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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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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K-방산도 발목 잡나...'9조' 흑표 전차 계약에 악영향 감지

국제 이슈

한국 방산업계가 추진하던 약 '9조 원' 가량의 폴란드 'K2 흑표 전차' 추가 수출 계약이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와 맞물려 표류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방산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폴란드 정부와 K2 전차 820대 추가 구매를 위한 2차 계약이 막바지 협상 단계에 있었으나, 최근 한국 내 정치적 혼란이 변수로 작용하며 연내 계약 체결이 어렵게 됐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이번 계약은 820대 중 180대를 직구입과 현지 생산 방식으로 도입하는 방안이 유력했다.폴란드와 한국은 지난 2022년 7월 방산 수출 기본계약을 체결한 이후, 같은 해 8월 K2 전차 180대, K-9 자주포 212문, FA-50 경공격기 48대를 포함한 약 17조 원 규모의 1차 계약을 성사시켰다. 이후 2차 계약 논의가 이어지며 K-9 자주포 개별 계약 등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었으나, 이번 K2 전차 계약이 불확실해지면서 방산 수출 성장세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점차 커지고 있다.방산업계 관계자는 “정부 간 거래의 특성이 강한 방산 산업은 특히 국정 공백 상태에서 신뢰를 잃을 가능성이 높다”며 “폴란드뿐만 아니라 다른 수출 대상국에서도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어 걱정”이라고 밝혔다.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유럽 시장뿐만 아니라 중동과 북미 시장에서도 한국 방산 수출에 타격을 줄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중동 지역은 천궁-Ⅱ 등 무기 체계 수출로 한국 방산업계가 새로운 전략 시장으로 주목하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한국의 정세 혼란이 국제 신뢰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며 추가 계약 논의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특히 방산 업계는 북미 시장에서의 진출 계획에도 차질이 생길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올해 미국 공군과 해군의 훈련기 사업에 도전장을 내밀었으나, 정부 역할이 중요한 방산 시장의 특성상 정세 불안이 장기화되면 경쟁에서 밀릴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방산업계는 이번 사태가 한국 방산 수출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정부와 기업이 협력해 조속히 정세를 안정시키고 국제 신뢰도를 회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2024.12.09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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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손으로 빚은 K2 전차, 북유럽 방산시장 진출 ‘시동’

산업 일반

우리나라 흑표 전차 K2가 북유럽 방위산업 시장 개척에 나선다. K2 전차 도입을 검토 중인 노르웨이 정부가 서울을 찾아 한국과의 방위산업 협력을 논의하기로 했다. 2일 방위사업청은 노르웨이 국방부 병기총국과 이날부터 4일까지 서울에서 제9차 방산군수공동위원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방산군수공동위원회는 한국과 노르웨이가 방산분야 현안을 논의는 연례 회의체다. 한국 측에서는 김생 방사청 국제협력관이, 노르웨이 측에서는 모튼 틸러 국방부 병기총국장이 공동위원장으로 회의를 주재할 예정이다. 이번 공동위원회에서는 양국이 한국의 K2 전차 수출을 위한 노르웨이 주력전차 사업을 비롯해, 무기체계나 핵심기술을 공동개발하기 위한 다양한 현안을 의제로 논의할 계획이다. 방사청에 따르면 노르웨이는 그간 콩스버그 등 자국 방산업체의 한국시장 진출과, 한국 방산업체와의 공동개발과 같은 협력 방안을 한국 측에 타진해 왔다. 노르웨이 주력전차 사업은 동계 시험평가 종료 후 기술협상과 가격협상을 거쳐 우선협상 대상자를 결정하고 올해 말 계약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공동위원회 부대행사로 ‘한-노르웨이 국방연구개발 MOU’ 서명식을 개최할 예정이다. 강은호 방위사업청장은 “고위급간 인적교류로 활성화된 양국의 방산협력을 한-노르웨이 국방연구개발 MOU를 통해 제도적으로 뒷받침해 본격화할 수 있다”며 “이는 K2 전차의 노르웨이 진출 등 구체적인 성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번 공동위원회는 우리 국방당국 고위급 인사의 노르웨이 방문의 연장선상에서 추진된 것이다. 앞서 올해 2월 서욱 국방부 장관과 강은호 방위사업청장은 노르웨이를 방문해 오드 로겔 에녹센 노르웨이 국방장관과 9년만의 국방장관회담을 개최했다. 이들은 노르웨이 주력전차 사업의 동계 시험평가가 이뤄지고 있는 레나 기지를 방문해 사격 시험을 참관한 바 있다. 당시 강은호 방사청장은 당초 올해 8~9월로 계획했던 공동위원회의 조기개최와 노르웨이 대표단의 방한을 제안했으며, 노르웨이는 이를 수용했다. 강필수 기자 kang.pilsoo@joongang.co.kr

2022.05.02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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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과 슈퍼히어로의 만남

산업 일반

마블 만화의 흑인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최초의 TV 드라마 시리즈 ‘마블 루크 케이지’ ‘마블 루크 케이지’ 시즌2가 공개됐다. 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시리즈는 미국 사회의 시대상을 시의적절하게 대변한 작품으로 2016년 첫선을 보였다. 마블 만화의 흑인 슈퍼히어로가 TV 드라마의 제목을 장식한 최초의 작품이었다. 특히 주인공 케이지는 총알 구멍이 숭숭 뚫린 후드티를 입는다. 2012년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히스패닉 자경단원의 권총에 맞아 사망한 비무장 흑인 소년 트레이본 마틴의 치명적인 상처를 떠올린다. ‘공권력에 의한 흑인 소년의 희생’이라는 감정적 양극화를 불러온 미국 사회의 문제를 만화의 현실도피주의와 결합시킨 것은 드라마로서 대담한 시도로 평가 받는다.하지만 이 작품의 제작·연출을 총괄하는 체오 호다리 코커는 흑인 청소년이 경찰의 총격을 받아 숨지는 미국 사회의 기이한 현상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오히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언젠가 미국의 흑인이 그런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온다는 희망을 주고 싶다고 밝혔다.케이지는 1972년 마블 만화에 처음 등장했다. 그는 전과자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던 중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다. 케이지가 초능력을 얻게 된 과정은 또 다른 마블 캐릭터 제시카 존스의 경우와 흡사하다. 그는 원치 않는 의료 실험 도중 일어난 사고로 총알도 뚫지 못하는 강철 피부를 갖게 된다. 이후 도망자가 된 케이지는 자신의 능력을 숨기고 사람들의 관심을 피해 살고자 하지만 얼마 못 가 뉴욕 할렘을 지키기 위해 싸울 수밖에 없는 현실에 맞닥뜨린다. 마지못해 슈퍼히어로가 된 것이다. 그러면서 케이지는 초능력자로서의 심리적인 트라우마에 시달린다.시즌1은 ‘강철 피부를 가진 흑인 남자’가 자신의 능력을 받아들이고 할렘을 보호하는 사명을 떠안게 되는 과정을 그렸다. 최근 공개된 시즌2에선 케이지가 혼자서 모든 사람을 구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한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해 심한 갈등을 겪는다.음악 전문기자에서 드라마 대본작가로 방향을 바꾼 코커는 실제 자신의 영웅이었던 힙합의 전설 투팍 샤커에게 영감을 얻어 케이지의 캐릭터를 발전시켰다고 말했다. 1990년대 미국 서부를 대표하는 ‘갱스터 래퍼’로서 흑인 빈민가의 폭력과 사회적 문제 등을 노래로 표현한 샤커도 드라마 같은 격동의 삶을 살았다. 그는 1996년 라스베이거스에서 괴한의 총격을 받아 25세에 사망했다. 서부 힙합을 대표하던 그와 ‘동부 힙합의 전설’로 꼽히는 노토리어스 비아이지 사이의 갈등이 초래한 총격 사건으로 추정됐다. 비아이지 역시 이듬해인 1997년 24세의 나이로 총에 맞아 숨졌다.샤커는 갱스터로서의 삶에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믿었다. 코커도 같은 생각이다. 그는 “샤커에 관해 매력적이면서도 좌절스러운 점은 그가 갱스터의 길을 걷는 것이 잘못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고 말했다. “흑표당(Black Panther Party, 급진적 흑인 인권운동 단체로 샤커의 어머니가 이 단체의 간부였다)은 갱스터의 에너지를 용감하고 긍정적인 힘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샤커도 그처럼 흑인 청소년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힙합을 하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으려고 애썼다. 그들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시즌2의 초기 에피소드에서 케이지(마이크 콜터)는 새로운 악당 부시마스터(무스타파 샤키르)와 맞붙었다가 치욕스럽게 패한다. 케이지는 그동안 잔혹함을 경멸했지만 그 사건 이후 오히려 스스로 잔혹함을 드러내며 부시마스터에게 반격을 가한다. 당연히 그의 내면은 극심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다. 코커는 그 과정을 설명하며 ‘핵주먹’으로 알려진 전설의 복서 마이크 타이슨의 말을 인용했다. “얼굴에 펀치를 얻어맞고 나면 그에 맞대응할 뿐 훌륭한 계획이고 뭐고 필요 없다.” 코커는 시청자가 최종회인 13편에 가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갖게 되기를 바랐다고 설명했다. “이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헷갈린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범죄를 막는 영웅이 동시에 범죄자인가? 초인적인 영웅이 너무도 인간적인 오류를 지니고 있어 그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코커는 이 드라마를 ‘트로이의 목마’라고 생각한다. 상대 진영에 몰래 침투해 문을 열어젖힘으로써 대화와 새로운 식견을 전파하는 역할을 떠맡는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그는 “만화책 팬으로선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모든 다양한 문화에 시청자가 깊이 빠져들도록 하고 싶다”고 말했다.코커에겐 그 문을 열어젖히는 ‘비언어적인 열쇠’가 음악이다. 그는 이 드라마에서 음악을 스토리텔링의 일부로 사용한다. 코커는 “할리우드의 거장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청소년 시절 로큰롤에 빠졌듯이 난 갱스터 랩에 매혹됐다”고 말했다. “스콜세지 감독은 로큰롤에서 창의적인 자신감을 얻었다. 1990년대 내가 젊었을 때는 카하트 재킷과 팀버랜드 부츠로 상징되는 갱스터 랩이 유행했다. 그게 나의 ‘로큰롤’인 셈이었다.” 음악과 관련해 코커는 ‘마블 루크 케이지’ 시즌1을 “마블 만화 세계의 우탱클랜화’로 묘사했다(우탱클랜은 힙합계의 유명한 흑인 그룹이다). 백인 일색인 세계에 처음으로 흑인 히어로를 선보였다는 뜻이다(또 다른 마블의 흑인 주인공 드라마 ‘블랙 팬서’는 그로부터 1년 뒤인 지난해 첫 시즌을 시작했다).‘마블 루크 케이지’ 시즌2는 랩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코커는 “힙합의 뿌리엔 R&B, 펑크, 레게 음악이 자리 잡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초의 힙합 스타 DJ는 ‘디제이 쿨 허크’였다. 자메이카에서 태어나 십대 시절 뉴욕 브롱크스로 이주한 쿨 허크는 1950년대 킹스턴에서 시작된 자메이카 전통 ‘사운드 시스템’을 선보였다. DJ와 MC가 거대한 스피커를 설치하고 거리 파티를 열어 턴테이블에서 직접 샘플링과 믹싱을 하면서 중간중간 애드립으로 말을 추가하는 방식이었다.따라서 ‘마블 루크 케이지’ 시청자는 시즌2에서 아주 다양한 카리브해 문화를 접하게 된다. 부시마스터가 그 안내자다. 부시마스터는 할렘의 이야기를 자신이 사는 브루클린 크라운 하이츠로 가져간다. 카리브해 출신 이민자가 집단으로 거주하는 그곳에 실제로 있는 식당 글래디스(자메이카 전통 음식인 염소고기 커리, 저크 치킨, 페퍼드 슈림프로 유명하며 극중에선 식당 이름이 ‘그웬스’로 나온다)가 그의 아지트다. 거기서 부시마스터는 자메이카 음악을 들으며 할렘을 자신의 왕국에 합병할 음모를 꾸민다.코커는 1990년대 자신이 그랬듯이 시청자도 레게 음악의 에너지와 리듬에 푹 빠지기를 기대한다. “파티에 가면 흥이 오를 때 갑자기 레게 음악이 울려 퍼졌다. 그러면 모두 신나서 몸을 흔들었다. 그런 문화를 몰랐다면 처음엔 이해하기 어렵지만 자꾸 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빠지게 된다.”코커는 요즘의 드라마 ‘몰아보기’ 추세를 자신의 십대 시절 음악 듣던 방식에 견줬다. “프린스가 앨범을 내면, 예를 들어 ‘Sign ‘O’ the Times’나 ‘Lovesexy’가 시판되면 그 즉시 CD나 카세트를 구입해 집에 가서 앨범 전체를 연거푸 두 번씩 들었다. 앨범의 분위기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 불도 껐다. 그런 다음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몇 시간 동안 그 앨범에 관해 이야기했다.”코커가 음악 전문기자가 된 것은 ‘A&R 맨’이 꿈이었기 때문이다. 음반회사에서 아티스트의 발굴, 앨범 기획·제작, 곡목 관리 등을 전담하는 간부를 말한다. 그는 “이제 드디어 TV 드라마 제작 총책임자가 됐으니 그 꿈을 이룬 셈”이라고 말했다. 코커는 마치 앨범을 제작하듯이 ‘마블 루크 케이지’ 제작 계획을 세웠다. 예를 들어 각 에피소드의 명칭에 사운드트랙에 사용되는 음악 제목을 사용했다. 니나 시몬(그의 어머니가 좋아하는 가수다), 라킴, 페이스 에번스, 고스트페이스 킬라(우탱클랜 멤버) 등의 아티스트가 만든 음악이다.어떤 면에서 보면 그의 드라마는 비욘세의 콘셉트 앨범(한 가지 주제를 기준으로 음악을 선별해 담은 앨범)과 비슷하다. “비욘세는 6집 앨범 ‘Lemonade’를 내면서 비디오도 함께 출시했다”고 코커는 설명했다. “음악과 함께 스토리라인, 연기, 분위기에 동시에 몰두할 수 있는 신나는 경험이었다. ‘마블 루크 케이지’에서도 그런 경험을 제공하고 싶다. 강철 피부의 ‘방탄 레모네이드’라고 할까?”- 오텀 노엘 켈리 뉴스위크 기자

2018.07.23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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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의 군사력 어떤 차이가 있나

국제 이슈

병력과 포대 수에선 북한이 2:1로 우세하지만 질적 수준에선 남한이 크게 앞서 지난 6월 19일 한국과 미국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목표로 한 북미대화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올해 8월로 예정됐던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을 유예하기로 했다. 그러나 북한이 비핵화 약속 어기면 훈련은 즉시 재개된다는 단서가 붙었다.이 결정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북미 정상회담을 가진 직후 ‘워게임’을 끝내기로 약속했다고 밝힌 것에 따른 조치다.한반도는 세계에서 가장 군사화된 지역 중 하나다. 그렇다면 남·북한에 배치된 군사력은 어느 정도일까?군사력을 측정하는 한가지 방법은 병력과 그들이 보유한 군비의 규모를 비교하는 것이다.북한군은 한국군보다 규모가 크다. 병력과 포대의 수에서 북한이 약 2:1의 우위를 점한다. 영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가 발표한 2015년 보고서 ‘군사균형(The Military Balance)’에 따르면 현역 병력은 북한이 119만 명, 한국이 65만5000명이고, 포대 수는 북한이 2만1000문, 한국이 1만1000문이다. 또 미국 국무부에 따르면 북한은 국내총생산(GDP)의 거의 4분의 1을 군사 비용으로 사용한다.그러나 전문가들은 무기에 엄청난 질적 수준 차이가 있기 때문에 군비와 병력만으로 군사력을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지적한다. 한국은 첨단 장비와 무기를 보유한다. 독일 본 국제군축센터(BICC)의 무기 전문가 마르틴 발레스는 지난해 도이체벨레 방송과 가진 인터뷰에서 “북한군은 1960년대 말의 소련제 T-62 전차를 갖고 있는데 그 무기를 한국군이 보유한 2013년 제작된 K2 흑표 전차와 같은 잣대로 비교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또 북한은 군용기를 563대 보유하지만 2014년 보수와 정비 문제로 전부 다 일시적으로 발진하지 못한 적이 있다. IISS에 따르면 북한은 그 외에도 각종 구식 육군·해군 무기에 의존한다.이런 불균형을 고려하면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집착해온 이유가 설명된다. 핵이 있어야 한국에 군사적으로 중요한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결국 비핵화를 위한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역사적인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북한은 배치된 미사일(주로 소련제 스커드 미사일의 개량품으로 일부는 핵탄두 장착이 가능하다)의 대부분을 한국 도시들에 겨누고 있다. 특히 수도 서울이 주 표적이다.한국의 주요 이점은 동맹국 미국의 보호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2만8500명에 이르는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다. 미국의 군사력은 북한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하다.핵무기를 제외해도 미국의 현역 병력은 130만 명에 이르며 세계에서 국방비를 가장 많이 지출하는 나라다. 또 미군은 최첨단 장비와 무기를 보유하며 집중 훈련을 받는다.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개선되는 조짐을 보이고 한미 훈련도 축소되고 있지만 한국과 미국, 북한의 병력은 한반도에서 계속 전투준비 태세를 유지하고 있다.- 톰 포터 뉴스위크 기자

2018.07.02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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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관 아카데미과학 대표

CEO

아카데미과학은 변화의 파도가 몰아치는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다. 1980년대 잘나가던 시절 모은 자금을 제품 개발에 투자했다. 돈 되는 사업에 눈을 돌린 일도 없다. 프라모델 한 우물만 판 덕에 글로벌 시장에서 통하는 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2만5000원과 1만7000원. 각각 한국형 고등훈련기 T-50의 48분의 1 크기 플라스틱 모델(프라모델)과 한국형 자주포 K-9의 35분의 1 모델 가격이다. 실제 무기 수출이 늘며 요즘 해외 밀리터리 마니아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진 제품들이다. K-9 자주포는 터키·핀란드·인도, T-50 훈련기는 이라크·필리핀·태국에 수출한 한국형 첨단 무기다. 덩달아 이들의 프라모델도 주문이 늘었다. 국산 무기의 수출 소식이 들릴 때마다 아카데미과학 김명관(47) 대표의 얼굴이 밝아지는 이유다. 아카데미과학은 국내 주요 탱크와 비행기, 군함의 프라모델을 제작한다. 김 대표는 “해외 프라모델 시장은 두터운 마니아층이 있다”며 “물량은 많지 않지만 세계 곳곳에서 K-2 흑표전차, K-9 자주포, T-50 고등훈련기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아카데미과학의 완구들은 지금 세계 60여 개국에서 유통 중이다.아카데미과학은 1969년 과학교사 출신의 김순환 전 아카데미과학 회장이 설립한 완구·과학교재 제조 기업이다. 80년대 100여 개의 업체가 난립했지만, 국내 프라모델 제작사로는 아카데미과학만 살아남았다. 김 대표는 “경쟁업체보다 해외 시장을 한발 앞서 개척했고, 품질 관리에 노력을 기울인 덕”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일본의 타미야, 독일의 레벨에 이어서 프라모델 업계 세계 3위 회사로 올라섰다. 2015년 325억원의 매출을 기록한 48년 역사의 중견 기업이다. ━ 업계 세계 3위, 48년 역사의 중견기업 본사는 경기 의정부시 용현동 용현산업단지에 있다. 한국에서 150명이 근무하고, 필리핀에 직원 300명 규모의 공장이 있다. 독일에서도 판매법인을 운영 중이다. 본관 입구 자동 유리문을 지나면 정면에 커다란 진열대가 있다. 탱크와 비행기, 군함 모델 수백 개가 방문자를 반긴다. 입구 오른편이 제조 시설이다. 기술자들이 금형을 디자인하며 프라모델 부품을 뽑아내는 곳이다. 아카데미 과학은 국내 기업 중 유일하게 프라모델의 개발·금형·사출·조립의 전 공정을 직접 하는 업체다.2층이 사무실이다. 역시 직원 책상 사이 사이에 인기 프라모델들이 서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장소는 사장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린 시절 침 흘리며 바라봤던 문방구 진열대가 떠올랐다. 사장실엔 수백 개의 프라모델 제품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빽빽이 쌓여 있었다. 사장 책상 뒤쪽 벽과 오른편엔 제품 상자들이 있었고, 왼편엔 세계 곳곳에서 모아온 장난감 샘플들이 있었다. 책상 앞쪽 산더미처럼 쌓인 장난감 사이로 두 개의 TV 화면이 보였다. 김 대표는 업무 시간에 만화 채널 투니버스와 EBS를 틀어 놓는다.“교육 프로그램과 인기 애니메이션을 보며 어떤 제품을 개발할지 고민합니다.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캐릭터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고요.”김 대표에게 회사는 고향 같은 곳이다. 그는 1970년 생이다. 회사 설립 다음해에 태어났다. 그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매일 밤, 서울 안암동 집 안마당에 세운 작은 천막에서 밤을 지새웠다. 전구 불 하나 켜 놓고 아이들이 사용할 과학 교재를 깎아 만들던 장인이었다.“첫 제품들은 단순했어요. 아버님이 나무판 잘라 바퀴 달고 고무줄 붙여서 만든 자동차였어요. 가내 수송업 수준이었지만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 인기였습니다.”김 회장은 고물상에 나온 부품들을 조립해 재미있는 완구들을 만들었다. 출근길은 삼선교 앞 초등학교, 퇴근길은 청계천 부품가게였다. 김 회장이 밤 새워 만든 모형이 소문을 타자 다른 선생님 사이에서 부탁이 들어왔다. 부잣집에서 주문이 들어온 일도 있다. 과학 교재 만드는 일에 빠진 김 회장은 결국 과학 선생님 자리를 8년 만에 그만두고 완구 회사를 차렸다. 자본금은 500만원, 아카데미과학의 시작이다. ━ 완구 산업 주도한 삼선교 과학사 완구와 과학교재는 만드는 족족 팔렸다. 5년이 지나서는 집 앞마당에서 나와 삼선교에 과학사를 차렸다. 몇 년 후엔 회사 이름은 아카데미과학교재로 정했다. 뭔가 교육적인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아카데미, 여기에 이것도 하나의 과학이라는 의미로 과학, 그리고 아이들이 교육용으로 사용하는 목적이기에 교재를 붙였다고 한다. 나중에 회사가 커가며 교재 사업이 줄자 지금의 아카데미과학이 됐다.80년대 들어 국내 프라모델 산업은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당시 초등학교에 다닌 남학생 대부분에겐 문방구 진열대를 가득 채운 프라모델을 넋 놓고 지켜 봤던 기억이 있을 정도다. 업체도 늘었다. 전국 곳곳에 100여 개 넘는 업체가 난립했다. 아카데미과학도 이때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호황기는 오래가지 않았다.한국에서 가장 많은 어린이가 참여했던 행사는 모형 비행기 대회다. ‘과학의 날’ 행사였다. 글라이더를 만들어 날리며 아이들은 파일럿과 항공 엔지니어의 꿈을 키웠다. 지금은 사라졌다. 시대가 변하며 참여하는 아이들이 크게 줄어서다.바람은 갈수록 거세졌다. 2000년대 들어 골목마다 PC방이 들어섰다. 수많은 인터넷 게임들이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지금은 스마트폰 시대다. 모바일 게임에 빠진 아이들이 사회 문제가 될 정도다. 여기에 저출산으로 아이들 수가 매년 줄고 있다. 문방구도 문을 닫고 있다. 가장 큰 원인은 학교의 교재 단체 구매다. 저소득 자녀들이 교재 구입에 어려움을 겪자 교육부가 나섰다. 학교에서 수업용 교재를 단체 구매하는 것이다. 문방구가 직접적인 타격을 입었다. 프라모델 업체도 충격이 컸다. 전국 최대 유통망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아이들이 프라모델을 접할 기회조차 사라진 것이다. 국내 프라모델 업체들이 경영난을 호소하며 하나 둘 사라져간 배경이다.김 대표는 2009년 회사에 합류했다. 연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다음 미국 뉴욕대에서 경영학석사(MBA)를 취득했다. 이후 10년 넘게 외국계 금융사에서 일했다.“아버지가 부르시더군요. 이제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요. 어려서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가업을 이을 것이라고요. 저도 완구를 좋아합니다. 꿈을 만드는 일입니다.”김 회장은 회사로 찾아온 아들에게 한 가지를 강조했다.“‘큰 회사는 아니지만, 남한테 줄 돈, 직원 월급, 단 한 푼도 단 하루도 늦게 준 적 없다’고 하시더군요. ‘정직하게 벌어서 정직하게 세금 내온 회사’라는 말씀도 계셨습니다. 마음에 새기고 일하고 있습니다.”아카데미과학은 변화의 파도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다. 80년대 잘나가던 시절 모은 자금을 제품 개발에 투자해서다. 돈 되는 사업에 눈을 돌린 일도 없다. 프라모델 한 우물만 판 덕에 글로벌 시장에서 통하는 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이를 앞세워 수출 시장을 개척한 덕에 한국에서 벌어진 급격한 변화에서 살아남았다. 타이타닉호가 좋은 예다. 1997년은 영화 타이타닉이 흥행에 성공한 해다. 글로벌 프라모델 업계에도 타이타닉 열풍이 불었다. 아카데미과학의 타이타닉 모델은 전세계에 50만 개가 팔려나갔다. 단일 모델로 아카데미 과학 최고 판매 기록이다. 높은 품질의 일본 제품이 있었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 업체들은 아카데미과학에 먼저 주문을 넣었다. 일본에 비해 가격 경쟁력이 앞섰음은 물론 품질도 떨어지지 않아서다.독일에서 열리는 뉘른베르크 세계완구쇼는 전세계 완구 구매자들이 모이는 자리다. 행사를 마칠 무렵엔 완구 관계자들이 우수한 제품을 선정하는 시상식이 열린다. 아카데미과학은 지난 2000년 이후 뉘른베르크 세계완구쇼에서 매년 수상해왔다. 제품 고증을 위해 아카데미 과학은 각종 사진을 활용, 제품의 전체적인 비율을 정하는 것은 물론, 내부 설계는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할 정도로 철저하다.“2차 대전 당시 사용한 미국과 독일 전차와 비행기도 효자 종목입니다. 라이선스를 지불할 필요가 없는 아이템입니다. 해외 마니아 사이에서 아카데미과학 제품 인기가 좋습니다. 정교한 데다 가격까지 착해서입니다.”글로벌 시장 수출로 위기를 모면한 아카데미과학은 새로운 성장 동력을 개발해 왔다. 지금 프라모델, 무선조종(RC) 장난감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에 불과하다. 아카데미과학의 새로운 성장동력을 삼은 것은 저연령층을 대상으로 한 캐릭터 완구사업이다. 김 대표가 회사에 합류한 이후 가장 적극적으로 매달린 분야다. 아카데미과학은 2011년 애니메이션 제작업체 로이비쥬얼, 홍콩의 완구업체 실버릿과 손잡고 로보카폴리를 선보였다.경찰차 로봇 폴리가 다른 자동차들과 힘을 모아 악당을 잡는 이야기다.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 커다란 인기를 모으며 아카데미과학의 성장동력으로 자리잡았다. 로보카폴리 외에도 현재 아카데미과학은 티버스터, 날아라발루포, 그린세이버 등 애니메이션 캐릭터 완구를 제작하고 있다. 김 대표는 “아이들의 관심사가 바뀌는 시대 트렌드 자체를 거스를 수 없었다”면서 “국산 애니메이션과 캐릭터 제품을 동시에 개발한 것이 주효했다”고 말했다. ━ 새로운 성장 동력은 캐릭터 완구 애니메이션과 완구 회사가 협업하는 것은 일본 사업 모델이다. 처음부터 어떤 장난감을 만들지 주제를 정한 다음 애니메이션을 만들 정도다. 김 대표는 한국 사업 환경이 일본보다 더 좋다고 한다. 만화 콘텐트 개발 분야의 정부 지원이 활발하다. 애니메이션을 방송할 케이블 채널도 여럿이다. 일본은 공중파 중심이라 제작 비용이 훨씬 높다.“한국은 전체 방송의 80%를 케이블이 커버하고 있습니다. 애니 채널만 20개에 달합니다. 공중파에 비해 파괴력은 적지요. 그래서 처음부터 해외 진출을 목표로 만듭니다. 그러다 보니, 규모는 작아도 기회가 많이 열려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이런 애니 업체와 협력하며 내수와 수출을 시도하고 있습니다.”멀리 바라보고 준비 중인 사업도 있다. 복고 완구들이다. 김 대표 집무실 한편엔 낡은 진열장이 있다. 80년대 인기를 끌었던, 인디언과 보안관 시리즈, 독수리 오 형제 불새 모함, 이겨라 승리호 모델을 따로 보관하는 공간이다.“불새 모함은 지금 20만원 정도에 거래되고 있어요. 나이와 공간을 넘어서는 무엇인가가 프라모델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지 고민하며 사업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아카데미과학 1층 생산 라인 옆에는 농구코트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금형 보관실이 있다. 쌓아 놓은 금형은 보통 높이 60㎝ 가로·세로 40~50㎝ 크기다. 주문이 자주 들어오는 금형 200개가 이곳에 쌓여있다. 건물 옆에는 두 배 정도 크기의 창고가 또 하나 있다. 한때 인기 있었지만 지금은 주문이 들어오지 않는 금형 800개를 보관하는 장소다. “언젠가 이곳에 금형이 꽉 차는 날이 오겠지요. 그때까지 일하고 싶습니다. 글로벌 강소기업으로 살아남아 보겠습니다.”- 조용탁 기자 ytcho1@joongang.co.kr·사진 김현동 기자

2017.04.27 11:58

7분 소요
흑백 갈등 딛고 화합으로

산업 일반

민주당 대권 후보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 오랜 인종 편견 깨뜨리고 고른 지지 받아 종교와 흑인 문제 전문가인 프린스턴대의 코넬 웨스트 교수가 열변을 토했다. 의자에 앉아 몸을 흔들고 양손으로 무대를 휘저었다. 머리가 좋고 언변이 현란한 이 학자는 버락 오바마의 유세 방식을 질타했다. 애틀랜타 인근에서 열린 ‘스테이트 오브 더 블랙 유니온’ 행사장에서였다. 웨스트는 흑인 군중 앞에서 오바마가 왜 1000㎞나 떨어진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했느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진정으로 흑인 유권자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나? 그런 행동을 보면서 어떻게 자신의 신념을 위해 일어설 의지가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웨스트는 “그에겐 두려움과 우려에 떠는 수많은 백인 형제자매가 있고, 그는 우리와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답해야 했다”고 손을 앞으로 쑥 내밀어 강조했다. “그래서 이렇게 줄타기를 한다.” 웨스트는 오바마에게 만만치 않은 질문들을 던지면서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사람들을 향한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자신의 입장을 지키려고 어느 정도나 용기를 보여줬는지, 무엇을 희생시킬 용의가 있는지 알고 싶다. 이상은 기본적인 질문이다. 당신의 피부색에는 관심 없다. 당신이 흑인이라고 해서 흑인 표를 떼어놓은 당상으로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며칠 뒤 웨스트가 강의를 마치고 교수실에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버락 오바마였다. “몇 가지 확실히 하고자 한다”고 대통령 예비후보는 교수에게 차분히 말했다. 오바마는 장장 두 시간에 걸쳐 일리노이 주상원의원 시절 사법제도와 의료보험에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설명했다. 웨스트는 오바마에게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업적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묻고, 오바마가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한 연설의 단 한 대목을 따졌다. 케냐 출신인 자신의 부친에게 미국은 “마법의 땅”이었다는 말이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식 체험”이라고 웨스트는 말했다. “노예제도와 흑인차별을 겪은 사람의 입장에서 미국을 마법의 땅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당신은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 나 역시 그래야 한다.” 그로부터 몇 주 뒤 두 사람은 워싱턴 DC 시내의 한 호텔에서 만나 오바마의 선거운동본부 인선을 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무대에서 맹공을 가한 날부터 딱 한 달이 지난 뒤 웨스트는 오바마 지지를 표명하고 무보수 고문 자리에 앉았다. 웨스트는 생각을 바꿨지만 오바마 후보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그리고 가장 논란 많은 문제를 제기했다. 그를 과연 흑인으로 봐야 하느냐는 의문이다. 오바마 본인은 10대 후반에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아프리카 출신 아버지와 캔자스 출신 백인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사실) 갈등을 끝냈다고 말했지만 그의 정치생활 내내 꼬리표로 붙는 의문이다. 흑인 “정통성” 문제는 오바마만 겪는 문제가 아니다. 성공한 수많은 흑인이 그런 문제를 겪는다. 다만 오바마는 이 나라의 최고위직에 도전하면서 만인이 보는 앞에서 정면으로 그 문제와 씨름할 뿐이다. 그의 생각에 이 논란은 자신보다는 미국의 정신상태를 더 많이 말해준다. “미국은 여전히 약간의 시간왜곡에 사로잡혔다고 생각한다. 흑인 정치의 담론은 아직도 60년대와 블랙파워로 형성된다”고 그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대다수 흑인 유권자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대다수 백인 유권자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본다. 사람들은 어떻게 일자리를 구하고, 자동차 휘발유를 채우며, 자식을 대학에 보낼지 고민한다. 그런 문제를 거론하면 흑백 모두가 좋은 반응을 보였다.” 그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오바마가 얼마나 폭넓은 지지를 받는지 판단할 특이한 척도는 남다른 기금 모금 실적이다. 2분기 예비선거 기금 모금에 15만 명 이상이 3100만 달러를 기부해 힐러리 클린턴을 약 1000만 달러 차로 앞지르면서 양당의 다른 후보들과의 격차를 크게 벌렸다. 예비선거가 먼저 시작되는 중요한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오바마와 클린턴은 민주당 표, 특히 그 주 민주당의 중추인 흑인 표를 놓고 각축전을 벌인다.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매달 선두주자가 바뀐다. 전국적으로 실시된 뉴스위크의 최근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이제 대통령 선거에서 피부색은 과거와 같은 장벽이 아니다. 절대 과반수(59%)가 미국은 흑인 대통령을 뽑을 준비가 됐다고 말했다. 2000년대가 시작될 때의 37%보다는 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상당수 국민이 흑인 대통령에 회의적이거나 편견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오바마는 본인이 “믿기 어려운 입후보”라고 부르는 이번 대선에서 많은 난관을 넘어야 하지만 인종 정치만큼 복잡하고 감정적인 문제는 없다. 인종 정치가 그의 선거운동을 지탱하는 힘의 주요 원천이지만 어쩌면 선거운동의 몰락을 부를지도 모른다. 오바마는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고자 하고, 당내 지명을 따내려면 흑인 표를 싹쓸이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인 대표의 입장에서 출마하지도 않았고 그럴 입장도 아니다. 백인들의 폭넓은 지지도 필요하다. 그는 과연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흑백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을까? 오바마와 부인 미셸에게는 인종 파도를 거스르는 항해가 거북스러울 정도로 개인적인 문제일지 모른다. 미셸은 여섯 살배기 딸이 새로 파견된 후보가족 경호원 팀을 “경호 아저씨”들이라고 부른다는 말을 지지자들에게 자주 한다. 오바마는 공식적으로 가장 먼저 재무부 검찰국(경호실)의 신변보호를 받는 대선 후보가 됐다. 워낙 많은 인파를 몰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뉴스위크는 그런 결정을 내린 가장 중요한 요인은 오바마의 상원의원 사무실에 날아드는 일련의 인종차별적 e-메일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의 직원들은 보안상 이유로 그 문제의 공개 논의를 꺼렸다. 유세 현장에서는 그런 식의 명백한 증오감을 찾아보기 어렵다. 많은 오바마 지지자는 그의 인물 됨됨이에 매료된다. 이 나라의 정치적 갈등을 치유해 세계 속에서 위상을 되찾겠다는 진지한 욕구에 감동 받는다. 그의 피부색과, 2세기가 넘는 고통스러운 인종사의 한 페이지를 넘길 기회에 흥분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페이지를 넘긴다”는 그 표현은 해석의 여지가 많다. 흑인 유권자들은 오바마가 일종의 구원(救援)을 상징한다고 생각하는 백인들을 경계한다. 오바마야말로 흑인도 유능하고 선거마당이 평준화됐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그런 관념을 일축했다. 상원의원 사무실에서 한 뉴스위크와의 인터뷰 말미에 자청해 “인종차별시대 이후”의 정치에 관해 말했다. “그 용어는 거부한다. 왜냐하면 나의 선거운동이 인종 화합으로 가는 쉬운 지름길을 대변한다는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혼란이 없도록 이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인종차별과 노예제의 오랜 유산을 극복하려면 많은 일을 해야 한다. 헐값에 구입할 성질이 아니다.” 오바마는 공립학교가 학생들의 피부색을 고려해 인종 다양성을 추구하는 행위는 위헌이라는 얼마 전의 대법원 판결에 당혹감을 표명했다. 최근 뉴스위크 여론조사를 보면 이 문제를 보는 국민의 시각이 엇갈린다. 그러나 오바마는 질문을 어떤 식으로 하느냐에 달린 문제라고 주장했다. “지역사회가 자발적으로 학교의 인종적 다양성을 촉진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만일 그 사실을 국민에게 설명했다면 ‘대법원이 왜 그런 일에 개입하느냐’는 반응이 나왔으리라고 생각한다.” 정치 입문 시절부터 오바마는 반대진영을 화해시키는 재주를 인정 받아왔다. 보수적인 일부 백인을 달래는 능력이 있었다. 그들은 불만을 나타내지 않는 그를 보며 놀라고 그의 실용적 태도에 고무됐다. 오바마는 그 모든 일을 대체로 흑인 지지자들을 소외시키지 않으면서 해냈다. 그의 줄타기 과정에 얽힌 이야기들은 그가 어떤 정치인인지, 앞으로 백악관에서 어떻게 일할지 많은 사실을 알게 해준다. 또 미국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앞으로 갈 길이 얼마나 먼지도 말해준다. 오바마는 하버드 법대 대학원 재학 시절 주로 백인 유권자들을 상대로 첫 선거운동을 벌였다. 1990년대 초 당시 하버드는 차별철폐조치 같은 인종 문제로 갈등을 겪는 중이었다. 좌파는 흑인 교수진을 임명하지 않은 데 분노를 표명했고, 우파는 사법제도가 소수민족과 빈민에게 불리하다고 비난하는 진보적 학자들의 영향력에 당혹감을 표명했다. 그 와중에 오바마는 화합을 기치로 내걸고 보수적 학생들의 지지를 얻어 권위 있는 학술지 로리뷰의 편집장으로 당선됐다. 보수파는 그가 자신들 편이 아님을 알았다고 옛 학우 브래드퍼드 베렌슨(나중에 조지 W 부시의 백악관에서 일했다)이 말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를 돋보이게 하는 점은 반대편에 선 사람을 나쁜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라고 베렌슨은 말했다. “그는 차별철폐조치를 보는 시각이 다른 사람을 두고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욕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오바마는 보수파의 지지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그쪽 학생 몇 명을 로리뷰 기자로 임명했고, 그로써 좀 더 진보 성향인 일부 지지자의 원성을 샀다. 법대 대학원에 다니던 어느 여름날 오바마는 시카고의 한 법률사무소에서 험난한 인생항로의 반려자가 될 사람을 만났다. 미셸 오바마의 가족은 시카고 사우스사이드 출신이다. 미셸의 아버지는 도시 근로자였고, 어머니는 지금도 미셸이 태어난 누추한 집에서 산다. 남편과 마찬가지로 미셸 역시 아이비리그(프린스턴과 하버드) 출신이지만 본인은 시카고 공립학교의 산물이라고 자랑스레 말한다. 일각에서는 오바마가 일리노이 정치에 입문하려면 미셸이 가진 흑인사회 입장권이 필요했다는 억지 주장을 했다. 그러나 옳지 않은 말이다. 미셸을 만났을 무렵 오바마는 이미 몇 해째 사우스사이드의 흑인 교회들에서 지역사회 조직가로 일했다. 두 사람이 법률사무소에서 처음 만났을 때 미셸은 여름 내내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오바마의 선배 노릇을 했다. 미셸은 오바마와 처음 점심식사를 함께 하기 전 사무실에 나돌던 칭찬을 기억한다. “그래, 이 사람은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흑인이야”라고 혼잣말을 했다고 돌이켰다. “흑백의 피가 섞인 흑인으로서 하와이에서 자랐다고? 이상한 사람이겠군.” 미셸은 나중에 오바마를 잘못 판단했을지 모른다고 깨달았다. 그러나 오바마에게 반한 까닭은 그해 여름 나중에 그가 사우스사이드의 한 교회 지하실로 자신을 데려갔을 때였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 그렇게 되어야 할 세상”을 주제로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그들은 3년 뒤 결혼했다. 미셸은 일찍이 오바마를 잘못 생각했었다는 사실을 힘들여 깨달았지만 이제는 국민이 그럴 차례라고 말했다. “미국은 여전히 사람을 고정 틀에 넣고 보는 나라이기 때문에 버락이 이런 흥미로운 딜레마에 봉착한다”고 미셸은 뉴스위크에 말했다. “버락은 그런 관념들을 흔들어 버린다. 그의 인생이 다른 길을 너무 많이 건넜기 때문이다. 하와이에서 자랐지만 실제로는 지역사회 조직가였다. 사우스사이드에서 흑인사회에 깊이 개입했다. 틀림없는 흑인이지만 동시에 틀림없는 백인인 어머니의 아들이기도 하다. 버락은 백인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오바마가 처음 하원에 도전할 때 시카고에서 보낸 시절은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일리노이 주상원의원으로 4년을 보낸 오바마는 보비 러시 연방 하원의원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흑표범당 출신인 러시는 자위 차원에서 흑인 남성의 무장을 촉구한 바 있다. 2000년 선거에서 그의 또 다른 경쟁자 중에 일리노이 주상원의원 돈 트로터가 있었다. 시카고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흑인 집안 출신이다. 러시와 트로터는 모두 오바마의 인종적 선의, 가난한 흑인 유권자들을 대변할 능력을 문제 삼았다. 그러나 오바마에게 이 선거는 인종적 정체성보다 지나친 자신감이라는 교훈을 주었다. “선거운동 기간에 하버드 출신의 하이드파크 법대 교수가 현실과 동떨어져 살지 않느냐는 말들이 나돈 순간이 있었는가? 그렇다. 그것이 선거 결과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는가? 아니다”고 그는 말했다. 러시는 지금 오바마의 백악관 입성을 지원하지만 여전히 자기 같은 사람보다는 “하버드 출신에 말을 부드럽게 하고, 늘 미소 지으며, 비위협적인 흑인을 선호하는” 미국의 “부르주아 엘리트”를 성토한다. 그렇지만 오바마에게는 다른 세상에서 편안하게 일하는 보기 드문 능력이 있음도 인정한다. “모세가 파라오 딸의 아들로 자라지 않았다면 큰일을 해내기 어려웠다”고 러시는 뉴스위크에 말했다. “모세는 궁정 안에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궁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았다. 그래서 받아들여졌다. 오바마에게는 특권층에 드나드는 그런 능력이 있다.” 일리노이 주상원의원 시절 오바마는 민주·공화 양 진영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보수적 공화당원인 커크 딜러드를 포함해 다양한 의원을 사귀었다. 딜러드는 특히 오바마가 사형제도에서 타협을 도출하려고 애쓰던 일을 돌이켰다. 조지 라이언 주지사는 연이어 몇 건의 판결이 문제가 있었다고 드러나자 모든 사형 선고를 감형했다. 이 문제를 두고 입법부가 크게 갈라졌다. 보수적인 법질서 수호파는 분노했고, 특히 흑인 의원들은 주정부가 이 참에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죄수들의 사형을 더 이상 집행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타협점을 찾아내야 하는 힘든 일이 오바마에게 떨어졌다. 그는 경찰의 취조 과정과 피의자의 자백을 비디오에 담자는 안을 보수파가 받아들이게 만듦으로써 그 일을 해냈다. 오바마의 막강한 적 중에 일리노이 주상원의원인 에드 페트카가 있었다. 검사 출신인 그는 워낙 많은 사람을 사형수 감방으로 보내 친구들이 ‘전기의자 에드’라 부를 정도였다. “오바마에겐 에드 페트카가 가장 설득하기 어려운 사람이었으나 페트카마저 그 형법 문제에선 오바마 편으로 돌아섰다”고 딜러드는 말했다(현재 윌 카운티 판사로 재직하는 페트카는 논평을 거절했다). 그러나 합의점을 찾으려는 오바마의 노력은 동시에 일부 흑인 동료의 의심을 키웠다. 오바마는 사형제 논란과 동시에 경찰의 인종차별 관행(racial profiling)을 없애려는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애썼다. 그에 따르면 경찰은 차량을 정지시킬 때 운전자의 인종 정보를 기록해야 했다. 상원 의사당에서 오바마의 좌석은 화장실과 가까웠다. 초선의원으로서 배정받은 낮은 자리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유리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 의원들이 화장실에 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올 때 붙들고 늘어졌다. 경찰의 인종차별 관행 논란이 한창인 와중에 논쟁은 화장실로 번졌다. 딜러드는 인종차별 관행의 요건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카고 출신의 한 흑인 의원이 오바마에게 따지던 모습을 돌이켰다. “그는 오바마에게 주상원의원으로서의 엄격함과, 솔직히 말하자면, 흑인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10대 흑인 소년이 시카고의 길모퉁이에 서서 경찰관에게 시달림을 당하는 기분을 이해하느냐는 질문이었다.” 오바마는 호놀룰루의 우범지역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시카고에서 지역사회 조직가로 일한 경험을 거론하면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딜러드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오바마를 보고 놀랐다. “흑인이나 백인 모두에게 자기 입장을 설명해야 하는 처지니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세 현장에서 오바마는 동정을 구하지 않는다. 희망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특히 2004년 연방 상원의원 선거운동을 벌이던 시절의 이야기를 즐겨 한다. 오바마가 일리노이주 남부에서 자신의 의회 스승 격인 딕 더빈 상원의원과 함께 버스를 타고 가는 중이었다. 차는 소득수준이 낮은 케이로 읍을 향해 갔다. 더빈은 처음 케이로를 방문한 때가 1970년대였다고 말했다. 일리노이에서 흑백 분리가 가장 심한 곳이어서 린치, 십자가 화형, 폭동 등의 역사가 있었다. 당시 인종 화합 추진 임무를 맡은 주정부 소속 청년 변호사 더빈은 운전기사에게서 전화를 사용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걱정이 됐다. 전화회사 사장이 백인시민위원회 회원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모텔에 투숙하자 낯선 사람이 문을 두드리면서 남의 동네에 왜 왔느냐고 따졌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버스가 케이로에 들어서자 오바마와 더빈은 불안해졌다. 그러나 버스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 지지자 300명이 보였다. ‘오바마를 상원으로’라고 적은 큰 파란색 배지를 단 사람들이었다. 일부 흑인도 있지만 대부분 백인이었다. 오바마에게 이 케이로 이야기는 ‘도덕적 우주의 호(弧)는 정의를 향해 굽는다’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이 맞다는 확인에 다름 아니다. 실제 세계에서는 케이로의 호가 분명하게 인종 화합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도 이곳 정치는 공화당인 백인 시장과 흑인 민주당원들 간에 시 고용인의 임명과 해고를 놓고 벌어진 비열한 논란에 여러 해째 발목이 잡혔다. 폴 패리스(그의 시장 임기는 지난 5월 끝났다)는 반대세력이 인종갈등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한다고 비난했다. 케이로 이야기는 오바마가 물 반 잔을 놓고 반이나 남았다고 해석하는 예라 하겠다. 말로 또는 정치적으로 점수를 따려고 복잡한 인종적·경제적 분열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행위다. 그래도 패리스는 대선에서 오바마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그 마을에 바이오디젤과 액화석탄 공장의 도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뽑힌다면 이 지역에선 전폭적으로 지지할 예정”이라고 패리스는 말했다. “개발이 안 된 이 빈촌에 들렀던 기억을 잊지 말기 바란다.” 오바마는 인종문제에서 이상적인 입장을 취해도 되지만 백인 정치인들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직설적인 입장을 취해도 된다. 대선 유세를 시작하기에 앞서 2005년 아버지의 날, 이 초선 연방 상원의원은 사우스사이드의 한 교회에 들어가 책임감 있는 흑인 아버지의 의미를 놓고 연설했다. “많은 사람이, 형제가 돌아다닌다. 척 보면 남자답다”고 오바마는 말했다. “구레나룻을 기르고, 어쩌면 자식을 낳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완전히 성장한 남자인지 분명치 않다.” 상원의원은 신도들에게 일자리를 얻으려고만 하지 말고 사업을 시작하라고, 집에만 처박히지 말고 텔레비전을 끄라고 촉구했다. 무엇보다도 지역사회는 아이들의 목표를 높게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가끔 8학년 졸업식에 가서 행사와 가운과 꽃들을 본다. 그 아이들은 고작 8학년일 뿐이다. 그냥 악수만 해주면 된다. 축하한다고. 그러고는 도서실에 보내라.” 주목을 많이 받은 그 연설은 사전준비가 별로 없었다. 연설문 작성 담당자가 그 행사를 깜박하는 바람에 오바마가 직접 주방 식탁에서 오가는 가족들 대화를 중심으로 종이 몇 장 뒤에 몇 자 적었다. 머릿속에서 오바마는 개인적 의무와 사회적 행동 명령의 필요 사이에서 중도적 입장을 취하려고 했다. “충격효과를 노려 이런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고 그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일부 보수적 평론가가 관심을 보이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정부가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 이유는 개인의 책무이기 때문이라는 핑계다. 그것은 갑, 아니면 을이라는 자세가 아니라 갑과 을 모두라는 자세다. 그런 용어로 표현하면 흑인 사회가 반응을 보인다.”(1년 전 빌 코스비는 흑인들의 의무감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사회의 의무를 빠뜨리는 바람에 동료 흑인들에게 호되게 당했다). 때때로 흑인과 백인 사이에 중도적 입장이 먹히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 오바마의 타고난 조심성과 타협자세는 약점으로 보이기도 한다. 스프링필드의 옛 주의회 의사당 밖에서 대선 출마를 발표하기 직전 오바마는 갑자기 계획을 바꿔 목사에게 축도를 올리러 오지 말라고 요구했다. 제레미아 라이트 목사는 오바마의 영적 방향을 지시했을 뿐 아니라 단골 문구까지 준 사람이다. ‘대담한 희망(The Audacity of Hope)’이라는 그 표현은 오바마가 쓴 책의 제목으로도 쓰였다. 그러나 오바마가 정식으로 선거운동을 시작하기 전에는 라이트 역시 아프리카 중심주의와 흑인 문제에 치우친 자세 때문에 “급진파”로 놀림을 받았다. 사우스사이드에서 일하는 목사치고는 이상한 비난일지도 모르겠다(라이트 목사는 흑인 교회 지도자 중에서 주류로 인정 받는다. 에보니 잡지는 그를 미국에서 영향력 있는 흑인 목사 15인으로 선정한 바 있다). “안식일 예배 15분 전 오바마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라이트 목사는 심란한 목소리로 뉴욕 타임스에 말했다. “참모 중에 누가 나를 초대하지 말도록 설득했다.” 오바마는 다만 목사가 언론의 거친 관심을 받지 않도록 배려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신의 영적 지도자와 지역사회로부터 거리를 두려 한다는 인상만 남겼다. “나의 과잉보호였을지도 모르고 그분의 기분이 상할 줄은 몰랐다”고 오바마는 시인했다. “그래서 그 문제를 논의했고 지금은 다 잘 해결됐다.”(라이트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를 거절했다) 유세 현장에서는 어떤 입장을 취하든 일단 아내와 두 딸이 있는 시카고 자택으로 돌아가면 오바마의 정체성에는 이중성이 없다. 미셸에게 오바마의 뿌리에 관한 꾸준한 의문은 그와 무관하다. “우리 흑인 사회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과 흑인이라는 사실의 의미를 두고 갈등을 겪는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텔레비전에서 우리의 모습이라고 나오는 모습을 보지만 우리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면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 그것을 연구한다. 그런 대화를 해야 한다.” 대화의 방향이 오바마의 통제 범위를 넘어서는 경우가 있다. 대선 유세라는 환한 불빛 아래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지난 3월 그는 민권운동사의 전환점인 1965년 피의 일요일 행진을 기념하러 앨러배마주 셀마에 갔다. 거기서 자신의 세대는 무관심을 극복하고 정치 활동을 할 필요가 있다는 주제로 힘찬 연설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셀마와의 개인적 연고를 암시하느라 무리수를 뒀다. 자신의 부모가 행진 때문에 “만나게 됐다”고 말했으나 사실 그는 4년 전인 1961년 태어났다. 몇 블록 떨어진 곳에서는 오바마의 민주당 내 경쟁자인 힐러리 클린턴이 선거유세에서 처음으로 남편의 공개적 지원을 끌어들이면서 흑인 표를 놓고 설득전을 벌였다. 오바마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실수는 단순히 깊은 생각 없이 “몇 마디 한 결과”라고 말했다. 흑인 표를 놓고 가열되는 경쟁이나 클린턴 부부에게서 받는 압력과는 관련이 없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로부터 넉 달 뒤 셀마는 오바마 선거 연설의 고무적인 마무리로 쓰였다. 이제는 피의 일요일에 자신이 어린 소년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다만 행진자들은 자기 같은 어린이들의 권익을 위해 싸웠다고 말한다. 지난주 아이오와주 남부, 담쟁이덩굴에 뒤덮인 헛간 앞에서 “그들은 우리를 위해 그렇게 했으며 이제는 우리가 차세대를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셀마에서 워싱턴으로 돌아가니 어떤 사람들이 등을 두드리면서 ‘흑인 역사를 멋지게 기념했다’고 말했다. 나는 ‘이해를 제대로 못했다. 그것은 미국 역사의 기념이었다’고 대꾸했다. 미국 역사의 매 길목에서 그런 식으로 변화가 일어난다. 사람들이 단결해 좀 더 나은 미국을 만들겠다고 결심하기 때문이다.” 그 주는 독립기념일이 낀 주였다. 아이오와주 전역에선 대선 후보들이 애국적 발언을 쏟아냈다. 그러나 버락 오바마처럼 멋진 말을 날린 후보는 없었다. 그는 셀마에서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를 건너 행진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겠지만 자신을 그 큰 투쟁의 일부로 간주한다. 그리고 조상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방식의 상(마틴 루터 킹이 말한 민권운동의 목표 달성)을 꿈꾼다.

2007.07.18 10:20

14분 소요
중국 예술의 글라스노스트

산업 일반

China's Glasnost 10년 전 중국의 전위예술 사진가 룽룽(榮榮·36)은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살면서 생계 유지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는 “아무도 내 작품을 사려 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벌거벗은 몸에 꿀을 바른 채 베이징의 한 공중 화장실에서 한시간 동안 앉아 있는 행위예술가 장환의 몸에 파리들이 달라붙은 모습을 찍고 있는 룽을 우연히 목격한 마을사람이 당국에 신고하는 일도 있었다. 오늘날 룽과, 역시 사진작가인 그의 일본인 부인 잉리(映里)가 찍은 특이한 사진들은 과거보다 훨씬 나은 대접을 받는다. 한장에 1만달러 이상을 호가하며 그중 스무 작품이 뉴욕 국제사진센터(ICP)의 ‘과거와 미래 사이: 중국의 새로운 사진과 비디오’전에서 선보이고 있다. 그밖에 수십장의 사진(상당수는 누드)이 지난해 겨울 베이징에서 전시됐다. 룽은 당국이 ‘첫날’ 전시회를 폐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시회는 아무 문제 없이 두달이나 계속됐다. 염소수염을 기른 룽은 “1990년대에 이런 일은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베이징의 일류 건축가가 설계한 2층짜리 집에서 살고 있다. 문화혁명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예술의 자유는 정부 검열에 크게 제약받았다. 누드·추상미술·로큰롤·에로문학은 모두 금기였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지난해 베이징에서 열린 한 민간 전시회에서는 온갖 충격적 영상들을 볼 수 있었다. 스무명의 창녀와 동침하는 한 예술가의 모습을 담은 비디오, 후지(富士)산 근처에서 벌거벗고 서 있는 룽과 잉리의 사진들, 산 누에들이 뿜어내는 실에 친친 감기고 있는 두 사람의 나체, 공산당 깃발을 찢는 행위예술, 여덟마리의 도사견을 각각 러닝머신에 묶어 서로 마주보고 으르렁대며 달리게 해놓은 펑위(彭禹)와 쑨위안(孫原)의 충격적인 설치미술 등이 그것이었다. 이제 그 전시회의 후원자였던 부동산 업계 거물 장바오취안(張寶全)은 예술적 진보성보다는 가난으로 더 알려진 외딴 서부 도시 인촨(銀川)에서 열릴 우드스톡 스타일의 야외 로큰롤 콘서트로 또 한번의 성공을 꿈꾼다. 수도 베이징에서 오지까지 중국의 도처에서 현대문화가 활짝 피어나고 있다. 25년에 걸친 자본주의식 개혁에 의해 촉발된 자유화는 미술뿐 아니라 음악·연극·패션 디자인·건축·문학도 변화시킨다. 현대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서양과 중국의 수집상들에게 판다. 그리고 부동산 개발업자들은 이런 대안예술의 후원세력으로 떠올랐다. 물론 검열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해마다 국제영화제를 개최해 본토의 언더그라운드 예술가들에게 통로를 제공하는 홍콩예술발전국의 왕춘제(王純杰) 시각예술소조위원회 주임은 “예술에 대한 관심의 정도가 국내총생산(GDP)처럼 한 도시의 성공을 측량하는 지수라는 사실을 일부 정부 기관들이 깨달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 목적을 위해 정부는 전에는 금지했던 일부 예술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신세대 최고 지도자들이 등장하면서 일각에서는 중국의 예술적 백화제방(百花齊放) 을 옛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 시대에 비교하기도 한다. 지난해 후진타오(胡錦濤·61)가 국가주석이 된 이후 정부는 예술가들의 창조적 표현에 대해 보다 더 유연한 자세를 취할 것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예술가들이 툭하면 체포되고 수시로 전시회가 폐쇄되던 1980년대에 중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전위예술가 단체 성성주회(星星晝會)의 황루이(黃銳)는 “정부가 통제를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전보다는 많이 완화됐다. 어쩌면 후진타오는 중국의 고르바초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정치에 관한 한 후진타오는 고르바초프와 다르다. 중국이 처음에는 경제적으로, 그리고 지금은 문화적으로 깨어나고 있지만 아직 완고한 정치체제의 근본적 변화는 멀었다. 공공연히 정치성을 드러내는 예술작품은 지금도 금지 대상이다. 대만의 독립, 민족 갈등, 1989년의 천안문 사태,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산당 통치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 제기 등과 같은 전통적 금기 주제들은 여전히 제재를 받는다. 그러나 당국은 창의성을 통제하는 데 따르는 대가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베이징의 미술 전문 출판사인 타임존 8의 운영자 로버트 버넬은 “당국은 전시회를 폐쇄하거나 예술가를 체포하면 국제 언론으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안다”고 말했다. 공무원들은 인터넷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수많은 블로그들은 실험적 성격의 글이 실리는 새로운 창구를 제공한다. 온라인 게시판들은 신진 작가와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고 세계 문화 뉴스를 접하며 서로 비평하는 장이 되었다. 베이징 차오양(朝陽)구에 있는, ‘798 공창’으로 알려진 옛 무기공장보다 더 중국 전위예술의 역동성을 분명히 보여주는 곳은 없다. 바우하우스 스타일의 이 높은 건축물은 현재 중국에서 가장 많은 개인 갤러리와 스튜디오를 보유하고 있다. 2년 전 독특하고 임대료가 저렴한 풀뿌리 예술의 보루로 시작된 이곳은 이제 해마다 수십차례의 최첨단 전시회를 열고, 런던·싱가포르·도쿄·베를린의 수집가들이 운영하는 국제적 갤러리들이 들어선 명소로 자리잡았다. 차오양구의 천강(陳剛) 구장(區長)은 “이런 유형의 지역사회는 중국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사람들은 이곳을 뉴욕의 소호에 비교한다”고 말했다. 실험적 작품들을 위한 시장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커지고 있다. 서예가이며 현대 미술가인 왕둥링(王冬齡)은 본토의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 과열 현상에 대해 잘 아는 중국의 신흥 부호들이 “미술품을 투자 대상으로 간주한다”고 말했다. 현대미술 갤러리와 경매장에서는 그런 작품이 점당 2천∼10만달러에 팔려나간다. 그런 작품들은 대부분 개인적으로 전시하지만 정부에서도 장소를 대주며 창의력의 한계를 시험하기 시작했다. 지난 6월 중순 상하이의 둬룬(多倫) 현대미술관에는 벌거벗은 몸에 아슬아슬하게 흰색 마스킹 테이프를 감은 예술가 허청야오(何成瑤)의 모습을 보기 위해 지식인·예술가·사진기자들이 모였다. 정부가 공공장소에서 알몸 행위예술을 허가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정부는 최근 마오쩌둥(毛澤東)의 문화혁명 기간이었다면 모두 금지대상이었을 피카소 작품 몇점과 앤디 워홀, 그리고 재스퍼 존스의 작품을 보유하고 있는 국립미술관의 수리를 위해 1천8백만달러를 지원했다. 작은 도시에서의 전위예술 전시회와 행위예술 공연도 늘고 있다. 당나라 수도였으며 지금도 전통색이 강한 내륙도시 시안(西安)에서는 7월 초 ‘이것은 예술인가’라는 제목의 전시회가 열렸다. 그곳에서 특히 주목을 끈 것은 웃통 벗은 남자가 마치 인간 기중기처럼 높이 매달려 시멘트 포대를 나르는 작품이었다. 인간과 기계의 관계에 관심을 끌기 위해 만들어진 그 작품은 동시에 중국의 극심한 건축 열풍을 비판했다. 예술 개방에 대한 압력이 강해지면서 사람들의 기대치도 점점 높아진다. 최근 예술가들의 작품이 전시되는 웹사이트를 개설한 복합 미디어 예술가 추즈제(邱志傑)는 “과거에는 전시회가 금지되지 않고 제대로 열리기만 해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제는 우리의 욕구도 커졌다. 많은 관객이 들기를 바란다. 국내 민간 재단들의 지원을 기대한다.” 예술적 표현의 여러 형태 가운데는 다른 것보다 여전히 제약이 심한 것이 있다. 본토에는 록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라디오 방송국이 한개도 없다고 한 중국인 DJ는 말했다. 록음악은 대체로 권위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검열관들은 중국인 록음악가들에서부터 롤링스톤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개 공연에 앞서 가사를 심의할 권리를 주장하며 인디록을 여전히 제약한다. 그러나 일부 지하 밴드들은 공개의 장으로 나오고 있다. 지난해 관영 중앙텔레비전방송은 헤비메탈 밴드 흑표(黑豹)를 초빙했다. 중국인 록밴드가 본토 텔레비전에 생방송으로 나온 것은 처음이라고 또다른 베이징 악단인 세컨핸드 로즈의 리드싱어 량룽(梁龍·27)은 말했다. “80년대와 90년대에 정부는 로큰롤을 이해하지 못했다. 요즘 지도자들은 좀더 젊고 개방적”이라고 그는 말했다. 문학과 드라마, 그리고 특히 주류 미디어는 여전히 통제가 심하다. 최고 지도자들은 예기치 못한 대중적 호응이 일어날 가능성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의 불만은 쌓여 간다. 최근 당국이 베이징에서 인기리에 공연되는 연극 ‘측소’(厠所·화장실)를 각 언론매체가 일절 취재하지 못하도록 막으려 하자 많은 매체들이 반발했다. 상당수는 금지령을 무시하고 그 연극에 관한 기사를 게재했다. 그 연극은 공중화장실의 관리인과 손님들의 삶을 통해 30년의 중국 역사를 추적한다. 베이징에서 제재를 당하더라도 생계에 지장이 없는 사례도 늘어간다. 실은 오히려 한 예술가가 서구의 레이더망에 포착되는 데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다. 마약중독자였던 상하이 작가 미엔미엔(棉棉)은 섹스와 마약, 그리고 절망을 소재로 한 소설 두권이 중국에서 판금 대상이 되는 바람에 해외에서 이름을 알리게 됐다고 말했다. ‘캔디’는 미국과 프랑스에서 출간됐고 마침내 중국에서도 지하 베스트셀러가 됐다. 미엔은 올해 출간 예정인 세번째 소설 ‘판다 섹스’는 “마약이나 섹스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검열을 통과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과거에 자유와 폭 넓은 관객을 찾아 서구로 망명했던 중국 예술가들은 이제 고국으로 돌아간다. “일류 작가들은 서구 독자들을 겨냥한 중국 소설을 전처럼 많이 쓰지 않는다”고 중국인 소설가 10여명을 관리하는 런던의 문학 에이전트 토비 이디는 말했다. “중국인들을 위한 순수 중국 소설을 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작가들은 요즘 고위층의 부패·에이즈·도시 범죄·빈부격차 등의 현대 금기를 다루는 데 더 관심이 있다. 텔레비전 대본작가 출신인 루톈밍(陸天明)은 부패한 공직자들과 하급관리들에 관한 소설로 중국에서 일대 선풍을 일으켰다. 최근작 ‘대설무흔’(大雪無痕)은 동북부 헤이룽장(黑龍江)성의 실제 내부 고발자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쓴 작품이다. 그 책은 채워지지 않는 중국인들의 반부패 갈증이라는 주제를 다룸으로써 18만5천부가 팔렸다. 헤이룽장성 출신의 미술가 천샤오민(沈少民·48)은 천안문 사태 이후 전시장이 폐쇄되는 바람에 1990년 호주로 떠났다. 그러나 이제는 “작품을 위해서 내가 중국에 가는 것이 더 낫다. 중국에서는 워낙 변화가 급격하기 때문에 좀더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창의력을 얻기 위해 긴장을 필요로 하는 예술가들에게는 사실 고국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 “서구 사회에는 충분한 갈등이 없다”고 황루이는 말했다. “중국은 도처에서 갈등이 빚어진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갈등, 전통과 현대화의 갈등, 농촌생활과 도시생활의 갈등.” 큰 의문은 중국의 문화적 백화제방이 근본적 정치개혁이 없으면 결국 시들거나 또는 말살당하지 않겠느냐는 점이다. “예술가들은 인민을 똑똑하게 만든다”고 록음악의 기수 최건(崔健)은 말했다. “그리고 지도자들은 똑똑한 인민은 다스리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현재로서는 펄펄 끓는 마찰과 갈등이 창의적 에너지의 창출에 도움이 되며,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한 점으로, 그것을 지원할 시장의 성장에도 도움이 된다. With CRAIG SIMONS and JEN LIN-LIU

2004.08.16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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