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5대 스파이 작전
세계 15대 스파이 작전
1월 19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고위 간부 마무드 알 마부가 두바이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암살자들(아마도 이스라엘의 모사드 요원들)은 그를 주시했다. 그의 두바이 방문은 가자 지구로 밀반입할 무기를 알아보려는 목적으로 알려졌다.
그는 몇 시간 뒤 알 부스탄 로타나 호텔 객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하루 종일 그를 미행한 뒤 호텔에서 기다리던 암살자 7명의 손에 질식사를 당한 듯했다. 범인들은 주도 면밀하게 흔적을 없앴다. 파리·프랑크푸르트·로마·쮜리히 등지에서 위조여권으로 입국했다. 변장도 했다.
호텔을 여러 번 바꿨다. 휴대전화가 있었지만 서로 직접 통화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현재 그들의 행적이 담긴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 있다. 반 세기 전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영국 해외정보국 MI6의 악명 높은 전성기를 연상케 하는 옛날식의 국제 첩보 미스터리다.
과거에 일부 가장 치밀하고 은밀하고 희한한 스파이 게임도 때때로 꼬리를 밟혔다. 작은 실수, 뛰어난 방첩활동 또는 순전히 행운의 결과였다. 이번 암살사건 같은 극적인 드라마는 전에도 많았다. 과거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스파이 작전들을 모아봤다.
THE HOLLOW NICKEL CASE(1953년)
배후: 소련 표적: 미국 1953년 6월 22일, 브루클린 이글 신문의 배달 소년 지미가 브루클린 지역을 돌며 구독료를 수금했다. 건네 받은 돈 속에 너무 가벼워 의심스러운 동전이 있었다.
소년이 집 밖으로 나온 뒤 실수로 떨어뜨렸을 때 동전이 깨지면서 일련의 숫자가 담긴 마이크로필름이 드러났다. 그 동전은 소년의 친구 손을 거쳐 경찰로 넘어갔다가 최종적으로 연방수사국(FBI)으로 건네졌다.
그러나 소년에게 동전을 건네준 여성도 영문을 몰라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당국은 4년 뒤에야 그 미스터리의 실마리를 찾았다. 알고 보니 소년이 우연히 발견한 건 KGB가 미국 내에서 정보를 전달할 때 이용한 광범위한 연락망이었다.
OPERATION TP-AJAX(1953년)
TP 아이아스 작전
배후: 영국, 미국
표적: 모하메드 모사데그 이란 총리 1953년 이란에서 서방의 사주로 일어난 쿠데타는 많은 암초를 만났다. 돌이켜 보면 결말이 좋지 않으리라는 암시였던 듯하다. 1952년 영국 정보당국은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이란 내 쿠데타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들은 모하메드 모사데그 총리의 국정운영과 석유산업 국유화 계획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란 석유산업은 과거 영국의 통제를 받았다. 영국의 계획은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 국왕이 칙령을 내려 모사데그를 해임하고 대신 그 자리에 왕당파인 파즈롤라 자헤디를 앉힌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팔레비 국왕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왕좌와 국민의 지지를 잃게 될까 두려워했다. 몇 달 동안 어르고 달랜 끝에 (그리고 모사데그가 권력을 장악하자) 국왕이 동의했다. CIA가 먼저 모사데그를 비난하는 반공산주의 선전선동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멍석을 깔았다.
언론에 조작된 정보를 흘리고, 뇌물을 뿌리고, 가두시위를 부채질하고, 심지어 성직자 자택을 폭파해서 총리와 이란 종교계를 이간질했다(뉴스위크도 속아넘어가 그런 조작된 기사 하나를 실었다). 마침내 1953년 8월 15일 밤, 국왕 지지파의 군인들이 테헤란 전역으로 퍼져나가 전화선을 절단하고, 모사데그 측근 관료들을 체포하고, 반모사데그 시위를 선동했다.
그러나 모사데그를 잡아들이지는 못했다. 그는 이미 쿠데타 소식을 듣고 몸을 피한 뒤였다. 다음날 아침 이란은 무정부 상태였다. 국왕도 혼란 중에 바그다드를 거쳐 로마로 달아나 버렸다. 그러나 TP 아이아스라는 이름의 그 작전이 완전히 실패로 끝나는가 싶을 때 왕정파 장교들이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한 뒤 더 뜨겁게 가두시위를 부채질했다.
국민 여론이 모사데그에 불리한 쪽으로 급격하게 방향을 틀면서 쿠데타 성공의 길이 열렸고 그 과정에서 시위 참가자 300명이 사망했다. 테헤란 외곽으로 몸을 피했던 자헤디가 시내로 나와 지도자 역할을 맡았고 모사데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속속 체포됐다. 훗날 외무장관을 포함해 22명이 처형됐다.
다음날 CIA는 신 정부에 500만 달러를 송금했다. CIA의 첫 정권교체 시도는 대단히 성공적으로 평가받으면서 인기 있는 정책 대안으로 떠올랐다. 미국은 다음해 과테말라에서 다시 한번 이 방법을 써먹었다.
그러나 CIA 개입의 전모가 밝혀지자 미국 정보당국의 명백해 보였던 승리도 얄팍한 밑천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작전으로 미국에 우호적인 정권이 들어섰지만 또한 이란 국민의 마음 속에 반 세기가 넘도록 사라지지 않는 뿌리 깊은 반미·반영 적개심이 자리잡았다.
OPERATION SUSANNAH(1954년)
수잔나 작전의 실패
배후: 이스라엘 표적: 이집트 1954년 7월 2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한 우체국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그 다음주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영국식 극장과 미국 해외공보처의 도서관에서도 폭탄이 터졌다. 알고 보니 이스라엘이 비밀리에 벌인 음해 공작이었다. 작전명은 오퍼레이션 수잔나. 현지 반군들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워 이집트 정정이 불안해 보이도록 만들려는 의도였다.
나아가 영국이 2년 이내에 수에즈 운하에서 철군한다는 계획을 변경하도록 만들 심산이었다. 그러나 이집트 당국은 범인들을 끈질기게 추적해 유대계 이집트인 9명을 찾아냈다.
서구인들이 자주 찾는 장소에 테러를 가할 목적으로 이스라엘 군 정보당국이 모집한 사람들이었다. 공개재판에서 범행을 자백한 뒤 범인 중 두 명은 교수형을 받았고 한 명은 자살했으며 나머지 여섯 명은 10년 이상의 징역형을 살았다.
PATRICE LUMUMBA(1961년)
파트리스 루뭄바
배후: 미국과 영국의 동의 아래 벨기에 주도
표적: 파트리스 루뭄바 콩고 총리
총리에 오른 지 몇 달 만에 조셉 모부투 대령이 미국 CIA의 후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킨 뒤 그를 가택연금에 처했다. 하지만 그는 항의를 계속하면서 복권을 계획했다. CIA는 요원을 파견해 독약을 넣은 치약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지만 콩고와 벨기에 군 당국이 선수를 쳤다.
루뭄바가 감시의 눈길을 피해 집을 빠져나가자 모부투의 군사들이 그를 추적해 체포한 다음 외교관과 기자들 앞에서 구타하고 모욕을 줬다. 한달 뒤 콩고와 벨기에 군인들이 그와 동료 두 명을 숲으로 끌고 들어가 마치 처형하듯 한 번에 한 명씩 총살했다. 다음날 벨기에 경찰관 한 명이 흔적을 없애려 현장을 다시 찾았다.
땅속에 묻혀 있던 시신을 파내 토막낸 다음 인근 벨기에 소유 광산에서 가져온 염산으로 녹여버렸다. 모부투는 훗날 모부투 세세 세코로 개명하고 사악한 독재자로서 1965년부터 1977년까지 나라를 통치했다(당시에는 자이르였지만 지금은 콩고 민주공화국으로 불린다).
PROFUMO AFFAIR(1963년)
프로퓨모 사건
배후: 소련 표적:영국 존 데니스 프로퓨모는 추문으로 영국을 충격에 빠뜨릴 만한 사람은 전혀 아닌 듯했다. 그러나 1963년 스파이 활동과 관련된 삼각관계에 휘말려 전국적인 스캔들의 장본인이 됐다.
프로퓨모 전쟁장관(지금의 국방장관)은 옥스퍼드대를 나온 뒤 각료 지위까지 올랐다. 영화 스타와 결혼해 런던 사교계의 고정멤버가 됐다. 그의 외도 상대인 크리스틴 킬러는 카바레 클럽의 쇼걸이었다.
그들의 위험한 애정행각만으로도 1960년대 영국이 발칵 뒤집어졌겠지만 킬러가 소련 대사관의 해군 무관 유진 이바노프와도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 추문은 전면적인 국가안보 위기로 확대됐다. 미국 FBI가 바우티 작전이라는 이름의 파일을 공개하자 해럴드 맥밀란 정부가 붕괴했으며(스캔들의 영향이 컸다) 킬러는 비윤리적인 수입을 올린 죄로 징역형을 살았다.
하지만 그녀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2001년 발간된 자서전에서 자신과 함께 활동한 소련 스파이 중에 MI5(국내 정보부) 국장 로저 홀리스경, 여왕 미술품 큐레이터 앤서니 블런트경도 있었다고 주장해 10년 전의 의혹을 뒷받침했다(후속 조사에서 홀리스는 무죄로 판명됐다).
THE DISAPPEARANCE OF MEHDI BEN BARKA(1965년)
메디 벤 바르카의 실종
배후: 모로코(가능성 아주 큼), 프랑스(가능성 큼), 이스라엘과 미국(가능성 있음)
표적:모로코 야권 지도자 메디 벤 바르카 모로코 반체제 인사 메디 벤 바르카(아래 사진)는 체 게바라와 말콤 X의 친구이자 모로코 국왕의 비판자였다. 세계의 주요 정보기관들이 그를 예의 주시했다. 그는 제3세계 해방운동의 첫 국제회의에 의장 자격으로 참석하기 직전 망명생활을 하던 파리의 길거리에서 두 명의 남자에게 납치됐다.
모두가 프랑스와 모로코 공작원들이 손잡고 벌인 일이라고 의심했다. 45년이 지난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확신하지 못하지만 그런 의혹은 여전하다. 벤 바르카는 납치 직후 살해된 듯하지만 시체도 결정적인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 한 전직 모로코 공작원에 따르면 모로코의 한 장성과 그의 부하가 벤 바르카를 고문·살해한 뒤 시체를 모로코 국내로 들여와 염산 탱크 속에 넣어 녹여버렸다.
또 다른 전직 공작원은 시체를 시멘트 속에 파묻었다고 말한다. 지난해 10월에는 프랑스 해군 요원이 나서 시체를 소각한 뒤 재를 호수에 뿌렸음을 입증하는 파일이 있다고 주장했다. 인터폴이 현직 모로코 경찰총장을 포함해 4명의 용의자를 체포하라는 영장을 발부 받았지만 다음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취소됐다. CIA와 모사드 요원들이 꾸민 음모라는 소문이 아직도 떠돈다.
LONDON’S UMBRELLA MURDER(1978년)
배후: 불가리아, KGB(가능성 큼)
표적: 불가리아 반체제 인사 게오르기 마르코프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게오르기 마르코프는 조국 불가리아의 독재적인 공산당 통치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1969년 런던으로 망명한 뒤 BBC 월드 서비스의 기자로 일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망명 후 10년 가까이 흘렀지만 그의 적들 마음 속에는 여전히 앙금이 남아 있었다. 1978년 마르코프는 런던의 버스 정류장에 서 있던 중 오른쪽 다리 뒤쪽을 우산 끝 같은 물건으로 찔렸다.
OPERATION BAYONET(1970년대)
뮌헨 테러 보복작전
배후: 이스라엘
표적: PLO 테러 용의자들 1972년 독일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대표 선수 11명이 살해된 뒤 며칠 만에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테러 관련자들을 제거하려는 모사드의 계획을 승인했다.
그때부터 유럽과 중동 전역에서 10여 명의 용의자를 제거하는 암살작전이 7년간에 걸쳐 펼쳐졌다. 레바논 베이루트 기습작전에서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간부 세 명이 살해됐다.
당시 훗날 이스라엘 총리가 된 에후드 바락이 여장을 하기도 했다. 내부에서는 총검작전으로 불렸지만 언론에서는 신의 분노작전이라고 알려졌다. 키프로스·베이루트·아테네·로마·파리에서 암살이 일어났으며 1979년 노르웨이에서 막을 내렸다. 이곳에서 한 모사드 요원이 무고한 모로코 태생 작가를 뮌헨 테러 주동자로 알려진 알리 하산 살라메로 오인해 총격을 가한 뒤 작전이 중단됐다. 이 사건으로 모사드 공작원 다섯 명이 체포됐다가 풀려났다.
HE FAMILY JEWELS(1960년대)
피델 카스트로 암살 기도
배후: 미국
표적: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1993년 ‘패밀리 주얼(Family Jewel)’이라는 문서가 기밀 해제된 뒤에야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를 제거하려는 야심찬 CIA 공작의 전모가 만천하에 공개됐다. 미국 의회의 한 위원회가 이 문제와 관련된 청문회를 열고 CIA가 1960~65년 최소 8건의 암살공작을 계획했다고 결론지었다.
일부 계획은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졌다. 시가에 약물을 주입하고, 다이빙 복에 병균을 넣거나, 탈모제를 그의 구두 속에 넣었다(그렇게 하면 그의 턱수염이 모두 빠져 카리스마를 잃게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마리타 로렌츠라는 여성은 19세 때 카스트로와 관계를 가졌으며 독살 공작에도 한 번 가담했다고 주장한다. 조개껍데기 속에 폭탄을 숨기거나 카스트로가 출연하는 라디오 방송국 안에 환각제 같은 마약을 살포하는 등의 다른 계획은 구상에 그쳤다.
그중 아마 가장 충격적인 음모는 마피아 거물들과 짜고 정교한 도박단을 구성한 다음 그들에게 독약을 건네주어 암살하도록 한다는 구상이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THE DIKKO AFFAIR(1984)
디코 납치미수 사건
배후: 나이지리아, 이스라엘(가능성 있음)
표적: 우마루 디코 전 교통부 장관 통상적으로 외교업무 화물은 수색과 압수 대상에서 완전히 제외된다. 그러나 그런 화물 중 하나가 나이지리아 전 교통부 장관이 들어 있는 궤짝이라면 예외일 수 있다. 우마루 디코는 나이지리아에서 부패 혐의로 수배된 질 나쁘고 악명 높은 정치인이었다. 1984년 쿠데타로 정권이 몰락한 직후 런던으로 도주했다.
몇 달 뒤 디코는 런던의 호화주택에서 납치되어 약물주사를 맞은 뒤 나무상자에 넣어져 나이지리안 항공의 나이지리아 도시 라고스행 화물기에 실렸다. 보내는 이는 런던의 나이지리아 대사관, 받는 이는 나이지리아 외교부로 기록됐다. 궤짝 안 디코의 곁에는 유사시 그를 제압할 주사기를 든 이스라엘인이 한 명 있었다.
바로 그 해, 과거 그를 강제로 본국으로 납치하려 했던 바로 그 정부로부터 귀국 초대를 받았다. 같은 해, 나이지리아의 한 기자가 디코와 가진 독점 인터뷰에 기초해서 납치의 전말을 공개했다. 오늘날 디코는 나이지리아에서 원로 정치가 대접을 받는다.
OPERATION SATANIC(1985년)
무지개 전사호의 침몰
배후: 프랑스
표적: 그린피스 국제 환경보호단체 그린피스는 북미 인디언의 예언을 따라 배 이름을 ‘무지개 전사(Rainbow Warrior)’로 지었다. 신화 속의 전사 무리가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 세계를 인간의 탐욕으로부터 구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 배가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한 항구에 정박했을 때 프랑스 정보당국이 가졌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 배의 목적지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작은 산호섬 무루로아였다. 프랑스의 원자력 기구가 핵실험을 하는 섬이었다. 세 팀의 공작원이 그 배에 폭발물을 설치했다.
배를 무력화해서 그들의 항의시위를 막으려는 계획이었다. 그 폭발로 포르투갈 사진기자 한 명이 숨졌다. 파괴된 배는 뉴질랜드 인근의 만 한복판으로 끌려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무지개 전사’호의 폭파 결정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하지만 국방장관과 정보국장이 그 문제와 관련해 사임할 때도 손을 쓰지 않았다) 2005년에 공개된 한 보고서는 그가 공격을 승인했다고 주장했다.
THE MARINE SPY SCANDAL(1987년)
해병대 스파이 스캔들
배후: 소련 표적: 미국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 공관의 접객 담당 비올레타 세이나는 긴 금발에 눈이 컸다. 1986년 그녀가 우아한 검정색 롱드레스 차림으로 해병대 연례 무도회에 참석했을 때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집중됐다. 특히 미국 대사관 경비를 담당하는 25세의 클레이튼 론트리 병장 눈에는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KGB 요원인 세이나는 그를 유혹해 문서를 입수하고 외교 비밀을 알아냈다. 그는 또한 밤중에 세이나에게 대사관 문을 열어줘 건물의 몇몇 가장 민감한 통신과 정찰 구역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도록 해주었다. 해병대 사상 최초로 간첩죄가 인정된 론트리는 원래 30년형을 선고받았지만 9년만 복역했다.
세이나는 훗날 모스크바 주재 아일랜드 대사관에서 일한다고 알려졌지만 1987년 그 일을 그만둔 뒤 자취를 감췄다. 론트리는 재소기간 내내 그녀와 연락을 취했다고 전해졌다.
OPERATION TITAN RAIN(2005~10년)
타이탄 레인 작전
배후: 중국
표적: 미국, 독일, 구글, 자본주의
몇 달 뒤 독일의 한 방첩요원은 중국 스파이들이 전화도청과 해킹도구를 이용해 산업비밀을 빼돌리며 그들이 독일의 “전체 인프라를 파괴할” 능력을 갖췄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2005년 미국 당국은 타이탄 레인이라는 암호명의 작전을 통해 국방부를 포함한 미국 행정부 전체의 수백 개 컴퓨터 네트워크를 대상으로 한 중국의 해킹 시도 성공사례를 확인했다. 하지만 어느 해커도 기밀정보에 접근하지는 못한 듯했다.
BUGS AT THE UN(2003년)
유엔에 설치된 도청장치
배후: 미국, 영국 표적: 유엔 당국자 영국 신문 업저버는 ‘더러운 술책’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고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유엔 고위 당국자를 정탐해 왔음을 보여주는 유출 문서를 입수했다고 밝혔다. 이라크 전쟁을 앞둔 2003년 3월의 일이었다.
신문은 NSA가 주택과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고 앙골라·카메룬·칠레·멕시코·기니·파키스탄 대표단의 e-메일을 훔쳐봤다고 보도했다. 영국의 NSA에 해당하는 기관의 번역 담당자 캐서린 건에게 문서유출 책임을 묻는 소송이 제기됐다(그녀는 자신이 한 일이라고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훗날 이 소송을 취하했다. “통상적인 관행”이라고 유엔에서 근무했던 한 미국 정부 당국자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말했다. “우리가 늘 해오던 일이다.” 불가리아 대사는 자신을 감시하지 않았다면 모욕으로 여겼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정보 관계자들은 그 문서가 조작됐으며 민감한 시기에 미국 관계자들을 당혹케 하려는 의도라고 말했다.
이 추문은 크게 확대되지 않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았다. 2004년에는 이라크 전쟁 전 몇 주 동안, 영국 정보국이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을 정탐했다고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전 보좌관이 폭로했다. 블레어는 그 주장을 부인했다. 2004년 말에도 제네바 유엔 본부의 고위급 회의 장소로 사용되는 방에서 또 다른 도청장치가 발견됐다. 범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THE POLONIUM TRAIL(2006년)
폴로늄 암살사건
배후: 러시아
표적: 러시아 반체제 인사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과거 KGB 요원으로 러시아 정부를 비판했던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는 2006년 런던에서 사망했다. 사망하기 전 그는 자신의 “현 상황”에 책임이 있는 사람에게 이 같은 말을 남겼다. “내 입을 막는 데는 성공할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대가가 따른다.” 리트비넨코는 런던의 밀레니엄 호텔에서 누군가 그의 찻주전자에 탄 희귀한 방사성 동위원소 폴로늄 210에 중독돼 숨졌다.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리트비넨코와 그의 가족은 2000년 러시아에서 망명한 뒤 영국 시민이 됐다. 그들은 블라디미르 푸틴(리트비넨코가 마지막으로 남긴 발언에서 암시한 인물)을 날카롭게 비판한 일로 망명을 선택했다. 영국 검사들이 또 다른 전직 KGB 요원을 용의자로 지목했지만 러시아는 그를 살인혐의로 법정에 세우도록 넘겨주지 않았다.
푸틴이 러시아 사법부를 얼마나 확고히 장악했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러시아가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리트비넨코의 말은 옳았다. 살인사건 후 영국은 러시아 외교관 네 명을 추방했다. 그 뒤로 러시아와 서유럽의 사이에 형성된 한랭전선이 걷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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