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해외정보' 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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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개혁 모델로 거론되는 모사드의 피투성이 역사 [채인택의 글로벌 인사이트]](https://image.economist.co.kr/data/ecn/image/2022/05/20/ecnfda2252e-4e4a-4b10-951e-359381f8de6b.353x220.0.jpg)
윤석열 대통령이 5월 11일 국가정보원 원장에 김규현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내정한 것을 두고 국정원을 해외와 대북 업무에만 집중하도록 조직과 기능을 바꾸기 위한 포석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과거 국정원장은 주로 대통령의 측근이나 중량급 정치인, 또는 북한과 직접 거래를 해본 인물을 중용해 왔지만 김 내정자는 외교관 출신이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 모사드처럼 해외·대북에만 국정원 업무 집중 기대 이에 따라 김 내정자가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원장에 취임하면 국정원을 이스라엘 해외정보·공작 기관인 모사드처럼 해외 업무에 집중하도록 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김 내정자 본인도 주변에 ‘국정원이 모사드처럼 변화가 필요하며, 정보부서 본연의 기능으로 정상화해서 멀리,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조직이 돼야 한다’는 주장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조직 이익이나 정치에 눈 돌리지 않고, 오로지 국가만 위해 일하는 투철한 신념의 기관으로 바꾸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서울대 치대를 졸업한 김 내정자는 대학 재학 중인 1980년 외무고시(14회)에 합격해 외교부에 입부했다. 외교부에선 북미1과장, 북미국 심의관, 주미 한국대사관 참사와 공사 등을 맡으며 대미 관련 업무를 많이 맡았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6~2007년 국방부에 국제협력관으로 파견돼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문제 등 한·미 국방 현안을 다뤘다. 박근혜 정부에선 외교부 1차관과 국가안보실 1차장, 대통령 외교안보수석 겸 국가안보실 2차장 등을 지내 국방 업무의 경험이 풍부하다. 안보실 1차장을 맡았을 때는 남북고위급 접촉 수석대표로 북측과 직접 대면했다. 외교는 물론 국방과 남북관계까지 경험이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국정원장을 맡을 만하다는 평가다. 이 때문에 김 내정자 발탁은 평소 잘 알고 있던 ‘내 사람’이 아니더라도, 전문성과 함께 국제 감각을 갖춘 인재에게 정보기관의 수장을 맡기려는 윤 대통령의 의중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인선으로 볼 수 있다. 윤 대통령이 김 내정자의 인선을 통해 자기 방식의 국정원 개혁의 시동을 걸었다는 이야기다. 윤 대통령의 개혁은 국정원 본연의 정보 능력 강화와 국정원의 국내 정치 개입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여기엔 지난 정권에선 오로지 정치 개입 차단만 강조하면서 능력 강화는 도외시했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시대와 환경 변화에 따르는 사이버·테러·사보타지(파괴공작)·방첩·디스인포메이션·미디어전 등 다양한 국가안보 도전 과제에 대응하기 위한 충분한 예산 투자와 인력·조직·장비·교육·훈련 마련, 그리고 법률적인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는 인식도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정원을 해외와 대북 업무에 치중케 함으로써 이 분야에 대한 정치권의 발목잡기와 국민의 의심을 차단하자는 의도도 읽힌다. 국내 정보에는 관여하지 않고 오로지 해외 정보 수집과 분석, 정세 판단, 그리고 비밀공작만 맡는 대표적인 조직이 모사드이기 때문이다. 해외 정보·공작기관인 모사드는 이스라엘의 국내 보안기관인 신베트(Shin Bet, 샤박(Shabak)이라고도 부름)와 군 정보국인 아만(Aman)과 함께 음지에서 이스라엘의 안보를 떠받히는 삼지창의 하나다. 이스라엘 밖에서 벌이는 정보수집과 암살·납치 작전은 모두 모사드의 임무다. 이스라엘 국내와 점령지인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와 골란고원에서 벌이는 모든 정보수집과 작전은 신베트의 관할이다. 군은 별도로 활동한다. 예로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에 거주하는 무장단체 지도자나 자폭공격에 쓸 폭탄이나 로켓 제조자를 아파치 헬기나 무인공격기, 또는 휴대전화 폭탄으로 표적 살해하는 공작은 모사드가 아닌 신베트나 이스라엘군이 맡아왔다. 모사드가 윤석열 정부 국정원의 롤모델로 떠오른 본질적인 이유는 정치와 활동의 분리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정권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국민의 사활이 걸린 정보 수집과 정세 판단, 그리고 비밀공작으로 존재가치를 나타냈다는 점에서 눈길이 갔을 것이다. 이 때문에 정보기관의 수장도 정권의 운명과 상관없이 자리를 계속 지켜왔다. 정보기관의 입장에선 정치적인 변화와 무관하게 오로지 국민과 국가를 위해 묵묵히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 받을 수 있다. 이는 모사드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아울러 국민이 정치권이 아닌 정보기관을 더 믿고 지지하는 게 당연시되면서 정치권력은 정보기관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정치적으로 이용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모사드는 실제로 전 세계의 정보기관 중 국민의 신뢰를 가장 많이 받는 조직으로 꼽힌다. 강력한 능력과 노하우, 그리고 전문 인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를 상대로 첩보수집과 공작활동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 강국 이스라엘을 받치는 조직이다. 특히 미국과 서방이 목말라 하는 이란·시리아 등 적성국의 정보를 어느 나라보다 풍부하게 확보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시리아 이란 등과 무기 거래를 해온 북한과 관련한 정보도 상당히 확보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문성과 능력을 모두 갖춘 해외 정보·공작 조직인 셈이다. 실적이 이를 말해준다. 이 따라 우방은 모사드에 손을 벌리고, 적성국은 모사드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 특수외교·정보수집·국민보호·무기조달 등 해외에 전념 이에 따라 윤 대통령과 김 내정자가 국정원 업그레이드의 롤모델로 삼고 있는 모사드가 과연 어떤 기관인가에 관심이 쏠린다. 모사드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독립투쟁 및 건국과 궤를 함께했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4일 건국했지만, 모사드는 1년여 뒤인 1949년 12월 13일에 공식 설립됐다. 하지만 정보수집과 파괴공작, 요인암살 등 관련 활동은 이미 건국 1년 전인 1947년에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건국을 위한 독립운동을 하면서 필요 때문에 활동이 벌어졌으며, 이를 통해 조직이 나중에 생긴 셈이다.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모사드의 모토는 이 기관의 정체성을 함축한다.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는 구약성서 잠언 11장 14절이 바로 모토다. 적을 색출하고 제거해 평화롭고 편안한 나라를 만들어 국민을 발 뻗고 잘 수 있도록 하는 게 조직의 목표라는 이야기다. 여기에는 이스라엘 건국 이념인 시온주의와 2000년간 유지해온 유대인 공동체의 정체성도 엿보인다. 모사드의 본부는 최대 도시인 텔아비브에 있다. 직원은 정확한 숫자를 알 순 없지만 일부 추정에선 1200명 정도라고 제시한다. 예산도 당연히 기밀이다. 모사드는 7대 목표도 눈여겨볼 수밖에 없다. 이는 곧 모든 해외정보·공작 기관이 지향해야 할 목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해외와 대북 업무에 집중할 윤 정부 시대 국정원의 실질적인 목표가 될 수도 있는 내용이다. 모사드의 첫째 목표는 해외에서의 비밀 정보수집이다. 이는 당연하고 평범한 목표다. 둘째 목표는 더욱 구체적이다. 적성국의 비재래식 무기 개발과 조달의 방지가 그것이다. 셋째 목표는 모사드의 정체성과 역사성, 그리고 유대 국가 이스라엘의 건국과도 연관이 있다. 바로 해외 이스라엘인에 대한 테러 예방이 그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국민이라는 이유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국민과 같은 민족이 세계 곳곳에서 핍박이나 봉변, 그리고 잔혹한 일을 당해온 게 사실이다. 이에 따라 이를 막는 게 이스라엘 해외 정보·공작 기관인 모사드의 주요 업무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한국의 경우 해외 국민 보호는 외교부가 맡아 ‘이라크·아프가니스탄·소말리아·시리아·예멘·우크라이나 등을 여행하는 것은 법에 따라 금지한다’고 고시하는 데 그친다. 이들 국가에 입국하려면 외교부의 특별입국허가를 받도록 하고 있으며 이를 어기면 법적이 제재를 가한다. 특별입국허가를 받으려면 방탄차에 무장경호원을 확보하도록 요구해 큰 이익이 걸린 기업인이나 직원이 아닌 이상 힘든 게 사실이다. 이런 방식보다 이들 국가에서 국가기관이 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국민 안전을 강화하는 노력을 하는 게 필요하다. 국제화되고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 입국 금지만으로 해외 국민 안전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무모할 뿐이다. 해외 국민 보호라는 원칙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이스라엘의 경우 이를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모사드가 맡은 게 다를 뿐이다. 국민 안전을 확보하려면 국민의 활동을 틀어막는 것보다 정보와 무력을 가진 국가기관이 나서는 게 맞을 것이다. 모사드의 넷째 목표는 특수외교 및 여타 비밀 관계의 발전과 유지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보 교류와 이를 바탕으로 하는 국익 확대 업무가 그것이다. 이스라엘의 모사드는 미국·영국 등 우방은 물론 전 세계 다양한 국가와 정보 교류를 한다. 모사드 활동의 특징은 은밀성에 있다. ‘우크라이나에 정보를 제공해 러시아군 장성을 표적 제거하도록 지원했다’는 기밀이 줄줄 새는 미국과 달리 이스라엘의 모사드는 기밀은 기밀로만 존재한다. 가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면 모사드가 했다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이 페르시아만(아라비아만) 연안의 산유국인 아랍에미리트(UAE)와 2020년 8월 13일 국교를 수립한 ‘아브라함 협정’은 누가 봐도 모사드의 작품이다. 모사드의 정보 수집과 공작이 외교 관계 수립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요시 코헨 모사드 국장이 UAE로 날아갔다. 다섯째 임무는 유대인의 해외이민을 공식 허용하지 않는 나라로부터 유대인을 탈출시키는 일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건국 정신을 모사드에 투사한 것이다. 실제로 모사드는 에티오피아·예멘 등에서 유대인을 데려오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섯째 임무가 전략·정치·작전 정보의 생산이다. 국가 전략을 마련하고, 국내에서 입법 활동 등 정치적인 행동을 하며, 안보나 보안과 관련해 무력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해외 정보를 모사드가 마련하는 것이다. 정치에 관여하는 게 아니라, 정치가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정확하고 유용한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모사드가 하는 것이다. 일곱째 업무는 겉으론 상당히 관료적인 표현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내용이다. 바로 ‘해외 특수작전 수립과 실행’이기 때문이다. 여기엔 이스라엘의 명성과 악명을 동시에 높여준 암살 작전을 포함한 해외 공작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물론 이들 공작은 대부분 모사드가 한 것으로 짐작만 할 뿐 뚜렷한 증거가 없는 ‘도깨비 공작’이다, 아울러 이스라엘 정부와 모사드는 작전을 절대 시인하지 않는다. 내가 했노라고 자랑하거나 홍보하지 않는다. ━ 유대인 보호, 적성국 무기개발자 제거 등 대외안보 주력 그런 모사드가 그동안 벌여온 위험한 작전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눠 살펴보자. 물론 모사드가 했다고 의심만 하는 사건이다. 첫째, ‘유대인을 해친 자는 반드시 보복 살해한다’는 원칙에 따른 공작이다. 대표적인 것이 1972년 뮌헨 올림픽 때 이스라엘 선수 11명과 독일 경찰 1명의 살해에 가담한 팔레스타인 검은구월단 조직원을 일일이 찾아서 제거하는 복수 작전이다. ‘신의 분노’라는 이름의 이 작전은 영화 ‘뮌헨’으로 잘 알려졌다. 1992년 6월 8일 프랑스 파리에서 이스라엘 강경파 무장조직인 하마스의 지도자 아테프 브세이소가 두 명의 총잡이에게 처형 방식의 근접 사격으로 살해됐다. 브세이소는 뮌헨 학살 관련자다. 1983년 8월 21일엔 그리스 아테네에서 뮌헨 학살 관련자이자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고위간부인 마문 메라이시가 오토바이를 타고 온 괴한에게 총격을 받고 숨졌다. 1979년 1월 22일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선 뮌헨 학살 기획자인 PLO 간부 알리 하산 살라메(별명 아부 하산)가 인근의 자동차 폭탄이 터지면서 목숨을 잃었다. 당시 폭발 위치가 보이는 건물의 2층에 수년간 거주하며 저녁 시간이면 고양이를 데리고 베란다에 나왔던 할머니가 있었는데 살라메가 폭사한 뒤 사라졌다. 살라메 제거 작전을 몇 년 간 준비한 것으로 보이는 증거다. 살라메는 PLO 내의 확고한 정치적 위치 때문에 ‘PLO의 황태자’로 불리며 항상 무장 경호원을 여러 대의 차량에 싣고 다녔지만, 상대의 치밀한 작전 앞에 목숨을 잃었다. 1972년 10월 16일 이탈리아 로마에선 뮌헨학살 관련자로 PLO의 현지 대표이자 리비아 대사관 직원인 압델 와엘 즈바이터가 자신의 아파트 입구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아날로그 전화기로 통화하다 전화기 안에 숨긴 폭탄에 터지면서 숨진 경우도 있다. 이스라엘 국적기나 이스라엘인·유대인이 탑승한 여객기를 납치한 테러범의 상당수도 비슷하게 최후를 맞았다. 1960~70년대 여객기 납치에 관여했던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의 지휘관 와디 하다드가 거주해온 동독에서 1978년 3월 28일 독이 든 초콜릿을 먹고 한 달 뒤에 사망했다. 1971년 7월 8일엔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팔레스타인 작가이자 여객기 납치 관련자인 가산 카나파니가 자동차 폭탄으로 숨졌다. 1972년 7월 25일 같은 도시에 살던 여객기 납치 관련자 바삼 아부 샤리프가 배달된 책이 폭발하면서 손가락 네 개를 잃고 한 눈이 실명했으며 한쪽 귀의 청력을 잃었다. 둘째, 모사드는 공작을 벌이면서 ‘이스라엘을 직접 위협할 수 있는 무기 개발자는 살려두지 않는다’는 원칙을 적용해왔다.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험한 천적으로 통하는 이란의 핵무기 개발자가 우선 타격 대상이다. 실제로 이란 핵 과학자는 자신의 나라에서 줄줄이 살해됐다. 2020년 11월 27일 이란 수도 테헤란 인근의 소도시인 아브사드르에서 핵 과학자인 모셴 프크리자네는 경호원이 탑승한 두 대의 자동차의 호위를 받으며 자신의 자동차를 타고 출근하다 140m 거리에 주차된 픽업트럭에서 발사된 원격조종 기관총으로 살해됐다. 파크리자데는 헬기 편으로 병원에 이송됐지만 숨졌으며, 원격조종 기관총이 장착된 트럭은 원격조종 폭탄이 터지면서 파괴됐다. 2012년 1월 11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의 거리에서 핵 과학자인 모스타파 마흐말디 로샨이 자석 폭탄으로 피살됐다. 2011년 4월 9일엔 역시 테헤란에서 이란 핵 과학자인 다리우슈 레자이에가 오토바이에 탄 총잡이의 총에 맞아 숨졌다. 2010년 11월 29일엔 같은 도시에서 이란 핵 과학자 마지드 샤흐리아르가 자동차 폭탄으로 폭사했다. 이란은 물론 팔레스타인의 무기 조달책도 제거 대상이다. 2010년 1월 19일 UAE의 두바이에선 팔레스타인 강경파 무장조직인 하마스의 무기·폭탄 조달 담당인 마무드 알마부가 호텔 방에서 질식사했다. 당시 여러 명의 수상한 남녀가 호텔 CCTV에 찍혔지만, 유럽 국가 여권을 가진 이들은 당일로 항공편으로 이 나라를 떠났다. 1990년 이스라엘의 적인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위해 장거리 야포를 개발하던 캐나다인이 피살된 사건에도 모사드의 냄새가 난다. 1990년 3월 20일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캐나다인 대포 개발자 제럴드 벌이 자신의 아파트 문 앞에서 총격을 받고 숨졌다. 벌은 사담 후세인을 위해 이라크에서 이스라엘을 직접 포격할 수 있는 최대 사거리 750km의 초대형 대포를 개발하고 스커드 미사일의 사거리와 정확도를 높이는 개량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다. 1980년 6월 13일엔 프랑스 파리에서 이집트인으로 이라크 핵 개발 책임자였던 폐히아 엘마샤드가 프랑스 파리의 메리디앙 호텔 객실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 1962년 11월 28일 이집트 할루안의 로켓 공장인 팩토리 333에선 우편물 폭탄이 터져 로켓 엔지니어 다섯 명이 목숨을 잃었다. 1962년 9월 11일엔 독일 뮌헨에서 이집트 미사일 개발을 돕던 서독 로켓 과학자 하인츠 크루크가 사무실에서 피랍된 뒤 영영 행방불명됐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1948년 독립전쟁, 1952년 수에즈 위기, 1967년 6일 전쟁, 1973년 욤키푸르 전쟁 등 4차례에 걸쳐 짧지만, 대대적인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양측은 힘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1978년 9월 17일 미국에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맺고 점령지를 돌려주는 조건으로 국교를 수립했다. 이 과정에도 모사드가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알려지고 모사드가 한 것으로 의심을 받은 일만 이 정도다. 모사드가 했다는 증거가 따로 없는 사건이 대부분이다. 이스라엘에 작전의 동기가 있으며, 모사드가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공작일 경우 모사드가 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정보과 공작 세계의 일반적인 상식이다. 윤 대통령이 지향하는 모사드의 실체다. 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하고, 얼마나 오랫동안 공을 들이고, 역대 지도자들이 조직을 믿고 애정을 쏟았는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다만 그런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의 모사드나, 이 기관이 그동안 쌓아온 실적은 없었을 것이란 점이 명백할 뿐이다. 물론 국정원도 보안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실적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모사드가 누리는 신뢰를 확보하고 국민의 사랑을 받으며 적이 두려워하게 되려면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물론 멀고 험해도 가야 할 길이다. 국민과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 말이다.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2022.05.14 19:00
10분 소요![‘중동 유일 민주국가’ 이스라엘, 12년 장수 총리 물러나고 새 시대 시작 [채인택 글로벌 인사이트]](https://image.economist.co.kr/data/ecn/image/2021/06/20/ecn6a2590a6-e8bf-414c-9e36-84cf4dd25608.353x220.0.jpg)
이스라엘에서 12년 만에 정부 수반인 총리가 바뀌면서 중동의 사실상 유일한 세속 민주국가로 자리 잡은 이 나라의 정치 제도에 관심이 쏠린다. 새 정부는 이스라엘 크네세트(국회)가 6월 13일 표결에서 극우·중도·좌파·아랍계 등 8개 정당이 참가한 새 연립정부를 승인하면서 탄생했다. 이로써 2009년 3월부터 연속 12년간 총리로 재직했던 베냐민 네타냐후(71)는 자리에서 물러나 야당인 리투드(통합)의 대표가 됐다. 이스라엘은 ‘포스트 네타냐후’ 시대를 맞았다. 네타냐후는 1996~1999년 이어 2009~2021년까지 모두 15년간 총리를 지내 이스라엘의 최장수 총리 기록을 세웠지만 이번엔 연정 구성에 실패해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번 총리 교체로 이스라엘은 네타냐후가 6월 1일 교체한 해외정보공작기관 모사드의 다비드 바르네아 국장, 크네세트가 6월 2일 선출해 7월 9일 취임할 이삭 헤르초크 대통령까지 국가 권력의 실질적인 3대 핵심 자리가 바뀌게 됐다. 이스라엘로서는 정부를 대표하는 세 인물이 한꺼번에 교체되면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는 셈이다. 이스라엘은 2019년 4월과 9월, 그리고 2020년 3월과 올해 3월 23일 등 지난 2년간 총선을 네 번씩 치를 정도로 극심한 정치적 분열과 위기 상황을 겪었다. ━ 신임총리, ‘초강경 우파’ 나프탈리 베네트 이번에 연립정부를 구성한 8개 정당은 전체 120석의 크네세트 의석 중 61석을 차지해 아슬아슬한 과반을 유지한다. 네타냐후 지지파는 리쿠드 30석을 포함해 모두 57석의 의석으로 집권 연립을 압박하게 된다. 네타냐후의 리쿠드는 2020년 3월 선거에선 36석, 2019년 9월엔 33석, 4월엔 35석을 각각 차지하면서 제1당을 차지해 연정 구성을 주도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1당이 되면서도 연정 구성에 실패해 정권을 넘겨주게 됐다. 새 총리는 극우 정당인 야미나(우파)의 나프탈리 베네트 대표(49)가 첫 2년 간 맡게 된다. 그 뒤 2년은 연정 구성 당시 합의에 따라 중도자유주의 정당인 예시 아티드(미래는 있다)의 야이르 라피드(57) 대표가 이어받기로 했다. 연정이 무너져 새 총선을 치르게 되면 합의는 무효가 된다. 정체성이 극과 극인 다른 정당들이 반(反) 네타냐후와 정권 획득이라는 목적 아래서 손을 잡은 연정인 만큼 이 약속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길게 갈지는 알 수 없다. 네타냐후가 지난해 3월 36석을 획득한 상황에서 정적인 베니 간츠 전 군참모총장이 이끄는 청백연합과 연정을 구성하면서도 총리를 우선 네타냐후가 맡은 뒤 간츠에게 물려주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네타냐후는 그 전에 크네세트를 해산하고 3월 23일 새 총선을 치렀다. 총리직 물려주기 약속의 정치적 허망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동안 이스라엘에선 네타냐후 총리가 팔레스타인에 맞서는 등 지나치게 우파 드라이브를 건다는 비판이 많았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등에 유화적인 반네타냐후 그룹이 서로 힘을 합치는 일이 맞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독특하게도 네타냐후보다 더 강력한 반팔레스타인 정책을 외치면서 극우파 소리를 듣는 베네트가 총리를 맡는 일이 벌어졌다. 이스라엘 정치의 아이러니다. 베네트 신임 총리는 이날 연설에서 “모든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고 말했지만, 발언대로 정치를 펼지는 의문이다. 우파 중에서도 팔레스타인을 독립시키는 2국가안에 반대하고, 요르단강 서안지구에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강하게 지지하며, 가자지구를 장악한 이슬람주의 무장 정파인 하마스를 폭격으로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해온 초강경파이기 때문이다. 그와 비교하면 강경파로 분류되는 리쿠드와 네타냐후 전 총리도 유화파로 보일 정도다. 리쿠드와 네타냐후는 중도 우파, 또는 우파로 분류되지만 베네트는 우파 또는 극우파로 분류된다. 베네트는 네타냐후의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했지만, 팔레스타인 등에 더욱 강력한 압박을 주장하면서 2013년 유대인의 집이라는 정당 대표로 나갔으며, 2018년 신우파 대표를 맡았다가 2019년 야미나(우파)를 창당해 대표를 맡고 있다. 2013년 이후 리쿠드와의 연정에 참여하면서 경제·종교·디아스포라·교육·국방·지역 장관 등을 맡아왔다. 이번 연정 구성에서 리쿠드 및 네타냐후와 일시 결별한 셈이어서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할 가능성이 있다. 베네트는 미국과의 동맹을 강조하면서도 조 바이든 행정부의 이란 핵 합의(JCPOA) 복귀에는 반대의 목소리를 높인다. 베네트는 신임투표 직전 연설에서 “이란의 핵무기 획득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바이든 행정부를 향해선 “JCPOA 복귀는 세계에서 가장 폭력적인 정권을 정당화하는 실수”라고 주장했다. 중동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가장 숙적인 이란에 대해선 이스라엘 정치인들이 여야 할 것 없이 우려의 목소리를 높인다. 이스라엘의 생존과 관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란은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댄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알라위파(시아파의 한 분파) 정권과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장파인 헤즈볼라를 군사적으로, 재정적으로 지원한다. 레바논에서 가끔 이스라엘 북부 하이파 인근으로 떨어지는 로켓은 이란이 헤즈볼라에 지원한 무기로 볼 수 있다. 이란은 가자지구를 장악한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발사하는 로켓의 원료와 기술을 제공했을 것으로 의심을 받는다. 따라서 이란에 유화적인 이스라엘 정치인은 기본적으로 없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스라엘에서 일부 유대교 ‘원리주의자’가 이란이 여는 국제 행사에 참여하기는 한다. 이들은 초정통파 유대교도의 일부로 ‘인간이 이스라엘을 인위적으로 건국한 것은 하느님의 뜻과 어긋난다’고 주장하며 이스라엘의 건국 자체에 회의적인, 독특한 분파다. 베네트는 이란에 특히 반대의 입장을 표시한다. 문제는 새로 들어선 미국의 조 바이든 행정부가 트럼프가 탈퇴했던 이란 핵 합의(JCPOA) 복귀를 추진한다는 점이다. 이란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과 미국과의 동맹 강조는 정치적으로 이율배반적이다. 여기에 베네트의 과제가 있다. 이번 정권 교체로 이스라엘의 민주주의 체제가 새삼 관심을 받는다. 이스라엘 하면 흔히 안보에서 일사분란하고 국론이 통일된 나라로 한국에 알려졌다. 하지만 이스라엘 정치를 살펴보면 각자 서로 다른 목소리 내는 다원주의와 민주주의를 추구해도 안보와 경제가 문제없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이스라엘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을 안보중심·일사불란·극론통일의 나라로 여기는 것은 한국에서만 진행됐던 안보 ‘상징조작’의 일부인 셈이다. ━ 이스라엘, 다원주의 정치의 실천현장 이스라엘은 120석을 확보한 의회인 크네세트가 국정의 핵심이다. 의회가 선출하는 대통령은 의전을 주로 맡으며 정치적으로는 제 1당 대표에게 형식적으로 정부 구성권을 의뢰하고, 시일 안에 정부를 구성하지 못하면 제 2당에 이를 넘기는 등의 일을 맡을 뿐이다. 이스라엘 총선은 의원내각제이며, 선거는 정당명부제 투표로 치른다. 유권자는 개별 후보가 아닌 정당에 투표한다. 2019년 4월 이스라엘 총선을 현장에서 참관했더니 거리에 붙은 각 정당의 홍보 현수막이나 벽보에는 대표의 얼굴 사진만 보였다. 투표소에 가봤더니 각 정당의 약자가 검게 히브리문자로 적힌 기다란 투표용지 샘플이 벽에 붙어 있었다. 당시엔 50개가 넘는 정당이 나왔는데, 올해 3월 23일 총선에선 39개 정당이 나왔다. ‘팔레스타인 폭격’으로 하마스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대놓고 외치는 극우, ‘사회주의 실현’을 주장하는 극좌, 중도파에다. 유대교 종교 정당,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이주한 스파르드 유대인 정당, 동유럽에서 이주한 아슈케나즈 유대인 정당, 러시아에서 이주한 유대인 정당, 이스라엘 건국 뒤에도 고향에 남은 아랍인들이 만든 아랍계 보수 정당까지 다양한 정당이 존재한다. 이스라엘 정치는 그야말로 다원주의 정치의 실천 현장이다. 이스라엘 총선은 3.25% 이상 득표한 정당만 의석을 배분 받는다. 나머지 정당은 해산되고 다음 총선 때 다시 창당할 수 있다. 올해 총선에선 13개 정당만 3.25%의 벽을 넘어 의석을 배분 받았다. 이번 총선에선 리쿠드당이 24.19%의 지지율로 지난번보다 7석이 줄어든 30석으로 제 1당을 차지했지만 연정 구성에 실패해 정권을 넘겨줬다. 무지개 연합에 참여한 이스라엘의 정당을 살펴보자. 중도 정치인 야이르 라피드가 대표를 맡은 예쉬 아티드(미래는 있다)가 13.93%의 지지율로 4석을 늘려 17석을 차지해 제 2당이 됐다. 네타냐후가 연정을 구성하지 못하자 구성권은 제2당 당수인 라피드에게 넘어갔다. 라피드는 연정을 구성해 네타냐후를 총리 자리에서 밀어내기 위해 6.21%의 지지율로 7석을 차지한 극우 정당 야미나의 베네트 대표를 총리로 민 것으로 알려졌다. 베니 간츠 전 군 참모총장이 이끄는 청백연합은 6.63%의 지지율로 지난번보다 6석이 줄어든 8석으로 이번 연정에 참여했다. 지난해 네타냐후와 연정을 구성해 국방부 장관을 맡았던 간츠도 무지개 연합으로 말을 갈아탔다. 간츠는 원래 반네타냐후 정치인으로 그에게 날을 세워왔다. 하지만 지난해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다시 선거를 치르기도 만감한 상황이 되자 일단 총리직을 순차적으로 맡기로 하고 연정 구성에 합의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당이 정체성 혼란을 겪고 지지율도 떨어져 의석수도 줄면서 원래의 반네타냐후로 복귀한 것으로 보인다. 전통의 좌파 정당인 노동당은 6.09% 지지로 7석 확보에 그쳤다. 중도우파 정당인 이스라엘 베이테이누(이스라엘 우리의 집)이 5.63%로 7석을, 좌파 정당인 메레츠가 4.59%로 지난 선거 때보다 3석이 많은 6석을 각각 배분 받았다. 민족주의·자유주의 정당인 새희망이 4.74% 지지로 6석을 차지했다. 여기에 아랍인 정당인 라암(아랍연합의 약자)이 3.79%의 지지율이라는 턱걸이로 4석을 배분 받았다. 이렇게 모두 8개 정당이 연정을 구성했지만, 라암은 내각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이렇게 극우·극좌·아랍 정당까지 반네타냐후 ‘무지개 연합’ 8개 정당이 함을 합쳐 정권을 교체한 것이다. 지난해 총선 이후 네타냐후의 리쿠드 등과 연립정권을 이뤘던 청백연합의 간츠 국방부 장관은 새 정권에 참여해 국방부 장관 자리를 계속 유지한다. 만일 네타냐후가 크네세트 해산과 새 총선을 치르는 대신 사임했다면 간츠는 총리 자리를 물려받아 남은 크네세트 임기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했을 것이다. ━ 복잡한 정치에도 ‘안보와 경제’ 두 마리 토끼 잡아 이렇게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특유의 정치 지형 속에서도 이스라엘은 안보와 경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 왔다. 네타냐후 집권 시절 ‘스타트업 국가’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4만 달러대에 진입했다. 국제통화기금(IMF) 2020년 추정치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명목 금액 기준으로 1인당 GDP가 4만4474달러로 세계 19위의 부자 나라다. 한국과도 경제와 군사 분야에서 협력하고 있으며 발전 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 이스라엘이 비즈니스 아이디어 중심의 스타트업 산업은 발달했지만 이를 글로벌 경제 현장으로 연결한 산업체는 별로 없어 한국과 협력하면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다. 2021년의 정권 교체로 관심을 받는 ‘중동 유일 민주국가’ 이스라엘은 이렇게 다양성을 추구하는 정치로 안보와 경제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 온 셈이다. 문제는 한 정당이라도 반대하면 법안을 통과 못 하는 독소 조항을 이번 연정 조건에 삽입했다는 점이다. 베네트의 극우 정책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정치적 장치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분열 가능성을 키우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2차례 15년 집권했다. 이번에 물러난 네타냐후 전 총리가 총리로서 마지막 연설에서 “예상보다 빨리 돌아오겠다”고 말한 배경이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2021.06.2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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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언론인 로넨 베르그만, 신저에서 정보기관 모사드의 ‘표적 제거’ 작전과 관련된 실화 폭로해 스파이를 다룬 소설은 주로 작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이언 플레밍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해군 정보장교로 복무한 경험을 기초로 소설 ‘007 제임스 본드(James Bond)’ 시리즈를 썼다. 존 르 카레(본명 데이비드 콘웰)는 영국 정보기관 MI6에서 일하는 동안 자신의 첫 첩보 스릴러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를 집필했다. 제이슨 매튜스는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 출신으로 모스크바에서 옛 소련 정보기관 KGB의 감시팀을 따돌린 경험을 토대로 소설 ‘레드 스패로(Red Sparrow)’ 3부작을 펴냈다.그러나 이스라엘의 언론인 로넨 베르그만(45)은 그들과는 약간 다른 접근법으로 스파이와 암살이라는 어둔 세계의 실상을 파헤쳤다. 1990년 이스라엘 방위군에 징집된 그는 3년 동안 방위군 범죄수사국에서 정보원을 포섭하고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다. 그동안 그는 군 내부의 부패와 마약 거래, 무기 밀매 등의 범죄를 조사했다. 베르그만은 그곳에서 배운 기술을 활용해 이스라엘의 3대 정보국(해외정보국 모사드, 국내보안국 신베트, 군정보국 아만)의 은밀한 역사를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기록했다. 최근 ‘일어나 먼저 죽여라: 이스라엘 표적 암살의 비사(Rise and Kill First: The Secret History of Israel’s Targeted Assassinations)’를 펴낸 그는 출판 홍보행사의 인터뷰에서 “실제 정보원들을 모집하고 관리한 경험과 훈련 덕분에 그들이 처하는 상황과 사고방식을 잘 알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대다수 이스라엘 남자가 그렇듯이 베르그만은 지금도 예비군에 소속돼 있다. 법에 따라 51세까지 의무적으로 복무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군 복무와 이스라엘 정보기관에 관한 리포팅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고 말했다. “난 내가 군에서 맡은 직무에 관해선 쓰지 않는다. 지금 내가 리포팅하는 것과 실제 나의 직무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그럼에도 그의 군 경력이 이스라엘 정보기관들에서 신뢰를 얻는 데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하다. 이스라엘에서 최대 부수를 자랑하는 신문 예디오트 아로노트의 선임 정치·군사 분석가로 일하는 그는 칼럼과 책(지금까지 9권을 써냈다)을 통해 이스라엘 정보기관들의 내부 상황을 자주 폭로한다. 그러면서 베르그만은 전 세계 국가안보 전문가들의 필독서 작가로 부상했다. 그는 ‘일어나 먼저 죽여라’를 쓰기 위해 이스라엘의 전·현직 관리 1000여 명을 인터뷰했다고 밝혔다.이 책은 이스라엘의 적을 대상으로 한 정보기관들의 ‘표적 암살’(그들의 은어로 ‘부정적인 취급’이라고 표현된다) 60년 약사를 기록했다. 이스라엘의 적은 처음엔 나치 독일의 전범 도망자와 로켓 과학자였지만 그 후로 아랍 지도자들, 이라크 핵프로그램 관리들(사담 후세인 시절), 이란 핵프로그램 소속 과학자들까지 다양하게 변해왔다. 물론 늘 그렇듯이 팔레스타인 지도자들과 레바논의 친이란 무장 정파 헤즈볼라의 지도부도 그들의 ‘제거 대상’이었다.‘일어나 먼저 죽여라’는 제목은 유대인의 지혜를 담은 ‘탈무드’에 나오는 ‘누군가 너를 죽이러 오면 일어나 그를 먼저 죽여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그의 책이 ‘이스라엘의 주요 암살작전이 끝없이 이어져 마치 경찰 사건기록부처럼 읽힌다’는 서평도 있다. 그러나 이 책(약 750쪽 분량으로 주석이 많이 달렸다)은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수장들이 고백하는 도덕적인 거리낌과 실수, 실책을 담았다는 점에서 특히 의미가 크다. 잘못된 표적이나 무고한 제3자를 실수로 암살하거나 평화협상에서 좋은 파트너가 됐을 법한 팔레스타인 지도자를 제거한 일 등이 그런 사례다. 집필하면서 진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적이 있는지 기자가 묻자 그는 “물론이다”라고 말했다. “하루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텔아비브 북부의 한 카페에서 공군 장교 출신과 만나 다양한 주제를 두고 얘기를 나눴다. 도중에 그는 내게 ‘오랫동안 비밀로 간직했지만 이제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다.”1982년 당시 이스라엘 국방장관이던 아리엘 샤론의 지시로 이스라엘 공군 조종사들이 민간 항공기를 격추시킬 뻔했다는 일화였다. 모사드가 그 여객기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수반이었던 야세르 아라파트가 탑승했다고 잘못 판단한 결과였다.모사드가 마지막 순간 착오를 발견해 공군에 통보함으로써 수많은 탑승객이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 그중엔 아라파트와 빼닮은 동생 파티, 팔레스타인 적십자사를 설립한 소아과 의사, 또 그가 이집트 카이로로 데려가 치료 받도록 하려던 부상한 팔레스타인 어린이 30명이 포함돼 있었다.또 책에서 베르그만은 아라파트의 2004년 사망이 샤론 장관(오랫동안 아라파트 암살에 집착했다)의 지시에 의한 독살이었을지 모른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안다고 해도 이스라엘의 군검열관이 그 문제에 관한 언급을 금지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밝힐 순 없다고 적었다(그러나 프랑스 검찰은 독살 논란을 일축하고 아라파트의 죽음이 자연사임을 재확인했다).베르그만은 “지난 20년 동안 난 이스라엘군의 검열과 정부를 상대로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그는 몇 차례 심문을 당했다며 “당국이 나의 취재원을 고발하기도 했다”고 돌이켰다. “2010~2011년 육군 참모총장이 나를 반역 혐의로 조사하라고 이스라엘 법무부에 공식 요구했다. 그들은 나와 내 책을 맹렬히 공격했다.”그러나 그런 조사 과정에서 베르그만은 많은 우군을 얻었다. 특히 모사드 내부에도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는 듯하다(최근의 모사드 간부들은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이끄는 우익 정부와 가끔씩 공개적으로 불화를 빚었다). 따라서 타미르 파르도 전 모사드 국장이 그의 책을 호평한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여러 모사드 전 국장이 베르그만의 취재원이었다). 파르도 전 국장은 “이 주제에 관한 책 중 가장 인상적”이라며 “허구적인 소설이 아니라 실제 취재를 통해 쓴 최초의 기록”이라고 평가했다.소설과 영화에선 모사드가 실제보다 과장된 거창한 기관으로 묘사된다. 허구가 많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2005년 영화 ‘뮌헨’에서 묘사된 것처럼 1972년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 11명과 독일 경찰 1명을 살해한 팔레스타인인 테러단 ‘검은 9월단’ 대원을 모사드 요원들이 한명씩 추적해 암살했다는 것이 가장 터무니없는 허구 중 하나다. 베르그만은 “뮌헨 올림픽 학살 관련자 대다수는 잡히거나 암살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물론 모사드는 누구든 가능하다면 암살했다. 그러나 그들이 제거한 표적 대다수는 뮌헨 사건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는 암살단 팀장이었다고 주장하는 이스라엘인이 쓴 책을 바탕으로 제작됐지만 그 저자는 사실은 텔아비브 공항의 ‘수하물 조사관’이었다고 베르그만이 설명했다. 그러나 실제로 모사드는 그 후 수십 년 동안 팔레스타인인 표적 수십 명을 ‘제거’했다. 또 헤즈볼라를 상대로도 무자비한 작전을 펼쳤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에서 2008년 모사드는 CIA의 협조를 받아 헤즈볼라 사령관이던 이마드 무그니예를 자동차 폭탄으로 암살했다.베르그만에 따르면 모사드의 암살 작전은 총리의 승인이 있어야 했다. 모사드는 ‘독자적인 기관’이 아니다. 총리의 승인이 떨어져야 암살팀을 파견할 수 있다. 그러나 정보기관이 반드시 총리와 뜻이 맞는 건 아니다. 네타냐후 총리는 2015년 총선을 앞두고 이란의 핵폭탄에 대한 국민의 두려움을 부추기며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프로그램을 표적으로 선제공격할 수 있다고 시사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자신의 의도를 강조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군사훈련도 실시했다. 그러자 일부 전직 정보기관 책임자들이 과잉 대응을 경고하고 나섰다. 모사드에서 무자비하기로 악명 높았던 메이어 다간 전 국장은 “정신차려라!”며 경종을 울렸다. 네타냐후 총리의 노선에 반대하는 그는 “이스라엘 국민이 두려움과 불안의 인질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며 “우리 국민은 그런 공포에 밤낮으로 시달린다”고 말했다.과거엔 그런 위엄 있는 이스라엘인의 발언이 ‘신성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고 베르그만은 책에서 지적했다. 하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그는 “옛 엘리트층의 힘이 거의 다 빠져버렸다”고 설명했다. “아랍 땅에 사는 유대인, 유대교 정통파, 우익 등의 새로운 엘리트층이 부상하고 있다.” 온건 노선이 무시되고 극단주의가 유행한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서안 점령지와 예루살렘 전체의 절대적인 영유권을 주장한다. 연립정부를 구성한 유대교 정통파 정당들은 이스라엘 민주주의가 아니라 유대인 신정 정치를 주창한다. 이스라엘의 ‘미즈라히 유대인’(그들 중 다수는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될 때 아랍 국가들에서 추방됐다)도 그들과 같은 편이다. 지금 이스라엘에선 정보기관들이 외부와 내부의 위협 요인 둘 다를 적극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지지를 받는다. 문제는 그런 전술적 승리가 평화는커녕 기껏해야 즉각적인 위협을 잠시 완화해주는 효과뿐이라는 사실이다. 시리아와 이라크의 혼돈 상황, 가자 지구의 로켓 공격, 레바논 남부의 미사일 위협, 이란의 호전성 등을 고려하면 이 지역에서 이제 70년째로 접어든 폭력의 악순환이 가라앉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베르그만의 책에서 두드러지는 아이러니 중 하나는 모사드·신베트·아만의 여러 책임자들이 임기 동안 손에 많은 피를 묻혔으면서도 퇴임 후엔 “이제 그만!”이라고 외친다는 사실이다. 신베트 책임자를 지낸 아미 아얄론은 베르그만에게 “‘악의 평범성’이라고 할 만하다”고 말했다. ‘악의 평범성’이란 악행이 성격파탄자나 정신이상자 같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조직 내 수긍 잘하고 상부의 명령에 잘 따르는 성실한 일반인에 의해 자행된다는 개념을 가리킨다. 2012년 제작된 다큐멘터리 ‘게이트키퍼(The Gatekeepers)’에서 전직 신베트 수장들이 공통적으로 느낀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작전이 계속되다 보면 암살에 너무나 익숙해진다. 사람의 생명을 대수롭지 않게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그렇다면 이스라엘 정보기관들이 그런 표적 암살로 무엇을 이뤘을까? 아얄론은 2012년 다큐멘터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린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려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린 더 많은 테러에 시달린다.”- 제프 스타인 뉴스위크 기자※
2018.03.02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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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이란의 사이버 전쟁 다룬 알렉스 지브니 감독의 다큐 스릴러 ‘제로 데이스’, 전쟁의 패러다임 바꾼 스턱스넷 바이러스를 추적한다 2012년 8월 15일 정체불명의 자기복제 컴퓨터 바이러스가 세계 최대의 석유 회사 사우디 아람코를 공격했다. 이 사이버 공격으로 3만 대의 컴퓨터에 들어 있던 모든 소프트웨어와 어마어마한 분량의 정보가 지워졌다. 4개월 후 또 다른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뱅크 오브 아메리카와 웰스 파고 등 10여 개의 미국 주요 은행을 공격해 온라인 서비스가 수 차례 중단됐다. 전문가들은 이 두 공격의 기술적 복잡성으로 미루어 볼 때 외국 정부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대외적으론 어떤 대응도 하지 않고 민간 부문에 피해 처리를 맡겼다.하지만 오바마 대통령과 그의 최고 보좌관들은 그 공격이 누구의 소행인지, 또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보다 얼마 앞서 미국과 이스라엘은 스턱스넷(Stuxnet) 바이러스를 이용해 이란 핵 프로그램의 핵심이었던 나탄즈의 원심분리기 1000여 대를 파괴했다. 미국 측은 미국 주요 은행에 대한 사이버 공격이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이란 정부가 저지른 일이라고 결론 내렸다. 리처드 클라크 당시 백악관 사이버 보안 특별 고문은 이렇게 말했다. “백악관 관리들은 이 공격이 ‘스턱스넷으로 나탄즈를 공격했던 것과 같이 사이버 공간에서 우리를 공격하는 행위를 멈추라’는 이란의 메시지였다는 걸 알았다. 이란 측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알렉스 지브니 감독의 다큐 스릴러 ‘제로 데이스(Zero Days)’는 이 전례 없는 사이버 전쟁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한 국가(혹은 일단의 국가)가 사이버 무기를 공격 목적으로 사용한 첫 번째 사례다. 지브니 감독은 가톨릭 교회의 성학대, 미 중앙정보국(CIA)의 고문, 사이언톨로지 교회 등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으며 에미상과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이번엔 그가 완전히 새로운 부류의 대량파괴 무기인 사이버 무기 개발에 초점을 맞췄다. 이 영화의 제목 ‘제로 데이스’는 잘 알려지지 않은 소프트웨어의 취약점을 나타내는 컴퓨터 용어에서 따왔다. 제로데이 취약점은 문제의 존재를 널리 알리거나 해결책을 마련할 겨를도 없이 해커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는 보안상의 취약점을 말한다. 지브니는 이 강력한 사이버 무기가 어떻게 한 나라의 전력망이나 수도 공급, 항공 교통 관제, 금융기관, 민간 및 군사 커뮤니케이션을 신속하게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공격자의 신분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말이다.그는 또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사이버 무기를 둘러싼 비밀주의가 그 파괴적인 힘과 관련해 반드시 필요한 논의를 방해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논의의 부재가 사이버 무기 사용 제한을 위한 효과적인 대책 마련에 걸림돌이 된다는 설명이다.‘제로 데이스’는 2010년에 일어난 한 사건을 극화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 시내에서 오토바이를 탄 두 남자(얼굴은 헬멧으로 가려졌다)가 달리는 자동차 옆으로 바짝 다가간다. 차 안에는 이란의 핵 과학자 두 명이 타고 있다. 오토바이를 탄 남자들은 차 문에 시한폭탄을 붙이고 달아나고 몇 초 후 폭탄이 터져 과학자들이 죽는다.이스라엘이 이런 공작과 공습 위협을 통해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중단시키려 한다는 소문이 널리 믿어지던 시절의 이야기다. ‘제로 데이스’는 이 싸움의 감춰진 이면을 조명한다. 미국과 이스라엘 공작원들이 폭탄급 핵 연료를 생산하는 이란 시설을 파괴할 바이러스를 어떻게 투입했는지 보여준다. 그들은 사실상 사이버 전쟁의 새 시대를 열었다.뉴욕타임스의 데이비드 생거 기자는 2012년 저서 ‘직면과 은닉(Confront and Conceal)’에서 ‘올림픽 게임’이라는 암호명으로 불리던 미국과 이스라엘의 합동 작전을 폭로했다. 스턱스넷 바이러스는 2008년과 2009년을 전후해 2년 이상 이란의 나탄즈 핵농축 시설에 있는 원심분리기의 속도를 교란시켜 결국 폭발하게 만들었다. 스턱스넷 바이러스가 세상에 알려진 건 2010년 이 바이러스의 좀 더 공격적인 버전을 실험할 때 프로그래밍 상의 실수로 바이러스가 세계 곳곳의 인터넷으로 확산됐기 때문이다.지브니가 이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려고 나섰을 때 미국이나 이스라엘 관리들로부터 스턱스넷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여전히 기밀사항으로 분류돼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독일의 사이버 보안 전문가들도 협조를 거절했다. 그래서 지브니는 다른 사이버 보안 전문가들에게 이 바이러스의 작동 방식에 관한 설명을 요청했다. 그들은 나탄즈에 침투한 스파이가 썸드라이브(컴퓨터의 USB 포트에 꽂아 사용할 수 있는 휴대용 데이터 저장 기기)를 이용해 인터넷에 연결되지 않은 컴퓨터 네트워크에 바이러스를 투입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리고 일단 바이러스가 원심분리기를 교란시키기 시작한 이후엔 정상 신호가 담긴 기록을 재생시켜 운영팀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원심분리기가 폭발했을 때 이란 기술자들은 그 이유를 모른 채 자신들이 뭔가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지브니의 조사에 따르면 스턱스넷의 개발은 조지 W 부시 정부 말년에 시작됐다. 그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CIA와 미 국가안보국(NSA), 사이버 사령부가 개입된 대규모 작전이었다고 말했다. 이스라엘 측에서는 모사드(비밀 정보 기관)와 해외정보국, 8200 부대(통신정보 부대)가 관여했고 영국 정보통신본부도 협조했다. 스턱스넷 바이러스의 코드가 완성되자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란에서 사용하는 것과 똑 같은 원심분리기를 이용해 시험에 들어갔다. CIA 관리들이 부시 대통령에게 스턱스넷이 파괴한 원심분리기의 파편을 보여주자 부시는 그것을 이란에 대해 사용할 것을 승인했다. 이렇게 해서 사이버 전쟁의 시대가 공식적으로 시작됐다.이 작전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미국과 이스라엘이 스턱스넷을 공동으로 개발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카메라에 얼굴을 공개하지 않을 것과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요구했다. 기밀 정보 누설 금지 규칙에 위배될 것을 우려해서다. 그래서 지브니는 한 여배우(극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했다)를 등장시켜 그 사람들이 한 이야기를 전달하게 했다. “스턱스넷은 훨씬 더 큰 대이란 작전 중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고 그 캐릭터는 말한다.이 캐릭터는 또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하거나 이란 핵협상이 실패할 경우를 위해 미국이 계획했던 또 다른 사이버 전쟁 프로그램이 있었다고 말한다. “나이트로 제우스는 이란의 전략통신과 방공, 전력망, 민간통신, 교통, 금융 시스템을 마비시킬 능력이 있었다”고 그 캐릭터는 말한다. “우리는 이란 컴퓨터 시스템 안에서 대기 중이었다. 언제라도 사이버 공격을 개시해 그 시스템들을 교란시키고 파괴할 준비가 돼 있었다. 그에 비하면 스턱스넷은 소규모의 은밀한 작전이었다. 나이트로 제우스는 전면적인 사이버 전쟁을 위한 계획이었다.”미국과 이스라엘, 영국 정부는 스턱스넷을 개발했다고 인정한 적이 없다. 하지만 ‘제로 데이스’는 스턱스넷을 비롯한 컴퓨터 바이러스들이 전쟁의 패러다임 변화를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NSA와 CIA 국장을 지낸 마이클 헤이든은 지브니에게 “마치 1945년 8월과 같은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원자폭탄이 최초로 사용됐던 때를 의미한다. “누군가 새로운 무기를 사용하면 그것을 다시 상자 안으로 집어넣을 수가 없다.”맞는 말이다. 스턱스넷 이후 심각한 피해를 초래한 사이버 공격이 2번 있었다. 2014년엔 독일 강철 공장이, 2015년엔 우크라이나 전력망이 공격을 받았다. 사이버 보안 전문가들은 양쪽 다 러시아 해커들의 소행으로 여긴다.핵무기의 확산은 공적인 논의를 촉발해 무기제한을 위한 수많은 조약의 체결을 부른다. 하지만 사이버 무기나 그것을 제한하기 위한 조약을 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바마 대통령의 사이버 보안 고문을 지낸 클라크는 지브니에게 “사이버 전쟁이나 사이버 무기와 관련된 모든 사항이 비밀이기 때문에 그런 논의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미국 사이버 무기를 둘러싼 비밀주의는 제도적으로 유지된다. NSA에서 무기를 개발하면 대통령의 직접 지시를 받아 사이버 사령부에서 사용 개시 명령을 내린다. 무기의 관리는 CIA가 맡는다. 전문가들은 어느 정도의 비밀 유지는 필요하지만 너무 지나치면 해롭다고 말한다. “출처와 제조방식을 보호하기 위해서 비밀을 유지하는 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롤프 모와트-라슨 전 CIA 관리가 영화에서 말했다. “하지만 미국인들이 꼭 알아야 할 사항까지 비밀에 부쳐서는 안 된다.”일각에서는 사이버 공간을 규제하는 국제 규범이 없다는 영화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의 사이버 전문가 제임스 루이스는 뉴스위크에 이렇게 말했다. “아직 초기 단계인 사이버 보안 시스템은 전략무기 체계처럼 탄탄하진 않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뤄진 일도 많다.” 미국과 러시아, 미국과 중국 사이에 체결된 사이버 보안 협정과 사이버 공간에서 전쟁법을 준수할 것을 각국에 촉구한 유엔 총회 결의안 등을 말한다.이에 대해 지브니는 뉴스위크에 “미국은 사이버 무기 제한과 관련해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이버 무기 제한은 매우 복잡한 문제라는 게 한 가지 이유다. 일례로 어떤 나라가 사이버 전쟁 조약을 준수하고 있는지 어떻게 증명하겠는가? 랩톱 컴퓨터 수백만 대의 코드를 확인해서? 또 사이버 공간에서 ‘무력의 사용’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강대국 간에는 사이버 공격이 물리적 피해나 사상자를 발생시켰을 경우를 의미한다는 암묵적 이해가 존재한다”고 루이스가 말했다. “하지만 정치적 융통성을 잃을 것을 우려해 누구도 그것을 성문화하려 하지 않는다”고 재빨리 덧붙였다.그 말이 ‘제로 데이스’의 요점을 증명해주는 듯하다. 미국 사이버 사령부의 변호사를 지낸 게리 브라운 대령이 지브니에게 말한 것처럼 “현재로선 ‘무사히 넘어 갈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한다’는 게 사이버 공간의 규범이다.”- 조너선 브로더 기자
2016.08.01 12:26
6분 소요1월 19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고위 간부 마무드 알 마부가 두바이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암살자들(아마도 이스라엘의 모사드 요원들)은 그를 주시했다. 그의 두바이 방문은 가자 지구로 밀반입할 무기를 알아보려는 목적으로 알려졌다.그는 몇 시간 뒤 알 부스탄 로타나 호텔 객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하루 종일 그를 미행한 뒤 호텔에서 기다리던 암살자 7명의 손에 질식사를 당한 듯했다. 범인들은 주도 면밀하게 흔적을 없앴다. 파리·프랑크푸르트·로마·쮜리히 등지에서 위조여권으로 입국했다. 변장도 했다.호텔을 여러 번 바꿨다. 휴대전화가 있었지만 서로 직접 통화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현재 그들의 행적이 담긴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 있다. 반 세기 전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영국 해외정보국 MI6의 악명 높은 전성기를 연상케 하는 옛날식의 국제 첩보 미스터리다.과거에 일부 가장 치밀하고 은밀하고 희한한 스파이 게임도 때때로 꼬리를 밟혔다. 작은 실수, 뛰어난 방첩활동 또는 순전히 행운의 결과였다. 이번 암살사건 같은 극적인 드라마는 전에도 많았다. 과거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스파이 작전들을 모아봤다.THE HOLLOW NICKEL CASE(1953년) 속 빈 동전 사건배후: 소련 표적: 미국 1953년 6월 22일, 브루클린 이글 신문의 배달 소년 지미가 브루클린 지역을 돌며 구독료를 수금했다. 건네 받은 돈 속에 너무 가벼워 의심스러운 동전이 있었다.소년이 집 밖으로 나온 뒤 실수로 떨어뜨렸을 때 동전이 깨지면서 일련의 숫자가 담긴 마이크로필름이 드러났다. 그 동전은 소년의 친구 손을 거쳐 경찰로 넘어갔다가 최종적으로 연방수사국(FBI)으로 건네졌다.그러나 소년에게 동전을 건네준 여성도 영문을 몰라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당국은 4년 뒤에야 그 미스터리의 실마리를 찾았다. 알고 보니 소년이 우연히 발견한 건 KGB가 미국 내에서 정보를 전달할 때 이용한 광범위한 연락망이었다. 그들은 동전·펜·머리 빗·볼트 그리고 갖가지 소형 도구의 속을 파내 정보를 담는 용기로 이용했다. 1957년 KGB 간부가 파리의 미국 대사관으로 망명한 뒤에야 미국은 암호를 해독하고 공작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OPERATION TP-AJAX(1953년)TP 아이아스 작전배후: 영국, 미국표적: 모하메드 모사데그 이란 총리 1953년 이란에서 서방의 사주로 일어난 쿠데타는 많은 암초를 만났다. 돌이켜 보면 결말이 좋지 않으리라는 암시였던 듯하다. 1952년 영국 정보당국은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이란 내 쿠데타 가능성을 시사했다.그들은 모하메드 모사데그 총리의 국정운영과 석유산업 국유화 계획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란 석유산업은 과거 영국의 통제를 받았다. 영국의 계획은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 국왕이 칙령을 내려 모사데그를 해임하고 대신 그 자리에 왕당파인 파즈롤라 자헤디를 앉힌다는 구상이었다.그러나 팔레비 국왕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왕좌와 국민의 지지를 잃게 될까 두려워했다. 몇 달 동안 어르고 달랜 끝에 (그리고 모사데그가 권력을 장악하자) 국왕이 동의했다. CIA가 먼저 모사데그를 비난하는 반공산주의 선전선동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멍석을 깔았다.언론에 조작된 정보를 흘리고, 뇌물을 뿌리고, 가두시위를 부채질하고, 심지어 성직자 자택을 폭파해서 총리와 이란 종교계를 이간질했다(뉴스위크도 속아넘어가 그런 조작된 기사 하나를 실었다). 마침내 1953년 8월 15일 밤, 국왕 지지파의 군인들이 테헤란 전역으로 퍼져나가 전화선을 절단하고, 모사데그 측근 관료들을 체포하고, 반모사데그 시위를 선동했다.그러나 모사데그를 잡아들이지는 못했다. 그는 이미 쿠데타 소식을 듣고 몸을 피한 뒤였다. 다음날 아침 이란은 무정부 상태였다. 국왕도 혼란 중에 바그다드를 거쳐 로마로 달아나 버렸다. 그러나 TP 아이아스라는 이름의 그 작전이 완전히 실패로 끝나는가 싶을 때 왕정파 장교들이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한 뒤 더 뜨겁게 가두시위를 부채질했다.국민 여론이 모사데그에 불리한 쪽으로 급격하게 방향을 틀면서 쿠데타 성공의 길이 열렸고 그 과정에서 시위 참가자 300명이 사망했다. 테헤란 외곽으로 몸을 피했던 자헤디가 시내로 나와 지도자 역할을 맡았고 모사데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속속 체포됐다. 훗날 외무장관을 포함해 22명이 처형됐다.다음날 CIA는 신 정부에 500만 달러를 송금했다. CIA의 첫 정권교체 시도는 대단히 성공적으로 평가받으면서 인기 있는 정책 대안으로 떠올랐다. 미국은 다음해 과테말라에서 다시 한번 이 방법을 써먹었다.그러나 CIA 개입의 전모가 밝혀지자 미국 정보당국의 명백해 보였던 승리도 얄팍한 밑천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작전으로 미국에 우호적인 정권이 들어섰지만 또한 이란 국민의 마음 속에 반 세기가 넘도록 사라지지 않는 뿌리 깊은 반미·반영 적개심이 자리잡았다.OPERATION SUSANNAH(1954년)수잔나 작전의 실패배후: 이스라엘 표적: 이집트 1954년 7월 2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한 우체국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그 다음주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영국식 극장과 미국 해외공보처의 도서관에서도 폭탄이 터졌다. 알고 보니 이스라엘이 비밀리에 벌인 음해 공작이었다. 작전명은 오퍼레이션 수잔나. 현지 반군들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워 이집트 정정이 불안해 보이도록 만들려는 의도였다.나아가 영국이 2년 이내에 수에즈 운하에서 철군한다는 계획을 변경하도록 만들 심산이었다. 그러나 이집트 당국은 범인들을 끈질기게 추적해 유대계 이집트인 9명을 찾아냈다.서구인들이 자주 찾는 장소에 테러를 가할 목적으로 이스라엘 군 정보당국이 모집한 사람들이었다. 공개재판에서 범행을 자백한 뒤 범인 중 두 명은 교수형을 받았고 한 명은 자살했으며 나머지 여섯 명은 10년 이상의 징역형을 살았다. 이스라엘은 여러 차례 수감자를 교환하면서도 이들을 외면했다. 이 사건은 핀하스 라본 이스라엘 국방장관의 이름을 따서 라본 사건으로 알려졌다. 라본은 개입설을 부인했지만 음모가 공개된 뒤 사임했다.PATRICE LUMUMBA(1961년)파트리스 루뭄바배후: 미국과 영국의 동의 아래 벨기에 주도표적: 파트리스 루뭄바 콩고 총리 파트리스 루뭄바 콩고 초대 민선총리의 피살은 40년 뒤 서방 정부의 기밀문서가 공개될 때까지 악의를 품은 주민들의 범죄로 알려졌을 뿐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벨기에 식민 당국의 압제를 소리 높여 비난하고 소련과 친선관계를 강화하겠다는 뜻을 숨기지 않던 루뭄바는 1960년 콩고 독립 이후 국가 지도자 자리에 오르면서 서방에 적을 많이 만들었다.총리에 오른 지 몇 달 만에 조셉 모부투 대령이 미국 CIA의 후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킨 뒤 그를 가택연금에 처했다. 하지만 그는 항의를 계속하면서 복권을 계획했다. CIA는 요원을 파견해 독약을 넣은 치약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지만 콩고와 벨기에 군 당국이 선수를 쳤다.루뭄바가 감시의 눈길을 피해 집을 빠져나가자 모부투의 군사들이 그를 추적해 체포한 다음 외교관과 기자들 앞에서 구타하고 모욕을 줬다. 한달 뒤 콩고와 벨기에 군인들이 그와 동료 두 명을 숲으로 끌고 들어가 마치 처형하듯 한 번에 한 명씩 총살했다. 다음날 벨기에 경찰관 한 명이 흔적을 없애려 현장을 다시 찾았다.땅속에 묻혀 있던 시신을 파내 토막낸 다음 인근 벨기에 소유 광산에서 가져온 염산으로 녹여버렸다. 모부투는 훗날 모부투 세세 세코로 개명하고 사악한 독재자로서 1965년부터 1977년까지 나라를 통치했다(당시에는 자이르였지만 지금은 콩고 민주공화국으로 불린다).PROFUMO AFFAIR(1963년)프로퓨모 사건배후: 소련 표적:영국 존 데니스 프로퓨모는 추문으로 영국을 충격에 빠뜨릴 만한 사람은 전혀 아닌 듯했다. 그러나 1963년 스파이 활동과 관련된 삼각관계에 휘말려 전국적인 스캔들의 장본인이 됐다.프로퓨모 전쟁장관(지금의 국방장관)은 옥스퍼드대를 나온 뒤 각료 지위까지 올랐다. 영화 스타와 결혼해 런던 사교계의 고정멤버가 됐다. 그의 외도 상대인 크리스틴 킬러는 카바레 클럽의 쇼걸이었다.그들의 위험한 애정행각만으로도 1960년대 영국이 발칵 뒤집어졌겠지만 킬러가 소련 대사관의 해군 무관 유진 이바노프와도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 추문은 전면적인 국가안보 위기로 확대됐다. 미국 FBI가 바우티 작전이라는 이름의 파일을 공개하자 해럴드 맥밀란 정부가 붕괴했으며(스캔들의 영향이 컸다) 킬러는 비윤리적인 수입을 올린 죄로 징역형을 살았다.하지만 그녀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2001년 발간된 자서전에서 자신과 함께 활동한 소련 스파이 중에 MI5(국내 정보부) 국장 로저 홀리스경, 여왕 미술품 큐레이터 앤서니 블런트경도 있었다고 주장해 10년 전의 의혹을 뒷받침했다(후속 조사에서 홀리스는 무죄로 판명됐다). THE DISAPPEARANCE OF MEHDI BEN BARKA(1965년)메디 벤 바르카의 실종배후: 모로코(가능성 아주 큼), 프랑스(가능성 큼), 이스라엘과 미국(가능성 있음)표적:모로코 야권 지도자 메디 벤 바르카 모로코 반체제 인사 메디 벤 바르카(아래 사진)는 체 게바라와 말콤 X의 친구이자 모로코 국왕의 비판자였다. 세계의 주요 정보기관들이 그를 예의 주시했다. 그는 제3세계 해방운동의 첫 국제회의에 의장 자격으로 참석하기 직전 망명생활을 하던 파리의 길거리에서 두 명의 남자에게 납치됐다.모두가 프랑스와 모로코 공작원들이 손잡고 벌인 일이라고 의심했다. 45년이 지난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확신하지 못하지만 그런 의혹은 여전하다. 벤 바르카는 납치 직후 살해된 듯하지만 시체도 결정적인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 한 전직 모로코 공작원에 따르면 모로코의 한 장성과 그의 부하가 벤 바르카를 고문·살해한 뒤 시체를 모로코 국내로 들여와 염산 탱크 속에 넣어 녹여버렸다.또 다른 전직 공작원은 시체를 시멘트 속에 파묻었다고 말한다. 지난해 10월에는 프랑스 해군 요원이 나서 시체를 소각한 뒤 재를 호수에 뿌렸음을 입증하는 파일이 있다고 주장했다. 인터폴이 현직 모로코 경찰총장을 포함해 4명의 용의자를 체포하라는 영장을 발부 받았지만 다음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취소됐다. CIA와 모사드 요원들이 꾸민 음모라는 소문이 아직도 떠돈다.LONDON’S UMBRELLA MURDER(1978년) 런던 우산 살인사건배후: 불가리아, KGB(가능성 큼)표적: 불가리아 반체제 인사 게오르기 마르코프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게오르기 마르코프는 조국 불가리아의 독재적인 공산당 통치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1969년 런던으로 망명한 뒤 BBC 월드 서비스의 기자로 일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망명 후 10년 가까이 흘렀지만 그의 적들 마음 속에는 여전히 앙금이 남아 있었다. 1978년 마르코프는 런던의 버스 정류장에 서 있던 중 오른쪽 다리 뒤쪽을 우산 끝 같은 물건으로 찔렸다. 이때 독극물 리신이 든 캡슐이 그의 몸에 박혔다. 그는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계속 일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쓰러진 뒤 3일 만에 숨졌다. 1992년 전 불가리아 정보 국장이 10권 분량의 마르코프 사망 관련 파일을 파기한 죄가 인정돼 징역형을 살았지만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역사가들은 KGB 개입 가능성을 시사한다.OPERATION BAYONET(1970년대)뮌헨 테러 보복작전배후: 이스라엘표적: PLO 테러 용의자들 1972년 독일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대표 선수 11명이 살해된 뒤 며칠 만에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테러 관련자들을 제거하려는 모사드의 계획을 승인했다.그때부터 유럽과 중동 전역에서 10여 명의 용의자를 제거하는 암살작전이 7년간에 걸쳐 펼쳐졌다. 레바논 베이루트 기습작전에서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간부 세 명이 살해됐다.당시 훗날 이스라엘 총리가 된 에후드 바락이 여장을 하기도 했다. 내부에서는 총검작전으로 불렸지만 언론에서는 신의 분노작전이라고 알려졌다. 키프로스·베이루트·아테네·로마·파리에서 암살이 일어났으며 1979년 노르웨이에서 막을 내렸다. 이곳에서 한 모사드 요원이 무고한 모로코 태생 작가를 뮌헨 테러 주동자로 알려진 알리 하산 살라메로 오인해 총격을 가한 뒤 작전이 중단됐다. 이 사건으로 모사드 공작원 다섯 명이 체포됐다가 풀려났다.HE FAMILY JEWELS(1960년대)피델 카스트로 암살 기도배후: 미국표적: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1993년 ‘패밀리 주얼(Family Jewel)’이라는 문서가 기밀 해제된 뒤에야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를 제거하려는 야심찬 CIA 공작의 전모가 만천하에 공개됐다. 미국 의회의 한 위원회가 이 문제와 관련된 청문회를 열고 CIA가 1960~65년 최소 8건의 암살공작을 계획했다고 결론지었다.일부 계획은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졌다. 시가에 약물을 주입하고, 다이빙 복에 병균을 넣거나, 탈모제를 그의 구두 속에 넣었다(그렇게 하면 그의 턱수염이 모두 빠져 카리스마를 잃게 되리라는 생각이었다).마리타 로렌츠라는 여성은 19세 때 카스트로와 관계를 가졌으며 독살 공작에도 한 번 가담했다고 주장한다. 조개껍데기 속에 폭탄을 숨기거나 카스트로가 출연하는 라디오 방송국 안에 환각제 같은 마약을 살포하는 등의 다른 계획은 구상에 그쳤다.그중 아마 가장 충격적인 음모는 마피아 거물들과 짜고 정교한 도박단을 구성한 다음 그들에게 독약을 건네주어 암살하도록 한다는 구상이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THE DIKKO AFFAIR(1984)디코 납치미수 사건배후: 나이지리아, 이스라엘(가능성 있음)표적: 우마루 디코 전 교통부 장관 통상적으로 외교업무 화물은 수색과 압수 대상에서 완전히 제외된다. 그러나 그런 화물 중 하나가 나이지리아 전 교통부 장관이 들어 있는 궤짝이라면 예외일 수 있다. 우마루 디코는 나이지리아에서 부패 혐의로 수배된 질 나쁘고 악명 높은 정치인이었다. 1984년 쿠데타로 정권이 몰락한 직후 런던으로 도주했다.몇 달 뒤 디코는 런던의 호화주택에서 납치되어 약물주사를 맞은 뒤 나무상자에 넣어져 나이지리안 항공의 나이지리아 도시 라고스행 화물기에 실렸다. 보내는 이는 런던의 나이지리아 대사관, 받는 이는 나이지리아 외교부로 기록됐다. 궤짝 안 디코의 곁에는 유사시 그를 제압할 주사기를 든 이스라엘인이 한 명 있었다. 옆의 궤짝에는 나이지리아 당국이 그 작전의 집행을 맡긴 다른 이스라엘인 두 명이 있었다(모사드 관련설이 있었지만 확인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결국 이스라엘인 3명과 나이지리아인 1명이 런던에서 구속됐다. 영국은 디코의 정치적 망명을 거부했지만 그는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1994년까지 계속 런던에서 살았다.바로 그 해, 과거 그를 강제로 본국으로 납치하려 했던 바로 그 정부로부터 귀국 초대를 받았다. 같은 해, 나이지리아의 한 기자가 디코와 가진 독점 인터뷰에 기초해서 납치의 전말을 공개했다. 오늘날 디코는 나이지리아에서 원로 정치가 대접을 받는다.OPERATION SATANIC(1985년)무지개 전사호의 침몰배후: 프랑스표적: 그린피스 국제 환경보호단체 그린피스는 북미 인디언의 예언을 따라 배 이름을 ‘무지개 전사(Rainbow Warrior)’로 지었다. 신화 속의 전사 무리가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 세계를 인간의 탐욕으로부터 구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 배가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한 항구에 정박했을 때 프랑스 정보당국이 가졌던 생각은 전혀 달랐다.그 배의 목적지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작은 산호섬 무루로아였다. 프랑스의 원자력 기구가 핵실험을 하는 섬이었다. 세 팀의 공작원이 그 배에 폭발물을 설치했다.배를 무력화해서 그들의 항의시위를 막으려는 계획이었다. 그 폭발로 포르투갈 사진기자 한 명이 숨졌다. 파괴된 배는 뉴질랜드 인근의 만 한복판으로 끌려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무지개 전사’호의 폭파 결정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하지만 국방장관과 정보국장이 그 문제와 관련해 사임할 때도 손을 쓰지 않았다) 2005년에 공개된 한 보고서는 그가 공격을 승인했다고 주장했다.THE MARINE SPY SCANDAL(1987년)해병대 스파이 스캔들배후: 소련 표적: 미국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 공관의 접객 담당 비올레타 세이나는 긴 금발에 눈이 컸다. 1986년 그녀가 우아한 검정색 롱드레스 차림으로 해병대 연례 무도회에 참석했을 때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집중됐다. 특히 미국 대사관 경비를 담당하는 25세의 클레이튼 론트리 병장 눈에는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KGB 요원인 세이나는 그를 유혹해 문서를 입수하고 외교 비밀을 알아냈다. 그는 또한 밤중에 세이나에게 대사관 문을 열어줘 건물의 몇몇 가장 민감한 통신과 정찰 구역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도록 해주었다. 해병대 사상 최초로 간첩죄가 인정된 론트리는 원래 30년형을 선고받았지만 9년만 복역했다.세이나는 훗날 모스크바 주재 아일랜드 대사관에서 일한다고 알려졌지만 1987년 그 일을 그만둔 뒤 자취를 감췄다. 론트리는 재소기간 내내 그녀와 연락을 취했다고 전해졌다. OPERATION TITAN RAIN(2005~10년)타이탄 레인 작전배후: 중국표적: 미국, 독일, 구글, 자본주의 중국이 글로벌 강국으로 부상하면서 첩보능력도 고도화됐다. 그러나 과거의 스파이 공작과는 크게 다른 형태다. 2010년 초 구글이 공개한 컴퓨터 공격 사례에서 중국 정부와 기업의 합작 정탐 프로그램이 드러났다. 미국 내 금융·방위·첨단기술 기업뿐 아니라 중국 내 인권 운동가와 반체제 정치인이 표적이었다.몇 달 뒤 독일의 한 방첩요원은 중국 스파이들이 전화도청과 해킹도구를 이용해 산업비밀을 빼돌리며 그들이 독일의 “전체 인프라를 파괴할” 능력을 갖췄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2005년 미국 당국은 타이탄 레인이라는 암호명의 작전을 통해 국방부를 포함한 미국 행정부 전체의 수백 개 컴퓨터 네트워크를 대상으로 한 중국의 해킹 시도 성공사례를 확인했다. 하지만 어느 해커도 기밀정보에 접근하지는 못한 듯했다.BUGS AT THE UN(2003년)유엔에 설치된 도청장치배후: 미국, 영국 표적: 유엔 당국자 영국 신문 업저버는 ‘더러운 술책’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고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유엔 고위 당국자를 정탐해 왔음을 보여주는 유출 문서를 입수했다고 밝혔다. 이라크 전쟁을 앞둔 2003년 3월의 일이었다.신문은 NSA가 주택과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고 앙골라·카메룬·칠레·멕시코·기니·파키스탄 대표단의 e-메일을 훔쳐봤다고 보도했다. 영국의 NSA에 해당하는 기관의 번역 담당자 캐서린 건에게 문서유출 책임을 묻는 소송이 제기됐다(그녀는 자신이 한 일이라고 공개적으로 인정했다).그러나 미국 정부는 훗날 이 소송을 취하했다. “통상적인 관행”이라고 유엔에서 근무했던 한 미국 정부 당국자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말했다. “우리가 늘 해오던 일이다.” 불가리아 대사는 자신을 감시하지 않았다면 모욕으로 여겼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정보 관계자들은 그 문서가 조작됐으며 민감한 시기에 미국 관계자들을 당혹케 하려는 의도라고 말했다.이 추문은 크게 확대되지 않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았다. 2004년에는 이라크 전쟁 전 몇 주 동안, 영국 정보국이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을 정탐했다고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전 보좌관이 폭로했다. 블레어는 그 주장을 부인했다. 2004년 말에도 제네바 유엔 본부의 고위급 회의 장소로 사용되는 방에서 또 다른 도청장치가 발견됐다. 범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THE POLONIUM TRAIL(2006년)폴로늄 암살사건배후: 러시아표적: 러시아 반체제 인사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과거 KGB 요원으로 러시아 정부를 비판했던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는 2006년 런던에서 사망했다. 사망하기 전 그는 자신의 “현 상황”에 책임이 있는 사람에게 이 같은 말을 남겼다. “내 입을 막는 데는 성공할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대가가 따른다.” 리트비넨코는 런던의 밀레니엄 호텔에서 누군가 그의 찻주전자에 탄 희귀한 방사성 동위원소 폴로늄 210에 중독돼 숨졌다.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리트비넨코와 그의 가족은 2000년 러시아에서 망명한 뒤 영국 시민이 됐다. 그들은 블라디미르 푸틴(리트비넨코가 마지막으로 남긴 발언에서 암시한 인물)을 날카롭게 비판한 일로 망명을 선택했다. 영국 검사들이 또 다른 전직 KGB 요원을 용의자로 지목했지만 러시아는 그를 살인혐의로 법정에 세우도록 넘겨주지 않았다.푸틴이 러시아 사법부를 얼마나 확고히 장악했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러시아가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리트비넨코의 말은 옳았다. 살인사건 후 영국은 러시아 외교관 네 명을 추방했다. 그 뒤로 러시아와 서유럽의 사이에 형성된 한랭전선이 걷히지 않았다.
2010.03.23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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