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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비밀창고에 현금 130억 비축

SK 비밀창고에 현금 130억 비축



SK 불법 대선자금 수사기록 단독 입수

SK그룹은 SK해운으로부터 변칙 유출한 2천여억원을 해외 선물투자에 사용했으며 이렇게 조성된 그룹 비자금 중 일부가 2002년 말 불법 대선자금으로 사용됐다는 사실이 최초로 확인됐다. 뉴스위크 한국판은 SK 불법 대선자금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을 단독 입수해 이와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최돈웅 의원을 통해 한나라당에 건네진 1백억원을 비롯해 여야 정치권에 전달된 불법 자금도 이중 일부였다.

또한 SK그룹은 회사 내에 비자금을 보관하는 ‘비밀창고’까지 만들어놓고 이미 대선 1년 전부터 대선용 정치자금으로 사용할 자금을 은밀히 전액 현금으로 비축해 놓기 시작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 또한 드러났다.
한편 DJ정권 5년 동안 SK그룹은 민주당과 한나라당에 공식 후원금으로 각각 1백62억원, 16억원씩을 불균등하게 건네 한나라당으로부터 불만을 샀고, 대선 때 SK그룹측에 ‘강압’적으로 대선자금을 요구하는 빌미를 제공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기록 속에는 손길승 SK그룹 회장, 김창근 SK그룹 구조조정본부장 겸 (주)SK 사장, 최돈웅 한나라당 의원, 이재현 전 한나라당 재정국장 등에 대한 진술조서·피의자 신문조서 및 재판기록과 김영일 한나라당 의원에 대한 구속영장 등이 포함돼 있다. 이들의 진술을 통해 SK 불법 대선자금의 실체를 밝혀본다.



SK 1년 전부터 계열사 돈 변칙 유용,
1백30여억원의 불법 대선자금 준비


검찰은 지난 1월 9일 “SK해운에서 변칙적으로 유출된 2천3백92억원 중 상당액이 손회장의 해외 선물투자에 사용됐으며 손회장은 분식회계를 통해 이를 은폐하려 했다”고 결론짓고 손회장을 구속 수감했다. 금융감독위원회 산하 증권선물위원회는 지난해 8월 20일 2000∼2001년 분식회계 등을 한 혐의로 SK해운을 고발했다. 그러나 증권선물위의 고발로 수사가 착수됐다는 언론 보도와는 별개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검사장 안대희)는 고발이 있기 수개월 전 이미 단서를 포착하고, SK그룹 관계자들에 대한 소환 조사와 계좌추적 등을 통해 관련 증거를 상당량 확보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수사기록에 따르면 검찰은 SK그룹이 SK해운을 통해 2천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해 해외 선물투자를 했으며 이는 정치자금 등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이미 지난해 8월 27일 소환된 김창근 SK 구조조정본부장을 통해 확인했다. 최돈웅 의원을 통해 한나라당에 전달된 불법 대선자금 1백억원도 여기에 포함돼 있다는 진술도 이미 확보했다. 김본부장은 이날 검찰 조사에서 “그룹 차원에서 2002년 초부터 연말 대선에 대비해 현금으로 모아둔 돈이 있었으며, 특정 계열사에서 돈을 만들어 SK증권을 통해 선물거래를 하는 등 자금을 운용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또 “국회의원 총선이 있는 해는 현금으로 30억∼40억원 정도 시재(時在)를 갖고 있다 사용했고, 제16대 대선의 경우도 당연히 연말에 자금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해 그룹 차원에서 연초부터 SK증권을 통해 운영하던 선물거래 자금 중 일정액을 인출해 연말에 약 1백20억원 내지 1백30억원 정도의 현금을 준비해 두었다”고 진술했다. 따라서 2002년 불법 대선자금과 별개로 2000년 총선 당시 국회의원 후보들에게 불법 정치자금이 흘러들어갔는지 여부도 새로운 논란거리로 떠오를 것으로 보인다.

2002년 말 대선자금으로 1백30여억원 정도를 사전에 준비하도록 지시한 것은 손회장이었다. 김본부장의 진술이 있은 후 사흘 뒤인 8월 30일 손회장 역시 검찰에 소환돼 이같은 사실을 자백했다(당시 손회장은 10월 2일 검찰에 첫 소환된 것으로 보도됐다. 그러나 손회장은 이보다 두달여 앞선 8월 이미 검찰에 소환됐다.

더군다나 검찰이 제1회 조서를 ‘참고인 진술조서’가 아닌 ‘피의자 신문조서’로 받은 것으로 보아 이미 그 전에 비공식 소환을 통해 충분한 진술을 확보했던 것으로 보인다). 손회장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볼때 2002년에는 각 당에서 대통령 및 지방선거에 필요한 선거자금을 요구할 것이 뻔히 예상되는 상황이었으므로 김본부장에게 미리 준비하도록 지시했다”고 진술했다.



SK 구조조정본부 내 ‘비밀창고’ 압수
수색으로 불법 대선자금 수사 시작


SK그룹은 SK해운에서 유용한 돈으로 선물투자 등을 하면서 마련한 정치자금 등 기업 비자금을 보관하기 위해 별도의 ‘비밀창고’까지 만들어놓았다는 충격적인 사실 또한 수사기록에서 확인됐다. 대선용 정치자금으로 미리 마련해둔 현금 1백30여억원도 이 ‘비밀창고’에 보관돼 있었던 것이다. 손회장은 10월 2일 검찰 조사에서 “1997년 말께부터 SK해운에서 나온 돈으로 SK증권을 통해 선물 및 옵션 투자를 하고 있었는데 그 자금 중 일부를 인출해 구조조정본부의 ‘비밀창고’ 등에 보관했다”고 진술했다.

이 ‘비밀창고’는 종로 SK사옥의 구조조정본부 내 재무담당 임원실과 비상근 임원실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가로 3∼4m, 세로 1.5∼2m, 높이 3m 정도 크기의 공간으로 2중문이 설치돼 있다. ‘비밀창고’는 김본부장이 SK 구조조정본부 재무팀장 시절인 1999년께 회사의 중요 문건이나 그룹 비자금 등을 보관하기 위해 직접 공사를 시켜 만든 창고였다. ‘비밀창고’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김본부장과 손회장 두사람뿐이었다. ‘비밀창고’의 열쇠는 김본부장이 직접 관리했으며 손회장조차도 ‘비밀창고’를 직접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지난 5년간 이 공간은 철저하게 보안이 유지돼 왔다.

김본부장은 2002년 대선 때 쓸 정치자금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 2001년 말∼2002년 초 SK증권에 근무하는 모부장을 통해 현금을 만들었다. 현금은 은행에서 1만원권으로 1천만원 단위로 포장해 사과박스 같은 곳에 담아 구조조정본부 ‘비밀창고’로 옮겨졌다. 이 돈을 나중에 정치권에 전달할 때는 대형 쇼핑백에다 각각 1억원씩 담은 뒤 구조조정본부 사무실에 있는 화물 운반용 카트에 싣고 지하 2층 주차장으로 내려가 김본부장의 승용차 트렁크에 싣고 운반했다.

손회장 진술에 따르면 이 ‘비밀창고’의 존재가 처음 드러난 것은 지난해 봄 검찰이 SK 사옥에 대한 압수수색을 하면서다. 서울지검은 참여연대가 SK그룹 주식 이면거래 혐의를 고발함에 따라 지난해 2월 17일 SK사옥 및 계열사에 대해 전격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검찰은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SK그룹 회장실과 구조조정본부의 전직원들을 사무실에서 내보낸 뒤 외부와 연결되는 전화도 모두 차단한 채 압수수색을 벌였다. 이날 입수한 자료에는 사과박스 20여개 분량의 서류 등이 포함돼 있다.

문제의 ‘비밀창고’ 존재도 이날 압수수색에서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이날 구조조정본부 ‘비밀창고’에 보관돼 있던 SK해운 자금 변칙 유출 및 선물투자, 그리고 정치자금 등에 관련된 ‘비밀장부’를 입수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과 재계를 뒤흔들고 있는 불법 대선자금 수사의 서막은 이날 SK그룹 압수수색 와중에 ‘비밀창고’에서 입수한 관련 증거를 통해 이미 시작됐던 것이다.



SK그룹 수사 일지
2003년 2월 17일: SK그룹 압수수색
2003년 2월 27일: 검찰, SK글로벌 1조5천억원대 분식회계 혐의 수사 발표
2003년 8월 20일: 증권선물위원회, SK해운의 분식회계 고발
2003년 8월 27일: 김창근 SK구조조정본부장 소환, 제1회 진술조서 작성
2003년 8월 30일: 손길승 SK그룹 회장 소환, 제1회 피의자 신문조서 작성
2003년 9월 4일: SK그룹 비자금 정치권 유입 관련 검찰 수사 언론 보도
2003년 9월 22일: 최태원 SK(주) 회장 보석 석방
2003년 10월 2일: 대검 중수부 손길승 SK그룹 회장 소환 (제2회 피의자 신문조서)
2003년 10월 7일: SK그룹 비자금 관련 이상수(열)·최돈웅(한) 의원,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소환
2003년 10월 15일: 최돈웅 의원 제1,2,3회 피의자 신문조서 작성
2003년 10월 21일: 최돈웅 의원 1백억원 수수 사실 첫 시인
2003년 10월 27일: 이재현 전 한나라당 재무국장 제1회 진술조서 작성
2004년 1월 9일: 김영일 전 한나라당 사무총장 구속영장 청구, 손길승 SK그룹 회장 특가법상 배임 및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 수감




DJ 정권 당시 민주당에 1백62억원,
한나라당에 16억원의 정치자금 건네


SK측은 왜 정치권의 ‘요구’가 있기 훨씬 전인 2001년 말∼2002년 초부터 대선용 자금을 미리 마련해놓고 대기하고 있었던 것일까. 1백30여억원을 현금화하는 데는 시간이 상당히 걸리고, 보관하는 것도 쉽지 않다. SK그룹측이 이러한 불편을 감수하고 사전에 대선자금을 준비하는 치밀함을 보인 데는 이유가 있었다.
SK그룹측은 2002년 말 대선 때 정치권에서 요구할 금액이 1백30억원 정도일 것으로 예상했다.

손회장이 검찰 조사 과정에서 진술한 바에 따르면 SK그룹은 그룹 계열사 사정에 따라 매년 정치자금으로 공식·비공식적으로 줄 수 있는 총액을 책정해놓고 여당 60% 정도, 야당 40% 정도라는 기준을 두고 지원해왔다. 그러나 민주당측에서는 “(매년) 연초부터 돈을 요구”하고 “금액도 여당 몫으로 할당해놓은 액수를 초과하므로 60%를 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따라서 한나라당에는 애초에 책정된 금액보다 적게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손회장은 “지난 정권 때 SK그룹은 총선 등 특별한 사안이 없는 해에는 연간 민주당 25억∼40억, 한나라당 5억∼10억원, 자민련 3억원 정도의 후원금을 냈으며 국회의원 개인후원회는 개인에 따라 3백만∼1천만원 정도 지원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1998년부터 2002년까지 SK그룹이 공식적으로 정치권에 전달한 총액은 민주당(국민회의 시절 포함)이 1백62억원인데 반해 한나라당은 16억원에 불과했다. 따라서 SK그룹은 한나라당으로부터 불만을 샀던 것이다.

손회장은 8월 30일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2002년에는 한나라당에서 자주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거의 노골적으로 선거자금을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손회장 진술에 따르면 “국회에서 SK그룹 관련 사안에 대해 자꾸 시비성 발언을 하는 등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계열사 사장들이 못해 먹겠다는 말을 많이 했다”면서 “왜 한나라당에서 자꾸 SK그룹 관련 사안에 대해 시비를 거는지 여러 루트를 통해 확인·분석해 보니 결국 정치자금을 적게 주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따라서 다른 해보다 한라당측에 대선자금을 많이 책정하게 됐다는 것이다.

손회장은 검찰에서 “과거에는 정치자금이나 선거자금이 필요한 시점에 기업에서 이런저런 명목으로 돈을 빼내 건넸지만, 지난 정권부터는 필요한 시점에 큰 액수의 현금을 빼주는 것이 쉽지 않아 미리 준비시킨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치자금 불공평 배분 문제로
한나라당의 SK 표적 공세에 시달려


2002년 대선 당시 SK그룹측은 알려진 것처럼 ‘이회창 대세론’을 믿고 ‘올인’식 투자를 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치권과 언론 등에서는 대선 직전 한나라당의 압승이 점쳐지고 있었기 때문에 5대 그룹 등 기업들이 한나라당에 대선자금을 ‘올인’한 것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손회장과 김본부장은 검찰 조사에서 “한나라당에서는 그렇게 이야기를 했으나 저희들은 솔직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이회창 후보의 능력이 탁월하다고 해도 언제나 그랬듯이 현직 대통령이 미는 사람도 만만치가 않기 때문에 한나라당이 생각하는 것처럼 선거 결과가 그렇게 나오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다만 “만의 하나 한나라당이 승리할 경우 그룹의 입장이 더 어려워질 것을 염려해 울며 겨자먹기로 준 것”이라는 게 두사람의 공통된 진술 내용이다.

SK그룹측은 지난 정권 동안 거대 야당의 위력을 실감하면서 자신들이 불이익을 받았다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던 듯 보인다. 손회장과 김본부장은 “국회의원, 특히 경제 관련 상임위원회의 영향력있는 국회의원들은 SK그룹의 사업 추진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데 국회에서 의원들이 표결·질의·발언을 통해 기업의 사업 추진에 장애가 되는 정책을 지지하거나 기업 이미지에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할 경우 애로가 많이 발생하게 된다”고 말했다. 손회장은 검찰 조사에서 “실제로 거대 야당의 파워를 여러 차례 실감했으며 실제로 불이익을 받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손회장은 이에 대한 예로 대선 직전인 2002년 10월께 공정거래위원회의 출자총액 초과 주 의결권 제한 조치, 금감원·공정위의 SK그룹과 JP모건 이면계약 조사, 부당 내부거래 관련 제재 조치, KT 민영화 과정에서 SK텔레콤의 주식 인수와 관련한 통신위원회의 제재 조치 등을 들었다. 손회장은 “이런 사안들은 모두 국회와 정부 각 부처가 우리 그룹을 우호적으로 봐주어야 원만하게 처리될 사안들인데 보통 대선이나 총선 전 국정감사 기간에는 국회의원들이 은근히 정치자금을 낼 만한 기업들을 골라 그런 기업을 압박하기 위해 정부 부처에 관련 자료를 요청하거나, 회사 관계자를 증인으로 출석시키거나, 대정부 질의시 기업을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 대선 직전에도 SK그룹과 관련해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김본부장도 “지난해(2002년)에 한나라당 의원들이 국회 과학정보통신분과위원회(통신과학위원회)에서 우리 그룹이 DJ 정부의 보호 하에 부당 이득을 취했으니 집권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취지로 말하는 등 SK그룹 관련 사안에 대해 시비를 많이 걸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SK그룹 관계자들은 검찰 조사 과정에서 수차례 한나라당에서 ‘강압적’으로 선거자금 1백억원을 요구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대선자금으로 한나라당에 1백억원, 민주당에 25억원을 준 이유는 DJ 정권 때 민주당에 1백62억원, 한나라당에 16억원을 줬기 때문에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도, 한나라당이 대선에서 승리할 것 같아서도 아니었다. 단지 정치권에서 요구하는 대로 줬을 뿐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김본부장은 “기업을 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자발적으로 정치자금을 내겠다고 하지는 않지만 정치권에서 선거자금을 달라고 하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줄 수밖에 없다”면서 “민주당의 경우 25억원을 요구했고, 한나라당에서는 1백억원을 요구했기 때문에 이렇게 준 것”이라고 밝혔다. 정치자금은 기업이 결정해서 주는 것이 아니라 정치권 요구 대로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상득 사무총장도
대선자금 모금에 관여


이번 검찰 조사를 통해 드러난 또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최돈웅 의원이 김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대선자금을 요청하기 전 이상득 한나라당 사무총장(당시 최고위원)과 먼저 접촉이 있었다는 것이다. 기업가 출신인 이총장은 손회장·김본부장과는 오래 전부터 개인적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김본부장은 “2002년 10월 말께 이상득 의원이 전화를 해 마포 가든호텔 뒤편에 있는 커피숍에서 만났으며 이 자리에서 이의원이 한나라당에 대선자금을 지원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의원은 기업에 부담주는 것을 미안해하며 구체적 액수는 제시하지 않고 도와달라는 말만 했다는 것이다. 손회장은 “김본부장이 두 의원에게 연락해 두 분이 서로 정리해서 SK가 어느쪽에 대선자금을 내야 하는지 물어봤을 때 두 사람 모두 자기에게 내라고 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 뒤에도 김본부장은 같은 장소에서 이의원을 다시 만났다. 이 자리에서 김본부장은 “최의원이 만나자고 해서 만났는데 SK에 대선자금을 현금으로 1백억원을 달라고 하더라는 얘기를 하자 이의원은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그사람 큰일 날 사람이구만’이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총장은 불법 대선자금 모금에서 관여한 것으로 전혀 거론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이총장측은 “구체적 금액을 얘기하지도 않았고 법적으로 인정되는 한도에서 도와달라는 등 일반적 의미에서 도와달라고 한 것”이라면서 “김영일 전 사무총장하고는 사전에 대선자금 모금과 관련해 얘기한 적이 없으며 개인적 친분을 통해 도와달라고 한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이총장측은 또 “혐의가 있다면 검찰에서 참고인 조사라도 했을 텐데 전혀 연락이 없었다”며 한나라당의 ‘조직적 불법 대선자금 모금 의혹’과는 전혀 무관함을 강조했다.

당시 손회장이나 김본부장은 창구가 최의원으로 정해진 것에 대해 의외라고 생각했다. 손회장은 “사실 나나 김창근 사장은 한나라당 사무총장 김영일이나 (이상득) 정책위원장 같은 사람을 전부터 잘 알고 친하게 지내왔고, 그들이 한나라당에서 어느 정도 책임있는 당직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런 사람을 선정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서 “불법 정치자금을 전혀 면식이 없는 사람에게 전달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상당히 불편했다”고 말했다. 손회장은 김본부장을 통해 한나라당 사무총장에게 전화해 “가급적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다시 전달했다. 그럼에도 한나라당측으로부터 “최의원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답변이 왔다. 그리고 손회장은 곧바로 그 이유를 깨닫게 된다.

손회장은 “최의원이 경기고 출신이고, 재정 담당이라는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느끼는 바가 있었다”면서 그 이후로 더 이상 창구에 대해 거론하지 않았다고 한다. 손회장은 순간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경기고 출신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SK그룹 홍보실 관계자는 2월 16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SK해운에서 나온 돈으로 선물투자한 돈이 비밀창고에 보관돼 왔을 개연성은 있으나 그룹 차원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얘기”라면서 “사실이더라도 SK그룹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그룹도 마찬가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손회장은 검찰조사 말미에 “위법인지 알면서도 불법으로 정치자금을 준 것은 잘못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SK그룹이 정치권으로부터 미움을 사지 않고 정상적인 경영활동을 하려면 부득이 음성적인 정치자금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임을 이해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번 일을 계기로 정치제도가 개혁돼 앞으로는 돈이 많이 들었던 과거의 정치풍토가 개선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인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불법 대선자금은 이미 과거에 저지른 불법·위법 행위를 무마하기 위한 로비용 ‘뇌물’이지, 기업들이 미래에 받을지도 모를 불이익 때문에 주는 ‘보험금’일 수 없다”고 일침을 가했다. 그는 “그동안 짐작만 할 수 있었던 SK그룹측의 계열사 돈 유용을 통한 불법 대선자금 조성 및 비밀창고 운영 행위가 사실로 확인됐다면 3월 12일 있을 주주총회에서 적지 않은 파장과 변화가 있을 것”이라면서 “기업과 정치권간의 이같은 불법 관행을 단절하기 위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당사자들은 억울하게 느낄 수 있지만, 새로운 시스템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관련자들에 대한 엄정한 사법 처리와 조치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2002년 대선 당시 5대 그룹 공식후원금도 따로 냈다
제16대 대선 당시 한나라당 중앙당 후원회에서 근무했던 박종식 부장이 지난해 11월 6일 검찰에 제출한 자료로 여기에는 한나라당 후원회에서 LG·롯데·삼성·SK·현대자동차 등 5대 그룹으로부터 받은 후원금 내역이 포함돼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LG그룹은 2002년 9월과 11월에 30개 계열사에서 총 30억원, 롯데그룹은 같은 해 5월과 9월에 18개 계열사에서 총 20억원, 삼성그룹은 같은 해 9월과 10월 10개 계열사에서 20억원, SK그룹은 5월과 9월 7개 계열사에서 8억원, 현대자동차는 10월 7개 계열사에서 3억원을 후원금으로 지원했다. SK 사건을 보면 기업들은 이런 공식후원금의 10배가 넘는 액수의 불법 자금을 조성해 정치권에 따로 건넨 것으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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