 것이 가장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일”이라고 위머가 말했다. “언어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면 소설에 빠져들 수 없다.” 그 후로 위머는 쉬지 않고 번역을 했다. 그녀는 조만간 여성 작가의 작품을 번역할 기회가 오기를 기대한다.

그로스먼과 위머, 두 사람 다 창작에 손을 댔지만 성공한 작품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그로스먼은 자신이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소설을 쓰려고 할 때마다 압축에 압축을 거듭한 끝에 시가 된다. 몇 년 전 여성 작가들의 익살스러운 문학 작품을 모아 펴내는 ‘위민스 글립(Women’s Glib)’에 그로스먼의 시 한 편이 실렸다.

“시상이 화요일에 떠올랐기 때문에 제목을 ‘화요일의 딜레마(Tuesday Dilemma)’로 붙였다”고 그로스먼은 설명했다. 그녀가 자리에 앉은 채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시즈모어 박사는 이 차에 탄 모든 여성에게 아름답고 맑은 피부를 약속했다.

한편 뉴욕타임스는 냉소가들이 독실한 신자들보다 훨씬 더 일찍 죽는다고 보도했다

“이게 그 시다”고 그로스먼이 말했다. 그녀가 발표한 유일한 시다. 그로스먼은 자신이 혹평을 잘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글을 써놓고 혼자서 보는 걸 좋아한다고 말했다.

위머 역시 일찍이 소설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자신에게 플롯을 짜는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출판업계에서 일하면서 세상에 많은 소설이 쏟아져 나온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됐다. 정말 시급하거나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이 아니라면 거기에 나까지 하나 더 보태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양이다.”

그래서 위머는 그 대신 수필과 서평을 쓴다. 그리고 프린스턴대와 콜럼비아대에서 번역 세미나를 연다. 그로스먼 역시 콜럼비아대에서 강의를 한다. 올해는 지난 4월 세상을 떠난 가르시아 마르케스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맨해튼에서 그에 관한 세미나를 두 차례 열 계획이다.



이디스 그로스먼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경험한 모든 것이 반영돼 있다. 그것은 내 번역에 색깔을 입힌다”고 말했다


번역가와 작가의 관계작가와 번역가의 관계는 매우 가깝다. 작가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경우에도 그렇다. “내가 세르반테스와 사랑에 빠졌다는 걸 눈치채지 않았느냐”고 그로스먼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그는 분명 기막히게 멋진 남자였을 것이다. 내가 그를 만날 수 있었다면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고대했을 듯하다. 같이 식사를 하고 와인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이다.”

그로스먼은 세르반테스의 인생에 관해 이야기했다. 군인이었던 그는 1571년 레판토 전투에서 싸우다가 왼쪽 손을 다쳐서 못쓰게 됐다. 그리고 얼마 뒤 포로로 잡혀 여러 차례 탈출을 시도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표정에서 장한 일을 한 아들에 관해 말하는 어머니의 자랑스러움과 경외심이 묻어났다.

“스페인어에는 늘 세르반테스의 그림자가 따라다닌다”고 그녀가 말했다. “모든 사람의 머리 뒤를 따라다니는 북소리 같다. ‘돈키호테’를 읽지 않은 사람들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로스먼이 세르반테스만큼 애정을 쏟는 대상을 더 꼽는다면 가르시아 마르케스뿐이다. 그녀는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몇 번 만났는데 대체로 맨해튼의 호텔 레스토랑에서 그의 부인과 셋이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책의 특정 부분에 관한 질문이 있을 때는 묻어두었다가 나중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에게 장문의 팩스를 보내 물었다. 그로스먼에 따르면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 나올 무렵 그녀와 가르시아 마르케스, 두 사람 다 컴퓨터를 시험 삼아 써보기 시작했다.

“난 그를 실제로 알았던 것보다 더 잘 아는 것처럼 느꼈다”고 그로스먼이 말했다. “내가 번역한 책들을 통해 그의 머릿속에 들어가본 듯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매력적이고 똑똑하며 아주 재미있고 재치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로스먼이 영역한 스페인어 문학작품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이방의 순례자들’(왼쪽)과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위머 또한 자신이 볼라뇨와 매우 가까운 사이처럼 느낀다. ‘야만스러운 탐정들’이 자전적인 성격의 책이기 때문에 특히 그렇다. 바르가스 요사의 작품을 번역할 때 역시 작가의 특성을 깊이 있게 통찰할 수 있었다. 그의 소설 중 한 편을 번역할 당시 그녀는 좀 신경 쓰이는 문제가 있어 작가와 상의하려고 그에게 연락했다.

“이야기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내가 말했다. ‘제가 이 부분에서 약간, 그리고 이 부분에서 약간 고쳐서 번역하면 어떨까요?’ 그랬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요. 일부러 그렇게 쓴 거요.’” 위머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매우 품위 있었다.”

이 번역가들은 몇몇 특정 단어를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쓴다. 작가의 사인 같은 것이랄까? 일례로 위머는 스페인어 ‘mano’(친구끼리 ‘이봐!’ ‘야!’하고 부르는 말)를 ‘dude(놈, 녀석)’나 ‘man’(‘이봐요’ ‘자네’)’ 등의 영어 단어로 옮기지 않는다. 두 영어 단어 모두 볼라뇨가 의도한 바와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다.

그로스먼의 경우 거리와 교회의 이름 등을 스페인어로 그대로 쓰며 ‘señor(남자나 기혼녀나 미망인의 성 앞에 붙이는 경칭, 또는 그 호격)’와 ‘señorita(미혼여성의 성 앞에 붙이는 경칭, 또는 그 호격)’도 번역하지 않는다. 그것이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 나타난 언어의 흐름을 덜 해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로스먼은 또 축약형의 사용을 피해 언어의 격을 높인다. 그녀는 책에 쓰인 스페인어 문체에 상응하는 영어 문체를 찾다가 19세기 영어가 적합하다고 판단해 찰스 디킨스와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참고했다.


스페인어로 된 문장을 읽으면서 그것을 영어로 옮겨 읽으면 어떤 소리가 날까 생각하는 게 정말 좋았다.이 두 번역가는 원래 뉴욕 출신이 아니지만 출판 산업의 중심인 그곳에 사는 게 마음에 든다. 브루클린의 디트머스 파크에 사는 위머에게 뉴욕은 고향에서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기회와 명성을 선사했다.

위머는 집 근처 카페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봤던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우연일 뿐이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내게 말을 붙이거나 파파라치가 따라오거나 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많은 번역가들이 막후의 실력자로 숨어 있기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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