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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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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그룹, 이태원 참사 희생자 지원 등에 5억원 기부

산업 일반

한진그룹이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을 지원하고, 사회 안전 시스템 구축에 힘을 보태기 위해 성금 5억원을 기부한다고 14일 밝혔다. 성금은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를 통해 11월 중 전달될 예정이다. 한진그룹 관계자는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며 “이번 성금이 희생자들과 유가족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덜고,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안전해질 수 있도록 보탬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밝혔다. 이창훈 기자 hun88@edaily.co.kr

2022.11.14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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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이승만은 “남궁이가 해냈구나” 극찬

산업 일반

1952년 10월 21일.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반도에서 1만t급 대형선이 출항한다. 고려호. 국적 대한민국. 당시만 해도 1만t급 대형선을 갖고 있는 나라는 전 세계 다섯 곳 뿐이었다. 수출용 고철 1600t을 싣고 부산항을 떠나 미국 포틀랜드항으로 향하는 고려호에 오른 이승만 대통령은 서른여덟 살 젊은이의 등을 연방 두드리며 감격을 연발했다. “남궁이가 해냈구나.” 남궁련(南宮鍊). 그는 한국 해운사(史)에 이렇게 이름 석 자를 올렸다. 그는 1949년 극동해운을 설립하고 태평양 전쟁 말기 부산 앞바다에서 침몰했던 일본 배 ‘가즈우라마루호’를 인양해 수리에 들어갔다. 수리에 필요한 돈 70만원은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해 외환대부로 받아냈다. 이 대통령이 ‘M. S. (Motor Ship) Korea’를 ‘Miss Korea’로 잘못 읽어 ‘미스코리아호’로 더 널리 알려진 우리나라 최초의 1만t급 대형선은 고(故) 남궁련 회장의 삶을 ‘바다’로 옮겨놨던 것이다. 그는 1968년 인생에 또 한번의 전환점을 맞는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그에게 파산 직전이던 대한조선공사를 인수해 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기회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고 찾아왔다. 대만으로부터 250t급 참치어선 20척을 낙찰받은 것이다. 이어 세계 최대 정유회사인 미국의 걸프오일로부터 2만t급 유조선 6척을 수주했다. 석유제품선을 구경도 할 수 없었던 때였지만 그는 미국 필라델피아로 날아가 선주를 설득했고, 마침내 한국 조선업계의 새로운 역사가 쓰였다. 그는 이후 100만t급 선박 건조를 할 수 있는 옥포조선소 건설을 위해 사력을 다하다, 결국 자신의 손으로 이루지 못하는 아픔도 겪었다. 조선 경기가 불황에 빠지고, 무리한 건설비 투입으로 결국 옥포조선소 건설 프로젝트는 1976년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 손으로 넘어갔다. 조선공사 경영권도 차남인 호씨에게 넘겼다. 조선공사는 80년대 말 한진그룹으로 인수됐다. 그의 해운왕 꿈은 다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고 남궁련 회장의 도전은 우리나라가 세계 제 1의 조선 강국이 되는 기틀이 됐음에 틀림없다. 86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그는 이듬해 일본인 부인이었던 와다에이 여사가 별세한 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자택에서 고미술을 수집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가 국가에 기증한 국보급 한국 문화재도 상당수다. 고인은 경기도 양주(현 서울 도봉구 방학동) 출생으로 일본 니혼(日本)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광복 이전에는 일본, 만주, 중국 등에서 비누 등 원자재 거래로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는 1949년 극동해운을 설립하고 54년부터 6년간 국영 대한해운공사 사장을 지냈다. 61년 한국경제인협회 부회장, 이후 경제심의위원, 금융통화위원 등을 거쳐 68년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를 인수, 88년까지 사장·회장을 역임했다. 유족으로 욱강(오리엔탈코 사장), 호(메트로신문사 사장)씨 등 4남 3녀가 있다. 90세.

2006.02.27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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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 ·남산 자락에 거주 경남출신, 아들부자 많아

산업 일반

포브스코리아는 지난 3월호에 조사 ·발표한 한국 부호들의 인적사항을 살펴봤다. 이들의 출신지 ·거주지 ·학력 ·가족관계 ·신장과 혈액형 등 신체사항 ·취미 등을 일일이 따져봄으로써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한국 부호는 어떤 사람인가. 조사결과에 따르면 경남 출신으로 서울 강북에 거주하며, 서울대를 나온 1m71㎝ 정도 키에 아들 둘을 둔 사람이 평균치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을 제외한 60명의 부호들의 평균신장은 1m71.3㎝였고, 몸무게는 평균 70.2㎏(다소 유동적)으로 나왔다. 한국인 표준체격(기술표준원 2004년 기준 신장 1m73㎝, 몸무게 69.1㎏)과 비교해 키는 약간 작고, 몸무게는 조금 더 무거운 것으로 나타났다. 혈액형은 공개된 자료(38명)만 분석한 결과 O형(12명)이 가장 많았고, A형(10명)이 그 뒤를 이었다(한국인 중에는 A형이 가장 많다. 서울아산병원 발표 2003년 기준 : A형 34%, O형 28%, B형 27%, AB형 11%). 북악산 ·남산 자락에 밀집 = 한국 부호들의 거주지를 보면 대부분(61명) 서울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들은 주로 강남 지역보다는 강북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신흥 부자는 강남에, 큰 부자는 강북에 산다’는 얘기를 확인해주는 셈이다. 특히 강북 중에서도 저택 밀집지역인 성북동과 한남동에 살고 있는 부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한남동에는 1위인 이건희 삼성 회장을 비롯해 정몽구 현대 ·기아차그룹 회장, 이명희 신세계 회장,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 서경배 태평양 사장, 강영중 대교그룹 회장 등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이태원에는 정상영 금강고려화학 명예회장,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 등의 자택이 있다. 인근인 장충동에는 이재현 CJ 회장, 이호진 태광산업 회장이 살고 있다. 후암동에는 임광수 임광토건 회장이 살고 있다. 서울 남산을 둘러싸고 부호들의 거주지가 형성돼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부호들의 집단 거주지는 성북동이다. 이곳에는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정몽근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이화경 미디어플렉스 사장, 이회림 동양제철화학 명예회장,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 등이 살고 있다. 성북동뿐 아니라 평창동 ·구기동 ·가회동 등 북악산을 둘러싸고 있는 동네에도 부호들이 많이 산다. 평창동에는 정몽준 현대중공업 대주주가, 가회동에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구기동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청운동에는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이 살고 있다. 남산과 함께 북악산도 또 다른 부호 거주지 축인 셈이다. 이밖에 이준용 대림그룹 회장과 박경복 하이트맥주 명예회장은 신문로에, 장평순 교원 회장은 관철동에, 박성훈 재능교육 회장은 혜화동에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강남에 거주하는 부호들은 10명 안팎인 것으로 나타났다.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과 허진규 일진 회장은 서초동에, 김정식 대덕전자 회장과 박병엽 팬택 부회장은 청담동에, 윤세영 태영 회장은 방배동에, 허진수 LG칼텍스정유 부사장은 압구정동에, 구태회 LG전선 고문은 신사동에, 윤석금 웅진닷컴 회장은 삼성동에 살고 있다. 한국부자는 아들부자 = 63명의 부호들은 평균 3.04명의 자녀를 두었다. 아들이 평균 1.8명, 딸이 평균 1.2명으로 아들이 더 많았다. 자녀구성비를 보면 아들 둘만 둔 사람이 9명으로 가장 많았다. 가장 많은 자녀를 둔 사람은 구자경 회장과 구태회 고문으로 두 사람 모두 4남2녀를 두었다. 최진민 귀뚜라미그룹 명예회장(2남3녀)과 신춘호 회장 ·이준용 회장(3남2녀)도 많은 자녀를 둔 편에 속했다. 홍종렬 고려제강 명예회장은 아들만 넷이다. 63명의 부호 가운데 딸만 둔 사람은 조수호 회장(2녀) 한 명뿐인 것으로 조사됐다. 경남 출신이 최다(最多) = 한국 부호들의 출생지를 분석해 본 결과 24명이 경상남도 출신인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 대상 63명의 38%에 해당하는 수치다. 특히 10위권 부호 가운데 6명이 경남 출신이었다. 서울 출신이 14명으로 그 뒤를 이었고, 강원 ·경기도 출신이 각각 4명이다. 평안북도(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 ·황해도(허영인 SPC그룹 회장) 등 이북 출신도 한 명씩 있었다. 부호들의 평균 나이는 63세로 이회림 회장이 최고령(88세), 김정주 모바일핸즈 대표가 최연소(37세)였다. 연령분포를 보면 50대와 60대가 18명씩으로 가장 많았다. 30대가 2명인 데 비해 80대는 신격호 ·구자경 ·박경복 ·홍종렬 ·이회림 ·배상면 ·구태회 회장 등 7명이나 됐다. 서울대 ·고려대 출신 40% = 학력으로 보면 학사 출신이 38명으로 가장 많았고, 석사(16명), 박사(6명), 고졸(3명)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외국에서 대학을 나온 사람은 7명, 석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14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해외에서 MBA를 졸업한 부호는 서경배 사장, 허창수 회장, 조양호 회장, 박성훈 회장, 이호진 회장,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회장, 이정훈 서울반도체 사장, 정몽준 대주주 등 8명이었다. 해외박사는 허동수 회장, 정몽준 대주주 등 2명이다. 대학을 국내에서 나온 부호(49명)들의 경우 서울대 졸업생이 14명으로 가장 많았고, 고려대 졸업생이 12명으로 두 번째로 많았다. 이어 연세대(4명) ·한양대(4명) ·동국대(2명) 등의 순이었다. 전공분야로 보면 상경계가 31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공계와 인문계는 각각 15명과 9명이었다. 취미는 골프 = 부호의 취미는 골프(21명)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 다음은 독서(7명), 등산(4명)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주력업종으로는 전자와 식품이 9명씩으로 가장 많았고, 출판 ·미디어와 유통 ·물류 ·운송이 각각 7명, 건설이 5명 등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번 조사에선 가족 1인당 보유주식 평가액도 계산했다. 가족이 보유한 주식평가액을 가족 수로 나누면 이건희(7,700억원) ·신격호(3,960억원) ·이명희(3,850억원) ·정몽구(2,750억원) ·구자경(2,200억원) ·강영중(1,580억원)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1,367억원) ·서경배(1,281억원) ·정상영(1,258억원) ·박경복 회장(1,158억원) 순이다. 가족 순위와 다소 차이를 보였는데, 자녀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이명희 회장과 김택진 사장 등이 순위가 오른 반면, 자녀를 많이 둔 구자경 회장 등은 순위가 하락했다.

2005.04.1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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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美 대사워커 -한화의 30년 至交

산업 일반

지난 4월13일 워커 전 주한 미국 대사의 팔순잔치 “우리 부부 연애 시절부터 우리를 지켜봐 온, 나에게는 아버지와도 같은 당신의 80번째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지난 4월13일 서울 플라자 호텔 그랜드볼룸에는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축사가 울려펴졌다. 생일상을 앞에 두고 묵묵히 이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은 주한 미국 대사를 지낸 리처드 워커씨. 백발에 파란 눈의 이 노신사에게 한국식 팔순잔치는 웬말일까. 이날 행사를 주관한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은 “팔순잔치에 이어 1백세 때도 한국에서 잔치를 열어드리겠다”고 즉석 제안하며 건강을 기원하는 술잔을 높이 들었다. 워커 전 대사는 이어진 답사에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며 즐거워했다. 평생을 한국과 동아시아를 연구하는 학자로, 1981년부터 86년까지 6년간은 주한 미국 대사로 격동기의 한국을 지켜본 이 노신사는 한국과의 인연으로 살아온 생애를 반추하며 잠시 목이 잠기기도 했다. 미국내 대표적인 지한파(知韓派)인 워커 전 대사는 현재에도 민간차원의 한·미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인물이다. 워커 전 대사와 김승연 회장의 인연은 김회장의 선친인 고(故) 김종희 회장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화그룹 창업주인 김 전 회장은 60년대 말 한국을 연구하는 학자로 서울을 오가던 워커 전 대사를 만나 10여년 동안 친형제 이상의 교분을 나눴다. 당시 김 전 회장은 ‘워커 대사의 60세 생일은 한국식 환갑잔치로 꼭 치뤄주겠노라’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60회 생일 전 해인 81년 김 전 회장이 별세, 아들인 김회장이 아버지 대신 환갑잔치를 마련했다. 이번 팔순 잔치는 82년 환갑잔치 당시 김회장이 “20년 뒤 팔순 때도 꼭 서울에서 잔치를 열어드리겠다”고 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래서 이번 행사 이름도 ‘워커 전 대사 환갑 20주년 행사(Ambassader Richard Walker’s 20th Hwangap Anniversary)’로 붙였다. 이날 행사에는 워커 전 대사의 아들·딸·손자 등 가족은 물론, 한진그룹 조중건 고문 가족, 숙명여대 이경숙 총장 가족, 노신영·이영덕·이홍구 전 국무총리, 호레이스 언더우드 연세대 이사 부부, 토마스 허바드 주한 미 대사 등 1백여명이 참석했다. 한진그룹 조중건 고문 역시 워커 전 대사와 오랜 친분을 나눈 수십년 지기. 숙대 이경숙 총장은 워커 전 대사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에서 직접 가르친 제자다. 이들뿐 아니라 워커 전 대사가 한국에서 맺은 크고 작은 인연의 사람들도 자리를 함께 했다. 젊은 시절, 한국말을 배우러 서울을 찾았을 당시 자신의 한국어 과외교사를 해주었던 이경희(50)씨 부부도 어렵게 찾아내 이날 자리를 같이 했다. 서울 근무 시절, 워커 전 대사가 단골로 드나들던 이태원의 양복집 사장 부부도 그의 간곡한 초청으로 참석했다. “형님으로 부르라” 워커 전 대사는 원래 중국학을 전공했다. 42년 미국 드류대학에서 역사학과 정치학 학사를 취득한 그는 50년 미국 예일대에서 국제교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문 분야는 중국 지역이었다. 박사 학위 취득 후 50년부터 예일대에서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6. 25전쟁 발발 후 육군 통역 장교로 한국에서 근무하게 된다. 당시 그는 맥아더 장군의 통역관으로 한국과 최초의 인연을 맺었다. 그 후로도 중국·한국 등 동아시아 문제 전문가로 한국을 오가던 워커 전 대사가 김종희 선대 회장과 인연이 닿은 것은 60년대 말. 52년 조선화약공사(한화의 전신)를 설립, 군수산업에 몸담고 있던 김 전 회장과는 미군을 통해 서로 알게 됐다. 김 전 회장은 주한 미군 수뇌부와도 절친한 사이였다. 70년대 초 주한 미군 사령관이던 리처드 스틸웰 장군과 특히 가까웠다. 73년 한국에 머물던 워커 전 대사의 집은 용산 미군 기지 내 스틸웰 장군 집 바로 건너편. 용산기지를 드나들던 김 전 회장은 스틸웰 장군 집에서 자주 워커 대사와 자리를 같이 하게 됐고, 이들의 우정도 자연스레 깊어갔다. 워커 전 대사는 98년 출간한 그의 회고록 「한국의 추억」에서 '김 전 회장은 한국 문화를 이해하고, 그 독특한 맛과 향기를 즐길 수 있도록 도와준 소중한 친구'라고 썼다. 워커 전 대사는 1922년 생으로 김 전 회장과 동갑내기다. 만나서 친해질 듯싶으면 형·아우 서열부터 정리하는 한국식 친구 사귀기에 익숙해 있던 워커 전 대사는 자신보다 두세달 늦게 태어난 김 전 회장에게 “형님으로 부르라”고 했을 정도로 서로 막역한 사이가 됐다. 워커 전 대사가 보는 김 전 회장의 모습은 이렇다. 한마디로 열정이 온 몸에서 펄펄 넘치는 사람이라는 것. 워커 전 대사는 “김 전 회장은 언제나 활기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자제력과 통솔력도 뛰어났고, 매사를 자신감 있게 추진하는 사람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그가 김 전 회장에게 자주 건넸던 농담 중 한구절. “이봐요, 다이너마이트. 당신 몸에는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아. 우리가 문을 등지고 앉아 있더라도 당신이 들어오면 나는 직감적으로 당신임을 알아챌 정도라구”. ‘다이너마이트’는 김 전 회장의 미국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화약을 만드는 회사 사장이니 당연한 별명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김 전 회장은 ‘폭발적인’성격의 소유자란 뜻이렸다. 김승연 현 한화 회장도 아버지의 별명을 이어받았다. 김승연 회장은 미국 친구들 사이에서 ‘다이너마이트 주니어’로 통한다. 당신은 ‘다이너마이트 김’이야! 워커 전 대사는 자신의 회고록 곳곳에 ‘다이너마이트 김’에 대해 써놓았다. 특히 한국 산업화의 역군으로 한국의 미래를 짊어졌던 일꾼으로 그를 높이 평가했다. 서울 시청 맞은편에 자리잡은 플라자 호텔에 들를 때마다 김 전 회장의 모습이 떠오른다며 그를 추억하고 있다. 김 전 회장이 설립한 이 호텔에 워커 대사는 남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이 호텔에서 워커 전 대사는 아끼는 친구 ‘다이너마이트 김’을 만나 국가의 미래에 대해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이 호텔을 볼 때마다 근대화를 주도했던 한국 재계 지도자들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고 한다. 워커 전 대사와 김 전 회장 간에는 가족간의 교류도 잦았다. 워커 전 대사의 아내 세니 여사는 김 전 회장의 가족들과 한 식구처럼 지냈다. 김 전 회장의 부인 강태영씨는 ‘케이’란 미국식 애칭으로 불리며, 많은 행사에서 세니 여사와 시간을 보냈다. 김승연 회장도 그를 아버지처럼 따랐다고 한다. 김 전 회장과 워커 전 대사의 인연은 81년, 김 전 회장이 세상을 떠나면서 끊어지는 듯했다. 워커가 주한 미 대사로 서울에 부임하기 석달 전, 김 전 회장은 58세의 일기로 숨을 거둔 것이다. 하지만 김 전 회장과 워커씨와의 인연은 대를 이어갔다. 김승연 회장이 워커 전 대사를 아버지처럼 모시며 관계를 이어간 것. 82년 7월23일, 김 전 회장의 1주기 추도식에서 워커 대사는 직접 추도사를 낭독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오늘의 미국을 만드는데 카네기와 멜론·벤더빌트·록펠러 등 재계 지도자들이 큰 일조를 했다. 2차 대전 이후 한국에도 이같은 사람들이 많이 등장했고, 김 전 회장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국가 건설을 위해 비(非)정치 분야의 많은 뛰어난 ‘건축가’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그를 회고했다. 워커 전 대사는 김 전 회장을 “회사를 권위주의적으로 운영하는 면도 있었지만 능률적인 면에서는 더욱 돋보이는 경영 스타일을 지니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솔직담백한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성실이 몸에 배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워커 전 대사는 77년 이리시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고 당시 수습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의 모습을 특히 기억하고 있다. 사고로 회사가 파산지경에 이르렀지만 지극 정성으로 피해가족을 보살피던 그의 모습이 바로 지도자의 표상이라는 것이다. 워커 전 대사는 현재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대학에서 워커 연구소를 운영하며 만년 현역 학자로서의 생을 살고 있다. 많은 국제 관계 저널에 한국 관련 저술을 기고하는 등 한국 연구에 일생을 바치고 있다. 최근 그를 비롯한 주한 미국 대사 역임자들의 북한 방문을 추진하기도 했다.

2002.04.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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