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일반
민주당 대권 후보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 오랜 인종 편견 깨뜨리고 고른 지지 받아 종교와 흑인 문제 전문가인 프린스턴대의 코넬 웨스트 교수가 열변을 토했다. 의자에 앉아 몸을 흔들고 양손으로 무대를 휘저었다. 머리가 좋고 언변이 현란한 이 학자는 버락 오바마의 유세 방식을 질타했다. 애틀랜타 인근에서 열린 ‘스테이트 오브 더 블랙 유니온’ 행사장에서였다. 웨스트는 흑인 군중 앞에서 오바마가 왜 1000㎞나 떨어진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했느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진정으로 흑인 유권자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나? 그런 행동을 보면서 어떻게 자신의 신념을 위해 일어설 의지가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웨스트는 “그에겐 두려움과 우려에 떠는 수많은 백인 형제자매가 있고, 그는 우리와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답해야 했다”고 손을 앞으로 쑥 내밀어 강조했다. “그래서 이렇게 줄타기를 한다.” 웨스트는 오바마에게 만만치 않은 질문들을 던지면서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사람들을 향한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자신의 입장을 지키려고 어느 정도나 용기를 보여줬는지, 무엇을 희생시킬 용의가 있는지 알고 싶다. 이상은 기본적인 질문이다. 당신의 피부색에는 관심 없다. 당신이 흑인이라고 해서 흑인 표를 떼어놓은 당상으로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며칠 뒤 웨스트가 강의를 마치고 교수실에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버락 오바마였다. “몇 가지 확실히 하고자 한다”고 대통령 예비후보는 교수에게 차분히 말했다. 오바마는 장장 두 시간에 걸쳐 일리노이 주상원의원 시절 사법제도와 의료보험에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설명했다. 웨스트는 오바마에게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업적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묻고, 오바마가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한 연설의 단 한 대목을 따졌다. 케냐 출신인 자신의 부친에게 미국은 “마법의 땅”이었다는 말이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식 체험”이라고 웨스트는 말했다. “노예제도와 흑인차별을 겪은 사람의 입장에서 미국을 마법의 땅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당신은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 나 역시 그래야 한다.” 그로부터 몇 주 뒤 두 사람은 워싱턴 DC 시내의 한 호텔에서 만나 오바마의 선거운동본부 인선을 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무대에서 맹공을 가한 날부터 딱 한 달이 지난 뒤 웨스트는 오바마 지지를 표명하고 무보수 고문 자리에 앉았다. 웨스트는 생각을 바꿨지만 오바마 후보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그리고 가장 논란 많은 문제를 제기했다. 그를 과연 흑인으로 봐야 하느냐는 의문이다. 오바마 본인은 10대 후반에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아프리카 출신 아버지와 캔자스 출신 백인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사실) 갈등을 끝냈다고 말했지만 그의 정치생활 내내 꼬리표로 붙는 의문이다. 흑인 “정통성” 문제는 오바마만 겪는 문제가 아니다. 성공한 수많은 흑인이 그런 문제를 겪는다. 다만 오바마는 이 나라의 최고위직에 도전하면서 만인이 보는 앞에서 정면으로 그 문제와 씨름할 뿐이다. 그의 생각에 이 논란은 자신보다는 미국의 정신상태를 더 많이 말해준다. “미국은 여전히 약간의 시간왜곡에 사로잡혔다고 생각한다. 흑인 정치의 담론은 아직도 60년대와 블랙파워로 형성된다”고 그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대다수 흑인 유권자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대다수 백인 유권자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본다. 사람들은 어떻게 일자리를 구하고, 자동차 휘발유를 채우며, 자식을 대학에 보낼지 고민한다. 그런 문제를 거론하면 흑백 모두가 좋은 반응을 보였다.” 그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오바마가 얼마나 폭넓은 지지를 받는지 판단할 특이한 척도는 남다른 기금 모금 실적이다. 2분기 예비선거 기금 모금에 15만 명 이상이 3100만 달러를 기부해 힐러리 클린턴을 약 1000만 달러 차로 앞지르면서 양당의 다른 후보들과의 격차를 크게 벌렸다. 예비선거가 먼저 시작되는 중요한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오바마와 클린턴은 민주당 표, 특히 그 주 민주당의 중추인 흑인 표를 놓고 각축전을 벌인다.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매달 선두주자가 바뀐다. 전국적으로 실시된 뉴스위크의 최근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이제 대통령 선거에서 피부색은 과거와 같은 장벽이 아니다. 절대 과반수(59%)가 미국은 흑인 대통령을 뽑을 준비가 됐다고 말했다. 2000년대가 시작될 때의 37%보다는 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상당수 국민이 흑인 대통령에 회의적이거나 편견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오바마는 본인이 “믿기 어려운 입후보”라고 부르는 이번 대선에서 많은 난관을 넘어야 하지만 인종 정치만큼 복잡하고 감정적인 문제는 없다. 인종 정치가 그의 선거운동을 지탱하는 힘의 주요 원천이지만 어쩌면 선거운동의 몰락을 부를지도 모른다. 오바마는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고자 하고, 당내 지명을 따내려면 흑인 표를 싹쓸이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인 대표의 입장에서 출마하지도 않았고 그럴 입장도 아니다. 백인들의 폭넓은 지지도 필요하다. 그는 과연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흑백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을까? 오바마와 부인 미셸에게는 인종 파도를 거스르는 항해가 거북스러울 정도로 개인적인 문제일지 모른다. 미셸은 여섯 살배기 딸이 새로 파견된 후보가족 경호원 팀을 “경호 아저씨”들이라고 부른다는 말을 지지자들에게 자주 한다. 오바마는 공식적으로 가장 먼저 재무부 검찰국(경호실)의 신변보호를 받는 대선 후보가 됐다. 워낙 많은 인파를 몰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뉴스위크는 그런 결정을 내린 가장 중요한 요인은 오바마의 상원의원 사무실에 날아드는 일련의 인종차별적 e-메일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의 직원들은 보안상 이유로 그 문제의 공개 논의를 꺼렸다. 유세 현장에서는 그런 식의 명백한 증오감을 찾아보기 어렵다. 많은 오바마 지지자는 그의 인물 됨됨이에 매료된다. 이 나라의 정치적 갈등을 치유해 세계 속에서 위상을 되찾겠다는 진지한 욕구에 감동 받는다. 그의 피부색과, 2세기가 넘는 고통스러운 인종사의 한 페이지를 넘길 기회에 흥분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페이지를 넘긴다”는 그 표현은 해석의 여지가 많다. 흑인 유권자들은 오바마가 일종의 구원(救援)을 상징한다고 생각하는 백인들을 경계한다. 오바마야말로 흑인도 유능하고 선거마당이 평준화됐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그런 관념을 일축했다. 상원의원 사무실에서 한 뉴스위크와의 인터뷰 말미에 자청해 “인종차별시대 이후”의 정치에 관해 말했다. “그 용어는 거부한다. 왜냐하면 나의 선거운동이 인종 화합으로 가는 쉬운 지름길을 대변한다는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혼란이 없도록 이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인종차별과 노예제의 오랜 유산을 극복하려면 많은 일을 해야 한다. 헐값에 구입할 성질이 아니다.” 오바마는 공립학교가 학생들의 피부색을 고려해 인종 다양성을 추구하는 행위는 위헌이라는 얼마 전의 대법원 판결에 당혹감을 표명했다. 최근 뉴스위크 여론조사를 보면 이 문제를 보는 국민의 시각이 엇갈린다. 그러나 오바마는 질문을 어떤 식으로 하느냐에 달린 문제라고 주장했다. “지역사회가 자발적으로 학교의 인종적 다양성을 촉진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만일 그 사실을 국민에게 설명했다면 ‘대법원이 왜 그런 일에 개입하느냐’는 반응이 나왔으리라고 생각한다.” 정치 입문 시절부터 오바마는 반대진영을 화해시키는 재주를 인정 받아왔다. 보수적인 일부 백인을 달래는 능력이 있었다. 그들은 불만을 나타내지 않는 그를 보며 놀라고 그의 실용적 태도에 고무됐다. 오바마는 그 모든 일을 대체로 흑인 지지자들을 소외시키지 않으면서 해냈다. 그의 줄타기 과정에 얽힌 이야기들은 그가 어떤 정치인인지, 앞으로 백악관에서 어떻게 일할지 많은 사실을 알게 해준다. 또 미국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앞으로 갈 길이 얼마나 먼지도 말해준다. 오바마는 하버드 법대 대학원 재학 시절 주로 백인 유권자들을 상대로 첫 선거운동을 벌였다. 1990년대 초 당시 하버드는 차별철폐조치 같은 인종 문제로 갈등을 겪는 중이었다. 좌파는 흑인 교수진을 임명하지 않은 데 분노를 표명했고, 우파는 사법제도가 소수민족과 빈민에게 불리하다고 비난하는 진보적 학자들의 영향력에 당혹감을 표명했다. 그 와중에 오바마는 화합을 기치로 내걸고 보수적 학생들의 지지를 얻어 권위 있는 학술지 로리뷰의 편집장으로 당선됐다. 보수파는 그가 자신들 편이 아님을 알았다고 옛 학우 브래드퍼드 베렌슨(나중에 조지 W 부시의 백악관에서 일했다)이 말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를 돋보이게 하는 점은 반대편에 선 사람을 나쁜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라고 베렌슨은 말했다. “그는 차별철폐조치를 보는 시각이 다른 사람을 두고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욕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오바마는 보수파의 지지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그쪽 학생 몇 명을 로리뷰 기자로 임명했고, 그로써 좀 더 진보 성향인 일부 지지자의 원성을 샀다. 법대 대학원에 다니던 어느 여름날 오바마는 시카고의 한 법률사무소에서 험난한 인생항로의 반려자가 될 사람을 만났다. 미셸 오바마의 가족은 시카고 사우스사이드 출신이다. 미셸의 아버지는 도시 근로자였고, 어머니는 지금도 미셸이 태어난 누추한 집에서 산다. 남편과 마찬가지로 미셸 역시 아이비리그(프린스턴과 하버드) 출신이지만 본인은 시카고 공립학교의 산물이라고 자랑스레 말한다. 일각에서는 오바마가 일리노이 정치에 입문하려면 미셸이 가진 흑인사회 입장권이 필요했다는 억지 주장을 했다. 그러나 옳지 않은 말이다. 미셸을 만났을 무렵 오바마는 이미 몇 해째 사우스사이드의 흑인 교회들에서 지역사회 조직가로 일했다. 두 사람이 법률사무소에서 처음 만났을 때 미셸은 여름 내내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오바마의 선배 노릇을 했다. 미셸은 오바마와 처음 점심식사를 함께 하기 전 사무실에 나돌던 칭찬을 기억한다. “그래, 이 사람은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흑인이야”라고 혼잣말을 했다고 돌이켰다. “흑백의 피가 섞인 흑인으로서 하와이에서 자랐다고? 이상한 사람이겠군.” 미셸은 나중에 오바마를 잘못 판단했을지 모른다고 깨달았다. 그러나 오바마에게 반한 까닭은 그해 여름 나중에 그가 사우스사이드의 한 교회 지하실로 자신을 데려갔을 때였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 그렇게 되어야 할 세상”을 주제로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그들은 3년 뒤 결혼했다. 미셸은 일찍이 오바마를 잘못 생각했었다는 사실을 힘들여 깨달았지만 이제는 국민이 그럴 차례라고 말했다. “미국은 여전히 사람을 고정 틀에 넣고 보는 나라이기 때문에 버락이 이런 흥미로운 딜레마에 봉착한다”고 미셸은 뉴스위크에 말했다. “버락은 그런 관념들을 흔들어 버린다. 그의 인생이 다른 길을 너무 많이 건넜기 때문이다. 하와이에서 자랐지만 실제로는 지역사회 조직가였다. 사우스사이드에서 흑인사회에 깊이 개입했다. 틀림없는 흑인이지만 동시에 틀림없는 백인인 어머니의 아들이기도 하다. 버락은 백인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오바마가 처음 하원에 도전할 때 시카고에서 보낸 시절은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일리노이 주상원의원으로 4년을 보낸 오바마는 보비 러시 연방 하원의원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흑표범당 출신인 러시는 자위 차원에서 흑인 남성의 무장을 촉구한 바 있다. 2000년 선거에서 그의 또 다른 경쟁자 중에 일리노이 주상원의원 돈 트로터가 있었다. 시카고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흑인 집안 출신이다. 러시와 트로터는 모두 오바마의 인종적 선의, 가난한 흑인 유권자들을 대변할 능력을 문제 삼았다. 그러나 오바마에게 이 선거는 인종적 정체성보다 지나친 자신감이라는 교훈을 주었다. “선거운동 기간에 하버드 출신의 하이드파크 법대 교수가 현실과 동떨어져 살지 않느냐는 말들이 나돈 순간이 있었는가? 그렇다. 그것이 선거 결과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는가? 아니다”고 그는 말했다. 러시는 지금 오바마의 백악관 입성을 지원하지만 여전히 자기 같은 사람보다는 “하버드 출신에 말을 부드럽게 하고, 늘 미소 지으며, 비위협적인 흑인을 선호하는” 미국의 “부르주아 엘리트”를 성토한다. 그렇지만 오바마에게는 다른 세상에서 편안하게 일하는 보기 드문 능력이 있음도 인정한다. “모세가 파라오 딸의 아들로 자라지 않았다면 큰일을 해내기 어려웠다”고 러시는 뉴스위크에 말했다. “모세는 궁정 안에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궁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았다. 그래서 받아들여졌다. 오바마에게는 특권층에 드나드는 그런 능력이 있다.” 일리노이 주상원의원 시절 오바마는 민주·공화 양 진영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보수적 공화당원인 커크 딜러드를 포함해 다양한 의원을 사귀었다. 딜러드는 특히 오바마가 사형제도에서 타협을 도출하려고 애쓰던 일을 돌이켰다. 조지 라이언 주지사는 연이어 몇 건의 판결이 문제가 있었다고 드러나자 모든 사형 선고를 감형했다. 이 문제를 두고 입법부가 크게 갈라졌다. 보수적인 법질서 수호파는 분노했고, 특히 흑인 의원들은 주정부가 이 참에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죄수들의 사형을 더 이상 집행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타협점을 찾아내야 하는 힘든 일이 오바마에게 떨어졌다. 그는 경찰의 취조 과정과 피의자의 자백을 비디오에 담자는 안을 보수파가 받아들이게 만듦으로써 그 일을 해냈다. 오바마의 막강한 적 중에 일리노이 주상원의원인 에드 페트카가 있었다. 검사 출신인 그는 워낙 많은 사람을 사형수 감방으로 보내 친구들이 ‘전기의자 에드’라 부를 정도였다. “오바마에겐 에드 페트카가 가장 설득하기 어려운 사람이었으나 페트카마저 그 형법 문제에선 오바마 편으로 돌아섰다”고 딜러드는 말했다(현재 윌 카운티 판사로 재직하는 페트카는 논평을 거절했다). 그러나 합의점을 찾으려는 오바마의 노력은 동시에 일부 흑인 동료의 의심을 키웠다. 오바마는 사형제 논란과 동시에 경찰의 인종차별 관행(racial profiling)을 없애려는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애썼다. 그에 따르면 경찰은 차량을 정지시킬 때 운전자의 인종 정보를 기록해야 했다. 상원 의사당에서 오바마의 좌석은 화장실과 가까웠다. 초선의원으로서 배정받은 낮은 자리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유리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 의원들이 화장실에 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올 때 붙들고 늘어졌다. 경찰의 인종차별 관행 논란이 한창인 와중에 논쟁은 화장실로 번졌다. 딜러드는 인종차별 관행의 요건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카고 출신의 한 흑인 의원이 오바마에게 따지던 모습을 돌이켰다. “그는 오바마에게 주상원의원으로서의 엄격함과, 솔직히 말하자면, 흑인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10대 흑인 소년이 시카고의 길모퉁이에 서서 경찰관에게 시달림을 당하는 기분을 이해하느냐는 질문이었다.” 오바마는 호놀룰루의 우범지역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시카고에서 지역사회 조직가로 일한 경험을 거론하면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딜러드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오바마를 보고 놀랐다. “흑인이나 백인 모두에게 자기 입장을 설명해야 하는 처지니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세 현장에서 오바마는 동정을 구하지 않는다. 희망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특히 2004년 연방 상원의원 선거운동을 벌이던 시절의 이야기를 즐겨 한다. 오바마가 일리노이주 남부에서 자신의 의회 스승 격인 딕 더빈 상원의원과 함께 버스를 타고 가는 중이었다. 차는 소득수준이 낮은 케이로 읍을 향해 갔다. 더빈은 처음 케이로를 방문한 때가 1970년대였다고 말했다. 일리노이에서 흑백 분리가 가장 심한 곳이어서 린치, 십자가 화형, 폭동 등의 역사가 있었다. 당시 인종 화합 추진 임무를 맡은 주정부 소속 청년 변호사 더빈은 운전기사에게서 전화를 사용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걱정이 됐다. 전화회사 사장이 백인시민위원회 회원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모텔에 투숙하자 낯선 사람이 문을 두드리면서 남의 동네에 왜 왔느냐고 따졌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버스가 케이로에 들어서자 오바마와 더빈은 불안해졌다. 그러나 버스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 지지자 300명이 보였다. ‘오바마를 상원으로’라고 적은 큰 파란색 배지를 단 사람들이었다. 일부 흑인도 있지만 대부분 백인이었다. 오바마에게 이 케이로 이야기는 ‘도덕적 우주의 호(弧)는 정의를 향해 굽는다’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이 맞다는 확인에 다름 아니다. 실제 세계에서는 케이로의 호가 분명하게 인종 화합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도 이곳 정치는 공화당인 백인 시장과 흑인 민주당원들 간에 시 고용인의 임명과 해고를 놓고 벌어진 비열한 논란에 여러 해째 발목이 잡혔다. 폴 패리스(그의 시장 임기는 지난 5월 끝났다)는 반대세력이 인종갈등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한다고 비난했다. 케이로 이야기는 오바마가 물 반 잔을 놓고 반이나 남았다고 해석하는 예라 하겠다. 말로 또는 정치적으로 점수를 따려고 복잡한 인종적·경제적 분열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행위다. 그래도 패리스는 대선에서 오바마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그 마을에 바이오디젤과 액화석탄 공장의 도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뽑힌다면 이 지역에선 전폭적으로 지지할 예정”이라고 패리스는 말했다. “개발이 안 된 이 빈촌에 들렀던 기억을 잊지 말기 바란다.” 오바마는 인종문제에서 이상적인 입장을 취해도 되지만 백인 정치인들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직설적인 입장을 취해도 된다. 대선 유세를 시작하기에 앞서 2005년 아버지의 날, 이 초선 연방 상원의원은 사우스사이드의 한 교회에 들어가 책임감 있는 흑인 아버지의 의미를 놓고 연설했다. “많은 사람이, 형제가 돌아다닌다. 척 보면 남자답다”고 오바마는 말했다. “구레나룻을 기르고, 어쩌면 자식을 낳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완전히 성장한 남자인지 분명치 않다.” 상원의원은 신도들에게 일자리를 얻으려고만 하지 말고 사업을 시작하라고, 집에만 처박히지 말고 텔레비전을 끄라고 촉구했다. 무엇보다도 지역사회는 아이들의 목표를 높게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가끔 8학년 졸업식에 가서 행사와 가운과 꽃들을 본다. 그 아이들은 고작 8학년일 뿐이다. 그냥 악수만 해주면 된다. 축하한다고. 그러고는 도서실에 보내라.” 주목을 많이 받은 그 연설은 사전준비가 별로 없었다. 연설문 작성 담당자가 그 행사를 깜박하는 바람에 오바마가 직접 주방 식탁에서 오가는 가족들 대화를 중심으로 종이 몇 장 뒤에 몇 자 적었다. 머릿속에서 오바마는 개인적 의무와 사회적 행동 명령의 필요 사이에서 중도적 입장을 취하려고 했다. “충격효과를 노려 이런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고 그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일부 보수적 평론가가 관심을 보이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정부가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 이유는 개인의 책무이기 때문이라는 핑계다. 그것은 갑, 아니면 을이라는 자세가 아니라 갑과 을 모두라는 자세다. 그런 용어로 표현하면 흑인 사회가 반응을 보인다.”(1년 전 빌 코스비는 흑인들의 의무감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사회의 의무를 빠뜨리는 바람에 동료 흑인들에게 호되게 당했다). 때때로 흑인과 백인 사이에 중도적 입장이 먹히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 오바마의 타고난 조심성과 타협자세는 약점으로 보이기도 한다. 스프링필드의 옛 주의회 의사당 밖에서 대선 출마를 발표하기 직전 오바마는 갑자기 계획을 바꿔 목사에게 축도를 올리러 오지 말라고 요구했다. 제레미아 라이트 목사는 오바마의 영적 방향을 지시했을 뿐 아니라 단골 문구까지 준 사람이다. ‘대담한 희망(The Audacity of Hope)’이라는 그 표현은 오바마가 쓴 책의 제목으로도 쓰였다. 그러나 오바마가 정식으로 선거운동을 시작하기 전에는 라이트 역시 아프리카 중심주의와 흑인 문제에 치우친 자세 때문에 “급진파”로 놀림을 받았다. 사우스사이드에서 일하는 목사치고는 이상한 비난일지도 모르겠다(라이트 목사는 흑인 교회 지도자 중에서 주류로 인정 받는다. 에보니 잡지는 그를 미국에서 영향력 있는 흑인 목사 15인으로 선정한 바 있다). “안식일 예배 15분 전 오바마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라이트 목사는 심란한 목소리로 뉴욕 타임스에 말했다. “참모 중에 누가 나를 초대하지 말도록 설득했다.” 오바마는 다만 목사가 언론의 거친 관심을 받지 않도록 배려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신의 영적 지도자와 지역사회로부터 거리를 두려 한다는 인상만 남겼다. “나의 과잉보호였을지도 모르고 그분의 기분이 상할 줄은 몰랐다”고 오바마는 시인했다. “그래서 그 문제를 논의했고 지금은 다 잘 해결됐다.”(라이트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를 거절했다) 유세 현장에서는 어떤 입장을 취하든 일단 아내와 두 딸이 있는 시카고 자택으로 돌아가면 오바마의 정체성에는 이중성이 없다. 미셸에게 오바마의 뿌리에 관한 꾸준한 의문은 그와 무관하다. “우리 흑인 사회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과 흑인이라는 사실의 의미를 두고 갈등을 겪는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텔레비전에서 우리의 모습이라고 나오는 모습을 보지만 우리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면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 그것을 연구한다. 그런 대화를 해야 한다.” 대화의 방향이 오바마의 통제 범위를 넘어서는 경우가 있다. 대선 유세라는 환한 불빛 아래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지난 3월 그는 민권운동사의 전환점인 1965년 피의 일요일 행진을 기념하러 앨러배마주 셀마에 갔다. 거기서 자신의 세대는 무관심을 극복하고 정치 활동을 할 필요가 있다는 주제로 힘찬 연설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셀마와의 개인적 연고를 암시하느라 무리수를 뒀다. 자신의 부모가 행진 때문에 “만나게 됐다”고 말했으나 사실 그는 4년 전인 1961년 태어났다. 몇 블록 떨어진 곳에서는 오바마의 민주당 내 경쟁자인 힐러리 클린턴이 선거유세에서 처음으로 남편의 공개적 지원을 끌어들이면서 흑인 표를 놓고 설득전을 벌였다. 오바마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실수는 단순히 깊은 생각 없이 “몇 마디 한 결과”라고 말했다. 흑인 표를 놓고 가열되는 경쟁이나 클린턴 부부에게서 받는 압력과는 관련이 없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로부터 넉 달 뒤 셀마는 오바마 선거 연설의 고무적인 마무리로 쓰였다. 이제는 피의 일요일에 자신이 어린 소년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다만 행진자들은 자기 같은 어린이들의 권익을 위해 싸웠다고 말한다. 지난주 아이오와주 남부, 담쟁이덩굴에 뒤덮인 헛간 앞에서 “그들은 우리를 위해 그렇게 했으며 이제는 우리가 차세대를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셀마에서 워싱턴으로 돌아가니 어떤 사람들이 등을 두드리면서 ‘흑인 역사를 멋지게 기념했다’고 말했다. 나는 ‘이해를 제대로 못했다. 그것은 미국 역사의 기념이었다’고 대꾸했다. 미국 역사의 매 길목에서 그런 식으로 변화가 일어난다. 사람들이 단결해 좀 더 나은 미국을 만들겠다고 결심하기 때문이다.” 그 주는 독립기념일이 낀 주였다. 아이오와주 전역에선 대선 후보들이 애국적 발언을 쏟아냈다. 그러나 버락 오바마처럼 멋진 말을 날린 후보는 없었다. 그는 셀마에서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를 건너 행진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겠지만 자신을 그 큰 투쟁의 일부로 간주한다. 그리고 조상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방식의 상(마틴 루터 킹이 말한 민권운동의 목표 달성)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