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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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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 대통령 "개 식용 금지 신중히 검토할 때"…개고기 논란 재점화

정책이슈

‘개고기 판매 금지’와 관련한 논란이 다시 가열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개 식용 금지에 대해 신중히 검토할 때라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를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이들의 의견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의 이 발언은 동물에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내용의 민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논의를 앞두고 나왔다. 오는 30일 김부겸 총리가 주재하는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서 정부는 유기 반려동물 관리체계 개선방안을 확정·발표할 예정인데 문재인 대통령이 개 식용과 관련한 의견을 밝힌 것이다. 앞서 문 대통령은 27일 "개 식용 금지를 신중히 검토할 때"라며 관계 부처에 이를 논의해달라고 당부했다. 통계청이 발표한 인구주택총조사 표본 집계를 보면 우리나라에서 개·고양이 등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는 작년 11월 기준 약 312만9000가구(등록 가구 기준)를 넘어섰다. 이 중 개를 키우는 가구가 242만3000가구(11.6%)로 가장 많았다. 고양이를 키우는 가구(71만7000가구·3.4%)였다. 등록하지 않고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반려 동물과 함께 사는 가구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개는 제대로 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가축’으로 분류되면서도 도축과 유통을 다루는 축산물 위생관리법에는 빠져 있어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식품위생법에 따르면 개를 식품 원료로 조리하거나 유통하는 것이 불법인데, 개 식용 금지 조항은 없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동물을 보호하는 등 동물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속해서 이어졌다. 지난 20대 국회에서만 89건의 동물보호법 일부 개정 법률안이 발의됐다.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개정안도 59건에 달한다. 그러나 20대 국회에서 발의된 동물 학대행위에 대한 처벌 상향, 동물 유기에 대한 제재 강화 등을 담은 개정안 5건 만이 원안 가결되는 데 그쳤다. 3년 전인 2018년 청와대도 "식용 금지를 위해 개를 가축에서 제외해달라"는 국민청원에 관련 규정 정비를 약속했지만, 아직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개 식용을 둘러싼 논쟁이 그만큼 민감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동물권을 주장하는 단체와 개 식용을 찬성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동물권단체 케어(CARE)는 페이스북을 통해 “그동안 개 식용 금지에 대해 임기 내내 어떠한 노력도, 의지도 보이지 않았던 문 대통령께서 임기 말, 늦었지만 이제라도 금지의 목소리를 내 주어 환영한다”고 전했다. 반면 서울시에서 보신탕 집을 운영하는 A씨는 “왜 소, 돼지, 닭은 식용으로 문제 없다고 보면서 개고기만 금지하려는지 모르겠다”며 “정치인들의 선거용 편가르기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현재 개고기 판매 등을 생업으로 삼는 이들을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경기도 성남시 모란시장에서 14년간 가축상인회장을 지낸 이강춘 씨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개 식용이 무조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는 다만 “개를 식용으로 판매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수십 년째 현업에 종사하고 있다”며 “개 식용을 법으로 막았을 때 이들이 먹고살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병희 기자 yi.byeonghee@joongang.co.kr

2021.09.28 17:10

2분 소요
안주 안 시킨다고 눈 흘겨서야

산업 일반

▲경기침체로 리모델링한 남대문 상가가 여럿 비어 있다. 많은 자영업자가 올해를 90년대 이후 최대 불황으로 꼽는다. 외환위기보다 더한 위기 상황이라는 이도 있다. 중소기업청 자료에 따르면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연평균 75만6000명의 소상공인이 폐업 절차를 밟았다. 같은 기간 창업자 대비 폐업률은 85%에 달한다. 100명이 창업하면 85명이 문을 닫은 셈이다.이들은 왜 문을 닫아야 했을까. 중소기업중앙회가 최근 전국 소상공인 10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들이 생각하는 경기 악화의 원인은 매출 감소와 내수 침체였다. 전체 응답자의 73.3%가 이같이 답했다. 이전에는 창업자 개인의 역량이나 아이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문 닫는 일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경기 악화라는 외부 요인이 실패를 가져오는 것이다.하지만 포기하기는 이르다. 실제 창업자들의 실패·성공 사례를 잘 살펴보면 성공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의류판매점을 운영하는 L씨는 IMF 때 직장을 그만두고 창업 전선에 나섰다. 처음 문을 열었을 때는 장사가 곧잘 되는 듯했다. 하지만 점점 상황이 나빠졌고 올해는 몇 달째 임차료를 못 내는 상황이다.그는 “그래도 시작할 때는 생계를 걱정할 수준은 아니었다”며 “온라인 쇼핑몰이 많아지고 소비심리가 얼어붙어 가게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L씨처럼 생계를 걱정하는 자영업자가 늘고 있다. 무점포형 청소대행업을 하는 K씨는 요즘 경기 불황으로 적자가 이어지자 폐업을 고민했지만 당장 갚아야 할 빚 때문에 마음대로 접지도 못하고 있다.그는 창업 당시 정부에서 정책자금 1000만원을 대출받았다. 폐업하려면 전액을 상환해야 하기 때문에 매달 적자가 이어져도 폐업을 못하는 것이다. 부부가 함께 사철탕 전문점을 운영하는 C씨는 개고기 위생 논란과 애완견 식용 논란이 사회문제로 대두하면서 매출이 오르지 않자 석 달 전 곱창 전문점으로 업종을 바꿨다. 불황에도 끄떡없는 ‘대박 전략’ □ 동네 상권에서는 ‘카더라’를 조심하라 □ 맛과 입지를 너무 믿지 마라 □ ‘내 식구(직원)’부터 챙겨라 □ 가족과 동업해 인건비 줄여라 □ 고객 의견이 최고의 컨설팅이다 그러나 올봄 조류인플루엔자(AI) 여파로 막창, 곱창 같은 돼지 부산물 원가가 오른 데다 업종을 바꾼 후로 돼지 부산물의 판매가 줄어 결국 아내에게 가게를 맡기고 건설 일용직 노동자가 됐다. K씨와 C씨는 경기 불황의 피해자지만 창업 마인드 없이 매장을 열어 실패하는 사례도 있다. 주택가에서 프랜차이즈 호프전문점을 운영하던 P씨는 사장이 고객을 차별한다는 소문이 돌아 인심을 잃고 폐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안주 없이 맥주 한 잔만 주문한 사람에게는 술을 팔지 않는다며 문전박대하고 수시로 손님에게 안주를 추가 주문하라고 강요했다. 창업 전문가들은 동네 상권일수록 고객 민심 잡기에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심상훈 작은가게연구소 소장은 “유동인구가 많은 상권에서는 서비스가 다소 소홀해도 음식이 맛있거나 위치가 좋으면 성공할 수 있지만 소문이 빠른 동네 상권에서는 고객의 민심을 헤아리지 못하면 필패(必敗)한다”고 지적했다. P씨 같은 창업자도 있지만 불황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힌 성공 창업자도 있다. 이들은 매출을 높이는 데 급급하기보다 고객 한 명 한 명에게 감동 서비스를 제공해 매출 상승의 기반을 다졌다. 국내 대표 프랜차이즈 업체인 놀부보쌈 가맹점 중 ㎡당 매출 1위를 기록하는 매장은 어디일까. 바로 북악터널 가는 길에 있는 정릉점(성북구 정릉 2동)이다. 업계에서 이런 위치는 중심 상권도 동네 상권도 아닌 변두리 상권으로 불린다. 가장 가까운 아파트가 2㎞나 떨어져 있으니 틀린 말도 아니다. 매장도 165㎡ 정도로 여느 놀부보쌈 가맹점보다 좁은 편이다. 하지만 최호범 사장은 직원들에게 주인의식을 심어줘 사장이 있거나 없거나 한결같은 서비스를 제공하게 했다. 다른 매장은 대부분 아르바이트 직원을 채용하는데 정릉점은 정직원만 열여섯이다. 손님들로 붐비는 떡삼시대 부천 소사점. 저마다 재량껏 서비스를 펼치는 직원들 덕에 한번 방문한 고객은 꼭 다시 매장을 찾았다. 불황의 기운이 감돌던 지난 6월 서울 송파구 가락동에 맥주전문점 치어스를 개업한 맹영숙 사장은 꽃게전문점을 운영하다 업종을 전환해 성공했다. 그는 월 평균 5500만원 매출에 1500만원 순이익을 올린다. 그 역시 직원들을 가족처럼 대하면서 손님 이전에 직원들을 만족시키는 데 주력했다.매장에서는 사장이라고 특별 대우 없이 직원들과 똑같이 일했다. 직원들의 근무만족도는 곧 높은 고객만족도로 나타났다. 이곳은 고객의 80%가 단골이다. 방경현 떡쌈시대 부천 소사점 사장은 가족과 함께 창업했다.역세권이라 입지가 좋은 것도 경쟁력이지만 가족이 매장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인건비 부담이 크게 줄어 우수 매장 대열에 진입했다.방 사장은 가족끼리 호흡이 잘 맞은 것도 성공 요인이라고 했다. 원래 방 사장은 떡쌈시대 본사 마케팅팀 차장이었다. 그는 “직접 창업해 보니 아이템보다 어떤 전략을 세우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해물포장마차인 버들골이야기의 탄생 배경도 불황기 창업에서 본받을 만하다. 아동복 사업을 하던 문준용 사장은 IMF를 버티지 못하고 사업에 실패했다.몇 천만원의 돈으로 실내형 해물포장마차를 시작했을 때 그는 음식점 경영이라고는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미숙한 초보 창업자였다. 하지만 문 사장은 투철한 서비스 정신을 발휘해 매장을 찾는 고객들의 불편을 일일이 기억해 메뉴 개발, 인테리어 등에 적용했다. 버들골이야기 매장 벽면은 고객들이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추억판’이다.자칫 지저분해 보일 수 있고 관리하기 번거롭지만 고객들은 자신이 남긴 낙서를 추억하려고 다시 매장을 찾곤 한다. 또 해물포장마차인 만큼 신선도가 떨어지는 해물은 가차없이 버렸다. 그의 서비스 정신이 통했는지 1호점인 이태원점은 오후 7시 넘어 예약 없이 가면 자리 맡기도 어렵다고 한다.창업자 대부분은 돈을 벌기에 급급해 자영업을 시작한다. 요즘 같은 위기 상황에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성공하는 창업자들은 창업이 ‘쩐의 전쟁’이 아닌 ‘심(心)의 전쟁’이라고 말한다. 성공과 실패는 고객의 돈이 아닌 마음을 얻는 데서 갈린다는 뜻이다. 주위를 둘러보라. 아무리 경제가 어려워도 회사 앞 ‘그 집’ 앞에 선 줄은 여전히 길다.

2008.10.13 14:07

4분 소요
오바마의 신앙 오디세이

산업 일반

▶오바마가 쓴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은 젊은 시절의 영적 탐구와 가족을 찾으려는 갈망을 담고 있다. 1981년 버락 오바마는 스무 살의 컬럼비아대학 학생으로 삶의 의미를 찾고 있었다. 그는 풋내기와 완숙함, 흑과 백, 도시와 시골, 경이와 비극 사이에서 방황했다. 뉴욕의 컬럼비아대학 진학은 자신의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의미도 있었다. 하와이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2년 동안 LA의 옥시덴털 칼리지에서 지낸 직후였다. 그는 LA에서는 “삶을 즐겼다”고 말했다. 하지만 뉴욕에 와서는 “고행 생활을 했다”고 오바마는 지난주 유세용 전용기에서의 인터뷰에서 뉴스위크에 말했다. “영적인 탐구를 했다. 의도적으로 속세와 담을 쌓았다.” 단식도 하고 며칠씩 대화를 하지 않는 묵언 수행도 했다. 그때는 책이 유일한 벗이었다. 4세기 북아프리카의 주교로 서양 최초의 신앙 회고록을 썼으며 기독교의 신학적 기초를 닦은 성 아우구스티누스, 19세기 독일 철학자이자 실존주의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니체, 타협과 양면가치 그리고 고통으로 가득한 단편소설을 쓴 영국인 가톨릭 신자 그레이엄 그린 등. 오바마는 이들의 삶을 돌아보며 그들과 정신적으로 교감했다. 일요일 아침 초조하고 불안할 때면 뉴욕 할렘의 흑인 교회 아비시니아 침례교회에 나갔다. “그냥 뒷자리에 앉아 성가대의 찬양과 설교를 들었다.” 오바마는 그 ‘광야’에서 보낸 젊은 시절을 기억하며 미소를 머금었다. “찬양을 들으면서 억눌린 감정이 풀어져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오바마는 공인으로서의 삶에서 종교의 중요성을 열정적으로 자주 언급했다. 그러나 지지자들의 감정이 상하지나 않을까 조바심을 내는 여느 정치 지도자처럼 그도 자신의 신앙을 되도록이면 드러내지 않았다. 특히 신과 기도, 구원과 개인적 책임의 관계에 관해서는 말을 아꼈다. 어떤 면에서는 이해가 된다. 오바마의 신앙 여정은 정통적인 것이 아니며, 정치적으로 문제 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기독교 모태 신앙을 가졌지만 회의를 가진 어머니와 이슬람 신자에서 무신론자로 변한 아프리카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 뒤 오바마는 세계 여러 곳에서 성장하면서 다양한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렇다 할 신앙은 없었다. 이제 그는 기독교인으로 거듭났다. 1990년대 초 시카고 트리니티 그리스도 연합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오바마의 신앙에 관한 소문은 끊이지 않는다. 뉴스위크 조사에서 유권자의 12%는 그가 이슬람 신자라고 잘못 알고 있었다. 25% 이상은 그가 이슬람 가정에서 성장했다고 믿었다. 오바마가 세례를 받은 과정도 문제의 소지가 있다. 세례를 받을 당시 트리니티 교회의 선임 목사는 제러미아 라이트였다. 지난봄 수주 동안 케이블 TV는 라이트 목사의 ‘미국을 저주하는’ 설교를 방영했다(라이트 목사는 지난 3월 트리니티 교회 설교에서 인종 문제를 거론하며 미국 정부가 흑인 사회의 에이즈 확산을 방조했고, 미국의 국외 군사 행동이 테러를 자초했다는 이른바 ‘갓댐 아메리카’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다). 올가을에도 그 비디오가 다시 등장할 게 뻔하다. 뉴스위크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거의 절반은 오바마가 적어도 어느 정도는 라이트 목사와 같은 생각을 가진 듯하다고 말했다. 라이트 목사 때문에 미국 대선 결선에서 오바마를 찍지 않을지 모른다고 말한 응답자도 거의 3분의 1이나 됐다. 오바마의 신앙 이야기는 어머니 앤에서 시작한다. 미국 중서부에서 기독교인이었지만 신앙심이 깊지 않았던 부모 아래서 성장한 앤은 모든 종교를 넘나들었지만 어느 하나를 잡지 못하고 세계 곳곳을 전전했다. 앤이 좋아하는 책 중 하나는 ‘신화의 힘(Joseph Campbell and the Power of Myth)’이었다고 오바마의 배다른 여동생 마야 소에토로-응이 뉴스위크에 말했다. 종교와 신화의 공동 주제를 탐구하는 조셉 캠벨과 빌 모이어스의 PBS 인터뷰 녹취록을 엮은 책이다. 가족이 인도네시아에 살 때 앤은 가끔씩 자녀들을 성당에 데려갔다. 하와이로 돌아온 뒤에는 그리스도 연합교회에 나가 부활절과 성탄절을 지켰다. 나중에 앤이 마야와 함께 인도네시아로 돌아갔을 때 오바마가 그들을 만나러 갔다. 그때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큰 불교 사원 중 하나인 보로부두르로 오바마를 데려갔다. 앤은 나중에 인도에서 일할 때 한동안 불교 수도원에서 생활했다. 앤이 신을 믿었을까? 오바마는 어머니를 “불가지론자”라고 불렀다. “더 높은 힘을 믿었다. 우주의 기본 질서와 선을 믿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아인슈타인의 생각에 공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하나의 종교가 진실을 알려준다는 생각에 큰 회의를 품었다.” 오바마의 아버지는 케냐에서 이슬람 신자로 성장했다. 그러나 앤을 만났을 때는 이미 “확고한 무신론자”였다. 오바마는 ‘담대한 희망(The Audacity of Hope)’에서 아버지는 종교를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으로 보았다고 적고 있다(아버지는 오바마가 두 살 때 집을 떠났다). 오바마는 인도네시아에 살던 시절 가톨릭 학교에 입학했다. 그 다음 공립 초등학교에 들어가 일주일에 한 번씩 주로 이슬람 문화를 소개하는 종교 교육을 받았다. 그는 계부의 손에서도 자랐다. 계부의 이름은 롤로였다. 오바마는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Dreams From My Father)’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계부는 이슬람 신자였지만 대다수 인도네시아 사람처럼 고대 정령신앙과 힌두교를 수용했다. 그는 사람은 먹거리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롤로는 어린 오바마에게 개고기, 뱀고기, 구운 메뚜기의 맛을 보여줬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히잡을 쓴 여자도 있고 쓰지 않는 여자도 있으며, 이슬람 신자들이 기독교인들과 사이 좋게 지냈다고 오바마는 말했다. 또 인도네시아의 이슬람 신자들 사이에서 살면서 “이슬람이 현대 세계와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오바마는 하와이에서 공부벌레였지만, 이미 그때부터 삶의 의미를 찾는 구도자였다. 그러나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은 그가 하와이에서 사춘기를 보내면서 여느 10대들처럼 음주와 흡연, 농구를 즐겼다고 적고 있다. LA의 옥시덴털 칼리지에서 보낸 2년 동안은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그 어떤 것에도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컬럼비아대로 옮긴 뒤에는 진지한 자세로 영적인 탐구에 들어갔다. 당시 오바마를 알았던 사람들은 그가 말수가 적고 수도승처럼 살며, 술집에 드나들고 사교생활을 하고 잡담을 즐기는 뉴욕 대학생들의 판에 박힌 생활에 흥미가 없는 청년이었다고 기억한다. 윌리엄 아라이자는 4학년 때 오바마와 정치학 세미나에 참석했다. 그는 오바마가 모든 일에 별 관심이 없는 데 놀랐다고 돌이켰다. 의도적으로 냉담하다는 게 아니라 일반 대학생이 아닌 듯했다. 기숙사에서 살지도 않았고 캠퍼스에서 노닥거리지도 않았다.” 대학 졸업 후 오바마의 첫 직장은 뉴욕의 시장조사 업체인 비즈니스 인터내셔널이었다. 오바마의 동료였던 베스 노이머 리바인은 이렇게 돌이켰다. “젊은 싱글들이 가득했기 때문에 누가 누구와 연애를 하느니 말들이 많았다. 하지만 오바마는 초연했다. 아주 침착하고 성숙했다. 당시 난 스물셋이었는데 그 곁에 서면 나는 탈선한 기차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바마는 그런 영적인 탐구가 두 가지 목표에 기초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마음의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역사회를 찾고 있었다. 혼혈아로 여러 곳을 돌아다닌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에 그때 갖지 못한 소속감을 찾고 싶어 했다. 흑인 교회에 나가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흑인 교회의 전통에는 아주 특별한 무엇이 있다. 그게 내게는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아비시니아 같은 교회의 열정적인 신앙과 가족 같은 분위기, 미래를 내다보는 설교 내용이 머릿속으로만 그렇게 살아온 청년 오바마의 마음을 끌었다. 오바마는 민권운동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사회 참여주의가 특히 종교와 연대하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매우 강하다는 사실을 독서를 통해 알았다. 제럴드 켈먼은 시카고의 지역사회 운동가로 오바마를 채용했을 때를 떠올리며 그 젊은이가 “갖가지 아이디어에 흠뻑 빠져 있었다”고 말했다. 오바마는 테일러 브랜치의 ‘물길을 가르다(Parting the Waters)’를 탐독했다. 민권운동의 역사서 겸 마틴 루터 킹의 자서전 격인 책이다. 시카고에서 오바마는 지역사회 운동가들이 신자들의 참여의식을 북돋우기 위해 진보적인 신학을 동원한다는 것을 알았다. 종교 지도자들은 폴 틸리치, 라인홀트 니부어 같은 청교도 신학자, 마틴 루터 킹, 그리고 흑인과 가톨릭 해방신학자들, 성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기독교의 아버지들의 저서를 사용해 원죄와 인간의 불완전성을 강조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독립적인 개인이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자들이 행동을 통해, 이 세상의 종말이 올 때만이 완벽하게 실현될 완벽성을 추구하도록 서로 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신학의 신봉자들은 자주 마태복음 25장을 인용한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다시 말해 모두가 구원의 역사에 매달려야 한다는 얘기다. 그 경험에서 오바마는 신앙과 사회 행동이 별개의 사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신앙에 충실하면서도 나를 뛰어넘어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이 좋을지 생각하지 않거나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그는 말했다. 여기에 정서적인 소속감을 찾으려는 욕구가 합해지면서 오바마는 비로소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담대한 희망’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성령이 나에게 손짓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주님의 의지에 복종했고, 그분의 진실을 발견하는 데 나를 바쳤다.” 그렇다면 그것이 예수님의 말을 듣는 순간 과거의 삶과 완전히 단절하는 회심일까? 아니다. 오바마는 이렇게 말했다. “순간적인 깨달음이 아니었다. 번개를 맞고서 ‘아! 그렇구나’라는 식이 결코 아니었다. 나의 깨달음은 서서히 왔다. 독서에 몰두하며 방황하던 뉴욕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뉴욕 시절 나는 내가 삶에서 찾은 의미, 내게 가장 중요했던 가치, 내가 가졌던 경이와 비극이 기독교 이야기에 모두 들어 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판단이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에서 그가 말한 대로 돕고 싶은 사람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실용적인 욕구에서 비롯됐을까? “신앙 공동체의 일부분이 되고 공개적으로 신앙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오바마는 말했다. 오바마가 진정 예수를 받아들인 곳은 논란이 되는 트리니티 그리스도연합 교회다.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 상황이었다. “그 교회가 내가 원하던 바로 그런 공동체였다”고 오바마는 말했다. 무엇보다 트리니티는 신앙생활의 일부로 현실 참여를 촉구했다. 또 그곳은 가족 공동체였다. 신도들은 그 교회를 자기 동네라고 표현했다. 교인들은 매주 일요일 같은 교회에 나가 곁에 앉은 사람들을 알게 됐다. 누군가 아프거나 직장에서 승진하면 모두가 알았다. 오바마는 지역사회 운동을 하면서 제러미아 라이트 목사를 만났고, 둘은 친구가 됐다. 오바마는 “결혼 후 예배가 끝나면 라이트 목사를 집으로 초청해 닭고기 요리를 같이 먹으며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고 말했다. 라이트는 설교에서 가족과 결혼생활, 자녀 양육의 중요성을 자주 강조했다. 최근 아버지의 날 연설에서 오바마는 “아버지의 책임은 생명을 잉태시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라이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그 전제는 라이트 목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바마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로 결심한 시점에서 나의 지성과 감성이 합쳐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믿음, 다시 말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었고, 그를 통해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선행을 통해 이 세상의 질서와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우리의 한계와 결점, 그리고 약점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아주 강력한 힘이 됐다.” 마야는 어머니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오바마의 결심을 이해하고 인정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오빠와 달리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고도 서로를 잘 대하고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어머니는 늘 영적인 방랑자였다. 반면 오바마는 어느 한 가지 신앙을 선택함으로써 좀 더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오바마는 시카고에서 지역사회 운동가로 잠시 일한 뒤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했다. 몇 년 뒤 유망한 변호사로, 남편과 아버지가 되고 출세하겠다는 결의를 갖고 시카고로 돌아갈 때까지 트리니티 교회와 공식적인 관계는 없었다. 그때쯤 오바마는 세례를 받았다. 그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나의 신앙을 시험한” 유능한 교사들과 성경 공부를 했다고 말했다. 결혼 뒤 버락과 미셸(역시 어려서는 교회에 자주 나가지 않았다)은 자주 교회에 나갔다. 한 달에 두세 번은 됐다. 그러나 첫딸 말리아가 태어난 뒤에는 교회에 자주 나가기가 힘들었다. “갓난아기를 데리고 교회에 나가는 일은 정말 쉽지 않다”고 오바마는 말했다. “트리니티 교회는 늘 만원이어서 일찍 가야 자리를 잡는다. 특히 아침 예배에 가면 아주 힘들었다. 그래서 교회에 잘 나가지 못했다.” 연방 상원의원에 출마한 뒤 그의 가족은 몇 달씩 교회에 나가지 못했다. 딸아이들도 주일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의 가족은 식사 전에 기도를 했고 오바마는 아이들이 질문을 하면 종교에 관해 이야기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신앙을 강요해선 안 되면 내재된 호기심과 영성을 발현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오바마는 심란한 가운데서도 신앙을 가지려 애썼다. 일리노이 주상원의원 시절인 1999년 그는 정통파 유대교도인 아이러 실버스타인과 같은 사무실을 썼다. 오바마는 실버스타인에게 음식에 관한 율법과 안식일에 금지되는 행동 등 정통파 유대교인에게 일상생활에 어떤 제한이 있는지 많이 물었다. “안식일에 내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버락이 대신 해줬다”고 실버스타인이 회상했다. “사무실 문이 전자식이었기 때문에 그가 대신 열어줬다. 사실 그런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오바마는 라이트 목사와 트리니티 교회에 등을 돌린 이후 다시 약간은 방황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라이트 목사라는 친구를 잃었고 트리니티 교회라는 제2의 고향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선거가 끝나기 전에는 새 교회를 찾아볼 생각이 없다. “우리 선거운동의 특수한 사정 때문에 어느 교회에 나가면 좋을지 알아보기에 적절한 시점이 아니다”고 오바마가 말했다. “트리니티 교회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이 주시 받는다.” 그럼에도 유세를 떠나서도 그의 영적인 탐구는 계속된다. 그는 매일 기도한다고 말했다. 특히 “수많은 나의 죄와 결점을 용서받고, 내 가족의 안전을 위해 기도한다. 또 거창하지 않지만 내 행동과 주님이 원하는 것 사이에 일치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내가 주님의 의지를 실현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기 위해” 기도한다고 그는 말했다. 때때로 저녁에 성경도 읽는다. “긴급한 현안에서 잠시 벗어나 삶을 반추할 시간을 갖기 위한 일종의 의식이다.” 지금 수많은 성직자와 친구들이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에게 도움이 되는 성경과 유대교 율법 구절을 e-메일로 보내준다. 조지 W 부시의 대통령 취임식과 부시의 딸 제나의 결혼식에서 기도를 한 커비존 콜드웰 목사도 오바마를 위해 기도한다. 콜드웰은 오바마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감정을 잘 억누르지 못한다. 그는 오바마에게 “무엇에 대해 기도할까요?”라고 물으면 오바마는 늘 “아내와 딸들”이라고 대답하는데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결코 ‘나를 위해, 그리고 선거의 승리를 위해, 그리고 비방을 받지 않기 위해 기도해 달라’고 말하는 법이 없다. 그는 늘 ‘아내 미셸과 딸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바마의 신앙을 비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특히 복음주의자 중 일부는 오바마의 신앙이 현시대적 특징의 혼합물이라고 지적한다. 정통이 아니고, 규율이 없으며, 심지어 성실치 못하다는 것이다. 지난달 미국 복음주의 지도자 중 한 명인 제임스 돕슨 박사는 오바마가 “자신의 세계관과 자신의 어설픈 신학에 맞추려고 성서의 전통적 해석을 의도적으로 왜곡한다”고 비난했다. 이에 오바마 캠프는 신자들을 포용하고 가족의 가치를 옹호했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아들 프랭클린 그레이엄은 최근 오바마에게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신약성서의 교리와, 다원주의와 다양성을 포용하려는 선거운동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 물었다. 그레이엄은 오바마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뉴스위크에 전했다. “나의 속죄와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내 기독교 신앙의 기본이다. 하지만 나는 황금률(‘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을 확고히 믿는다. 그것이 내 신앙뿐이 아니라 나의 가치관과 이상, 그리고 이 세상에서 나의 경험을 떠받치는 기둥이다. 이전에도 나는 그렇게 말했다. 이 점과 관련해 복음주의자들이 의문을 갖는다는 사실을 나도 안다.… 내가 아는 한 기독교를 정식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는 내 어머니가 지옥에 갔을까?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만약 오바마가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선출된다면 그 말이 정당화될지 모른다. 링컨과 제퍼슨 같은 역대 대통령들도 비정통파 기독교인이었다. 그리고 퓨 포럼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70%는 “다른 종교도 얼마든지 영생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말에 동의한다. “나의 믿음이 다른 기독교인들의 믿음과 일치하지 않을지 모른다”고 오바마는 말했다. 지난 3월 라이트 목사의 ‘갓댐 아메리카’ 비디오가 방송을 탔을 때 오바마는 인종에 관한 연설문을 썼다. 그래야 후보로서 살아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몇몇 사람은 그것이 인종 문제만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연설이라고 생각했다. 오바마는 라이트 목사와 자신의 관계를 설명하고, 미국인들의 선의에 호소했다. 미국의 인종 문제가 “완벽하지 못한 인간으로서 우리가 가진 결점”이라며 라이트 목사의 실언을 인간으로서의 부족함으로 설명했다. 가톨릭 신자로 ‘당신이 구한 생명이 당신의 생명일지 모릅니다(The Life You Save May Be Your Own)’의 저자인 폴 엘리는 이렇게 말했다. “너무 기독교에 치우친 생각이었다. 우리가 맺는 대인관계는 전부 결함이 있고 우리 모두에게 문제가 있다. 인간관계를 단칼에 끊을 수는 없다. 다른 불완전한 인간과 함께 나아가야 하며 양쪽 다 완벽해야 한다는 주장에 저항해야 한다.” 라이트 목사는 한 달 뒤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 나와서 자신의 실언을 인종적인 측면에서 해명했다. 엘리는 그 뒤 오바마가 기독교인으로서 그와 절연한 것이 옳았다고 말했다. 오바마는 과연 인종에 관한 이야기를 신앙에 관한 이야기로 생각했을까? 지난주 유세용 전용기에서 오바마는 이렇게 말했다. “인종 문제는 우리 자신이 우리 형제자매들의 보호자라는 믿음에 대한 가장 혹독한 시험이다. 우리가 인종의 벽을 뛰어넘는 것이 그렇게 간단명료하다면 좋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고통스럽고 복잡한 과정이다. 바로 거기에 신앙이 개입돼야 한다.” 이제 미국 대통령 선거의 결선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오바마는 그 복잡한 자신의 신앙 전부를 동원해야 할 것이다. 대통령 선거전의 막바지만큼 어렵고 복잡한 시기는 없다.

2008.07.16 17:33

12분 소요
대한민국의 두 얼굴

산업 일반

로만손시계의 해외사업부 김태환(42) 부장은 해외통이다. 1990년 이 회사에 입사한 이래 15년 동안 오로지 해외시장 개척에 매달렸다. 토종 브랜드인 로만손시계를 들고 30여 개국을 누볐다. 88년 창업한 이 회사의 제품은 70개국에 상표가 등록됐을 만큼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커팅 글래스(Cutting Glass·시계 유리면을 각지게 깎는 기법)’ 시계로 전 세계 애호가들을 매혹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만손시계는 유독 미국과 유럽 시장에서는 맥을 못 춘다. “통계수치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 지역 수출은 미미하다”고 김 부장은 말했다. 이유는 간명하다. 미국에서는 로만손의 ‘Cutting Glass’ 기술이 소송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사파이어를 깎는 원천기술을 가진 미국 업체가 특허권 침해 소송을 냈다. 그 바람에 시장 진입단계에서 벽에 부닥쳤고 지금도 고전 중이다. 하지만 특허분쟁 없는 유럽에서도 실적이 영 시원찮다. 단지 한국 제품이라는 이유로 당하는 불이익이 많기 때문이라고 김 부장은 말했다. “로만손시계보다 기능 면에서 한 수 아래의 시계도 스위스 제품이라면 더 높은 가격에 잘 팔린다. 첨단 시계기술의 본산인 유럽의 최고급 제품과 경쟁하기에는 아직 우리 제품이 조금 부족하다. 그러나 브랜드 성능이나 디자인이 실제보다 저평가될 때는 무척 억울하다. ” 그래서 로만손의 해외 대리점들은 아예 로만손을 스위스 제품으로 소개한다. 로만손시계에 들어가는 주요 기계 부품, 즉 무브먼트는 수입품이 많다. 시계 부품을 생산하는 나라로는 크게 스위스·일본, 그리고 중국이 있다. 고가 제품에는 스위스, 중가 제품에는 일본, 그리고 저가의 제품에는 중국 무브먼트를 사용한다. 그래서 일본 무브먼트를 사용하면 ‘Japan Quartz’, 스위스 무브먼트를 사용하면 ‘Swiss Quartz’라고 표기한다. 로만손은 스위스 부품을 가져다 쓰므로 제품에 ‘Swiss Quartz’라고 표시해도 된다. 해외 대리점들은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로만손을 아예 스위스 제품이라고 홍보한다고 한다. 한국 브랜드라고 하면 반응이 시원찮기 때문이라고 김 부장은 말했다. “한국의 브랜드 파워가 강하다면 판매상들이 굳이 스위스를 내세울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아직은 한국은 그런 단계에까지 올라서질 못했다. ” 여성패션의류 전문기업 (주)오브제의 강진영 사장은 업계의 대표주자 중 하나다. 그가 내놓은 ‘Y& Kei’ 브랜드는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로는 유일하게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명품관 ‘애비뉴얼’에 입점해 있다. 2001년 글로벌 패션기업으로 도약하려고 뉴욕에 현지법인을 세웠다. 귀네스 팰트로, 브리트니 스피어스 등 외국 유명스타들이 자주 찾으면서 ‘Y& Kei’는 최근 세계적 브랜드로 발돋움했다. 뉴욕에서 해마다 컬렉션 쇼를 여는 등 미국 주류 패션계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는 평가다. 그러나 ‘Y& Kei’는 미국에 정착하기까지 숱한 역경을 겪어야 했다. 한국에서 메이저 브랜드로 군림하던 오브제가 미국에 상륙했을 때는 초대받지 않은 변방의 브랜드나 다름없었다. 미국 소비자들은 한국 패션을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다 못해 장차 미국이 뚫어야할 거대 시장인 중국은 그 이유만으로 관심을 끌었다. 이른바 ‘차이나 백그라운드’(중국 후광) 효과가 있다. 일본 역시 유명 디자이너들이 미국에서 활개를 쳤다. 일본과 중국에 비해 너무나 가벼운 한국의 무게에 자괴감이 들 때도 많았다고 강 사장은 회상했다. “한국을 알리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고정관념을 깨기가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였다. ” 미국의 고급 의류시장에서 원산지를 한국이라고 밝히면 당장 마이너스다. 하지만 강 사장 제품에는 ‘Made in Korea’가 박혀 나온다. (주)오브제 제품 중에는 외국 유수 명가와 가격이 같거나 비싼 제품도 있다. 미국 소비자들은 최고급 패션 제품이라면 응당 이탈리아나 프랑스제를 떠올린다. 따라서 한국에서 만들어진 ‘Y& Kei’ 구매를 망설이게 된다. “이를 극복하는 일이 우리의 숙명”이라고 강 사장은 말했다. 제일기획 강진기C2 그룹장은 ‘Y& Kei’가 맞는 어려움은 “기업과 개인만 업그레이드 되고 한국이라는 브랜드는 아직 제자리를 맴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이라는 국가 이미지의 낮은 브랜드 파워에 한국 기업의 발목이 잡힌다. 로만손과 오브제에서 보듯 상품의 국적은 무시 못할 변수다. 국가 브랜드 이미지는 소비자의 구매를 좌우하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쟁쟁한 기업의 제품이라도 원산지가 개도국이면 값싸 보이게 마련이다. 이처럼 한국의 상품은 실제 가치보다 저평가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질곡에 빠져있다. 다국적 브랜드 조사기관인 안홀트-GMI사가 매긴 브랜드 순위에 나타난 한국의 체력은 기대 이하다. 한국은 2005년 4분기에 35개국 중 25위를 기록해 하위권에 머물렀다. 중국·러시아는 물론 한국이 한 수 아래로 생각하는 헝가리·브라질·아르헨티나 등에도 뒤졌다. 국가 브랜드 가치를 금액으로 환산했더니 미국은 17조8930억 달러, 일본은 6조2050억 달러, 독일 4조5820억 달러, 중국은 7120억 달러로 평가됐다. 반면 한국의 경우는 2400억 달러에 그쳤다. 국가 브랜드 가치와 국내총생산(GDP) 비율을 따져보면 더 형편없다. 한국의 국가 브랜드 가치는 GDP의 26%로 35개국 중 최하위권이다. 미국·독일·영국·이탈리아·스페인·스위스 등 주요 국가의 브랜드 가치는 GDP의 1.5배를 웃돌았다. 한국의 경제력보다 국가 브랜드 가치가 턱없이 저평가돼 있다는 말이다. 고속 성장으로 한국의 몸집은 커졌지만 이미지는 그 성장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가 이미지는 실체보다 좋은 경우와 못한 경우가 있는데 우리는 후자”라고 정부 부처 등 공공기관 브랜드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퍼브릭 브랜드 컨설팅의 김형남(41) 대표는 말했다. 그는 “홍보의 문제, 즉 알리기에 실패한 결과”라고 풀이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는 지난해 ‘2005 국가 이미지 현황 및 시사점’ 이라는 자료를 펴냈다. 세계 70개국 100개 도시의 일반 소비자 5000여 명에게 한국을 물어본 설문조사 결과다. 여기서 한국 브랜드의 장단점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한국에 보인 호감도는 평균 67.3%로 전년도 60.6%보다 약간 높아졌다. 그러나 국가별로 한국 호감도는 큰 편차를 보였다. 중국(82.2%), 일본(77.8%) 등 최근 한류 영향을 받는 지역에서는 한국에 보이는 호감도가 높다. 한국에 호감이 없다는 응답자는 각각 17.4%(중국), 20.8% (일본)에 불과했다. 반대로 유럽 지역은 39.4%, 북미 지역은 30.4%가 한국에 호감이 없다고 답했다. 비호감 지수가 중국·일본의 2배에 가깝다. 게다가 한국을 호의적으로 보는 유럽인은 줄어가는 추세다. 2005년 한국에 보인 호감도는 59.1%로 전년도 63%보다 4%가량 하락했다. 여타 지역의 한국 호감도가 증가하는 경우와 대조적이다. 유럽과 북미 지역에서 한국의 이미지가 구겨진 채로 방치됐다는 의미다. 고정관념과 선입관은 현실을 보는 눈을 흐리게 마련이다. 유럽과 북미 지역 사람들의 뇌리에 한국과 관련한 이미지로는 한국전쟁이 가장 강렬하다. 한국과 연상되는 이미지를 묻는 질문(복수 응답)에 유럽인은 한국전쟁(55.5%), 자동차(53.4%), 올림픽·월드컵 (52.6%) 순으로 답했다. 북미에서도 한국전쟁(60.1%)이 북핵 문제(58.6%)와 자동차(49.4%)를 제치고 한국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한국에 부정적 이미지가 덧칠된 데다, 한국을 그리 강력한 국가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라고 제일기획 강진기 C2 그룹장은 분석했다. 유럽과 북미인 상당수는 미디어로만 한국을 접했다. 그런데 “서구인들이 언론을 통해 접하는 한국은 긍정적 내용보다 부정적 내용이 많다”고 김형남 대표는 말했다. 전쟁과 분단, 북핵, 강성 노조, 빈부 격차, 열악한 노동 환경 등이 해외 언론에 자주 노출되면서 한국의 이미지가 일그러졌다는 얘기다. 개고기 논란 등도 한국에서는 사소한 일로 치부됐지만 유럽에서는 뜨거운 관심사로 사람들의 뇌리에 박혔다. 경제 발전, IT 강국, 월드컵, 올림픽 개최 같은 호재도 있었다. 그러나 선진국은 진작에 다 보유한 가치들이다. 그들 눈에는 한국이 새롭지 않은 그저 그런 나라 중의 하나로 남는다. 반면 유럽 바이어들의 한국 제품 호감도는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중앙일보는 최근 KOTRA와 함께 유럽 22개국 바이어 1071명을 상대로 ‘한국 및 한국산 상품의 이미지’를 조사했다. 한국에 보인 호감도(100점 만점) 점수는 프랑스·스위스·오스트리아 세 나라에서 평균 68.3점을 기록했다. 일본(65.4점), 프랑스(60.9점), 미국(57.2점)을 앞섰다. 한국에 보인 전체 평균 호감도는 56점이다. 부자 나라가 많은 서유럽 지역(62.8%)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는 유럽의 구매자가 소비자보다는 한국과 한국 제품을 보다 정확하게 인지한 결과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 같은 결과가 나온 주된 이유는 어느 정도 한국에 관심이 있는 사람을 상대로 물었기 때문이다. 선진국 대부분 국민에게 한국은 아예 관심권 밖의 국가다. 지난달 한국관광공사와 한국 이미지 커뮤니케이션이 공동 주최한 국가 상징물 관련 토론회에서 이안 심 주한 영국문화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이 아시아에서는 한류로 대표되는 매우 강렬한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한국이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지, 아니면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섬 나라인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 프랑스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장뤼크 말랭 주한 프랑스문화원장도 프랑스에서 한국은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라고 했다. “프랑스인에게 한국을 지도에서 찾으라면 아마 곤혹스러워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아시아 주요 교역국이나 중동·중남미 개도국으로 오면 분위기가 확 다르다. 한국의 긍정적인 측면에 더 주목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에게 투영되는 한국 이미지는 유럽이나 미국의 경우와 대조적이다. 한국의 최대 수출국인 중국은 오히려 한국에 대한 호감도는 높은데 개별 상품 이미지가 낮아 문제다. 앞서 KOTRA의 ‘2005 국가 이미지 현황 및 시사점’에서 한국 상품은 품질과 디자인, 가격, 기술 등 4개 분야 100점 만점에 70개국 평균 64.4점을 받았다. 그러나 중국인의 한국 상품 평가는 62점에 그쳤다. 하지만 한국에 보인 호감도는 82.2점으로 조사대상 권역(유럽·북미·아시아·대양주·일본·중국·중남미·중동·아프리카·기타) 중 최고였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한국에 보인 호감도는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그런데도 한국 상품의 평가는 8개 권역별 조사에서 45.1점으로 꼴찌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한국 하면 김치나 한류 등 친근한 이미지를 먼저 떠올린다. 중국 사람들은 한국을 생각할 때 김치(65.8%)와 한류 상품(영화·드라마·가수·배우, 57.7%) 순으로 연상한다. 일본인에게도 김치(91.1%)와 한류 상품(71.3%)이 한국을 대표하는 이미지다. 비슷한 현상은 중남미와 중동·아프리카에서도 나타난다. 이들 지역 절반 이상의 응답자에게 한국은 경제 성장과 자동차, 올림픽·월드컵 등 긍정적 이미지로 다가선다. 한국의 이미지를 전쟁에 결부시키는 응답자는 중남미 27.5%, 중동·아프리카 21%에 그쳤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한국 기업은 국가 이미지 덕을 본다. 고용석(38)씨는 베트남에 오토바이 완성차와 부품을 판매한다. 그는 효성그룹이 중국 업체와 합작해 중국 충칭에 세운 ‘효성 은샹 파비즈’의 대표이사(총경리)다. 지난해까지는 한국에서 베트남으로 상품을 직수출했다. 올해부터는 낮은 생산비와 저렴한 노동력을 좇아 중국으로 본사와 공장을 옮겼다. 8월이면 중국의 생산기지가 가동된다. 고씨가 판매할 오토바이와 부품에는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와 ‘디자인 바이 코리아(Design By Korea)’라는 문구를 새겨넣을 참이다. 중국에서 만들어도 디자인 기술은 한국산임을 알려야 더 잘 팔린다며 고 사장은 미소지었다. “베트남에서는 한국 이미지가 아주 좋다. 한국 제품이면 으레 품질은 물론 사후 서비스가 좋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사업하기가 예전보다 수월하다. ” 한국의 브랜드 파워는 국가 간 수교에도 위력을 발휘했다. 한국과 캄보디아는 96년 상주대표부를 설치했다. 지금은 양위했지만 노로돔 시아누크 당시 국왕은 그 이전부터 한국과의 수교를 단호하게 반대했다. 자신이 어려울 때 많은 도움을 준 북한과의 관계를 생각해서다. 하지만 훈센 총리는 생각이 달랐다. 한국의 경제개발 모델을 좇아 캄보디아를 번성케하고 싶었다. 그러자면 한국과 수교하고 경제개발 노하우를 전수받아야 한다. 훈센 총리는 이런 논리로 반대자들을 설득했다고 이한곤 전 캄보디아 대사는 전했다. 이 전 대사는 “개도국들은 60,70년대 우리의 개발경험을 애타게 갈구한다. 이들에게 잘 사는 방법을 전수하는 일이야말로 최고의 국가 이미지 홍보”라고 강조했다. 덧붙이자면 훈센 총리는 김치 애호가다. 관저에서 늦게 일하다 출출해지면 한국 김치에 밥을 비벼먹었다고 한다. 김치가 떨어지면 비서진이 수퍼마켓에서 사오기도 했다. 2003년 7월 주 캄보디아 한국대사로 부임하며 훈센 총리에게 이 말을 들은 이한곤 전 대사는 한국대사관에서 수시로 김치를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한국대사관에서 보내주는 김치 중에서 훈센 총리는 백김치를 즐기고 영부인은 매운 김치를 유난히 선호했다고 한다. 자기보다 잘 사는 나라는 다시 한 번 보게 된다. 그것도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서 짧은 기간에 부자가 된 나라를 보면 선망과 추종심이 생길 법도 하다. 동남아 국가들은 한국을 자국의 개발모델로 상정하는 데다 한류 스타들이 안방을 점령했다. 김정탁 성균관대 국가브랜드경영연구소장은 “한국은 제3세계의 모델 국가다. 현지에서의 이미지는 우리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굉장히 좋다. 자기만큼이나 가난했던 한국이 단기간에 고도 성장을 이뤄내는 모습에서 그들도 희망을 품게 됐다”고 말했다. 국가 이미지란 이처럼 국가경쟁력과 심리적 친근함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특정 국가를 향한 종합적이고 복합적인 심상이다. 좋은 국가 이미지는 기업의 해외 마케팅, 외국인 투자 유치, 관광 진흥, 외교, 문화 교류 등에 긍정적 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한마디로 국가경쟁력에 직결된다. KOTRA 통상전략팀은 “한국에 보이는 호감도와 한국 상품 구매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했다. 한국 정부는 비교적 최근에 들어서야 국가 브랜드 파워 육성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문민정부가 세계화 전략을 추진하면서 해외홍보를 국가이미지 제고 차원에서 다루기 시작했다. 대외 홍보위원회, 위성영어 TV 방송(아리랑TV) 등 실천 방안을 마련하기는 했으나 이때만 해도 국민적 관심사로 등장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97년 외환 위기를 맞아 관련 정책의 추진력은 순식간에 힘을 잃었다. 해외 홍보 정책 또한 후순위로 밀렸다. 본격적인 노력은 국민의정부에서 추진됐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회에 즈음해 한국을 세계에 집약적으로 알릴 슬로건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각계 의견수렴 과정을 거쳐 2001년 12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 주재 ‘2002 월드컵·아시아 대회 준비상황 합동 보고회’에서 ‘Dynamic Korea’를 국가 상징 영문 슬로건으로 최종 확정했다. 이에 앞서 정부는 재외공관, 서울 상주 외신기자, 주한 외국인, 행정 각 부처·위원회와 해외홍보 유관 기관으로부터 의견을 수렴했다. 또 한국방송이 인터넷에서 6000여 명을 대상으로 국민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Dynamic Korea’ (24.6%)가 ‘Fantastic Korea’ (24.5%) ‘The Hub of Asia’(12.2%) 같은 경쟁 브랜드를 제쳤다. 이후 ‘Dynamic Korea’는 모든 국가 홍보물의 시작점이 됐다. 정부는 국가 이미지 제고 차원에서 각 부처 주요 홍보 수단에 ‘Dynamic Korea’를 최우선적으로 홍보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홍보물마다 국가 브랜드인 ‘Dynamic Korea’를 전면에 내세우고, 필요할 경우 부처별 하위 슬로건을 활용토록 하는 지침이 제시됐다. 정부가 발간하는 각종 인쇄물·영상물·홍보 자료·공문서는 물론이고 외국인이 많이 이용하는 공항 시설과 항공기 내에도 ‘Dynamic Korea’ 브랜드가 대대적으로 노출됐다. 지난해 정부는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려 외국인 방문 도시 대중교통에 18만여 장의 스티커를 부착했다. 또 전국 지방 국세청·체신청·농협 지점에 2만여 장을 뿌렸으며, 스티커 부착 거리 캠페인도 전개했다. 중앙 행정기관과 광역 지방자치단체, 재외 공관 등 232개 정부 유관 기관 홈페이지에 Dynamic Korea’ 배너 등재를 추진했다. 확산력이 큰 해외 영상매체도 활용된다. 영어 방송 아리랑TV에 지난 한 해 동안 총 7400여 회의 ‘Dynamic Korea’ 를 주제로 하는 홍보 영상물이 방영됐다. 지난해 11월 부산 아태경제협력체(APEC) 회의 기간엔 CNN에 ‘Dynamic Korea’ 광고가 112회 실리기도 했다. 지난해 2월 당시 이해찬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국가 이미지 위원회·국가 이미지 개발위원회 연석회의는 ‘Dynamic Korea’를 국가 브랜드로서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확산하자고 결정했다. 그러나 ‘Dynamic Korea’가 국가 브랜드로 자리 잡았는지는 의문이다. 정부 유관기관의 ‘Dynamic Korea’ 배너 등재도 한때 전면적으로 시행되는 듯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관심이 시들해졌다. 중앙 행정기관 중에도 홈페이지를 개편할 즈음엔 슬그머니 배너 광고를 내리는 곳도 많다. 법무부·과학기술부·금융감독원 등 정부 기관들도 따로 논다. 정치인과 CEO에게 브랜드 컨설팅 서비스를 하는 메타커뮤니케이션의 노범석(38) 대표는 “국가 브랜드를 딱히 전담해 책임지는 부서가 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국가이미지위원회는 한·일 월드컵 개최 직후인 2002년 7월 발족했다. 월드컵 개최와 4강 진입을 계기로 드높아진 한국의 국가적 위상을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전략과 비전을 제시하는 기구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위원장인 국무총리를 비롯해 외교통상부·산업자원부·문화관광부 등의 부처 국무장관들과 민간 전문가가 참여했다. 여기서 20개 부처 42개 사업을 국가 이미지 제고 사업으로 선정했다. IT 산업 육성, 개도국 지원 확대, 국가 이미지 정기 조사 등도 포함되며 예산만 3500여억원에 달하는 방대한 규모다. 이를 실무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차관급 인사들이 참여하는 ‘국가 이미지 실무위원회’도 구성됐다. 하지만 국가 이미지 위원회 초기 활동은 활발하지 못했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1년에 한 번씩 회의를 하고는 그만이었다. 당초 1년에 두 번씩 열기로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실무위원회도 2003, 2004년 각 1회씩 회의를 열었을 뿐이다. 게다가 당시엔 이미지위원회 회의 결과를 실행에 옮길 하부 조직이나 후속 조치마저 마땅치 않았다. 국정홍보처도 국가이미지위원회가 실질적인 내용 없이 그냥 겉돌았다고 평가했다. 지난 2월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회의에 출석한 김창호 국정홍보처장은 “회의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 구체적인 성과가 없었다”고 답변했다. 국가이미지위원회에 할당된 예산도 2003년 2억원에서 이듬해에는 1억원으로 절반이 줄어들었다. 16대 국회 당시 문화관광위원회 김성호 의원은 여당이면서도 “국가이미지위원회 활동이 유명무실해졌다”고 비판했다. 2005년 2월 이해찬 국무총리가 국가 이미지 활동 내실화를 지시하면서 국가 이미지 추진 체계가 개편·보강된다. 해외홍보 경험과 지식을 갖춘 민간 전문가가 참여하는 국가이미지개발위원회가 자문기구로 발족했다. 또 18개 홍보 관련 기관이 참여하는 ‘해외홍보정책협의회’가 신설돼 해외홍보 업무 현안을 실무적으로 협의·조정하기에 이른다. 해외홍보원(원장 유재웅)이 주관하는 해외홍보정책협의회는 지난해 10월 구성된 이래 활동이 제법 왕성하다. 최근까지 24차례 회의를 열어 중복 사업을 조정했다. 지난 2월 10일부터 26일까지 이탈리아 토리노 겨울올림픽에서는 민·관이 합동으로 해외홍보에 나서는 성과를 이끌어 냈다. 국정홍보처와 과학기술원(KAIST), 대한체육회, 삼성전자 등이 ‘Dynamic Korea’ 슬로건 아래 이미지 홍보 활동을 펴 현지에서 호평을 받았다. 한국의 이미지는 앞에서 살폈듯이 대륙별로 각기 다른 방식으로 투영된다. 수용하는 국가에 따라 이분화·양극화 현상을 보인다. 김정탁 성균관대 국가브랜드경영연구소장은 “한국과 한국 제품 이미지가 제3세계에서는 굉장히 좋은 반면, 유럽과 미국에서는 정반대”라고 지역 편중성을 지적했다. 이안 심 주한 영국문화원장도 “한국이 아시아에서는 한류로 대표되는 매우 강렬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유럽은 이와 사뭇 다르다”고 말했다. 결국 취약 지역으로 분류되는 유럽과 북미 지역에서의 승부가 관건이다. 김유경 한국외국어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글로벌 미디어를 보유한 미국·영국 등 선진국 홍보대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국 이미지가 낙후된 지역을 새로운 목표 시장으로 설정해 홍보활동을 강화해야한다. ” 국가이미지개발위원회의 민간위원인 최정화 한국외대 교수도 “국가별로 그들의 취향에 맞게끔 한국의 이미지를 조절해 내보내야 한다”고 국가별로 차별화된 홍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정부도 국가별·권역별 특성에 맞는 차별화된 전략이 필요하다는 점을 잘 안다. 국가이미지위원회도 국가별·권역별로 긍정적 이미지 홍보를 적절하게 배합한다는 방침이다. 가령 북미 쪽에는 한·미동맹 강화와 한국에 대한 신뢰 확산을 주로 홍보하고, 유럽 쪽에는 IT 강국·문화한국 이미지를 널리 알려 나간다는 식이다. 한명숙 국무총리는 유럽문화의 상징적 공간인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지난 6월 8일 열린 한국·프랑스 수교 120주년 기념행사장에 한복을 입고 참석했다. 이곳에서 한국의 고위관리들이 참석하는 리셉션이 열리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기념행사에는 프랑스 정·관계 인사, 기업인, 학자, 언론인 등 여론주도층 수백 명이 참석했다. 기념행사에 앞서 베르사유궁 오페라 하우스에서는 국립무용단 창작 무용 ‘코리아 판타지’ 공연이 열렸다. 한 총리는 한국 전통의 멋과 아름다움을 유럽인에게 알리려 한복을 입었다고 기념식에 동행한 최정화 한국외대 교수는 말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한국 측 여성 대부분은 한복 착용이 권장됐다고 한다. 주 프랑스 한국대사관의 김지준 일등서기관은 “한복은 프랑스에서 한국의 전통과 이미지를 느끼게 하는 데 적합한 의상”이라고 했다. 국정홍보처는 ‘유럽 지역 종합 국가 이미지 홍보’ 계획 실행에 전력을 쏟기로 했다. 올해는 월드컵이 독일에서 열리고, 한·불 수교 120주년 행사가 양국을 오가며 진행 중이어서 시기적으로도 중요하다고 본다. 문화한국·IT한국·무역한국을 알리는 프로그램이 많이 준비됐다. 월드컵 기간 중 유럽의 위성방송인 유로스포츠와 독일의 지상파방송인 ARD-TV 등에는 한국 이미지 CF인 ‘Dynamic Korea’가 방영된다. 또 정보기술협력단(6.5∼6.7)을 파견하고, 이동멀티미디어방송(DMB) 휴대 인터넷서비스(WiBro) 로드쇼(6.6∼6.9)를 개최했다. 한국 경기가 열리는 프랑크푸르트·라이프치히·하노버에는 한국 종합홍보관도 개관했다. 베를린·프랑크푸르트·뮌헨·슈투트가르트에는 한국의 자연과 태권도, 태극기 등 한국 상징물을 차체 외부에 그려 넣은 전차와 버스 21대가 운행된다. 어림잡아 9000만 명 이상의 지구촌 사람이 교통광고를 통해 한국과 만난다. 한국관광공사 브랜드홍보팀 차소희 과장은 “독일 시장에서 한국 이미지를 제고할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관광객에게 한국 인지도를 높이는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했다. 정부는 올해 유럽 홍보가 “유럽 외 기타 지역의 권역별 종합 홍보 추진을 위한 시금석으로 활용된다”고 본다. 유럽에서의 홍보 성과가 향후 국가 브랜드 홍보의 진로를 좌우하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Dynamic Korea’ 브랜드가 모든 유럽인에게 호의적으로 수용되지는 않는다. 지난달 한국 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과 국정홍보처가 공동 주최한 국가 브랜드 관련 토론회에서 몇몇 외국인은 ‘Dynamic Korea’ 이미지를 문제 삼았다. 통일 후 10년간 정체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한 독일에는 ‘다이내믹 불도저’ 와 같은 인상을 준다고 위르겐 케일 주한 독일문화원장은 말했다. “역동적이란 단어는 열광적인 행동파(actionism)”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는 이웃 국가나 경쟁 국가들을 성가시게 할 수 있다. ” 필립 리 한불상공회의소 회장은 ‘Dynamic Korea’ 슬로건이 유럽인에게 합당한지 의문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유럽은 현재 불경기·실업률 증가 등으로 우울한 분위기가 깔려 있다. 한국이 ‘Dynamic Korea’ 라고 외친다면 부정적 이미지나 불안감을 가질지도 모른다”고 그는 말했다. 심지어 보는 각도에 따라 한국은 벼락부자라는 인상을 줄지도 모른다고 김정탁 성균관대 국가브랜드경영연구소장은 경고했다. 김 소장은 “구미 지역에서는 ‘Dynamic Korea’보다는 차라리 5000년 역사와 문화유산을 내세우는 게 우호적인 정서를 가꾸는 데 유리하다”며 보다 세련된 접근을 주문했다. 사실 현지의 여건과 정서를 충분히 고려치 못한 홍보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손지애 CNN 한국지국장은 한국 홍보 영상물을 보면서 느낀 점을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한국인 입장에서 이렇게 보여졌으면 좋겠다는 것을 광고한다. 그것도 한국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보여준다. “‘Dynamic Korea’는 아주 좋은 타이틀이다. 하지만 어떤 점이 Dynamic한가를 모르는 사람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홍보물을 만들어야 한다. 좀 더 현실적 시각을 가졌으면 좋겠다. ” 디터 브링크만 한독상공회의소 회장의 발언도 음미할 대목이다. 한국은 기술·노동력·인프라 등에서 매력적이지만 정부 차원의 대외홍보 부족으로 독일이나 유럽 기업 유치가 저조하다. 브링크만 회장은 “유럽에서 삼성·LG는 알지만 한국 정부 차원의 홍보가 약해 독일인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고 밝혔다. 특히 독일 중소기업의 경우 정보 부족으로 한국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는 한국 정부의 홍보 활동이 일본에 미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선진국들이 수십년간 다듬어 온 국가 이미지를 한국은 불과 5년 전에 국가적 과제로 다루기 시작했을 뿐이다. 하지만 한국 이미지 홍보는 분·초를 아껴야 하는 분기점에 서 있다. 한정호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앞으로 홍보 노력과 전략의 효율성에 따라 국가 브랜드가 크게 달라지는 민감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은 국가적 인지도가 약하다. 정치·경제·사회의 안정도가 떨어지는 데다 문화 확산력도 부족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국가 브랜드를 높이자면? 한국을 지속적으로 말하고, 설득하고, 증명하고, 보여주어야 한다고 한 교수는 주장했다. “ ‘Made in USA’ ‘Made in Germany’ ‘Made in France’ ‘Made in Japan’이라는 말 속에 모든 긍정적 의미와 개성이 동시에 나타난다. ‘Korea’나 ‘Made in Korea’란 단어에 모든 유리한 연상과 기억, 개성이 동시에 나타나도록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 그러자면 무엇보다 한국이 세계에 내놓는 알맹이가 일류여야 한다. 국가 이미지 제고는 캠페인이나 이벤트 또는 홍보 전략만으로 성공하기 어렵다. 한국무역협회 무역연구소의 김고현 전 연구위원은 “목표로 하는 이미지의 실질적 내용과 변화가 있어야 한다. 상품의 일류화, 서비스의 일류화, 기업 여건의 일류화라는 실체적이고 실질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보를 무턱대고 한다고 해서 이미지가 금세 좋아지지 않는다. 무역협회 박부규 무역진흥팀장은 “제품을 좋게 만들어야 기업과 국가 이미지가 올라간다”고 했다. 물론 잘 다듬고 포장하는 요령도 익혀야 한다. 홍보를 제대로 하자는 얘기다. 정부의 서투른 홍보 기능이 국가 브랜드의 제고에 걸림돌이라고 학계에서는 본다. 신호창 서강대 영상대학원 교수는 “정부 부처 조직의 담당자들이 홍보 전문가가 아니어서 전략적 지식과 이해가 부족하고, 커뮤니케이션 전략이 대부분 일회성에 그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정부 내에 홍보 관련 전문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하루·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2003년 당시 문화관광부의 김성일 문화교류과장이 한 정책토론회에서 한 말이다. “해외 홍보담당 조직의 근무자 역시 전문성 부족으로 창조적이고 효율적 활동을 전개하지 못한다. ” 이후로도 눈에 띄게 개선되지 않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정부와 거래를 하기 때문에 익명을 요구한 한 여론조사 기관의 고위관계자는 정부 부처가 순혈주의와 위계질서를 고집하는 바람에 전문가를 외부에서 영입하기가 여의치 않다고 했다. “내부에 경쟁의 동력이 있지도 않아 창조적 긴장감을 찾기 힘들다. ” 이와 관련해 김형남 대표는 “체계적인 미디어 관리가 전혀 안 된다. 어찌 보면 국가가 의무를 해태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국정홍보처 등 정부의 홍보 파트도 역량의 상당 부분을 국내 문제에 쏟아붓는다. 해외 파트는 찬밥이라는 말이 나온다. 한정호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국정홍보처 내 해외홍보원은 항상 우는 소리를 한다. 할 일에 비해 인력이나 예산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올 6월 현재 해외홍보원 정원은 원장을 포함해 국내 55명, 국외 32명 등 총 87명으로 2003년 85명에서 2명 증가하는 데 그쳤다. 국가이미지위원회의 실질적인 사무국 기능을 수행하는 해외 홍보원으로서는 늘어나는 업무를 처리하기에 역부족이다. 메타커뮤니케이션의 노범석 대표는 “이 정도 인원으로 국가의 해외홍보를 감당하기엔 약하다”고 진단했다. 정부 부처 간 협력도 원활하지 못하다. 외교통상부는 지난해 국가 이미지 제고 관련 기관별 실적을 제출했다. 여기서 외교통상부는 “각종 국제행사를 주관하는 정부 각 부처와 지자체 간의 정보 교류 등 긴밀한 업무 협조가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홍보 기능의 합리적 조정과 기능 통합이 여의치 않았다는 평가인 셈이다. 99년 해외홍보 정책 기능 강화용으로 만들어진 대외홍보실무협의회를 보자. 첫해 한 차례 회의를 연 이후 지난해 폐지될 때까지 매년 3, 4차례 회의만 했을 뿐이다. 부처 간 기능조정을 담당할 만한 위상이 확보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학계는 한국 정부의 해외홍보가 효율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현재 정부의 해외 홍보기능은 국정홍보처의 해외홍보원, 문화관광부의 한국관광공사, 외교통상부의 재외 공관, 산업자원부의 KOTRA, 기타 여러 국제 교류 기구 등 10여 개 기관에 분산돼 있다(2000년 신호창 서강대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해외 홍보 업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기관은 32개에 이른다). 이들 기관 간 사업의 사전 협의나 조정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비판은 단골 메뉴였다. 한정호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국정홍보처·문화관광부·외교통상부 등 3개 부서 해외 홍보 관련 업무가 10여 개 항목에서 중첩되기도 했다. 영역 중복은 업무 혼선과 조직 간의 갈등을 야기하게 마련이다. 정부의 해외홍보 전략을 보는 학계의 시각은 냉랭하다. 김유경 한국외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지난달 열린 국가 이미지 관련 토론회에서 정부 홍보체계의 비효율성은 여전하다고 했다. 김 교수는 “국가 상징물이나 국가 이미지 제고 프로그램의 주관 부처나 집행 부서가 명확지 않은 데다 관리 책임의 소재 또한 불투명하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여러 부처에 산만하게 분산된 해외홍보 기능을 통합하는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물음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논의조차 없다. 부처 간 이기주의의 벽을 넘어설 엄두를 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안보섭 숙명여대 홍보광고학과 교수는 “부처별로 산발적으로 전개되는 해외홍보 활동이 전문적 지식을 가진 경험 있는 부처로 통합돼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효율적으로 국가 브랜드를 관리하려면 정부의 각 조직에서 산발적으로 시행하는 국가 이미지 관리 정책을 통합 조직으로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학계는 지적한다. 하지만 정부의 조직을 통합하는 일은 쉽지 않다. 2003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은 국정홍보처와 문화관광부에 분산된 해외문화원을 통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국정홍보처가 운영하던 해외문화홍보원이 문화관광부의 재외한국문화원으로 통합되기까지는 2년 이상 소요됐다. 한정호 연세대 신방과 교수는 “해외문화홍보원의 통합은 바람직하지만 전체 업무를 놓고 보면 정부 차원의 근본적인 변화나 기구 통합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 문제는 정치권으로도 번졌다. 지난해 정기국회 국정감사에서 열린우리당 민병두 의원은 통합적인 홍보 활동을 담당하도록 ‘국가 브랜드청’ 신설을 촉구했다. 한나라당 정병국 의원도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인 한국의 국가 브랜드 가치나 경쟁력이 한참 뒤처진 이유는 정부 책임이 크다고 추궁했다. 외국의 경우 해외홍보 전담 기구에 대한 지원이 강화되는 추세며, 홍보 조직과 활동이 체계적이다. 미국은 해외 주재 미 공보원이 국무부에 통합되면서 대사관 내 공보과가 대외 홍보활동을 총괄적으로 수행한다. 또 대외 이미지 관리를 위해 세계 공보국을 운영 중이다. 일본과 프랑스 역시 공보문화원과 대사관, 민간기구와의 활동이 유기적으로 결합돼 업무 연계가 긴밀하게 이루어진다고 한정호 연세대 신방과 교수는 말했다. 로만손의 김태환 부장은 국가 이미지가 그나마 10여년 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고 한다. 올림픽·월드컵 이후에는 ‘아! 코리아’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고객이 해외에서도 늘었다. 김 부장은 삼성이나 현대 같은 국내 대기업들이 해외에서 선전한 덕으로 돌렸다. “한국의 기업들이 한국을 세계에 알리고 이미지 개선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우리도 그런 덕을 봤다. 로만손도 후발 기업의 길을 터주는 데 일조하길 바란다. ” 정부의 국가 이미지 작업에 자문을 제공하는 한 기업인은 정부에 필요한 요소를 이렇게 제시했다. “성공할 때까지 탈나지 않을 정도로 최선을 다하는 게 기업이다. 지금 정부에 필요한 것은 ‘두 유어 베스트(Do your best)’ ‘노 리미트(No limit)’ ‘브레이크 스루(Break through)’ 같은 기업 용어들이다. ”

2006.06.20 17:21

20분 소요
자동차업계 칭기스칸 꿈꾸는 글로벌CEO

산업 일반

정몽구회장 지난해 한국 재계의 최대 ‘신데렐라’는 누구였을까? 많은 사람들이 현대·기아차 정몽구(64) 회장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현대·기아차는 지난 한해 잘 나갔다. 현대·기아차와 현대모비스(옛 현대정공) 등 그룹의 주력기업들이 발표한 당기순이익 합계만 2조원이 넘었다.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10년 미만 10만 마일 품질보증’제도의 성공으로 미국 시장 자동차 판매대수를 전년 동기대비 40%나 늘렸다. 최근 현대차는 자동차의 본토 미국 시장에 본격 상륙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미국 현지공장 건설을 위해 정몽구 회장은 지난 14일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 미 앨라바마에서 현지공장 기공식에 참석하고, 본격적인 글로벌 작업에 나섰다. 재벌가의 장자(長子)로 각인됐던 그의 투박하고 황소 같은 이미지는 이제는 검증받은 글로벌CEO로 탈바꿈하게 됐다.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의 경영 성적은 세간에서 제기됐던 MK의 경영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일거에 불식시킨 것이다. 지난해 12월17일 「아시안 비즈니스 위크」는 ‘현대자동차가 승승장구하고 있다’며 정몽 구회장의 경영 능력을 극찬하는 기사를 커버스토리로 내보냈다. 1999년 3월, 그가 현대자동차 회장에 취임했을 때 오늘날과 같은 실적을 올릴 것이라고 본 사람은 별로 없었다. 어눌한 듯한 인상, 논리적이지 못한 말투, 검증되지 않은 경영 능력 등의 이유로 그는 재계의 시선을 별로 받지 못했다. 이제 MK가 자동차를 맡은 지 3년. 그의 이름 앞에는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킨 능력 있는 경영자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정몽구 회장의 이같은 대성공의 비결은 무엇일까? 단순히 행운이었다고 깎아내리는 사람들도 많다. 외환위기로 환율이 떨어졌고, 상대적으로 임금이 낮아져 가격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현대차의 성장이 가능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일부 애널리스트들은 “대우자동차가 쓰러져 반사 이익을 본 측면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과연 행운뿐 이었을까. 정몽구 회장을 두고 아버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회장의 중년시절을 꼭 닮았다고 말하는 주변 인사들이 많다. 한번 결정하면 우직할 정도로 무섭게 밀어붙이는 불도저 같은 추진력은 아버지 정회장의 장점이라는 설명이다. 충성심과 정직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평가하는 것도 부친과 비슷하다. 충성심과 정직이 최고 가치 정회장은 서울에 머물 때면 매일 오전 6시30분 어김없이 양재동 본사에 출근한다. 6시 40분부터 업무를 시작해 거의 10분도 낭비하지 않는 것이 그의 근무원칙이다. 참모진인 김동진 현대차 사장·김뇌명 기아차 사장 등은 오전 6시에 출근, 브리핑 준비를 한다. 기타 다른 임원들은 전날 정몽구 회장에게 올릴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밤늦게까지 일하기 일쑤다. MK의 트레이드 마크는 황소 같은 고집이다. 외모에서도 물씬 풍긴다. 이 고집이 위기에 빠질 뻔한 회사를 구했다는 평가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정부의 현대전자·현대건설 및 금강산 프로젝트 지원 압력을 끝까지 거부한 것이다. 정부는 지난 99년 북한 프로젝트에 돈을 쏟아 붓던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 계열사인 현대전자·현대건설이 부도위기에 처하자 MK측에 지원을 요청했다. 99년 소위 ‘왕자의 난’당시 몽헌계열과 전면전(?)을 벌였던 MK는 정부측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오비이락(烏飛梨落) 격이었을까. MK의 현대자동차는 그 직후 국세청으로부터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당했다. 2000년 말 정몽헌 회장이 추진하던 금강산 개발사업이 자금난으로 좌초 위기에 봉착하자, 정부는 다시 한번 MK에 금강산 프로젝트 참여를 권유했다. 당시 이계안 현대차 사장은 정부로부터 금강산프로젝트에 참여하라는 강력한(?) 압력을 받고 고민을 거듭했다. 일부 신문에서는 청와대 소식통을 인용, ‘정몽구 회장이 조만간 방북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는 결국 오보(誤報)로 끝났다. 현대차가 해당언론사에 적극 반론을 제기하고 사실 무근 보도자료를 내면서 극구 부인했다. 정회장은 ‘황소고집’으로 또다시 이 정부의 요구를 거부했던 것이다. 정회장은 청와대가 불쾌감을 표시하자, 당시 주인을 잃고 표류하던 해태타이거즈 프로야구단을 인수했다. 금강산 사업에는 불참하는 대신 현 정부의 텃밭인 광주를 기반으로 둔 타이거즈 야구단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타협점’을 찾은 것이다. MK는 단순한 성격이다. 그의 경영 특징 중 하나는 ‘쉬운 말로 하라’는 것이다. 부하들이 영어와 한문을 섞어서 어렵게 말하면 어김없이 “쉬운 말로 해”라고 지시한다. 브리핑을 받을 때도 아주 알기 쉽게 문제의 핵심을 비유하거나 직설적인 표현을 좋아한다. 취임 초 기아공장을 방문했을 때는 정공 출신 측근들이 기아차 임직원에게 MK의 스타일을 알려줘 브리핑 시간을 단축시킨 적도 있다. 미묘한 사안이 발생하면 이를 해결하는 방식도 간단하다. 회사경영에 좋은 것과 나쁜 것, 그리고 우리편과 적군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식 사고방식이 드러난다. MK는 빠른 것을 좋아한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풀어야 한다. 시간이 오래 걸리면 참지 못한다. 정회장 지시사항에 대한 보고서도 최단 시간 내 올려야 한다. 때문에 정회장 지시가 떨어지면 해당 실무부서는 한바탕 홍역을 치룬다. 초창기 한때 회사내에 ‘광속(光速) 결제’ ‘광속 경영’이 유행했던 것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보고는 간단하고 빠른 게 좋다 MK는 30년 가까이 최고경영자 생활을 했다. 현대차써비스와 현대정공 등을 독자적으로 경영해오면서 수많은 참모진과 임원진을 봐왔다. 그들의 눈빛만 봐도 MK는 분위기를 파악할 정도로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하다. 투박한 외모지만 그의 방에 결제서류를 들고 들어간 임원들은 어김없이 입을 삐쭉 내밀거나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나온다. MK가 의외로 사업의 세세한 부분까지 꽤뚫고 있기 때문이다. 어영부영 넘어가는 법이 없다.임원들은 숫자 하나 가지고 혼나기 일쑤다. 신차가 나오게 되면 반드시 품질 품평회 등을 한다. 그 자리에서 정회장은 디자인은 물론 색상과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도 전문가 수준으로 지적을 한다. 기술연구소 직원들조차 놀라는 적이 많다. 그만큼 섬세한 면이 많다. 그는 부친만큼이나 조직원들의 충성심과 정직을 중요한 가치로 평가한다. 99년 자동차 회장 취임후 첫 미국 출장 때의 일화다. 당시 현대차 출신과 정공 출신들이 뒤섞여 정회장 미국 출장길에 동행했다. 또 미국 현지법인에는 이미 현대차 출신들이 상당수 파견돼 일을 하고 있을때였다. 출장 중에 어느 날 저녁식사 자리에서 정회장이 불쑥 한마디 내뱉었다. “막걸리를 마시고 싶은데 여기서 구할 수 있겠느냐?”고 주위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 대목에서 현대차 출신과, 정공 출신들 간에 미묘한 차이점이 발생했다. 미국 현지법인에 근무하던 현대차 출신들은 “여기는 미국 땅이기 때문에 막걸리를 구할 수 없다”고 즉석에서 잘라 말했다. 그러자 현대정공 출신 참모들은 그 자리에서 “구해보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뿔뿔이 흩어져 막걸리를 구하러 나갔다. 한참이 지난 뒤 정공 출신들도 막걸리를 구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오기는 했다. 그러자 MK는 “그냥 됐다” 면서 어색한 상황을 넘겨버렸다. 이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공 출신들은 MK의 성격을 잘 안다. 그래서 멀리 미국 땅에서 막걸리를 찾는 회장을 위해 밖에 나가 찾아보는 시늉이라고 한 것이다. MK는 한마디로 이런 행동을 원한다. 찾아보지도 않고 구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하는 것보다 일단 찾아보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를 원하는 것이다. 합리적이라기보다는 보스 기질이 강하고, 조직에 대한 충성심을 더 요구하는 것이다. 취임 3년을 맞은 현대차는 MK의 친정 체제를 완전히 갖추었다. 현대차·기아차를 비롯 계열사 주요 보직에 자신의 측근들을 모두 앉혔다. 정공 출신 핵심인사들이 자금·인사·감사 ·기술연구소 등 주요 보직을 장악했다. 이를 두고 현대차 출신들은 ‘점령군’이니 뭐니 하며 볼멘소리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MK측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최고경영자가 바뀌면 당연히 이루어지는 인사일뿐이라는 것이다. 새 대통령이 취임하면 바뀌는 보직 숫자가 4천개가 넘는다고 하지 않느냐는 반응이다. 파격적인 비공식 포상금 전임 정세영 회장 때와 다소 틀린 경영 스타일로 인해 취임 초반 삐걱 거리던 회사 분위기도 안정을 찾아가는 느낌이다. 정세영 회장이 차분하고 조직적으로 경영을 해왔다고 하면, MK는 한마디로 파격적이고 통 큰 스타일로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지금도 현대차 직원들은 정세영 회장에 대해서는 비교적 좋은 기억들을 갖고 있다. 정세영 회장은 검소하게 생활했으나 세상물정을 모를 정도로 다소 인색한 면이 없지 않았다고 기억한다.그러나 MK는 정세영 회장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화통하다. 정세영 회장 때는 사무실마다 있던 컬러프린터를 모두 없앴다. 그러나 MK가 들어서며 다시 컬러프린터기가 사무실마다 등장했다. 정몽구 회장의 경영 스타일은 오히려 간단하고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 MK는 취임 이듬해인 2000년 말 현대차 전 직원(약 4만명)에게 1인당 모두 1백만원의 특별 보너스를 지급했다. 단체협약에 명시된 것도 아니고, 그냥 준 것이다. 참모진이 특별 보너스 지급에 반대하자 정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노조가 한달 파업하면 1조원 이상 손해를 본다. 여기에 비하면 4백억원은 크지 않은 금액이다. 노사 평화를 유지하면 종업원들이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다.” 정회장은 사무실보다 현장을 좋아한다. 해외 출장이 없는 동안에는 어김없이 공장을 찾는다.이때 생산성을 높이거나 기술혁신을 이뤄낸 직원들을 직접 불러, 격려금을 주는 것도 특이하다. 공식적인 상금 외에 비공식적인 두툼한 봉투를 준다. 이 봉투를 한 번이라도 열어본 직원이라면 전임 정세영 회장 때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액수에 입이 떡 벌어진다고 한다. MK는 취임 후 직원들 월급도 상당히 올려주었고, 공식·비공식 포상금도 파격적으로 늘렸다. 노력하면 반드시 보상을 해준다는 원칙이기도 하다. 정회장의 인사 스타일은 독특하다. 그는 회장 취임 초기 기아자동차 아산공장의 임원들과 가진 저녁 술자리에서 술 취한 한 임원이 정회장 바로 앞자리에 앉아 도에 지나친 ‘아부’를 하자 다음날로 그 임원을 파면시켰다. 한 임원은 회장에게 ‘거짓 보고’를 한 것이 들통나 곧바로 좌천됐다. 조직의 ‘최고 보스’로 자처하는 정회장의 강한 성격 때문에 참모들은 정회장을 매우 어려워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글로벌 작업 진두지휘 최근 정회장의 행보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글로벌화 작업이다. 정회장은 지난 2000년 다임러크라이슬러와의 전략적 제휴를 맺은 이후 터키·우즈베키스탄·멕시코 등으로의 진출을 가속화 시켰다. 또한 지난해 미국·일본·중국 3개국을 집중공략하듯 각국을 세 차례나 방문했다. 중국에선 3대 자동차집단인 둥펑자동차집단과의 자본제휴로 승용차사업에 본격 뛰어드는 개가를 올렸다. 이는 고 정주영 회장 때부터 추진해 왔던 것이어서 의미가 각별하다. 또 최근에는 미 앨라바마 주에 현지공장을 짓기로 최종 결정했다. MK는 현대·기아차그룹을 세계 5위권 자동차기업으로 올려놓기 위해 해외에 1백만대 규모의 생산설비 확충하는 모험에 나섰다. 그는 요즘 또 2010년 세계박람회 유치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지난 99년 유치위원장을 맡은 후 129차,130차 세계박람회기구(BIE)총회 참석을 비롯해 유럽·아시아·미주지역의 10개국 이상을 순방했다. 세계박람회는 월드컵·올림픽과 함께 세계 3대 축제로 꼽힌다. 이 3개 행사를 모두 개최한 나라는 전세계에서 영국·독일·스페인·미국·일본 등 5개국에 불과하다. 그만큼 대형 행사를 주최하기 위해서는 정치·경제적 여건과 함께 경험과 노하우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정회장이 세계박람회에 유달리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는 고 정주영 회장이 올림픽 유치에 공헌했고, 동생인 정몽준 의원이 월드컵을 유치한 데 이어 자신이 세계박람회를 유치할 경우 세계 3대 축제를 모두 정씨 일가에서 유치하는 전무후무한 업적이 되기 때문이다. MK는 식성이 좋지만 개고기는 전혀 먹지 않는다. 주말이면 골프 대신 등산을 즐긴다. 가족들을 현대차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즐기는 것도 그의 취미다. 경복고 시절 그는 럭비선수로 활약했었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몽골고원의 영웅 ‘징기스칸’이다. 현대차가 징기스칸처럼 세계 대륙을 석권하는 그의 꿈이 이루어질지 궁금하다.

2002.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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