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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경제원리] '오페라의 유령'의 ‘현상유지편향’

[문학으로 읽는 경제원리] '오페라의 유령'의 ‘현상유지편향’

특별한 이득이 없을 거라고 여기면 현재 상황을 바꾸지 않으려는 경향
매일 밤 화려한 공연이 펼쳐지는 대형 극장. 수많은 관객이 빠져나간 후 텅 빈 극장에는 무슨 일이 있을까. 그런 의문을 가져본 사람이 있다면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은 꽤 흥미로운 작품이 된다. [오페라의 유령]은 원작보다 뮤지컬로 더 유명하다. 원작은 프랑스 작가 가스통 루르(Gaston Leroux)가 쓴 동명의 추리소설이다. 1910년 프랑스 일간지 르 골르와에 연재됐으니 벌써 100년이 넘었다. 가스통 루르는 영국의 코넌 도일, 프랑스의 모리스 르블랑과 동시대를 살았다. 코넌 도일은 명탐정 셜록 홈즈를, 모리스르블랑은 괴도 아르센 루팡을 창조했다. 가스통 루르도 소년 탐정 룰르타비유를 만들었지만 캐릭터 이름값으로는 홈즈와 루팡에 떨어진다. 하지만 작품의 인지도와 인기로만 보자면 당 대에도, 지금도 절대 밀리지 않는다. 그 중심에 [오페라의 유령]이었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1986년 초연된 이후 30개국에서 최소 15개 언어로 공연됐다. 1억30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유령을 보기 위해 무대를 찾았다. 까만 배경에 하얀 가면. 그리고 빨간 장미 한 송이. [오페라의 유령]에 붙는 잊을 수 없는 포스터다.
 오페라의 유령을 떠나지 못하는 크리스틴
프랑스 파리에 있는 지상 25층, 지하 5층의 대형 오페라하우스. 23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이 오페라하우스에는 모두가 쉬쉬하는 비밀이 있다. 유령이 2층 5번 박스석에 출몰한다는 것이다. 새로 극장 지배인이 된 몽샤르맹과 리샤르는 코웃음을 친다. 세상에 유령이 어디 있냐고.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잇따라 일어나면서 두 지배인은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다. 이 극장의 디바는 카를로타. 유령은 크리스틴 다에를 내세울 것을 요구한다. 크리스틴을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 라울 샤니 자작이다. 크리스틴이 주인공으로 데뷔하던 날, 극장에서 그녀를 본 자작은 사랑에 빠지지만 크리스틴은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크리스틴은 ‘음악의 천사’로부터 오페라 교습을 받고 있다. 라울은 크리스틴을 쫓아다니다 크리스틴의 비밀을 알게 된다. 알고 보니 음악의 천사는 ‘오페라의 유령’이었고 그는 크리스틴을 사랑하고 있었다. ‘라울-크리스틴-오페라의 유령’은 삼각관계가 된다.

크리스틴이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은 라울이다.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데다 지체 높은 백작집안이란 점에서도 끌렸을 테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오페라의 유령을 떠나지도 못한다. 유령은 자신을 교습시켜준다. 그가 없다면 프리마돈나의 꿈을 이루기 힘들다. 크리스틴은 라울에게 자신의 마음을 실토한다. “나는 그 목소리를 더는 못 듣게 될까 두려운 한편, 당신에게로 자꾸만 향하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지요. 그 감정이 초래할지도 모를 온갖 부질없는 위험을 끊임없이 가늠해보는가 하면, 당신이 나를 못 알아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으니까요.”

오페라의 유령을 버리지 못하는 크리스틴의 심리를 행동경제학에서는 ‘현상유지편향’으로 설명할 수 있다. 현상유지편향이란 특별한 이득이 주어지지 않는 한 현재 상황을 바꾸려 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말한다. 상황을 바꾸면 좋을 수도 있지만 더 나빠질 수도 있다. 확실히 더 큰 이득을 얻을 것이라는 기대가 없다면 사람들은 현재 상황을 바꾸는 ‘리스크’를 굳이 떠안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상유지편향은 윌리엄 새뮤얼슨과 리처드 제크하우저가 1988년 쓴 논문 ‘의사 결정에서 현상 유지편향’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현상유지편향은 ‘단골손님’이 만들어지는 이유를 설명한다. 사람들은 다른 거래처가 확실히 다른 효용을 주지 않는 한 기존 거래선을 바꾸고 싶어 하지 않는다. 늘 가는 미용실에 가고, 항상 가는 식당에 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다 못해 아침 출근길에도 우리는 항상 가던 길을 간다. 다른 길로 돌아가는 게 확실히 빠르다는 보장이 없는 한 낯선 길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마케터들은 이런 심리를 이용해 ‘충성고객’ 만들기에 나선다. 현대자동차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무료 공장견학을 시켜주고 애니메이션인 ‘카봇’에 투자한다. 어린이 고객을 잡기 위해서다. 어릴 때 현대차에 좋은 이미지를 가지면 커서도 좋은 이미지를 가질 가능성이 크다. ‘로열티마케팅’도 현상유지편향을 극대화하기 위한 마케팅이다. 로열티마케팅이란 쿠폰, 할인권, 마일리지 적립 등을 제공해 고객서비스를 펴는 것을 말한다. 한번 맺은 고객과의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기 위한 판매전략 중 하나다. 고객들은 그동안 쌓은 마일리지가 아까워서라도 거래처를 쉽게 바꾸지 못한다.

현상유지편향은 개별 상품 판매전략으로도 쓰인다. 스마트폰 개통 때 몇백원짜리 부가서비스를 석달 간만 이용하면 큰 폭의 할인을 해주는 상품이 종종 있다. 소비자들은 그 얘기에 솔깃해 상품에 가입했다가 해당 서비스를 2~3년 간 쓰는 경우가 있다. 한달에 몇백원에 밖에 안 되다 보니 굳이 서비스 종료 기간을 기억해 통신사에 서비스를 끊어달라고 연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전화 걸기 귀찮다’는 것이다.

‘디폴트 옵션’도 현상유지편향을 이용한 마케팅이다. 디폴트 옵션이란 처음부터 옵션이 선택된 걸로 해서 나오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인터넷 사이트에 가입할 때 ‘개인정보 공개에 동의하십니까’라는 목록에 미리 체크된 경우가 있다. 통상 이럴 때는 정보공개 동의율이 높다. 가입자들이 별도로 클릭을 해 해제하는 것이 귀찮아 그대로 두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운전면허 신청을 할 때 장기 기증 의사를 묻는다. 옵션에 ‘기증 의사가 있다’가 표기돼 있으면 장기 기증률이 높고, 표기가 돼 있지 않으면 낮다. 국민정서의 차이도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귀차니즘’이다. 현상유지편향은 투자에도 영향을 미친다. 주가가 오르거나 내린다는 확실한 믿음이 없는 한 한번 넣은 펀드를 그대로 유지할 확률이 높다. 금융 거래도 한번 거래를 튼 금융사와 계속한다. 예·적금 가입자들이 펀드 가입이나 주식 투자자로 돌아서는 시기는 주가 상승기 때다. 주식시장의 수익이 커보이기 때문이다.
 주식·채권으로 상속받으면 그대로 보유하는 사례 많아
윌리엄 새뮤얼슨 교수의 실험을 보면 현금으로 상속받았을 때와 주식 혹은 채권으로 상속받았을 때 피상속인의 행동이 달라진다. 현금으로 받으면 투자를 하거나 예금을 하는 등 투자 포트폴리오를 짠다. 하지만 주식과 채권으로 받으면 그냥 보유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지금 주식과 채권을 파는 것이 미래에 파는 것보다 확실히 이득이라는 자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라울과 크리스틴이 도망치기로 한 날 마지막 공연, 크리스틴은 실종된다. 유령이 구축해놓은 지하세계로 납치해 간 것이다. 오페라의 유령은 어릴 적 기형으로 태어난 에릭이라는 남자다. 한 여자와 가정을 꾸미고 일상적인 행복을 느끼고 싶지만 세상은 호의적이지 않다. [오페라의 유령]은 선과 악, 미와 추, 생과 사를 버무린 종합 인생세트 같은 작품이다. 저자 가스통 루르는 기자 출신이다. 르 마탱에 ‘러일전쟁, 제물포의 영웅들’이라는 내용의 르포를 연재하기도 했다. 제물포 해전 이후 귀국길에 오른 러시아 수병들을 인터뷰한 내용이라고 한다. 100년 후 한국의 한 극장에서 그의 작품이 뮤지컬로 공연될 것이라 상상이나 했을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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