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연결' 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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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대한민국을 적대국가로 규정한 내용을 담아 헌법을 개정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12월 주장한 남북 간 '적대적 두 국가론'을 법적으로도 반영한 셈이다.조선중앙통신은 17일 이틀 전 있었던 경의선·동해선 남북연결 도로·철도 폭파 소식을 전하며 "이는 대한민국을 철저한 적대국가로 규제한 공화국헌법의 요구와 적대세력들의 엄중한 정치군사적 도발책동으로 말미암아 예측불능의 전쟁접경에로 치닫고 있는 심각한 안보환경으로부터 출발한 필연적이며 합법적인 조치"라고 밝혔다. 앞서 북한은 이달 7∼8일 최고인민회의를 열어 헌법을 개정했는데, 여기에 대한민국을 철저한 적대국가로 규제했단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다만 남북관계 및 통일 등에 관한 조항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구체적으로는 공개하지 않았다. 앞서 김 위원장은 헌법을 개정해 통일 표현을 삭제하고 영토 조항을 신설하라는 지시를 연초에 내리면서 한국을 '제1의 적대국', '불변의 주적'으로 교육한다는 내용도 반영할 것을 주문한 바 있다.통신은 인민군 총참모부가 지난 15일 "남부 국경의 동서부 지역에서 한국과 연결된 우리측 구간의 도로와 철길을 물리적으로 완전히 끊어버리는 조치를 취했다"고도 보도했다.통신은 이번 조치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명령에 따른 것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행사 영역과 대한민국의 영토를 철저히 분리시키기 위한 단계별 실행의 일환"이었다고 강조했다.
2024.10.17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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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북한이 경의선과 동해선 도로 폭파를 준비하는 정황이 우리 군 감시장비에 포착됐다.15일 군의 한 소식통은 "북한군은 총참모부 담화 발표 이후 경의선 및 동해선 일대에서 남북 연결도로 폭파를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활동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이 소식통은 "우리 군은 북한군의 이러한 활동을 예의주시하고 있으며, 우리 장병과 국민의 안전보호조치를 강구하는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앞서 북한군 총참모부는 지난 9일 보도문을 통해 "9일부터 대한민국과 연결된 우리 측 지역의 도로와 철길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견고한 방어축성물로 요새화하는 공사를 진행되게 된다"라고 발표했다.북한은 같은 날 유엔사-북한군 통신선을 통해 보낸 통지문에서 "우리 측은 10월 9일부터 남쪽 국경선 일대에 우리 측 지역에서 대한민국과 연결됐던 동·서부의 도로와 철길을 완전히 끊어버리기 위한 공사를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우리 군이 이번에 포착한 북한의 활동은 경의선과 동해선 도로를 완전히 끊고 요새화 공사를 하려는 작업으로 보인다.북한은 지난해 12월부터 남북을 잇는 도로 주변에 지뢰를 매설하거나 가로등, 철로 제거 등 육로 단절을 진행해 왔다. 지난 4월부터는 비무장지대에 대전차 장애물로 추정되는 방벽을 설치하고 지뢰 매설, 철조망 설치 등을 진행하고 있다.김명수 합참의장은 지난 10일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북한의 남북 육로 차단 작업 관련 사진을 공개하면서 "현재 경의선과 동해선은 완전 철거되고 허허벌판"이라며 "대전차 방벽과 유사한 형태로 10여 곳에서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라고 언급했다.
2024.10.15 08:00
1분 소요민통선 여섯 번째 기행은 고성으로 가는 길이다. 이제까지 갔던 여행 중 가장 먼 길이다. 마지막으로 파주 지역을 남겨놓긴 했지만, 강화에서 시작한 여행은 어느새 우리를 동해 바닷가 고성에 다다르게 했다. 해금강 지나 금강산으로 717OP에서 건너다 보이는 해금강의 풍광이다.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낯설고 기묘한 봉우리들이 보는 이의 눈을 놀라게 한다. ⓒ조우혜 고성으로 떠날 준비를 하면서 새삼 서쪽에서 동쪽으로 휴전선을 따라온 여정을 돌아보게 됐다. 휴전선과 비무장지대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고, 지역에 따라 서울에서 반복해 찾아간 셈이었다. 자유로를 타기도 했고, 3번 국도와 43번 국도를 이용하기도 했고, 경춘고속도로를 달리기도 했다.길이란 근대의 상징이다. 근대 이전에도 길은 물론 있었다. 하지만 신작로가 열린 이후 길은 근대 문명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길을 통해 인간과 상품과 문명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여행을 떠나기 전 길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늘어놓는 것은 이번 기행이 비무장지대와 민통선을 새롭게 발견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길의 의미도 다시 발견하게 했기 때문이다.진부령을 넘어 고성으로길이란 인간과 문명을 실어 나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삶이 진행되는 그 자체이기도 하다. 계획한 경로를 조금씩 이탈하면서 삶은 돌연 다른 길 위에 서 있기도 하고, 그 길 위에서 뜻밖의 동행들을 만나게 되는 행운을 누리기도 한다. 필자에게는 이번 민통선 기행이 그랬다. 여행을 더하면서 비무장지대 탐방이라는 본래의 목표 이외에 많은 다른 것을 생각해 보게 됐을 뿐만 아니라, 좋은 선후배들을 만날 수 있었다. 몇 번의 여행을 통해 어느새 우리는 서로의 취향과 어법을 어느 정도 눈치 채기 시작했고, 이제는 얼굴만 봐도 제법 정겨운 사이가 됐다.고성으로 가기 위해 이른 새벽에 경춘고속도로에 올랐다.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다시 44번 국도를 이용해 홍천과 인제로 내달렸다. 원통에서 아침을 먹은 후 단숨에 진부령에 올랐다. 진부령은 태백산맥 향로봉과 마산봉 사이에 있는 고갯길이다. 금강산, 향로봉, 설악산으로 이어지는 여기 태백산맥 준령은 백두대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금강산과 설악산이 그러하거니와 향로봉 또한 마찬가지다. 최근 백두대간 종주의 출발점을 이루기도 하는 이 향로봉 북쪽에는 휴전선이 지나고 있다. 이 산을 따라 이어지는 고진동 계곡, 진부령 계곡 등은 특히 가을 단풍으로 그 이름이 높을 뿐만 아니라, 건봉산으로 이어지는 계곡 안에는 고찰 건봉사가 있기도 하다.해발 529m의 진부령은 태백산맥에서 그렇게 높은 고개가 아니다. 하지만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멀리 동해가 훤히 보인다. 한계령, 대관령과 마찬가지로 진부령에서 동해안 바닷가로 내려가는 길은 말 그대로 구곡양장(九曲羊腸)을 이루고 있다. 끝없이 굽이치며 내려가면서 지켜보는 태백산맥의 풍광은 더없이 아름다웠다.하지만 여기 진부령 지역 역시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그 흔적의 하나가 진부령 정상에 있는 향로봉지구 전적기념비다. 이 비는 1951년 봄과 여름에 설악산과 향로봉 지구 전투에서 이 지역을 지킨 젊은 무명용사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전방 지역 어디를 가도 전쟁의 흔적은 이렇게 남아 있다. 동해와 어머니의 추억 1. 금강산 구경은 언제나 고성에서는 금강산이 남의 땅, 남의 동네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아직 금강산 가는 길은 다시 열리지 않았고, 고성은 이 때문에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고 있다. ⓒ조우혜 2. 민통선 안쪽으로 가는 길 대부분의 지역에서 민통선은 좁은 길의 끝에 세워진 초소로 확인된다. 하지만 동해안 7번 국도의 끝에 있는 민통선은 대형 아치를 방불케 한다. 끊어진 것도 아니요, 이어진 것도 아닌 길이 7번 국도다. ⓒ조우혜 진부령을 다 내려와 바닷가에 닿자 이내 거진항이 눈에 들어왔다. 화진포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화진포 해수욕장은 강릉 경포대 해수욕장, 양양 낙산 해수욕장과 함께 동해안을 대표하는 해수욕장 중 하나다. 바다와 연이어 있는 호수도 장관이지만 울창한 송림 앞에 펼쳐진 백사장과 푸른 동해는 언제 봐도 시원함을 안겨준다. 동해의 풍광은 서해 또는 남해의 풍광과 사뭇 다르다. 서해의 풍경에는 수평선 위에 크고 작은 섬들이 아기자기하게 떠 있다면, 동해의 풍경에는 짙고 푸른 물결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언제부턴가 동해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가 있다. 가수이자 시인인 하덕규다. 그는 ‘한계령’ ‘사랑일기’ 등을 만들고 부르기도 한 동시에 시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부른 ‘내 고향 동해바다’를 특히 좋아해 젊은 시절 무한 반복해 들은 적도 있었다. “내 고향 바다에는 고기도 많지 / 아주 예쁜 물고기 / 내 고향 바닷물은 깊기도 하지 / 너무너무 파랗지 / … / 내 고향 바닷물은 눈물이지 / 내 어머니 눈물이지 / 철없이 어린 아들 떠나보낸 / 슬픈 눈물이지 / 언제나 돌아갈까 내 고향 / 언제나 찾아가나 내 고향 동해바다.” 이 곡의 백미는 단연 푸른 동해 바닷물이 어머니의 눈물이라는 비유다. 많은 이가 그러하듯 나 역시 10대와 20대 초반 어머니에게 적잖이 반항했던 것 같다. 반항이라기보다 무관심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정작 20대 중반에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어머니의 존재와 사랑을 새삼 깨닫게 됐다. 하덕규 노래의 멜로디를 마음속으로 따라가면서 7번 국도를 쫓아 올라갔다. 대진항을 지나고 통일전망대를 옆에 둔 채 산길로 들어가 717관측소(OP)를 향했다. 몇 달 전 첫 취재여정에서 김포 애기봉 전망대에 오를 때 동행한 플래닛미디어 김세영 사장은 비무장지대 인근의 전망대 중 가장 인상적인 곳은 아마도 양구 가칠봉 전망대와 고성 금강산 전망대일 거라고 했다. 당시에는 그리 주의 깊게 듣지 않았지만, 지난번 양구 가칠봉 전망대에 올라섰을 때 새삼 김 사장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유엔사령부 관할에 있는 717관측소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직하게 말하면, 717관측소는 이곳에 대한 나의 막연한 상상을 뛰어넘었다. 금강산 전망대라고도 불리는 이 관측소에서 바라본 풍경은 이제까지 본 풍경들을 단숨에 압도했다. 왼편으로 멀리 놓여 있다는 비로봉을 포함한 금강산 연봉들은 안타깝게도 날씨가 흐려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정면과 오른편에 펼쳐진 해금강의 풍경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리 높지 않은 암산들이 줄지어 있고, 나무꾼과 선녀 전설이 깃들어 있다는 호수 감호와 해안가에 우뚝 솟은 구선봉을 마지막으로 산줄기가 바다에 잠기면서 금강산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수려한 풍광을 있는 그대로 펼쳐 보이고 있었다. 구선봉과 감호 717OP에서 본 구선봉과 감호의 모습이다. 선녀와 나무꾼 전설이 어린 호수로 멀리서 보기에도 이 일대의 경관은 장관이다. ⓒ조우혜 717관측소에서 본 금강산저 구선봉 너머에는 관동팔경의 하나인 삼일포가 있고, 고성군의 주요 도시인 ‘고성’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해안선을 따라 올라가면 저 멀리 원산과 흥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그 마지막 자락이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금강산을 여기 717관측소에 와서야 나는 제대로 보게 된 셈이다.금강산의 이름은 여럿이다. 봄에는 금강산(金剛山), 여름에는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풍악산(楓岳山), 겨울에는 개골산(豈骨山)으로 불린다. 계절이 여름인지라 봉래산이란 이름으로 불릴 수 있겠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해금강의 모습은 잎이 모두 떨어져 바위가 그대로 드러난, 골격이 그대로 보이는 개골산의 이미지였다.금강산에는 우리의 많은 역사가 깃들어 있다. 수많은 이가 금강산을 찾아갔으며 시, 그림, 그리고 기행문을 남겼다. 조선 시대 겸재 정선과 김홍도의 작품은 물론 지난 20세기 소정 변관식이 그린 금강산 풍경들을 보면 왜 금강산이 해동의 명산으로 불리었는가를 일깨워준다. 이 산에는 금강의 화려함, 봉래의 신비함, 풍악의 아름다움, 그리고 개골의 신선함이 모두 담겨 있다. 개인적으로 금강산 하면 우선 떠오르는 인물은 율곡 이이다. 지식사회학을 부전공으로 하는 필자에게 우리 역사상 가장 문제적인 지식인을 들라면 나는 서슴없이 이이를 가장 앞자리에 놓는다. 삼국 시대에 원효가 있었고, 고려 시대에 지눌도 있었고, 조선 시대에는 퇴계 이황과 다산 정약용도 있었지만, 지식인과 정치가로서의 이이의 영향력은 결코 이들 못지않았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어머니 신사임당이 돌아가자 이이는 삶의 무상함을 느껴 금강산으로 출가했다고 한다. 그리 오래 머무르지 않고 바로 속세로 돌아온 그는 과거시험을 보고 관리이자 학자의 길을 걷는다. 이황과 함께 주자학의 쌍벽을 이뤘고, 사계 김장생과 우암 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를 열었던 이이에게 출가는 매우 이례적인 삶의 경험이었다. 이러한 그의 행적은 서인과 노론으로 이어진 그의 제자들에게 적잖이 곤혹스러운 경력이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의 인간적인 풍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이이의 철학인 이기일원론은 주자학의 토착화를 모색한 사상이었다. 또한 그는 현실 정치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해 사회개혁과 통합을 모색했으며,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으나 이른바 십만양병설을 제시하는 등 부국강병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금강산과 율곡 이이 1. 신종플루 비상 군 부대도 신종플루에 바짝 긴장했다. 취재진이 고성에 가던 날부터 모든 부대 출입 인원을 대상으로 감염 여부 확인을 위한 체온검사가 실시되기 시작했다. ⓒ조우혜 2. 717OP에서 이번 취재와 연재를 맡은 3명의 필진. 왼쪽부터 김호기, 강석훈, 김환기. 봄부터 시작된 이번 특별취재도 여름의 끝자락에 이르러 막바지에 도달했다. ⓒ조우혜 그가 남긴 책들 가운데 나는 특히 『석담일기』를 좋아한다. 당대의 현실과 사상, 그리고 동시대 인물들에 대한 엄정한 평가를 담고 있는 이 일기는 조선 시대라는 시간적 구속을 넘어 국가와 사회, 이론과 현실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일깨워준다. 그래서 마음이 답답하거나 울적할 때면 이 책을 서가에서 꺼내 읽어 보곤 한다.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이이가 내게 던진 질문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애국주의 문제였다. 사회학적으로 애국주의 또는 민족주의는 전쟁 및 국민국가의 형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사회학자 찰스 틸리가 강조했듯이, 전쟁을 준비하고 대비하는 과정은 국민국가 건설의 핵심적 문제들인 물리적 강제력의 축적과 독점, 자원추출 능력의 신장, 권력의 정당성 제고, 영토의 확정, 국민 개념의 성장, 중앙집권화, 국가조직의 공식적 자율성 확보 등에 크게 기여했다. 애국주의는 바로 이런 전쟁과 국민국가의 형성과 궤를 같이하는바, 국민국가 구성원들에게 문화적 동질성을 부여한다. 우리 역사를 돌아봐도 애국주의와 민족주의 형성에 적잖이 기여한 것은 거시적으로 보면 고려 시대 대몽항쟁과 조선 시대 임진왜란, 그리고 일제 식민지 시대 독립운동이었을 것이다. 이이는 바로 십만양병설 같은 전략을 통해 다른 국가의 침략을 대비하고자 했으며, 각종 부국강병 정책을 통해 조선사회의 개혁을 모색했다. 오늘날과 같은 세계화 시대에도 애국주의는 여전히 뜨거운 쟁점을 이룬다. 인간이 태어나서 교육을 통해 자연스럽게 내면화하는 것 중 하나는 자신이 속한 나라에 대한 사랑, 다시 말해 애국주의다. 나라를 세운 이야기를 듣고, 민족의 역사를 배우며, 국기(國旗)와 국가(國歌) 등 나라를 상징하는 것들을 학습하게 된다. 민통선에서 생각하는 애국주의 대다수 사람에게 나라의 이름은 결코 단순한 호칭이 아니다. 예를 들어 2002년 월드컵에서 전국에 메아리 친 ‘대~한민국’에는 언어로 전달하기 어려운 나라에 대한 사랑이 고도로 응축돼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애국주의를 과연 어떻게 봐야 할까. 애국주의는 이른바 세계시민주의와 조화할 수 있을까. 그것이 조화하지 못한다면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까. 애국주의는 우리나라만의 이슈가 아니다. 미국에서도 1990년대 초반 애국주의를 둘러싸고 일대 토론이 있었다. MIT대 철학·정치학 교수인 조슈아 코언이 편집한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For Love of Country)』(우리말로는 2003년에 옮겨졌음)은 바로 이 애국주의를 정공법으로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원래 1994년 잡지 ‘보스턴 리뷰’의 애국주의 논쟁에 참여한 11편의 글에 새롭게 쓰인 5편을 덧붙인 것이다. 오늘날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인문학자·사회과학자가 대거 참여한 이 논쟁은 점증하는 세계화 속에서 애국주의의 위상을 다각도로 검토하고 있다. 논쟁의 출발은 시카고대 법학·윤리학 교수인 마사 너스봄이 주창한 세계시민주의다. 그녀에 따르면 우리에게 가장 고귀한 충성의 대상은 인류 공동체며, 우리의 실천적 사고의 제1원칙은 인류 공동체 모든 구성원의 가치를 동등하게 존중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애국주의는 결국 대외 강경주의나 배타적 국가주의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 대신 세계시민주의가 우리 삶의 일차적인 가치 기준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게 그녀의 주장이다. 너스봄의 문제 제기에 대한 대응은 애국주의를 지지하고 세계시민주의를 비판하는 입장, 세계시민주의를 제한적으로 지지하는 입장, 애국주의 대 세계시민주의를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지 않는 입장 등 세 흐름으로 나뉘었다. 애국주의 문제가 결코 간단치 않은 것은 너스봄이 말하는 세계시민주의가 실체 없는 현실적 추상이나 보증할 수 없는 낙관주의에 가까운 것이라는 반론 또한 만만치 않았다는 점이다. 세계화가 강제하는 국민국가 간의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를 고려할 때 특히 비서구사회에서는 민족주의 또는 애국주의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한 걸음 물러서 생각할 때, 세계화 시대에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 가운데 어느 하나를 지지할 게 아니라 새로운 시각과 생산적 절충이 필요할 것이다. 나라를 무조건 사랑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게 새삼 중요한 과제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측소에서 오른편 아래쪽을 굽어보니 동해선 남북연결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2004년 12월 개통된 이 도로를 통해 금강산 육로관광이 이뤄진다고 한다. 문득 지난번 성재산 관측소에서 굽어본 5번 국도가 떠올랐다. 5번 국도는 막혀 있지만, 7번 국도는 저렇게 이어져 있다. 끊어진 5번 국도 역시 저렇게 7번 국도처럼 다시 이어지게 되면 통일은 그만큼 가까워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717관측소에서 내려와 통일전망대로 향했다. 1984년 문을 연 이 통일전망대는 일반 국민이 쉽게 금강산과 해금강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다. 전망대에 올라서니 북쪽으로 해금강이 선명히 그리고 수려하게 펼쳐 있었다. 금강산 건봉사 우리나라 4대 가람 중 하나이자 호국의 성지였던 건봉사에서는 지금도 매월 넷째 주 일요일마다 6·25전사자 및 호국영령들을 위한 위령제가 봉행된다. ⓒ김환기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금강산여름방학인 탓인지 아이들과 함께 구경 온 가족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전망대에 오르고 내리면서 표정을 지켜보니 나이 든 이들은 감회가 깊은 듯하고, 젊은 세대들은 신기해 하며, 아이들은 즐거워하는 듯했다. 한국전쟁의 비극과 분단현실에 대해 세대에 따라 서로 다른 생각들이 표정이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했다.비록 한국전쟁을 체험하지 못했지만, 동행한 우리들의 마음은 젊은 세대보다 오히려 나이든 세대에 가까운 듯했다. 민통선 기행에서 한두 번 본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북녘 산하의 풍경은 언제나 복합적인 감정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전망대에 있는 식당에서 간단히 점심을 한 다음 고진동 계곡으로 가기 위해 건봉사에 가까운 군부대를 찾아가기로 했다. 아침부터 흐린 날씨는 어느새 비를 뿌리고 있었다. 다시 거진항을 거쳐 건봉사 입구까지 왔을 때 빗줄기는 이미 굵어져 있었다. 동행한 이들은 지프로 갈아타 고진동 계곡으로 향하고, 나는 다른 약속 때문에 서울로 돌아와야 했기에 간성으로 향해야 했다. 강석훈 교수가 먼저 돌아가는 내게 아쉬움을 표했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몇 번의 민통선 기행에서 강 교수는 언제나 함께 있었다. 나이 들어 만난 탓인지 서로 나누는 이야기는 제법 점잖았지만, 정은 이미 상당히 들어 있었다. 예기찮은 길 위에서 만난 따듯한 벗이었다. 간성 버스정류장에서 서울로 오는 고속버스를 탔다. 진부령을 넘고 원통을 지나 소양강 부근의 한 휴게소에 잠시 버스가 멈췄다. 커피를 마시면서 쉬고 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소양강 처녀’가 흘러나왔다. 소양강 인근에서 듣는 ‘소양강 처녀’는 남달랐다. 순간 이 노래를 가끔 부르시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두견새와 동백꽃이었다. 산새인 두견새는 호수에 없고 추운 소양강변에는 동백꽃도 피지 않기 때문이다.‘소양강 처녀’를 들으며 1. 긴장 혹은 호기심 최전방 비무장지대 근처에서는 멧돼지가 도처에서 발견된다. 천적이 없는 멧돼지는 인근의 농가에 피해를 준다. ⓒ조우혜 2. 통일전망대 이날 통일전망대에는 유난히 많은 사람이 몰렸다. 통일전망대는 최북단 전망대이자 해금강의 풍광을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관광 전망대다. ⓒ조우혜 하지만 어떠랴. 반야월이 쓴 가사가 다소 어설프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노래를 부르시던 그리운 어머니의 모습과 목소리가 지워지지 않는 도장의 붉은 인주처럼 내 기억 속에 선명히 그리고 소중히 남아 있다. 어머니가 부르시던 ‘소양강 처녀’의 멜로디에 어머니를 여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던 이이, 고향 바닷물이 어머니의 눈물임을 깨닫는 하덕규의 모습이 겹쳐졌다. 다시 어머니의 모습에 이 땅 산하의 풍경이 중첩되고, 그 위에 지난 몇 개월간 찾아다녔던 민통선과 비무장지대 풍경이 겹쳐지고 있었다. 이 땅의 산하를 사랑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44번 국도의 한 작은 휴게소에서 나는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애국주의와 만나고 있었다. 호두과자와 콜라를 사서 버스에 올랐다. 이내 소양강 끝자락이 보였다. 푸른 물결, 더없이 짙은 녹음, 창을 두들기는 빗줄기, 덜컹거리는 버스 소리,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바로 자기 자리에서 존재의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존재의 위용은 내게 존재에의 사랑을 일깨우고 있었다. 두고 온 이들이 떠올랐다. 강석훈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이코노미스트 허의도 대표에게 여기 홍천에는 비가 제법 온다는, 서울로 먼저 돌아가게 돼서 미안하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곳 고진동 계곡에도 비가 많이 온다는, 하룻밤을 같이 보내지 못해 아쉽다는 답신이 이내 돌아왔다. 창을 두들기는 빗줄기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고성 취재 여행을 안내해 주신 22사단 신지운 중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09.08.31 15:08
11분 소요김윤규 전 현대아산 부회장의 대북사업은 ㈜아천글로벌코퍼레이션(이하 아천)을 통해 본격화하고 있다. 김 회장은 지난해 8월 23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H빌딩에 이 회사를 설립하고 대북사업을 구체적으로 준비해 왔다. 아천 관계자는 “최근 북한의 농산물, 수산물, 약재, 산채류, 식료가공품 등 각종 상품을 동해와 서해 지역의 남북연결도로를 통해 교역하고 이를 위해 개성과 고성 지역에 양측이 공동으로 농수산물 유통센터를 건설해 운영하기로 북한과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미 지난 6월 21일 북에서 양식한 철갑상어가 동해 쪽 육로를 통해 시범적으로 남측에 반입됐고, 7월 19일 본격적으로 북한 각지에서 생산된 고사리를 비롯한 농토산물이 개성을 통해 육로로 반입됐다. 아천은 이번 교역을 시작으로 그동안 배로, 혹은 중국을 통해 교역하는 데 따른 불편과 타국을 우회해 남북교역이 이뤄지는 불편을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아천의 육로 수송은 개성이나 금강산 너머 북측 전 지역의 농수산물 및 가공품을 상업적 유통 목적으로 남쪽으로 가져오는 것이므로 남북 교역사에 새로운 획을 긋는 특별한 의미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현대아산 측은 남북 간 육로 교역이 최초라는 아천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현대아산 관계자는 “개성공단 외곽의 사천강 모래가 CS글로벌이라는 회사를 통해 이미 오래전부터 하루 두 차례 육로로 남측으로 들어오고 있는데 무슨 첫 육로 사업이냐”고 반문했다. 지난해 9월 남북 첫 합영회사를 만든 태림산업도 마찬가지 입장이다. 태림산업 관계자는 “이미 태림이 평안남도 남포에서 캐낸 돌을 육로를 통해 들여오고 있는데 어떻게 아천이 최초의 육로 교역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아천 측은 “일부에서 소규모로 육로 교역이 있었지만 본격적인 육로 교역은 아천이 처음 시작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김윤규가 구상 중인 남북교역 사업 ▶ 개성 · 고성에 대규모 유통 및 집하장 건설해 육로교역 시스템화 ▶ 해외건설 시장에 북한 인력 파견 및 건설 공사 진출 ▶ 북한 동해안 지역에서 모래 채취해 남측에 공급 ▶ 국내 건설사업 기반 구축 및 해외 진출 “북측 인력 수출로 식량난 해결” 김윤규 회장은 “이번 육로 교역을 시작으로 개성과 고성의 육로를 통한 물자교역이 정기적이고 본격적으로 진행될 것”이라며 “조만간 개성과 고성 지역에 대규모 농수산물 유통센터를 건설해 남북교역이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농수산물 유통은 아천이 구상 중인 대북사업 중 아주 작은 부분이다. 아천은 이 사업 외에도 다양한 국내외 사업 및 남북경협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곧 모든 사업이 가시화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중 주목되는 것은 중동지역 등 제3국 건설시장에 북한 기능 인력을 파견하는 사업이다. 김 회장은 “한 사람이 500달러씩 번다고 가정할 때 1만 명만 가도 한 달에 500만 달러를 버는 것”이라며 “현재 해외건설 시장은 기능 인력 부족현상을 겪고 있으며 이런 때 북의 경쟁력 있는 인력을 훈련시켜 내보내면 외화도 획득하고 북한의 식량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강조했다. 아천의 사업은 개인적 영달보다는 국가 이익을 위한 사업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 구상으로 아천은 올 10월부터 북한 인력 수백 명을 중동에 파견하고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수만 명까지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미 북한과 모든 합의가 끝났다는 게 아천 측의 설명이다. 김 회장은 남북 합영건설회사 설립에 대한 입장도 밝혔다. 경쟁력 있는 북측 기능 인력과 남측의 해외건설공사 기술 및 경험을 합하는 합영건설회사를 설립해 대규모 건설공사를 직접 수주하겠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아천은 이를 위해 현재 중견 건설회사를 인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중동의 허브라는 두바이에 7월 중 건설회사도 설립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회사는 북한 인력뿐 아니라 태국·인도네시아·베트남·필리핀 인력을 활용하고, 건설·유통 무역과 자문 등 다양한 사업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 7월 19일 북측에서 생산된 농토산물이 육로를 통해 남북출입사무소를 통과하고 있다. 아천이 건설업에 의욕을 보이는 것은 아천 직원들의 이력과 무관치 않다. 아천 직원 35명 중 80%에 해당하는 직원이 현대건설 출신이기 때문이다. 김 회장이 현대건설 출신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 듯하다. 현대아산 상무를 지냈던 육재희 대표와 김창기 본부장을 제외하면 대부분 현대건설 출신이다. 현대건설 전무 출신의 강용덕 부사장은 아천에서 해외건설과 영업을 담당하고 있으며, 현대건설 플랜트사업본부 상무를 지냈던 유기조 본부장은 아천에서 해외건설 및 인력담당으로 일하고 있다. 현재 아천이 중동에 건설회사를 세우는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것도 막강한 현대건설 출신 지원군단의 힘을 믿고 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자금 마련 위해 M&A도 추진 아천은 부산·울산·포항·진주·마산·창원·제주 등에 북한의 동해 모래를 채취해 공급하는 사업도 추진 중이다. 이를 위해 업체를 선정하고 북측 동해안 지역의 모래 샘플 채취 작업에 돌입했다. 이 밖에도 아천은 개성 중심부에 분양 받은 상업용지 400평에 업무용 빌딩을 건설해 사무실을 열 구상을 하고 있다. 애니메이션, 그래픽, 엔지니어링 사업도 이 사무실에서 북측과 함께 하는 것으로 합의 단계에 와 있다는 설명이다. 남북경협사업에 관심 있는 많은 기업의 대북사업을 그 동안의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지원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또한 중견 건설회사 인수를 통한 국내 건설사업 기반조성 및 북측과의 공동사업 추진, 유통회사 및 건자재 생산업체 공동 경영 등 다양한 사업기반을 구축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 회장이 이렇듯 다양한 대북사업을 의욕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것은 탄탄한 북측 인맥 덕분이다. 그는 정주영 명예회장 생전에 함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는 것 때문에 북측으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다. 김 회장은 “19일 개성에서 만난 북측 아태위원회 사람들이 김윤규 회장이 잘할 사람으로 믿겠다고 했다”며 “정주영 회장과 같이 사업했던 사람이란 인식 때문에 북측에서 아직까지 나에게 신뢰를 보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려면 사업 자금이 충분해야 한다. 김 회장은 7월 19일 기자에게 “필요하면 상장기업 인수 등으로 자금을 확보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사업의 폭을 넓혀 국내 건설과 자재, 제작 구매에서 반도체에 이르기까지 분야에 구애 받지 않고 다양한 종목의 기업을 인수할 계획이라는 설명이다. 이날 남북출입사무소에서 만난 일행 중 한 명은 기자에게 “오늘 저녁 하얏트호텔에서 열릴 만찬장에 이름이 거론된 후원사 중 아천이 인수하는 기업이 포함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귀띔을 했다. 실제 하얏트호텔 만찬장 앞에는 위디츠를 비롯해 ㈜샤인시스템, 동양토탈㈜, INDI system, 주식회사 이천종합식품 등 4개 후원사 이름이 적혀 있었다. 현대아산 측은 김 회장의 최근 대북사업 관련 행보에 대해 불편한 심정을 드러냈다. 현대아산 관계자의 말이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살아 계셨던 99년 이미 현대는 제3국 공사 현장에 인력을 보내겠다는 합의를 했다. 당시 김윤규 회장은 아산의 사장으로 있었다. 아산의 대표이사로 있으면서 북측과 합의하고 추진한 것을 회사를 나가 개인 사업에 이용한다는 것은 도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통일부 역시 아천의 대북사업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구체화된 게 없다는 입장이다. 통일부 관계자는 “해외에 건설사를 설립하는 것은 그 나라의 규제를 받기 때문에 상관없지만 남북 합영회사 설립 등은 반드시 우리 법의 규제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세부 절차가 필요하다. 대북사업이라는 것이 북측과 합의만 한다고 쉽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김윤규표 대북사업’이 결실을 보기 위해선 북측과의 합의 못지않게 국내에서의 설득 작업도 큰 과제로 남아 있다.
2007.07.23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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