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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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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 고수의 공통점…‘그들만의 단어’가 있다 [서광원 인간과 조직 사이]

전문가 칼럼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판매하는 게 영업이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게 하는 것이니 결코 쉽지 않은데 유난히 잘 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청산유수처럼 말을 잘하면 될까? 가끔씩 ‘00 판매왕’ 같은 이들을 만났지만 달변이라 할 만한 사람은 없다시피 했다. ‘판매왕이 맞나?’ 싶은 이들도 있었을 정도다. 달변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궁금한 마음에 지금도 이런 이들을 만나면 주의 깊게 지켜본다. 그동안 알게 된 것 중의 하나는, 이들은 달변이라기보다 내용(메시지) 전달에 능하다는 것이다. 이해하기 쉬운 말을 쓰고 상품의 장점이나 기능을 너무 강하게 어필하지 않는다.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다. 아마 이 정도는 누구나 느낄 것이다. 이들의 진짜 비결은 얼른 알아채기 어려운 디테일에 있지 않나 싶다. 언젠가 백화점에서 20년 넘게 근무했다는 사람의 설명을 듣다 뭔가 다르다는 걸 느꼈다. 그녀는 “고객님의”라는 소유격과 함께 듣는 사람이 어떤 이미지나 장면을 연상할 수 있는 표현을 썼다. 예를 들어 탁자를 사려고 하면 “아, 고객님의 거실에 놓으면 상당히 품위 있을 것 같네요? 그렇죠?”라고 하고, 자녀에게 줄 물건을 고르면 “사모님의 자녀분들이 밝아 보일 것 같네요”라고 말했다. 별 차이 없는 것 같지만, 이런 표현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미 내 것이 된 듯 한 느낌을 준다. ‘그래 그럴 것 같네’'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살며시 물어봤더니 알 만한 사람은 아는 것이라고 했다. 몇 년 전 에어컨을 사러 갔을 때 만난 고수도 그랬다. 설명을 듣는데 아내와 나에게 하는 말이 달랐다. 아내에게는 주로 얼마나 건강에 좋고 아이들에게도 좋은지를 말했고 나에게는 성능을 강조했다. 예를 들어 “더울 때 강풍을 틀면 곧바로 북극 찬바람 같은 냉풍이 나온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유를 물었더니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여자와 남자는 성향이 다르고 그래서 우선순위가 다르니 거기에 맞춰야죠.” 역시 전문가는 다르구나 싶었다. 그날 우리가 “건강에도 좋고 ‘북극 찬바람’이 나오는” 에어컨을 산 건 물론이었다. ━ 사무실에서 발휘하는 성향 맞춤형 대화 이런 고수들은 사무실에도 있다. 능력을 팔 때도 ‘영업 감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결재 받을 때가 그렇다. 며칠 밤을 새우고도 ‘한 쾌에’ 결재를 받지 못해 땅이 꺼져라 한숨 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수많은 노하우들이 회사들마다 암암리에 공유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영업 고수’들은 앞의 사람들처럼 ‘그들’에게 맞춘다. 특히 그들의 언어와 그들의 일하는 방식으로 다가선다. 단순한 고객 맞춤이 아니라 고객 ‘성향’ 맞춤을 한다. 상사와 대화할 때나 보고할 때 상사의 ‘출신 성분’에 맞는 용어나 방식을 구사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재무 출신이면 숫자나 그쪽에서 많이 쓰는 용어들을, 엔지니어 출신이면 역시 그쪽에서 주로 쓰는 용어나 방식을 쓰는 것이다. ‘그럴까’ 싶은데 해보면 생각 이상으로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해진다. 물론 그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자연스럽게 해야 좋다. 누구나 입에 맞는 음식을 좋아하는 것처럼 자기에게 익숙한 걸 좋아한다.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게 표현 방식이다. 음식을 잘 하는 셰프들이 재료 선택에 심혈을 기울이듯 능력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 필자는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이다. 조직과 리더십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등이 있다. 서광원

2021.07.04 19:00

3분 소요
[서광원 인간과 조직 사이] 알고보면 ‘한끗 차이’…세종의 ‘악덕 리더십'

전문가 칼럼

우리가 잘 아는 얘기가 있다. 조선 세종 때 집현전 학사이던 신숙주가 밤 늦게까지 책을 읽다 잠이 들었다. 그런데 깨어 보니 이게 웬일인가? 임금이 입는 용포를 덮고 있는 게 아닌가. 임금의 옷을 입는다는 건 용서받을 수 없는 대역죄인데 말이다. 깜짝 놀라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그 사이에 세종이 다녀간 것이었다. 집현전을 돌아보던 세종이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신숙주를 발견하고는 안쓰러운 마음에 용포를 덮어주었다는, 신하를 어여삐 여기는 세종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흔히 이야기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정말 이뿐이었을까? 신하를 어여삐 여기는 마음 뿐이었겠는가 말이다. 조직심리학적 관점에서 이 일을 보면 다른 게 보일 수도 있다. 생각해보자. 이 이야기를 우리도 알고 있으니 다음날 집현전은 온통 화제 만발이었을 것이다. 당시 집현전 학사들이 누군가. 다들 전국에서 손꼽히는 인재들이 아니던가. 하나같이 청운의 꿈을 품고 궁궐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런데 신숙주가 밤 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성은(聖恩)을 입었으니 그는 임금의 머리에 분명하게 기억됐을 것이고, 당연히 미래도 따놓은 당상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날 이후 집현전의 밤은 어땠을까? 퇴근할 시간이라고 가벼운 마음으로 나서거나 잠을 자야 할 시간이라고 편히 잠을 자는 이가 있었을까? 임금이 밤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으며 가끔 집현전 ‘순찰’을 돈다는데? 기회는 깜빡 졸기 쉬운 새벽녘에 온다는데? 모르긴 몰라도 이날 이후 집현전의 밤은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을 것이다. ━ 탁월한 리더, 말보다 상황 만들어 알다시피 세종은 셋째 아들이라 원래 후계자가 아니었다. 무소불위의 아버지 태종이 밀어 올린 왕이었다. 당연히 초반에는 왕권이 강하지 못했다. 신진 학자들로 집현전을 만들고, 싱크탱크로 키운 것도 그래서였다. 요즘 식으로 하자면 재벌 3세 회장이 직할조직을 만든 것이다. 그러니 세종은 이 집현전을 통해 국정을 주도할 뭔가를 만들어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세종은 집현전이라는 조직을 어떻게 이끌어야 했을까? 왕명의 지엄함으로 “열심히 하라”고 수백 번 강조하면 되었을까, 아니면 이런 식으로 새벽녘에 나타나 조용히 용포 한 자락 덮어주고 가는 게 효과적이었을까? 말할 필요도 없이 후자였을 것이다. 세종은 성군이기도 했지만 그가 일을 추진하는 과정을 보면 일을 시키는 능력이 뛰어난 리더였다. ‘하라’고 하지 않고 ‘하게끔’ 하는, 탁월한 리더들이 갖춰야 할 덕목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니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할 만한 그 많은 일을 해냈을 것이다. 생각해보자. 야근하다 잠깐 잠들었는데 “야근하느라 집안 식구들 얼굴도 못 볼 텐데 맛있는 밥이나 사주라”면서 사장이 두툼한 봉투를 두고 갔다면 우리 마음은 어떨까? 예나 지금이나 탁월한 리더들은 말로 하기 보다 ‘어떤 상황’을 만들어 그 상황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끌어간다.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인간은 참으로 이상해서, 스스로 원하는 것이면 ‘죽도록’ 일하면서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일도 억지로 시키면 악덕이고 갑질이지만 스스로 마음을 동하게 해서 하게끔 하면 탁월한 리더십이 된다. 세종 같은 ‘악덕 리더십’, 어디 없을까? ※ 필자는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이다. 조직과 리더십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등이 있다.

2021.06.06 19:00

2분 소요
[서광원의 인간과 조직 사이 2] 나는 어떤 친구를 두고 있을까

전문가 칼럼

한 중학생이 있다. 이 학생이 나중에 비만이 될지 그렇지 않을지 알 수 있을까?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어림할 수는 있다. 이 학생이 어떤 일상 환경에서 살고 있는지, 특히 가까운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면 가늠할 수 있다. 단순한 추측이 아니다. 미국 하버드대의 사회학자 니컬러스 크리스태키스와 캘리포니아대의 정치학자 제임스 파울러가 미국 매사추세츠 주 프래밍험에 거주하는 1만2000명을 30년 넘게 연구한 결과다. 이들은 원래 어떤 요인이 심장 질환에 영향을 주는지를 알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는데 의외로 사회적 네트워크가 심장은 물론 우리의 삶 자체에 생각보다 훨씬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회적 네트워크란 살면서 자주 만나는 친구나 이웃 사람, 동료들 같은 연결망이다. 연구에 의하면 한 사람의 연결망 안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대단히 큰 영향을 주고받고 있었다. 영향을 끼치는 정도와 범위가 생각 이상으로 컸다. 한 사람의 행동이 바로 옆 사람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었다. 옆(1단계)의 옆 사람(2단계)은 물론 그 옆 사람(3단계)까지 영향을 미쳤다. 2단계와 3단계는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도 말이다. ━ 내가 행복하면 친구도 행복할 확률 15%↑ 예를 들어 배우자가 뚱뚱하면 상대 배우자의 비만 가능성은 37%나 증가한다. 유전자를 공유한 형제가 비만이라면 확률은 40%까지 올라가고, 비만인 친구가 있으면 57%에 이른다. 이건 일반적인 친구인 경우이고 아주 친한 친구라면 171%, 그러니까 대체로 비슷한 체형을 가지게 된다. 함께 사는 배우자나 같은 핏줄인 형제보다 친구의 영향이 훨씬 크다. 흡연도 비슷하다. 내 친구가 담배를 피우면 나의 흡연 가능성은 61%나 증가한다. 친구의 친구가 담배를 피우는 경우 29%의 영향을 받는다. 나의 친구가 그 친구에게서 영향을 받아, 다시 나에게 흡연을 전염시킨다.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 때문에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것이다. 길을 제대로 가려면 잘 가고 있는지 가끔 주변을 둘러보아야 하는 것처럼 휴대폰 연락처에 저장된 리스트를 때때로 점검해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면 만나는 사람을 선별해야 하듯, 그러지 않으면 결국 탈이 나듯 살아가는 일도 마찬가지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내가 행복하면, 이 행복은 나 혼자로 끝나지 않는다. 나의 행복은 친구의 행복 확률을 15%나 높인다. 친구의 친구는 10%, 친구의 친구의 친구도 5.6%나 된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그 사람을 알려면 친구를 보라’는 속담은 사실이었다. 친한 친구는 유유상종이어서 친해질 수도 있지만 친해지면서 유유상종이 되기도 한다. 이런 상호작용 때문이다. 두 연구자에 의하면 한 사람의 행동이 영향을 미치는 사람 수가 무려 1000명에 이른다. 자, 이 연구 결과를 감안하고 생각해보자. 만일 나에게 알코올 중독 증세가 나타난다면 가장 먼저 뭘 해야 할까? 병원에 가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술 친구에게서 멀어지는 게 중요하다. 그들과 어울리면서 술을 마시지 않기는 힘들다. “딱 한 잔만…”“오늘만”이라는 유혹이 사방에서 넘실거리는데 어떻게 넘어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생명체에게 환경은 생존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태초에 생명이 탄생하는 것 자체가 적합한 환경이 조성되었던 덕분이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환경이라고 하면 강과 숲 같은 물리적인 것들이나 눈에 보이는 것을 생각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환경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그러니까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라는 환경이다. 자연환경이 거시적인 환경이라면 주변 사람들은 미시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나쁜 환경에 살면 안 된다는 걸 안다. 왜 그런지도 안다. 원인과 결과가 눈에 명확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도 더러운 곳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향이 눈에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으면 경계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 환경은 과대평가하면서(바퀴벌레가 나온다고? 사람 살 만한 곳이 아니네!) 눈에 쉽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환경’, 특히 친구들이라는 환경은 과소평가한다(뭐 별 일 있겠어? 그럴 수도 있지). 프래밍험 연구는 이런 행동이 결코 좋지 않다는 걸 알려준다. 우리의 미래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의 영향을 훨씬 많이 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영향을 주고 받으니 실제적인 영향력은 이보다 더 클 것이다. ━ 직업군 간 행동 유형 유사해져 고등학교나 대학 때까지 조용해서 눈에 거의 띄지도 않던 사람이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확 바뀌는 일이 꽤 있다. 대체로 그가 날마다 만나는 회사 사람들이 하는 행동 유형과 비슷해진다. 자신의 환경에 적응하려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변하는 것이다. 공무원도 그 중 하나다. 뭐든 적극적이었던 사람이 이런 말을 습관적으로 하는 경우를 봤다. “공무원이 이 정도 했으면 잘 한 거죠!”“오늘 못 하면 내일 하죠 뭐.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잖아요.” 격한 업무일수록 이런 경향이 짙어진다. 형사나 검사가 되면 사람을 취조하듯 하고, 판사가 되면 뭐든 판단하려 한다. 변호사가 되면 작은 것도 걸고 넘어지는 경향이 있다. 만나는 사람이 바뀌면 그 사람이 바뀐다. 지금의 우리도 충분히 이런 결과일 수 있다. 그래서 말인데 하고자 하는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나의 사회적 연결망, 특히 친한 사람들 네트워크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프래밍험 연구가 말해주듯 내가 잘 나가고 있는게 순전히 나만 잘해서 그런 게 아니듯 내가 힘든 것도 내 탓만이 아닐 수 있다. 나도 모르는 주변의 무언가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우리는 일이 안되면 흔히 우리 자신(능력 탓)이나 물리적인 환경(자금 부족, 시장환경)을 탓한다. 분명 일리 있지만 우리도 모르게 우리를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누군가(가까운 사람)가 있을 수도 있다. 이들이 끼치는 어떤 영향이 우리의 능력이나 물리적인 환경과 만나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만들고 증폭시킬 수 있다. 길을 제대로 가려면 잘 가고 있는지 가끔 주변을 둘러보아야 하는 것처럼 휴대폰 연락처에 저장된 리스트를 때때로 점검해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면 만나는 사람을 선별해야 하듯, 그러지 않으면 결국 탈이 나듯 살아가는 일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존과 고든 자브나 형제가 라는 책에서 진짜 친구를 판별하는 세 가지 방법을 얘기하는데 음미해볼 만하다. 첫째, 만나서 얘기할 때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가, 아니면 내가 하는 말에도 관심을 보이는가? 전자라면 그는 나를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 해소 상대로 보는 것이다. 둘째, 서로 원해서 친구가 되었는가, 아니면 어떤 상황 때문에 친구가 되었는가? 후자라면 생각해 볼 일이다. 상황이 바뀌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마음이 아니라 이해관계로 만났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를 만나는 게 기다려지는가, 아니면 은근히 꺼리는 마음이 생기는가? 여기서도 역시 후자라면 재고해 보는 게 좋다. 이미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우리의 마음(직감)을 따라야 한다. 한 주식투자 전문가가 물었다. “주식투자를 할 때 가장 신경 써야 할 게 뭘까요?” 뭘까? 나는 기업 분석, 시장 파악 등을 말했다. 그는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게 하나 더 있다”고 했다. 친구였다. “특히 친한 친구나 옆 동료가 대박을 터트릴 때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왜 그럴까?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는 비교 본능이라는 게 있다. 친한 사람이 대박을 터트리면 우리 마음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이 마음이 우리도 모르게 가동된다. ‘나도 저 정도의 성과를 올려야 한다’는 마음이 압박감과 조급함을 만들고 이런 것들이 모이고 쌓여 하지 말아야 할 선택과 결정을 하게 한다. 투자가 아니라 ‘모 아니면 도’ 식의 도박을 향해 가게 한다. ━ 주식 투자할 때 ‘친구의 대박’ 조심해야 ‘친구가 부자 되는 게 가장 위험하다’는 투자 격언이 괜히 생겨난 게 아니다. 미국에서도 무탈하게 살고 싶으면 “대학 동창회에 가지 마라”고 한다. 다들 자기 과시하는 흐름에 휘말려 하지 않아야 할 행동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들 조심해야 할 ‘위험한 친구들’이다. 그나저나 우리는 왜 이런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성향을 갖게 되었을까? 우리는 수백만 년 동안 부족 형태로 살아왔다. 인류의 역사 600만년을 1년으로 치면 12월31일 오후 늦게서야 문명 생활을 시작했을 정도다. 당연히 이 오랜 시간 동안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들이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았을 것이다. 인간관계를 부족 단위로 생각하는 것도 그 중 하나다. 우리와 가깝게 사는 사람들이 우리 편이었고, 그들과 같은 행동을 할수록 결과가 좋았으니 많은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는 게 필요했고, 또 그래야 했다. 그게 생존의 지름길이었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 그러지 말아야 하지만 본성이 되어버린 성향은 여간해선 바뀌지 않는다. 특히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과 중국·일본 등은 집단 동조화 성향이 유난히 높다. 조심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말이다. 거시적인 환경이야 개인이 바꾸기 힘들지만 미시적인 환경은 충분히 바꿀 수 있다. 좋지 않는 환경에서 어떻게 좋은 성과가 나겠는가? 곳간에서 인심이 생겨나듯 좋은 환경에서 좋은 성과가 생겨난다. 올해도 벌써 1년의 절반 가까이 지나고 있다.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들을 점검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필자는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이다. 조직과 리더십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등이 있다.

2021.05.15 14:50

6분 소요
[서광원의 인간과 조직 사이(2)] 마음 속 응어리를 풀어주는 대화의 힘

산업 일반

질문하고 마음 알아주면, 상대방 분노를 녹일 수 있다 영화 이 있다. 한때 미국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지하 포커 세계의 여왕, 몰리 블름(Molly bloom)의 실제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아래 내용에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다.)26세에 내로라하는 스타와 기업가들이 참여한 하루 판돈 400만 달러(44억여원) 규모의 포커 하우스를 운영했던 그녀는 나름 신중하게 처신했음에도 결국 범죄 혐의로 FBI의 수사를 받게 된다. 수사와 함께 하우스는 사라졌고, 그녀는 빈털터리가 됐을 뿐만 아니라 꼼짝없이 감옥에 갈 처지가 된다. 그녀가 힘겹게 소송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아버지가 찾아온다. 포커판에 발을 디디면서 보지 않았던 그의 아버지는 심리학과 교수이자 유명한 심리치료사이다. “왜 왔느냐”는 그녀의 물음에 그의 아버지는 “아주 비싼 심리치료를 해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3년짜리 심리치료를 3분 만에 해주겠다”면서 세 개의 질문을 받겠다고 한다. 방금 자신에게 물었던 “왜 왔느냐?”까지 포함해서 말이다.아버지가 “자, 두 번째 질문!”이라고 하자 기다렸다는 듯 몰리가 묻는다.“좋은 남편이었다고 생각하세요?”“그건 왜 묻는 거냐?”“내 아버지가 몹쓸 인간이었다고 생각해서요.” 딸이 잔뜩 벼른 듯 ‘한 방’을 날렸는데 아버지는 뜬금없이 “축하한다”고 말한다.“축하한다. 2년 차도 끝냈구나. 네 아버지는 교수 월급으로 자식 셋을 키웠다. 한 놈은 올림픽에서 2회 우승했고, 다른 놈은 종합병원 심장전문의. 마지막 놈은 수백만 달러짜리 사업을 하면서 능력을 썩혔지. 나도 몇 가지는 제대로 했다는 거다. 이제 마지막 질문이다.”“가야 해요.”“아니야. 반드시 물어야 해. 반드시 물어야 한다.”그러자 한참을 뜸 들이던 몰리가 입을 뗀다.“왜 저를 동생들만큼 좋아하지 않았어요?”“나왔구나. 좋아했다. 때때로 그렇지 않게 보였을 뿐이지.”“뻔한 소리. 사실 (제가) 버릇이 없긴 했죠. 말대꾸하고 규칙도 어기고 밤에 몰래 차를 몰고 나가 맥도날드를 들이받고…. .”“네가 안다는 걸 알았으니까!”“뭘요?”“내가 바람을 피웠는데 다섯 살 난 몰리가 그걸 본 거야.”“스무 살 때까지 몰랐어요.”“(바람피우는 상대와) 차에 있는 날 봤지만 뭔지 몰랐던 거지. 넌 알고 있었어. 네가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내가 수치심에 그렇게 반응한 거다. 그래서 너도 날 경멸하는 반응을 보인 거고”아버지의 질문에 딸은 마음속 깊이 담아두었던, 사실은 자신도 몰랐던 마음을 알게 되고 아버지 또한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토로한다. 덕분에 둘은 눈물로 화해한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아무리 피는 물보다 진하다지만 십 년 넘게 등 돌리고 살던 사이가 이렇게 빨리 화해할 수 있을까? ━ 몰리 마음을 읽은 아버지의 대답 세 가지 심리치료 전문가인 아버지 말에 실마리가 있다. “축하한다. 2년 차도 끝냈구나”라는 말이 그렇고, 몰리가 “가야 한다”고 했을 때 “반드시 물어야 한다”는 말을 두 번이나 한 것, 그리고 “왜 저를 동생들만큼 좋아하지 않았느냐”고 하자 “나왔구나” 하는 게 그것이다. 또 아버지가 이 말을 하게 한 몰리의 말에는 공통점이 있다. 꼭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베어도 베어도 계속 자라는 잡초를 완전히 제거하려면 땅속에 있는 뿌리를 뽑아야 하는데, 그녀가 질문을 통해 그렇게 했던 것이다.마음의 응어리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어디론가 이끌고 간다. 예를 들어 어릴 적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억압 때문에 내상을 입은 사람은 성인이 된 후 그걸 자신도 모르게 분출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저 반대 의견을 개진하는 정도로 해도 되는데 심하다 싶을 정도로 어깃장을 놓거나 하며 자신을 절벽 가까이 몰고 간다. 무의식이 감정을 충동질하는 까닭이다.우리가 여기서 눈여겨 봐야할 건 몰리의 아버지가 했던 ‘원래는 3년짜리이지만 3분 만에 할 수 있는 아주 비싼 심리 치료법’이다. 원활한 소통을 가로막고 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제거하는데, 아주 효과적이다.3년 전이었을 것이다. 하루에 은행을 세 번이나 갔던 날이 있었다. 갈 때마다 서류가 하나씩 빠졌다고 하는 바람에 다음날 네 번째 방문까지 해야 했다. 은행원이 보완해야 할 서류를 한 번에 다 말했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한 번에 하나씩 말하다 보니 생긴 일이었다.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어 한 번만 더 그러면 참지 않을 작정이었다. 더구나 그날은 사람도 많아 한참을 기다린 끝에야 창구 앞에 앉을 수 있었는데, 서류를 죽 훑어보던 은행원이 세상에, 또 같은 말을 하는 게 아닌가. ‘뭐, 한 번 더 오라고?’ 더는 참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아니 참아서는 안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때 화는커녕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했다.“감사합니다. 정말 이것만 가져오면 되는 거죠?”이유가 있었다. 그 은행원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라고 하니 짜증 나시죠? 아마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어쨌든 죄송하게 됐는데 이거 하나만 가져오시면 바로 해드리겠습니다. 번호표도 뽑지 마시고 바로 저에게 오세요. 제가 다 준비해 놓고 있다가 서류 가져오시면 5분 내로 처리해드리겠습니다.”생각지도 않은 그 말에 혹한 나는 화를 내기는커녕 “감사하다”는 말까지 하면서 기분 좋게 서류를 가져다주었고 그 또한 곧바로 처리해주었다. 일을 끝내고 나오면서 생각하니 내가 왜 그랬는지 몰라 혼자 웃었다. 은행원이 내 마음을 알아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짜증 폭발 직전이라는 걸 알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번호표도 뽑지 말고 바로 오라는 ‘특혜’까지 주어서였을 것이다. ━ 맞장구치며 상대방 존재를 인정 우리가 흔히 접하는 불만, 짜증, 두려움 등 부정적인 감정이 우리 마음에 쌓이면 불이 돼 타오른다. 쌓일수록, 생각할수록 증폭되는 이런 감정들은 ‘전의’를 불타오르게 해 상대에게 불을 토해 내게 한다. 그렇게 상대를 태워버리려 하다 자신을 태워버리기도 한다.그런데 묘하게도 몰리의 아버지처럼 질문해주고 앞의 은행원이나 의사처럼 마음을 알아주면 마음속 불이 눈 녹듯 사라져버린다. 몰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누군가 알아주어 밖으로 나오면 아무리 강한 부정적인 감정이라도 대체로 해소된다. 고장 난 차가 치워지면 막혔던 길이 뚫리듯 말이다.마음을 알아주는 힘은 이렇게 크다. 존재에 대한 위협과 달리 마음을 알아주는 건 존재를 인정한다는 의미다. 소통의 고수들이 가진 능력이기도 한데, 이들을 가만히 보면 질문도 잘하지만 맞장구를 참 잘 친다. 추임새처럼 맞장구를 치면 상대의 속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끌려 나오기 때문이다.※ 필자는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이다. 조직과 리더십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등이 있다.

2021.04.24 11:33

5분 소요
서광원의 인간과 조직 사이(2)-3 마음 속 응어리를 풀어주는 대화의 힘

전문가 칼럼

영화 ‘몰리스 게임(Molly's game)’이 있다. 한때 미국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지하 포커 세계의 여왕, 몰리 블름(Molly bloom)의 실제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아래 내용에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다). 26세에 내로라하는 스타와 기업가들이 참여한 하루 판돈 400만 달러(44억여원) 규모의 포커 하우스를 운영했던 그녀는 나름 신중하게 처신했음에도 결국 범죄 혐의로 FBI의 수사를 받게 된다. 수사와 함께 하우스는 사라졌고, 그녀는 빈털터리가 됐을 뿐만 아니라 꼼짝없이 감옥에 갈 처지가 된다. 그녀가 힘겹게 소송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아버지가 찾아온다. 포커판에 발을 디디면서 보지 않았던 그의 아버지는 심리학과 교수이자 유명한 심리치료사다. “왜 왔느냐”는 그녀의 물음에 그의 아버지는 “아주 비싼 심리치료를 해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3년짜리 심리치료를 3분 만에 해주겠다”면서 세 개의 질문을 받겠다고 한다. 방금 자신에게 물었던 “왜 왔느냐?”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아버지가 “자, 두 번째 질문!”이라고 하자 기다렸다는 듯 몰리가 묻는다. “좋은 남편이었다고 생각하세요?” “그건 왜 묻는 거냐?” “내 아버지가 몹쓸 인간이었다고 생각해서요.” 딸이 잔뜩 벼른 듯 ‘한 방’을 날렸는데 아버지는 뜬금없이 “축하한다”고 말한다. “축하한다. 2년 차도 끝냈구나. 네 아버지는 교수 월급으로 자식 셋을 키웠다. 한 놈은 올림픽에서 2회 우승했고, 다른 놈은 종합병원 심장전문의. 마지막 놈은 수백만 달러짜리 사업을 하면서 능력을 썩혔지. 나도 몇 가지는 제대로 했다는 거다. 이제 마지막 질문이다.” “가야 해요.” “아니야. 반드시 물어야 해. 반드시 물어야 한다.” 그러자 한참을 뜸들이던 몰리가 입을 뗀다. “왜 저를 동생들만큼 좋아하지 않았어요?” “나왔구나. 좋아했다. 때때로 그렇지 않게 보였을 뿐이지.” “뻔한 소리. 사실 (제가) 버릇이 없긴 했죠. 말대꾸하고 규칙도 어기고 밤에 몰래 차를 몰고 나가 맥도날드를 들이받고….” “네가 안다는 걸 알았으니까!” “뭘요?” “내가 바람을 피웠는데 다섯 살 난 몰리가 그걸 본 거야.” “스무 살 때까지 몰랐어요.” “(바람피우는 상대와) 차에 있는 날 봤지만 뭔지 몰랐던 거지. 넌 알고 있었어. 네가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내가 수치심에 그렇게 반응한 거다. 그래서 너도 날 경멸하는 반응을 보인 거고.” 아버지의 질문에 딸은 마음속 깊이 담아두었던, 사실은 자신도 몰랐던 마음을 알게 되고 아버지 또한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토로한다. 덕분에 둘은 눈물로 화해한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아무리 피는 물보다 진하다지만 십년 넘게 등 돌리고 살던 사이가 이렇게 빨리 화해할 수 있을까? 심리치료 전문가인 아버지 말에 실마리가 있다. “축하한다. 2년 차도 끝냈구나”라는 말이 그렇고, 몰리가 “가야 한다”고 했을 때 “반드시 물어야 한다”는 말을 두 번이나 한 것, 그리고 “왜 저를 동생들만큼 좋아하지 않았느냐”고 하자 “나왔구나” 하는 게 그것이다. 또 아버지가 이 말을 하게 한 몰리의 말에는 공통점이 있다. 꼭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베어도 베어도 계속 자라는 잡초를 완전히 제거하려면 땅속에 있는 뿌리를 뽑아야 하는데, 그녀가 질문을 통해 그렇게 했던 것이다. ━ 몰리 마음을 읽은 아버지의 대답 세 가지 ━ 마음의 응어리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어디론가 이끌고 간다. 예를 들어 어릴 적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억압 때문에 내상을 입은 사람은 성인이 된 후 그걸 자신도 모르게 분출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저 반대 의견을 개진하는 정도로 해도 되는데 심하다 싶을 정도로 어깃장을 놓거나 하며 자신을 절벽 가까이 몰고 간다. 무의식이 감정을 충동질하는 까닭이다.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건 몰리의 아버지가 했던 ‘원래는 3년짜리이지만 3분 만에 할 수 있는 아주 비싼 심리치료법’이다. 원활한 소통을 가로막고 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제거하는데, 아주 효과적이다. 3년 전이었을 것이다. 하루에 은행을 세 번이나 갔던 날이 있었다. 갈 때마다 서류가 하나씩 빠졌다고 하는 바람에 다음날 네 번째 방문까지 해야 했다. 은행원이 보완해야 할 서류를 한 번에 다 말했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한 번에 하나씩 말하다 보니 생긴 일이었다.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어 한 번만 더 그러면 참지 않을 작정이었다. 더구나 그날은 사람도 많아 한참을 기다린 끝에야 창구 앞에 앉을 수 있었는데, 서류를 죽 훑어보던 은행원이 세상에, 또 같은 말을 하는 게 아닌가. ‘뭐, 한 번 더 오라고?’ 더는 참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아니 참아서는 안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때 화는커녕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이것만 가져오면 되는 거죠?” 이유가 있었다. 그 은행원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라고 하니 짜증 나시죠? 아마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어쨌든 죄송하게 됐는데 이거 하나만 가져오시면 바로 해드리겠습니다. 번호표도 뽑지 마시고 바로 저에게 오세요. 제가 다 준비해 놓고 있다가 서류 가져오시면 5분 내로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그 말에 혹한 나는 화를 내기는커녕 “감사하다”는 말까지 하면서 기분 좋게 서류를 가져다주었고 그 또한 곧바로 처리해주었다. 일을 끝내고 나오면서 생각하니 내가 왜 그랬는지 몰라 혼자 웃었다. 은행원이 내 마음을 알아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짜증 폭발 직전이라는 걸 알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번호표도 뽑지 말고 바로 오라는 ‘특혜’까지 주어서였을 것이다. ━ 맞장구치며 상대방 존재를 인정 우리가 흔히 접하는 불만·짜증·두려움 등 부정적인 감정이 우리 마음에 쌓이면 불이 돼 타오른다. 쌓일수록, 생각할수록 증폭되는 이런 감정들은 ‘전의’를 불타오르게 해 상대에게 불을 토해 내게 한다. 그렇게 상대를 태워버리려 하다 자신을 태워버리기도 한다. 그런데 묘하게도 몰리의 아버지처럼 질문해주고 앞의 은행원이나 의사처럼 마음을 알아주면 마음속 불이 눈 녹듯 사라져버린다. 몰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누군가 알아주어 밖으로 나오면 아무리 강한 부정적인 감정이라도 대체로 해소된다. 고장 난 차가 치워지면 막혔던 길이 뻥 뚫리듯 말이다. 마음을 알아주는 힘은 이렇게 크다. 존재에 대한 위협과 달리 마음을 알아주는 건 존재를 인정한다는 의미다. 소통의 고수들이 가진 능력이기도 한데, 이들을 가만히 보면 질문도 잘하지만 맞장구를 참 잘 친다. 추임새처럼 맞장구를 치면 상대의 속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끌려 나오기 때문이다.

2021.04.22 13:42

5분 소요
[서광원의 인간과 조직 사이(2)-2 | 좋은 일의 시작, 분리] ‘꿈보다 해몽’… 본능을 버리고 기회를 잡는 법
나에 대한 ‘공격’과, 내 의견에 대한 ‘비판’ 분리해야 어느 날 부처가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와서 부처에게 갖은 욕설과 악담을 해댔다. 알고 보니 당시 기성 종교였던 브라만의 사제였는데 혜성처럼 나타난 부처가 자기 제자를 빼앗아 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 앞에서 이런 일을 당하면 보통 쩔쩔매거나 ‘눈에는 눈’ 식으로 행동하기 마련인데 부처는 그렇지 않았다. 그가 하는 모든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한참 동안 욕설을 퍼붓던 그가 사라지자 제자들이 물었다.“아니,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저러는 데 왜 가만히 있으십니까?”그러자 부처가 말했다.“생각해보자. 만약 누군가 상대에게 꽃을 선물했는데 상대가 그걸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받지 않으면 다시 가져가겠지요.”“그렇다. 지금도 그와 마찬가지다. 그가 내게 와서 욕을 해도 내가 받지 않으면 욕한 자가 다시 가져가는 것이다.”상대가 무슨 말과 행동을 해도 내 마음 그릇에 담지 않으면 욕을 퍼붓는 사람이 되려 욕을 먹게 된다는 말이다.그런데 참 이게 말은 쉬워도 절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상대가 던진 ‘꽃다발’을 안고 끙끙댄다.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다발이면 좋으련만 그런 경우는 별로 없다. 가시가 잔뜩 있을 때가 많다. 당연히 우리 마음은 상처 투성이가 된다. ━ 부처의 꽃을 기억하라 2600여 년 전 부처에게 일어났던 일이 지금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회의 시간에 괜찮다 싶은 아이디어를 말했는데 생각지 못한 반격을 받을 때가 있다. 생산적인 반대야 그럴 수 있지만, 왠지 감정이 들어 있는 것 같고 이상한 뼈 같은 게 느껴지면 기분이 확 나빠진다. 묘하게 빈정거리거나 깔아뭉개는 느낌이 들면 머릿속에 불길이 일어날 때도 있다. 그들이 하는 말에 들어 있는 ‘뼈’를 추려보면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제대로 알고 하는 소리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받아치자니 뾰족한 수가 없고 가만있자니 바보가 된다. 괜히 얼굴만 벌게진다.분명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한 제안을 했는데 상사가 일언지하에 툭 잘라버릴 때도 마찬가지다. “알았어. 나중에 시간 날 때 얘기하자”고 하지만 느낌은 ‘괜히 시답잖은 딴소리 하지 말고 시키는 일이나 잘하라’는 뜻인 까닭이다. 당황스럽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황당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는 기분이 된다. 친해지자며 악수를 청했는데 주먹으로 한 대 맞은 느낌이랄까. 이럴 땐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럽기 그지없다.상대가 감정적으로 마구 할퀴었는데도 부처가 아무렇지도 않았던 건 그것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귀를 막지도 않았고 눈을 가리거나 외면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상대가 던진 걸 마음에 담지 않았다. 자신이 들어야 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긍정심리학을 창시한 마틴 셀리그먼이 한 말이 있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상황이나 사건보다 그 상황이나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하는가에 더 영향을 받는다.” 꿈보다 해몽, 그러니까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여기느냐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부처는 이걸 무려 2600년 전에 알았다는 건데, 이처럼 사건과 상황에 매이지 않고 해석과 평가를 잘하는 방법은 뭘까?부처의 일화와 마틴 셀리그먼의 연구에는 중요한 개념 하나가 들어있다. 분리다. 부처는 상대가 쏟아붓는 걸 그대로 받지 않았다. 자신이 받아야 할 게 아니라고 여겨 자신과 분리했다. 누군가의 말이 타당하지 않다 싶으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듯 그렇게 한 것이다. 덕분에 그는 외면하거나 쳐내지 않고 그의 존재는 받아주되 그의 말과 행동은 받지 않았다. 성인다운 대처였다.이게 쉬운 일이 아닌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누군가가 나에 대해 부정적으로 행동하면 무의식적으로 나를 공격한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대체로 맞받아친다. ‘네가 주먹을 날렸으니 나도 날린다’는 식이다. 하지만 어디서나 그렇듯 본능을 넘어서지 못하면 후회할 일이 많고 이겨내면 기회가 많아진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게 바로 분리다. 상대의 말과 행동에 들어 있는 것을 분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하는 말에 누군가가 반대할 때 그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나’라는 존재에 대한 것인가, 아니면 내 의견에 대한 것인가를 분리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분리하면 대응이 한결 쉬워진다. 의견에 대한 반대인데 나라는 존재(정체성)를 공격하는 것으로 오해하면 감정이 상하고 갈등과 마찰이 빚어진다.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일이 일어나기 쉽다. 욱하는 마음의 강약에 따라 맞부딪치거나 회피를 하게 되는데 부딪치지 말아야 할 때 부딪치면 바위에 던져진 계란 신세가 될 수 있고, 회피만 하면 혼자 스트레스깨나 받는다. 하지 않아도 될 에너지 소모를 하게 된다. 물론 갑자기 당하는 상황에서 나에게 날아온 ‘주먹’을 분석하고 분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일단 분리가 중요하다는 걸 알고 연습하면 갈수록 후회하지 않을 대응을 할 수 있다. 장착하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하기만 하면 엄청난 무기가 된다. ━ 숱한 실패 끝에 투자받는 비결 언젠가 상당한 액수의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 CEO와 대화를 나누다 어떻게 투자를 받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랬더니 “거짓말 조금 보태면 한 1백 번쯤 퇴짜를 맞았을 것”이라고 했다. 제안하는 것마다 퇴짜를 맞은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피엔딩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그는 그걸 자신에 대한 퇴짜라고 여기지 않았다. 자신이 짜 간 사업계획안에 대한 퇴짜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기분 나빠하지 않고 자신의 준비가 부족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또 찾아가고 또 찾아갈 수 있었다. 투자자들이 나중에 그에게 투자를 해준 것도 그래서였다. 투자자들은 ‘사업하는 자세’를 높이 샀던 것이다.사실 내가 낸 아이디어를 신랄하게 공격한 사람이 꼭 나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나 깔아뭉개려고 그런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의 말투가 원래 그럴 수도 있고 그날따라 그의 기분이나 내 기분이 예민했을 수도 있다. 퉁명스럽게 단칼에 거절한 상사 또한 개인적으로 무슨 일이 있어서 얘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을 수 있다. 나에게 오는 상대의 말과 행동을 한 번만 분리해 봐도 속 끓일 가능성을 확 줄일 수 있다. 나에게 하는 반격의 일부를 수용해 ‘하나의 팀’을 만들어버리라고 했던 이전 칼럼의 설명도 같은 맥락이다. 상대가 하는 말을 나를 향해 던지는 돌멩이라고만 여기면, 다시 말해 공격 행위라고만 여기면 할 수 없다. 분리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이런 분리의 기술은 상대의 말이나 행동이 나에게 행해질 때만 필요한 게 아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행동하거나 영향을 끼칠 때도 필요하다.한 기업의 임원에게 자신이 자랑스러웠을 때를 얘기해보라고 했더니 과장 시절 때의 경험을 말해주었다. 분명 효과가 있을 것 같아서 팀장에게 ‘이렇게 해보자’고 제안을 했는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단칼에 묵살하더라는 것이다. 설득하려고 했지만 되려 짜증만 냈다.“안 되겠다 싶어 ‘알겠습니다’ 하고 물러가려고 한 걸음 옮기는데 문득 뭔가가 머리를 스치는 거예요. 그래서 몸을 반쯤 돌린 채 한숨을 쉬며 ‘사실 제가 진짜 해보고 싶은 건 이거 하나였는데…’ 하면서 말끝을 흐렸습니다. ‘이거’란 아주 작은 것이었죠. 그랬더니 팀장이 저를 한 4~5초 정도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그러는 거예요. ‘그래? 그러면 해 봐!’”결과적으로 일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했다. 그 작은 일에서 의외로 괜찮은 효과가 생겼던 것이다. 마음이 풀어진 팀장이 오케이한 건 물론이었고 말이다.“그때 정말 중요한 걸 깨달았습니다. 아, 큰일일수록 한 번에 되는 게 없구나, 단번에 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구나 하는 걸 말이죠. 그래서 다음부터는 핵심적이지만 얼핏 보기엔 작고 사소하게 보이는 것을 시작점으로 삼았습니다. 근데 그렇게 하려고 하니 남모르게 사전에 준비를 많이 해야겠더군요. 많이 알고 준비해야 핵심적이지만 작고 사소하게 보이는 게 뭔지 알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랬더니 정말 일이 잘 되는 거예요. 그때 이걸 알지 못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 작게 낳아서 크게 키워라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때 그의 팀장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은 생각지도 못한 걸 제안하는 부하에게 질투가 났을 수도 있고, 어쩌면 그 부하가 사실은 도발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바람에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다. 어쨌든 돌아서던 부하가 사소하게 내민 작은 제안이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은 데다 단칼에 묵살한 게 미안하기도 해서 허락했을 것이다.감정이 상해 만약 정면으로 대들었거나 그냥 물러났다면 어땠을까? 좋은 일은 물 건너갔을 것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제안 중 작지만 중요한 걸 분리해 내밀었기에 둘 모두 실패하는 길로 들어서지 않을 수 있었다. 우리 속담에 ‘아이는 작게 낳아서 크게 키우라’는 말이 있다. 일도 마찬가지다. 작게 시작해서 크게 키우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필자는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이다. 조직과 리더십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등이 있다.

2021.04.01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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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원의 인간과 조직 사이 2-(1)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임기응변] 후회와 기쁨이 엇갈리는 ‘결정적 순간’
임기응변의 조건은 흥분·변명하지 말 것 1918년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가 양자물리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을 때다. 전국에서 쏟아지는 강연 요청에 응하다 보니 똑같은 내용을 녹음기처럼 되풀이해야 했다. 하루는 그가 너무 피곤해하자 운전기사가 제안을 했다.“박사님 강의를 다 외울 수 있고 참석자들이 하는 질문도 거의 똑같으니 제가 한번 해보면 어떻겠습니까?”요즘처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아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몰랐던 때라 괜찮겠다 싶었다. 그가 큰 모자를 눌러 쓰고 앞줄에 앉아 있는 동안 운전사는 박사급들 앞에서 긴 내용을 술술 풀어냈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게 강의가 끝나나 싶었는데, 한 물리학 교수가 생각지 못한 질문을 했다. 모든 게 탄로 날 그 순간, 운전사가 재치를 발휘했다.“뮌헨은 참 발전한 곳인데 이런 단순한 질문도 하시는군요. 이 정도는 제 운전사도 대답할 수 있으니 그에게 한번 물어보겠습니다.”적절한 임기응변이나 재치는 이렇듯 막다른 골목에서 돌파구 역할을 한다. 우리 모두 이런 능력을 원하는 이유다. 하지만 소원을 이루는 이들은 많지 않다. 있다 해도 뒤늦게 생각나는 바람에 한숨만 깊어진다. 문제는 이런 ‘결정적 순간’이 후회와 기쁨, 아니 더 나아가 실패와 성공이 시작되는 갈림길이 될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두고두고 뼈아프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 두고두고 뼈아픈 갈림길 나 과장에게 오늘은 홀가분한 날이다. 팀장과 선배인 김 과장이 같이 출장을 떠났으니 눈치 볼 사람도 없고 딱히 중요한 일도 없다. 자리에 앉아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기면 퇴근 시간 아니겠는가. 마음이 가벼워서인지 눈도 일찍 떠졌다. 별일 없겠다 싶어 옷도 대충 걸치고 출근했는데 오늘따라 출근길조차 막힘이 없다. 이런 날만 있으면 회사 다닐 맛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찌감치 도착해서 그런지 엘리베이터 앞에 사람도 없다. 그렇게 서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건다.“어, 나 과장 아닌가? 출근이 빠르구만?”돌아보니 어이쿠, 사장님이다. 세상에, 나를 알아보시다니. 이렇게 황공할 데가.“예. 안녕하세요.”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면서 언제나 그렇듯 어색한 침묵이 시작됐다. 좁은 공간에서 높은 분과 함께 있는 그 무거움이란. 평소엔 바람처럼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오늘은 굼벵이처럼 22층까지 기어가는 것 같다. 별수 없이 앞만 보고 있는데 다시 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린다.“오늘 재택근무하는 날인데 회사에 나온 건가? 복장이 아주 자유롭네?”“예? 아 예…”난데없이 옷 얘기가 나오자 할 말이 없다. 때마침 구세주처럼 열린 문으로 탈출하듯 나온 나 과장이 25층으로 올라가는 사장에게 인사를 하자 언제나 들을 수 있는 말이 들려온다.“그래. 열심히 해요.”돌아서 사무실로 향하는데 뭔가 께름칙하다. 뒷맛이 개운찮다. ‘내 복장이 이상하다는 건가? 그냥 하시는 말인가? 아, 설명을 잘 해야 했는데… 바보 같이 왜 우물쭈물했지?’ 화장실 거울에 비춰 보니 이상한 것도 같다. 별일 없겠다 싶어 대충 걸치고 나온 건데 하필 사장님과 마주치다니. 더구나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얼버무렸으니. 아, 망했다 싶다.별일 아닌 것 같지만 이런 일을 막상 겪으면 오래 간다. 생각할수록 자신에게 화가 난다. 왜 그랬지, 하는 자책이 틈만 나면 파고들어 속깨나 썩히기 때문이다.문제는 이런 일이 심심찮다는 것이다. 나를 무시하는 말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어어 하다 바보가 된 기분, 겪어 본 사람만이 안다. 발표나 회의 때 치고 들어온 기습 질문에 중언부언하다 하는 실수는 또 어떤가. 뒤늦게 혼자 분통 터진다. 제대로 대응했는데 실력이 부족해서 그랬다면 내 잘못이니 그럴 수 있다 싶지만 이런 식으로 옆구리를 훅 찔리거나 뒤통수를 맞으면 속이 이그러진다. 경계에 실패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대패한 장군처럼 분통은 터지는데 어디에 하소연할 수도 없다.무엇보다 제대로 대응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후회가 들면 더 그렇다. 사장님께 멋지게 대답했더라면, 눈엣가시 같은 사람이 싸움을 걸어왔을 때 통쾌하게 한 방 훅 날려버렸더라면. 결과를 비교할수록 한숨만 커지고 분노 게이지가 쭉쭉 올라간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 경쟁자의 질문에 ‘비수’가 들었다면? 보통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고 난처하게 하는 ‘결정적 순간’은 질문이라는 형태로 날아올 때가 많다. 프레젠테이션이나 회의 때 던져지는 누군가의 공격적인 말이 대표적이다. 이럴 때 우리는 대부분 우리도 모르게 즉각 대답하려고 하는데 대체로 이런 시도는 좋지 않은 결과로 끝날 때가 많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상대는 질문을 던지기 전 여러모로 다듬었을 것이기 때문이다.협상 전문가들은 이럴 때 두 가지 전제조건을 강조한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것과 설명하거나 자신을 변호하려고 하지 말 것. 감정에 휩쓸리면 실수하기 쉽고, 설명하거나 변호하려 하면 상대의 의도에 말려들 수 있다. 의외로 많은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설명하고 변호하려 하는데 그래야 다른 사람들에게 멋지게 보일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럴 땐 잠시(약 3~5초) 생각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게 효과적이다. 상대의 말을 신중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비춰져서 좋고, 시간을 벌 수도 있다.상대의 질문에 ‘적의’가 없다면 어느 정도 설명해도 좋지만 그 속에 ‘비수’가 들었다면 대응이 달라야 한다. 미국 사우스캘리포니아대학의 마셜 비즈니스스쿨에서 설득과 협상을 강의하는 캐서린 리오돈 교수는 이럴 때 특히 조심해야 할 게 있다고 한다. ‘상대의 의도가 이럴 것이다’라고 지레짐작하고 추측하는 것이다. 상대의 의도를 정확히 모르는 상태라 헛짚을 수 있고 그런 이유로 “아직도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셨네요” 같은 연타를 맞을 수 있다. 스스로 궁지에 몰리는 꼴이 된다.질문에 ‘비수’가 들었다면 굳이 대답을 짜내기보다 그 ‘비수’를 돌려주는 방법이 좋다. 질문으로 받아넘기는 반문(反問)이다.“잘 이해가 안 되는데 다시 한번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정확하게 얘기해 주실 수 있습니까?”상대가 자신의 의도를 설명한다면 시간은 물론 의도를 더 많이 알 수 있어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있다. 단순한 비수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주려는 말에는 주어를 전환하는 기술이 필요하다.“어제 밤새 달렸어?(술 마셨어?) 왜 이렇게 얼굴이 푸석푸석해?”이런 말은 대답하자니 그렇고 안 하자니 이상해진다. 제대로 대답하면 “아니, 그냥 그렇게 보여서. 웃자고 하는 말이야” 같은 말로 쓱 넘겨버린다. 설명이 좋지 않은 건 ‘나’가 주어가 되기에 할 말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가 던진 그물에서 몸부림치는 꼴이다. 이럴 땐 상대를 주어로 받아쳐야 한다. “그래? 근데 박 팀장 얼굴은 번쩍번쩍 빛이 나네요?” 상대를 주어로 하면 상대가 설명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낀다. 노련한 이들은 의도성 짙은 이런 말에 무대응 전략을 쓰기도 한다. 딴죽을 건다 싶으면 상대를 보며 씩 한번 웃어주고 자리를 떠나거나 어깨를 으쓱하는 것이다. 대응할수록 긁어 부스럼이 되는 까닭이다. ━ 그들에게는 ‘나만의 노트’가 있다 상대의 말에 가시가 들어 있다면 역으로 던지는 질문의 구체성을 높이는 게 좋다. “예를 들면 어떤 부분이 그렇다는 건가요?”처럼 범위를 좁히면 상대의 설명도 그에 맞춰진다. 특히 그렇게 말하는 근거를 물으면 상대의 말이 사실에 근거한 건지 단순히 그의 생각인 건지 알 수 있다. 상대가 설명하면 그 말을 요약한 다음 내 생각을 말하면 된다. “머리는 폼으로 달고 다니냐”는 인격 비하 발언에도 비슷하게 대응할 수 있다. “머리를 폼으로 달고 다니느냐고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일제히 시선을 보낼 것이고, 그러면 말하는 사람은 보통 발을 뺀다. 상대의 말에서 반격할 수 있는 근거를 얻을 수도 있다.가시 돋친 질문이라고 모든 걸 부정할 필요는 없다. 수세적 방어 자체가 좋아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조건 쳐내기만 하면 고집스러운 사람으로 비친다. 합리적인 게 있으면 일부를 수용해 내 아이디어와 연결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상대가 “듣던 대로 까다로우시군요”라는, 대응하기 애매한 펀치를 날리면 “맞아요. 제가 좀 까다롭긴 하죠? 대충하면 회사에 큰 손해가 갈 수 있어서 그렇게 하려고 노력 중입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원래 그런 게 아니라 일에서만 그렇다는 뜻이다. 덩달아 이미지도 좋아진다. 더 나아가 상대에게 공을 넘길 수도 있다. “맞습니다. 저도 고민인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좋은 방안이 있는 것 같은데 알려주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반대만 하지 말고 대안을 내놓으라는 뜻이다.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알게 된 또 다른 방법이 있다. 임기응변이 뛰어난 사람 중 의외로 타고난 능력을 갖춘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들은 능력 대신 방법을 갖고 있었다. 수험생들의 오답 노트처럼 있을 만한 상황 10가지 정도를 예상한 뒤 적절한 대처법을 틈날 때마다 기록해 두는 것이다. 일종의 ‘나만의 노트’다. 예를 들어 서두에 나오는 나 과장 같은 상황에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아, 예. 조깅을 좀 하고 오느라고요”속이기 위한 것이 아니니 이 정도는 괜찮다. 자연스럽게 건강 같은 대화가 이어질 것이고 사장님과의 거리는 가까워질 것이다. 후회가 들어설 자리에 기회가 들어서는 것이다.※ 필자는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이다. 조직과 리더십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등이 있다.

2021.03.07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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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무능한 동료가 나보다 먼저 승진하는 이유는

전문가 칼럼

조직의 원리 담은 출간… “내성적인 사람, 불리하지만 롱런 가능성도” '상사는 왜 말만 앞서는 저 친구를 더 좋아할까. 정작 일하는 건 난데.’직장인이라면 한번쯤 해본 고민이다. 특히 내성적인 사람일수록 더하다. 말주변이 없어 상사와 친근하게 지내지 못하고, 일한 티를 내자니 낯간지러워 그저 묵묵히 제 할일만 할 뿐이다. ‘언젠간 알아주겠지’ 기대하면서…. 최근 를 펴낸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은 “어떤 방식으로든 일하는 티를 내라. 묵묵히 일하면 묻힌다”고 경고한다.경영 전문 기자 출신인 서광원 소장은 벤처기업을 경영할 때 느낀 점을 엮은 저서 (2005)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이후 등 일명 ‘사장 시리즈’로 수많은 사장들의 공감을 샀다. 지금도 많은 CEO들을 지켜보며 기업과 리더, 조직과 인간의 역학 관계를 심도 있게 탐구하고 있다. 조직과 리더십의 본질을 연구하기 위해 생태학까지 지평을 넓혔고, 현재 본지를 비롯한 일간지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사장님’ 마음을 대변하던 서 소장이 이번에는 직장인, 특히 조직생활이 어려운 소심한 직장인에게 도움이 될 신작을 냈다. ━ 조직생활 어려운 5~15년차 직장인 위한 책 ‘사장 전문’ 저자가 이번엔 직원 입장에서 썼는데.“기자 시절에 기업체 사장들을 사석에서 만날 기회가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공통적으로 들은 이야기가 ‘당신은 (사장이 아니니)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오기가 생겼는데 막상 내가 사업을 해보니 의지할 곳이 없어 외롭고, 힘든 사장님의 마음을 이해하겠더라. 내 능력이 부족해서인 것 같아 힘들었는데 이후 조직과 리더십에 대해 공부하다 보니 그게 개인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처럼 사장이라는 자리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책을 낸 건데 많은 사장들이 위로를 받았다고 전해왔다. 이번 책도 마찬가지다. 이전까지가 리더의 본질을 다뤘다면 새 책에서는 조직의 본질을 다뤘다는 점이 다르다. 특히 조직생활이 여전히 어려운 연차 5~15년 사이 직장인을 위한 내용을 담았다.”책에 나온 처세술만 잘 익히면 조직생활이 순탄해질까.“이 책은 처세술일 수도, 리더십이나 조직론일 수도 있다. 결국은 직장생활을 잘 하려면 조직의 본성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전 책을 쓰며 알게 된 사실 중 하나가 동기보다 승진이 빠른 사람이 부장까진 쉽게 올라가도 임원이 될 확률이 낮다는 점이다. 오히려 과장, 부장 진급에 몇 번이나 물 먹고, 산전수전 겪은 사람이 느리지만 높은 자리에 오래 앉아 있었다. 그만큼 숱한 경험으로 사람과 조직의 본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어차피 직장생활을 안할 게 아니라면 하루라도 마음 편하게 다니면 좋지 않나. 조직의 본질을 알고 나면 위안이 될지도 모른다.”서 소장은 책에서 일하는 티를 내야한다고 강조한다. 성격상 낯간지러워서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면 ‘풀(pull) 전략’을 써보라 권한다. 언변이 좋고, 처세술이 뛰어난 사람들은 밀고 들어가는 ‘푸쉬(push) 전략’으로 자신이 업무를 하고 있단 사실을 ‘광고’하는데 능하다. 반면 이런 방식이 불편한 사람들은 티 안 나게 일하는 걸 ‘미덕’으로 여기며 억울함을 억누른다. 저자는 그럴 때 어떤 행동이나 상황 조성을 통해 상대가 나에게 관심을 갖게 만들라고 조언한다. 벌과 나비가 날아오게 하는 꽃의 원리다.풀(pull) 전략이 효과적인 이유는.“노력하고 고생했다면 티를 내라는 것이다. 거래처를 다녀왔는데 내세우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이번에 거래처에 갔더니 이런 일이 있더라고요”라고 말하며 자신만의 스토리텔링을 짜라는 것이다. 행동이나 물건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법을 아는 게 중요하다. 이런 전략은 낯이 두껍지 않아도 조직이 나를 알아보게끔 하는 현명한 전략이 될 수 있다. 상사는 자기 일하기도 바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밝은 눈과 올바른 판단으로 나를 인정해주길 기다리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차라리 그들이 바쁜 이유에 관심을 갖고, 내가 가진 능력을 보여주고자 노력한다면 조직에서의 내 입지가 단단해질 것이다.”직장생활은 내성적인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싸움인가.“그렇다. 하지만 알고 보면 공평하다. 내성적인 사람은 직장생활 초반에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조직생활에 대한 고민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도 이들이다. 대신 그만큼 고민하기 때문에 자신의 단점을 잘 알고, 이를 보완할 방안도 연구한다. 단점을 고칠 수 없다면 장점을 더욱 키우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외향적인 사람은 말주변이나 활달한 성격으로 자신의 단점을 가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밑천이 드러나기 쉽다. CEO 설문조사를 보면 자신이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답한 사람이 70~80%를 차지한다. 미국 통계 역시 유사한 경향이다.” ━ “직장생활의 기초원리 같은 책으로 읽히길” 조직에서의 성공이란 무엇일까. 서 소장은 ‘성과’와 ‘성공’의 의미부터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직에서의 성과란 엄밀히 말하면 일에서의 성공일 뿐, 성공이 되기 어렵다. 아무리 성과가 좋아도 인간관계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조직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목표의식과 보람을 찾으며 롱런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즉 조직에서 스스로도 만족스러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일을 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회사생활에서 중요한 건 결국 능력보다 관계인가.“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비슷비슷한 능력을 가졌다. 그러니 능력이 조금 더 뛰어난 A보다 관계를 잘 맺은 B가 인정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최근 관계에 대한 고민을 담은 책이 인기를 끈다. 대학 졸업 전까지 아무도 관계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으니 그 능력이 ‘0’인 상태로 사회생활에 뛰어들기 때문이다. 조직의 본질을 모르고 자신만 탓하니 자괴감이 들고, 능력을 표출하지 못해 상사가 인정해주지 않으면 자존감이 떨어진다. 악순환인 셈이다. 조직의 기초원리를 알고 회사생활을 시작하면 적어도 무조건 ‘내 탓이오’하는 자괴감은 들지 않을 것이다.”이 책을 ‘직장생활의 지침서’로 삼으면 되나.“지침서라기엔 거창하고 구구단을 미리 외운다는 마음으로 읽으면 좋겠다. 구구단을 외울 때는 의미도 모르고 무작정 외우지만 한번 체득하고 나면 복잡한 계산도 쉽게 풀리지 않나. 독자들에게 알고 있으면 편한, 직장생활의 기초원리 같은 책으로 읽히길 바란다.”- 허정연 기자 jypower@joongang.co.kr

2020.12.13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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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원의 인간과 조직 사이(39)] 한방 vs 성실, 어느 쪽이 효과적일까?

전문가 칼럼

조직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아는 게 우선… 중요한 건 신뢰 얻는 것 칼럼 ‘서광원의 인간과 조직 사이’가 39회를 마지막으로 종료합니다. 근 2년 동안 독자들께 많은 메시지를 주었으리라 자평합니다.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은 잠시 휴식기를 가진 후 더 좋은 칼럼을 선보일 계획입니다. 세상엔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지만 고과평가가 시작되는 연말이 가까워지면 사람들은 대체로 두 유형으로 나뉜다. 여유 부리거나 시쳇말로 ‘뺀질거리다’가 큰 거 ‘한방’으로 부진을 만회하(려)는 ‘한방맨’과 언제나 그렇듯 하루하루에 충실한 ‘에브리데이(Everyday) 성실맨’이다. 숫자로 따지면 2:8 정도 된다. 누가 더 잘 나갈까?많은 사람들이 ‘한방맨’의 손을 들어준다. 노력(비용) 대비 효과(결과)가 아주 짭짤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타율은 높지 않지만 결정적일 때 한방을 터트리는 홈런 타자처럼 선망의 눈길을 한 몸에 받으니 더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묵묵히 일하는 성실맨들은 맥이 탁 풀리고 딜레마에 빠진다. ‘한방’에 대한 유혹이 커져 ‘한방’과 성실 사이를 오락가락하기도 한다. 성실은 무능한 듯 생각되고 한방은 능력의 징표로 여겨진다. 많은 연구들이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하지만 현실에서는 한방이 단연 우세하다.세계적 베스트셀러 를 쓴 이코노미스트 겸 칼럼니스트인 팀 하포드가 질문을 받았다. “동네 주차장을 1주일에 1번씩 이용하는데, 좋은 서비스를 받고 싶어 주차 직원에게 팁을 줄 생각입니다. 매번 2달러를 주는 것과 연말에 104달러를 몰아주는 것 중 어떤 게 좋을까요?” ━ 수렵채집의 DNA가 ‘한방’ 환영 그는 신경경제학(neuroeconomics) 관점, 그러니까 뇌가 이걸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것으로 답했다. “우리 뇌는 두 개를 같은 것으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매번 2달러를 주면 뇌는 별 놀랄 게 없는 것으로 입력되어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죠. 그러다가 팁 주는 걸 잊어버리면 ‘(자신에 대해) 뭔가 기분이 나쁜 게 있나 보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별 효과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한 번에 104달러를 주라는 것일까? “이상적인 건 안정성과 놀라움의 효과를 잘 조합하는 거죠. 매주 1달러를 주면서 매달 5달러를 추가로 주면 어떨까요. 그러면 감사하는 마음이 극대화되지 않을까요?”하포드의 말에는 두 가지가 들어있다. 매번 2달러를 주는 건 효과가 없고, 평소에는 다른 사람이 주는 것처럼 주되(1달러) 간간이 작은 한방을 쏘는 게 낫다는 것이다. 하지만 1년에 한 번 몰아서 주는 건 위험할 수 있다. 직원이 그만둘 수 있기 때문이다. 홈런보다는 2, 3루타를 자주 때리는 게 낫다는 의미다. 작든 크든 한방의 효과를 인정한 셈인데 이상한 게 있다. 몰아서 받는다고 더 받는 게 아닌데(매번 2달러씩 받으나 1달러+5달러를 받으나 총액은 같다) 왜 우리는 한방을 선호할까?우리는 매일 수많은 정보를 처리하며 산다. 이쪽 길로 출근해야 할 지, 저쪽 길로 가야할 지 결정하고, 지나치는 수많은 광고판 속에서 읽어야 할 것과 지나쳐야 할 것을 고른다. 우리의 시각은 초당 4000만 개의 정보를 받아들여 뇌로 보낸다. 뇌는 이걸 하나하나 분석하지 않는다. 들어온 차례대로 공평하게 처리하지도 않는다. 자극이 큰 것부터 처리한다. 누군가 나를 툭 치면 그 사람을 먼저 쳐다보고, 멋진 사람이 지나가면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간다. 이유는 하나,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우선적으로 처리하는 게 생존에 더 이롭기 때문이다.(하나하나 모든 걸 처리하면 머리가 터질 것이다)물론 이런 성향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출현한 지 20만년 정도 된다. 이 중 19만년을 여기저기 이동하는 수렵채집으로 살아왔고 1만여년 전부터 농경생활을 하며 정착생활을 해왔다. 농경생활을 해왔다고는 하지만 모두가 농경생활을 한 것도 아니었다. 이러니 우리 안에는 지금도 수렵채집 시절에 적응한 성향이 많이 남아 있다. 1만년은 성향(유전자)을 바꾸기에 턱없이 짧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큰 것 한방을 원하는 성향은 이 긴 수렵채집 시대의 유산이다.자, 지금이 수렵채집 시대라고 생각해 보자. 날마다 먹을 만한 각종 식물과 열매를 꾸준히 가져오는 사람이 있고, 평소엔 빈둥대는 듯 하다가 어느 날 커다란 멧돼지 한 마리를 짊어지고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 누가 환영 받을까?둘 다 환영 받겠지만 대환영을 받는 쪽은 말할 것도 없이 후자일 것이다. 배불리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기는 단백질의 보고 아닌가. 알다시피 단백질은 신체 성장에 필수적이다. 단백질이 부족하면 임산부는 허약한 아이를 낳고, 잘 태어난다 해도 쑥쑥 건장하게 자라지 못한다. 당연히 여성들이 선호하는 남편감도 멧돼지 사냥꾼일 수밖에 없다. 이런 성향이 19만년 동안 축적되어 왔다. ━ 진화 과정서 형성된 ‘지금 당장’이라는 본성 매일 성실하게 먹을 걸 가져온 사람의 공헌도가 사실 더 높을 수도 있는데 왜 한방맨이 환영 받았을까?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스위치를 올리면 무섭게 돌아가는 전기톱과 놀이공원에 있는 놀이기구 중 어떤 게 더 위험할까? 대부분 전기톱이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실제로 다치는 사람을 조사하면 반대다. 어느 나라나 놀이기구를 타다 다친 사람이 열 배 정도 많다.이런 오류가 생기는 이유는 우리가 ‘눈앞에 있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우리 눈으로 봐서 좋아 보이면 실제와 상관없이 좋다고 여기고, 누군가가 무섭게 보이면 무서운 사람이라고 단정해 버린다. 실제로는 아닌데도 믿어 버린다. 어쩌다 멧돼지를 잡아온 사람보다 날마다 조금씩 꾸준히 먹을 걸 구해온 사람이 더 중요할 수 있지만 멧돼지 사냥꾼에게 환호한다.물론 근거가 없는 게 아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생존의 불확실성이 워낙 높은 야생에서는 언제 죽을지 몰랐으니 ‘지금 당장’ 좋은 게 좋은 것이었다. 즉각적인 보상, 당장의 만족을 원하는 성향은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 안에 뿌리 깊게 스며들었다. 여름이라 다이어트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이슥한 밤 옆에서 먹고 있는 라면에 젓가락이 가고 마는 이유이기도 하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 먹어 두는 게 남는 것’이라는 우리의 본성이 충동질을 해대고 성화를 부려 ‘내일부터 잘 하자’로 결심을 변경하게 만든다.여기에 우리 한국인만의 특성도 한 몫 한다. 우리가 요즘 즐겨 먹는 고등어 같은 수산물은 우리 주변 바다 출신이 아니다. 멀고 먼 노르웨이 앞 바다에서 잡아오거나 그곳 바다에서 양식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당연히 노르웨이에게 한국은 중요한 수출국이라 주기적으로 한국 시장에 대한 조사를 한다. 이걸 담당하는 노르웨이 수산부 산하 마케팅 전담기구인 수산물위원회가 지난 2017년 ‘한국 소비자들의 수산물 소비 행태’라는 보고서를 발표한 적이 있다. 여기에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우리보다 생선을 자주 먹지 않는데도 세계에서 가장 수산물을 많이 먹는 국민.’ 이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은 1인당 수산물 섭취량(2013~2015년 평균)이 연간 58.4㎏으로 세계 1위다. 수산물 대국인 노르웨이(53.3㎏)나 일본(50.2㎏)보다도 많다. 세계 평균은 20.2㎏으로 우리나라의 3분의 1 수준이다. 자주 먹지도 않는데 어떻게 세계 1위를 했을까? 한 번에 많이 먹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노르웨이 사람들은 주 2회 이상 수산물을 먹는 비중이 68%다. 한국은 52%다. 가끔 먹지만 많이 먹는다는 뜻이다.수산물만 이럴까? 육류도 마찬가지다. ‘태초 먹거리 학교’를 운영하는 이계호 충남대 명예교수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한국의 대장암 환자는 10만 명 중 45명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특히 남성 발병률이 여성보다 2배 높다. 한국 남성이 독보적 세계 1위라는 의미다. (중략) 미국인의 육류 섭취량은 연간 약 140㎏으로 우리보다 3~4배 많이 먹지만 대장암 환자는 10만 명 중 38명꼴이다. 문제는 매일, 매 끼니에 나눠 고기를 먹는 그들과 달리 한국인은 한꺼번에 너무 많이, 몰아서 먹는 데 있다.”먹는 것만 그런 게 아니다. 미국인은 노후 준비를 위해 차근차근 주식투자를 한다. 한국인은 목돈을 쥐려고 한다. 한방에 큰돈을 벌려 한다.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뭘 하든 ‘날을 잡아 한방에’라는 문화가 널리 퍼져 있다. 아마 이런 문화 덕분에 우리가 ‘한방에’ 무역대국이 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우리의 한방 문화 뿌리는 생각보다 깊다.하지만 한방 유형이 꼭 좋은 건 아니다.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듯, 한방으로 일어선 사람은 한방에 가기 쉽다. 한방이라는 게 언제나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홈런만 때리려고 하는 선수가 헛스윙만 연발하다 사라지듯, 조직에서 한방으로 일어선 사람은 항상 큰 거 하나, 또는 지름길만 찾다가 사라진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한 CEO가 팀장으로 승진한 이들의 교육에 들어갔는데 한 사람이 질문을 했다. “요즘 세상이 불확실성 때문에 난리인데 우리는 성장 우선입니까, 아니면 안정 우선입니까?” 가장 중요하면서도 난해한, 팀장들이 궁금해 할만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질문을 받은 사장이 되레 물었다. “성장과 안정, 정말 중요하죠. 그런데 하나만 물어봅시다. 성장과 안정, 이 중에 가장 중요한 단어가 뭘까요?”사장이 물어보니 다들 고민하면서 답을 했다. 누군가는 성장을, 누군가는 안정을 말했다. 모두의 의견을 들은 사장이 말했다.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가장 중요한 단어는 가운데 있는 ‘과’가 아닐까 합니다.” 순간 무슨 말인가 싶어 멈칫하던 팀장들이 다들 크게 웃었다. “맞다”고 하면서 말이다.경영학에서는 이걸 양손잡이 경영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해온 것을 잘 하면서 새로운 것도 잘 해내는 능력을 말한다. 기업에게만 이런 능력이 필요할까? 개인에게도 마찬가지다. 팀 하포드가 말했듯 적절한 조화가 중요하다. 성실과 한방이 7:3이나 8:2 정도 되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행복이 그렇듯 말이다. 요즘 많은 연구가 말해주듯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로 결정된다. 크게 한 번 행복감을 맛보는 것보다 작게 여러 번 행복을 느끼는 게 더 좋다.많은 성실맨들에게도 한방이 필요하다는 얘긴데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시도를 하기 전에 알아둘게 있다. 성실과 한방은 사실 선택이라기보다 개인이 가진 성향에 기인할 때가 많다. 하겠다는 의지나 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 ━ 무하마드 알리가 전설이 된 비결 성실 유형은 나서는 것보다 조용히 일하기를 좋아하지만 한방 유형은 반대다. 성실형은 민감해서 작은 자극에도 생채기를 입고 고민하지만 한방형은 둔감해서 웬만한 건 그냥 넘어간다. 성실형이 한방을 원한다면 시쳇말로 ‘멘탈 갑’이 되어야 한다. 한방형이 빈둥거리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툭툭 쳐 내듯 그런 두꺼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애써 노린다고 한방이 항상 가능하지 않기에 실패했을 땐 압박감을 이겨내야 한다. 이런 걸 갖추지 않으면 상당한 후유증에 시달릴 수 있다.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낼 수 있다. 무엇보다 욕심으로 시작했다간 큰 코 다친다.또 하나 필요한 게 있다. 한 때 권투가 TV 화면을 휩쓸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전설이 된 무하마드 알리는 당시 혜성처럼 나타나 스타가 되었는데, 비결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스타일이었다. 당시 헤비급 선수들은 대체로 거대한 덩치를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오며 주먹을 날렸다. 주로 팔만 썼다. 알리는 춤추듯 빠른 발놀림으로 상대와의 거리를 자유자재로 유지하며 짧고 빠른 펀치를 날렸다. 이런 펀치에 당해 패한 선수들이 하나 같이 말한 게 있었다. “펀치는 강력하지 않았다. 그런데 너무나 갑작스럽게 날아왔다.”크고 세다고 좋은 게 아니다. 생각지 못할 때 작은 한방은 큰 한방 이상의 위력을 발휘한다. 목마른 사람에게 많은 물보다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한두 컵의 물이 필요하듯 말이다. 한방이든 성실이든 조직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하는 게 중요하다. 큰 것 한방보다 조직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아는 게 우선이다. 성실이든 한방이든 중요한 건 신뢰를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한방에 뛰어난다 해도 믿을 수 없다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평가는 크고 센 힘으로만 되는 게 아니다. ━ ‘최고 연봉팀’ 뉴욕 양키스는 왜 매번 우승하지 못했나 지난 1990년대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들은 사막의 열기만큼이나 뜨거운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당연히 이윤이 저하되고 있었다. 고심하던 한 카지노에서 완전히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다. 요즘 각광받는 데이터 전문가를 초빙, 고객 분석을 시도했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시도였다.한동안 데이터를 모아 분석한 결과 카지노 관계자들이 그때까지 생각했던 것과 다른 데이터가 나왔다. 수익의 82%가 26%의 고객에게서 나온다는 건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26%의 고객을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다. 큰 돈을 베팅하는 고객들이 아니었다. 인근에 살며 하루 50달러(약 6만원) 정도를 걸고 연 30회 정도 방문하는 소액 고객들이 ‘큰 손’이었다. 엉뚱한 손에게 각종 서비스를 베풀었던 것이다. 이 카지노는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이전에 알지 못했던 수익을 일궈낼 수 있었다.우리는 눈에 보이는 ‘큰 것’에 시선이 쏠려 카지노가 하는 잘못을 한다. 조용히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을 놓친다. 요즘 많은 연구가 말하듯 좋은 성과는 ‘스타플레이어’들만으로 나지 않는다. 그런 단순한 시대는 지나갔다. 미국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는 최고의 선수들을 모아 놓은 최고 연봉 팀으로 유명하지만 그렇다고 매번 우승하지는 못한다. 스타플레이어가 항상 우승을 선사하는 것도 아니다. 이 구단의 전설적인 홈런 타자 베이브 루스는 팀에게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루스 때문에 우승을 놓친 적도 여러 번이었다.연구에 의하면 뉴욕 양키스는 스타 선수가 10~15% 정도일 때 우승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이들과 ‘일반 선수’들의 팀워크가 좋았을 때 특히 그랬다. 능력자들만 모아 놓으면 질시와 견제 같은 소모적인 경쟁 때문에 반대되는 성과가 난다.※ 필자는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이다. 조직과 리더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콘텐트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등이 있다.

2020.08.1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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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원의 인간과 조직 사이(38) 왜 무능해 보이는 사람이 승진할까?] 팀원이 보는 팀장과 상사가 보는 팀장은 다르다

전문가 칼럼

전투에서 닦달하는 소대장 역할… 경영진 압박과 직원들 원성 사이에서 괴리 커져 회사를 다니다 보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일하고 싶은 마음을 꺾어 놓고 맥 빠지게 하는 그런 일들이 심심찮게 생긴다. 아무리 봐도 무능한 (것만 같은) 이들이 무난하게 승진해 팀장이 되고 임원이 되는 일도 그 중 하나다. 그 사람만 보면 다들 속이 부글부글 끓을 정도로 원성이 자자한데 왜 윗사람들과 회사는 모를까? 진짜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아는데도 모르는 척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알고도 놔둘 수밖에 없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미국에서 직원들에게 “경영 관행 중 가장 화가 나는 게 뭐냐”고 묻자 이구동성으로 나온 대답은 “경영진으로 승진한 멍청이”였다. 미국에서는 이런 걸 ‘딜버트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여기 나오는 딜버트는 1990년대 미국 직장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만화 ‘딜버트(Dilbert)’의 주인공 이름인데, 전 세계 65개국 2000여 개 신문에 연재됐을 정도로 호응이 좋았다. 덕분에 딜버트는 등 잡지의 표지 모델로 등장하기도 했다. ‘딜버트의 법칙’은 이 만화를 그린 스콧 애덤스가 같은 이름의 책을 출간하면서 나온 것으로, 이 책은 경영학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싱커스 50(thinkers 50)’에서 3회 연속 순위에 올랐고, 100만부 이상 팔렸다.그에게 한 기자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무능해 보이는 사람이 승진하느냐”고 말이다. 그도 한 마디로 답했다. “사실 그들은 무능한 것이 아니라 승진의 법칙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겁니다.”그리고 덧붙였다. “경영학 교수들에게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을 물어보면 누구나 ‘명확한 정보 전달’이라고 말할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교수가 사업에서 성공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거죠. 성공한 경영자라면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이란 ‘나는 승진할 만하다’는 메시지를 상사에게 끊임없이 전달하는 것이라고 말할 거예요. 캐릭터 딜버트는 입이 없어요. 사실 처음엔 실수였어요. 그런데 회사 생활에 대해 알면 알수록 현실과 맞아떨어지는 포인트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경영진의 거짓말도 잘 구분해야 해요. 상사가 ‘저는 마음을 활짝 열어놓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다고 쪼르르 달려가 다 말해버리면 그 부하직원은 어떻게 될까요?”그가 하는 말은 하나였다. 이른바 ‘법칙’을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의 차이는 생각 이상으로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법칙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 ‘일 잘 하는 것’과 ‘승진’은 별개 문제 직장생활 몇 년 해보면 알게 되는 게 있다. 일을 잘 하는 것과 승진은 별개라는 것이다. 이 둘의 인과관계가 밀접할수록 좋은 회사지만 좋은 회사라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다. 애덤스가 말했듯 일을 잘 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느냐 하는 것이다.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그리고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 부분 그렇다. 조직에는 이런 딜버트의 법칙에 능통한 몇몇 유형이 있다.일이 아니라 은밀한 커뮤니케이션에만 능통한 ‘전문가’들이 약속이나 한 듯 공통적으로 가진 능력이 있다.(인정받고 승진까지 하니 분명한 ‘능력’이기는 하다) 회사와 상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안다. 그들이 ‘지금, 당장’ 필요한 게 뭔지 잘 파악해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예를 들면 어느 회사의 오너인 회장은 모든 걸 다 알고 있을 것 같지만 사실 그에게 올라오는 보고는 상당히 제한적이다. 올라오는 동안 거르고 걸러서 온다. 대체로 전문경영인 사장과 두세 명의 임원을 만나는 게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즘처럼 불확실성이 높아지면 조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공식보고 이외의 것들을 알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불러 시시콜콜 물어볼 수도 없고 이곳저곳을 다닐 수도 없다. 결국 사람을 ‘심는’ 수밖에 없다. 비공식 라인을 두는 것이다.수요가 있으면 공급은 존재하는 법, 윗분의 이런 마음을 읽는 이들이 조용히 나타나 채널을 개척하고 담당한다. 공식보고에 없는 ‘저간의 상황’을 보고한다. 이들이 일을 통해 실적을 쌓으려 할까? 일 아닌 관계에 집중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우선한다. 일은 큰 사고만 나지 않을 정도로 관리한다. 제대로 일하지 않는데도 자리보전 하나는 잘 하는 사람들이다.회장도 안다. 이런 관계가 별로 생산적이지 않고 부작용이 상당하다는 걸.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 파악을 하는 게 그에게는 더 우선이다. 당사자들도 자신의 부하직원들이 그를 어떻게 보는지 알기에 불평불만이 퍼지게끔 놔두지 않는다. 따르게 할 수 없으니 따를 수밖에 없게끔 압력을 가한다. 자신의 힘을 증명하기 위해 힘없는 사람을 몰아세운다. 자신이 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려야 하니 더 넓고 화려한 사무실을 중시하고, 고급 자동차나 비싼 시계 같은 물리적 표지에 갈수록 예민해진다. 일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보다 물리적인 힘과 과시로 자신을 증명하려 노력한다. 이들이 화려한 주인공이 될수록 부하들은 그늘에 묻힌다. ━ 무능한 상사일수록 부하를 더 괴롭혀 이들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유형도 있다. 넘쳐흐르는 자신감으로 상사들을 매료시키지만 바로 그 자신감 때문에 같이 일하는 부하들이 익사하곤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기표현에 능한 면전(面前) 전문가들이라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자신을 호감형으로 인식시키는데 뛰어나다. 앞서 말한 이들이 그들 상사의 마음 빈 곳을 채워주는 전문가라면, 이들은 자신이 얼마나 능력 있고 카리스마가 있는지를 보여줄 줄 안다. 자신감 있게 행동하고 말을 잘 해 자신을 대단한 인물로 여기게끔 한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사회적 기술로 가릴 줄 아는 발군의 능력으로 상사의 눈을 가리고 그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간다. 이들이 승진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토마스 차모로-프레무지크 교수는 까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런 부류는 좋은 상사가 되지 못한다. 부하를 괴롭히고 애 먹이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잘못한 걸 남 탓으로 돌리고, 성과가 생기면 자기 공으로 만든다.”자기 이익에 밝은 이런 사람들은 장기적인 미래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말은 강하지만 사실은 눈앞의 이익에 전력투구한다. 일단 이익이 확실하다 싶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수중에 넣으려 한다. 뒷담화를 통해 뭐든 만들어내고 어떻게든 태클을 건다. 바람직한 성과를 만들어내는 일에는 무능하지만 자기 이익을 취하는 일에는 굉장히 유능하다. 이들이 달려들면 상황은 진흙탕 싸움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고, 그러면 이성적인 이들은 험한 꼴 보기 싫다며 물러나기 십상이다. 덕분에 손쉽게 원하는 걸 얻는다. 이들이 노리는 일종의 공식이며, 이런 저런 의혹을 받는 이들이 비중 있는 자리에 앉는 ‘전략’이기도 하다.문제는 자기 과시에는 뛰어나지만 일에서 성과를 내는 능력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욕심이 넘치기에 자신이 무능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한다. 어떤 프로젝트가 괜찮다 싶으면 호언장담하며 일단 뛰어들지만 진흙탕 싸움에서나 통하는 성공 방식이 일에서 통할 리 없다. 열심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열심히 하니 성과는 없고 부하들만 죽어난다. 인지신경학자 이안 로버트슨 교수(아일랜드 트리니티칼리지)가 한 말 그대로다.“지위에 대한 자신감은 있는데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자기 자아가 공개적으로 모욕당할지 모른다는 위협을 느낀다. (...) (그래서) 방어 차원에서 공격적으로 대응한다. 자신의 무능함이 사람들에게 드러날지 모른다는 심리적 위협에(...) 공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시작한 일이 성과가 없다 싶으면 공격 방향을 바꾼다. 그들이 향하는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힘없는 부하들이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너대니얼 패스트 교수의 말처럼 상사 역할에 적합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일수록 ‘악당 골목대장’이 된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능력이 없는 상사일수록 부하 직원을 드러나지 않게 방해했다. 무능할수록 아랫사람들을 더 괴롭힌다는 뜻이다. 욕심이 넘치기에 무능하다고 알려지는 걸 더 두려워하고, 그래서 사람들을 ‘쥐고 흔들려고’ 하는 성향도 강하다. 모든 걸 자신의 손 안에 두려 한다.더 큰 문제는 이런 욕심과 자신의 자리가 위험하다고 느끼는 불안이 만나면 만족을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 끝날 때까지 끝없이 상승을 추구한다. 잘 되면 자신이 잘해서 그런 것이고, 안 되면 남 탓을 하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을 만든다. 고과평가 등을 미끼로 삼아 사람을 흔들고 상대의 약점을 힘의 동력으로 활용한다. 잘 보여야 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기 과시에 열중하지만, 책임져야 할 일이 생기거나 위기 상황이 되면 어디론가 사라지는 능력을 발휘한다. 평소엔 면접 전문가이지만 이럴 땐 책임을 회피하는 면피 전문가로 재빨리 변신한다. 자신의 무능이 드러날 때까지 승진한다는 피터의 원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전형이다. 피터의 원리는 미국 콜럼비아대 로렌스 피터 교수가 1969년에 발표한 것으로 무능한 사람들이 조직을 채우는 현상을 말한다. ━ 밑에서는 보이는데, 위에서 보면 안 보여 무능해 보이는 사람이 승진하고, 이런 이들이 설치는 데도 가만 놔두는 세 번째 이유는 그의 ‘활약상’을 윗사람들이 모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단위 조직을 이끌게 되는 지위를 가지면 그 윗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같이 일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일이 있을 때나 보고할 때 대면하는 정도다. 같이 일을 해야 면면을 파악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고 그가 보여주는 것만 보게 되니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모를 수 있다. 앞에서 말하는 사람들처럼 감추고 덧칠하는 능력이 있다면 말할 것도 없다.한 인사 전문가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의 아래에서 보면 그의 ‘항문’이 잘 보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보면 하나도 안 보여요.” 여기서 ‘항문’은 그가 숨기고 싶은 단점이다. 아랫사람들에게는 그의 못난 면이 다 드러나지만 위에서는 보기 힘들다는 뜻이다.물리적 거리가 있다 보니 아래에서 당하는 고통의 정도를 가볍게 여기는 측면이 있기도 하고, 잘 하지 못한다는 건 어렴풋하게 알지만 무능하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기도 한다. 이렇듯 실상을 위에서 제대로 모를 수도 있지만 안다고 해도 함부로 바꿀 수 없는 사정도 있다. 인사를 손바닥 뒤집듯하면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올 수 있고 팀장들의 불안이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랫사람들 입장에서야 ‘못된 암 덩어리’를 제거하는 게 왜 조직의 불안을 야기한다는 건지 알다 가도 모를 일지만, 어쨌든 윗사람들은 대체로 그렇게 생각한다.일은 잘 하지만 조직 리드에는 서툰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경영진과 직원 사이에 있다 보니 무능이라는 멍에를 뒤집어쓸 때도 많다. 팀장이라는 자리 자체가 악역을 담당할 가능성이 다분한 까닭이다. 잊을 만하면 나오는 직장인 대상 조사에서 빠지지 않는 항목이 있다. “회사 발전을 가로막는 사람은?” 답은 거의 정해져 있다. 부장이나 팀장이다.이상한 건 회사마다 시스템이 다르고 업종이 다르고 사람이 다른데 부장이나 팀장만 욕을 먹는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서도 마찬가지다. 이 ‘꼰대’들이 승진해 고위 경영진이 되고, 팀장을 괴물로 지목했던 사람들이 그 자리에 앉으면 지목하는 대상이 변해야 하는데 이번에도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다. 언제나 팀장이 발전의 장애물이다.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리가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들 수도 있다. 팀장이라는 자리가 경영진의 의사나 결정사항을 실행 조직에 전달해야 하는 역할인 까닭이다. 전달사항이 직원들의 호응을 얻는 것이면 무슨 문제가 있겠냐마는 그러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게 문제다. 하고 싶은 일은 못 하게 하고 하기 싫은 일만 골라서 하라고 하니 어떻게 밉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 회사의 사장은 이런 말을 했다.“팀원들이 보는 팀장과 상사들이 보는 팀장은 다를 수 있어요. 팀원들이 바라는 팀장의 역할과 회사에서 바라는 팀장의 역할이 다를 수 있다는 겁니다. 회사에서 바라는 역할에 치중하느라 팀원들의 뜻대로 하지 못할 수도 있죠.” ━ 조직 요구 따라야 해 자리가 ‘악역’ 만들어 실제로 리더가 된 팀장은 직원들 입장보다 조직의 입장에 서야 하고 조직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냉혹한 말 같지만 팀장이라는 자리 자체가 위에서 시키는 걸 잘 하라고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조직에 대한 의존성 또한 높아지다 보니 위에서 결정한 걸 직원들에게 강제할 수밖에 없다. 이러니 직원들에게는 현실적이지도 않은 걸 밀어붙이는 팀장이 억압적이고 무능해 보일 수 있다.예나 지금이나 군대에서 맨 꼭대기에 있는 장군을 욕하는 병사는 거의 없다. 진격 명령을 내린 건 장군이지만 총알이 쏟아지는 전투에서 “왜 뛰어나가지 않느냐”고 닦달하는 건 소대장, 중대장이다. 원성도 이들이 가장 많이 받는다.팀장이라는 자리가 딱 그렇다. 볼멘소리를 가장 많이 들을 수밖에 없다. 요즘처럼 경영진과 직원들의 사이가 세대격차라는 이름으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이 괴리를 감당해야 하는 팀장의 어려움은 가중된다. 위에서는 “이것도 못하느냐”고 하고 아래에서는 “왜 이걸 해야 하느냐”고 한다.잘 살려면 ‘부모 복’ 다음으로 필요한 게 ‘상사 복’이다. 하지만 부모도 그렇고 상사도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여론조사기관인 갤럽이 여러 나라에서 조사해 보니 직장인의 65%가 ‘임금 인상’보다 ‘상사 교체’를 원했다. 마음에 안 맞는 상사들 때문에 속 터지는 사람이 숱하게 많다는 뜻이다.※ 필자는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이다. 조직과 리더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콘텐트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등이 있다.

2020.07.19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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