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 석유왕의 '아메리칸 드림'
러시아 석유회사 루코일이 미국 동북부의 주유소들을 조용히 인수해 왔다. 이제 루코일의 미국 진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게티 주유소로 들어서는 미국인 운전자들은 미국의 괴짜 석유부호 폴 게티(Paul Getty)가 유산으로 남긴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는다고 생각한다. 빨강·하양·파랑으로 디자인한 낯익은 모빌(Mobile) 간판을 달고 있어서 합병된 엑슨(Exxon) 주유소일 것 같지만 펜실베이니아주와 뉴저지주는 다르다. 낯익은 간판 뒤에 버티고 선 남자는 러시아 석유회사 루코일(Lukoil)의 CEO인 바지트 알렉페로프(Vagit Alekperov ·54)다. 루코일은 메인주에서 버지니아주에 이르는 2,100개 주유소와 매장량이 풍부한 러시아의 유전 일부를 소유하고 있다.
알렉페로프는 ‘조용한 올리가르히(Oligarch·러시아의 신흥 재벌)’로 알려져 있을 뿐 그의 야심은 알려진 게 없다. 그는 10여 년 전 “7명의 누나들은 이제 남동생이 생겼으니 주의해야 할 것”이라는 모호한 말을 던졌다. 옛 소련 석유장관 출신 알렉페로프는 소련 붕괴 이후 혼란기에 러시아 국영 석유회사들을 통폐합해 루코일을 설립했다. 그 뒤 루코일의 몸집은 4배로 성장했다. 하지만 알렉페로프는 루코일을 세계적 통합 석유회사로 탈바꿈시킨다는 자신의 꿈을 아직 실현하지 못했다. 작업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루코일이 보유하고 있는 석유 매장량은 확인된 것만 200억 배럴이다. 엑슨모빌(ExxonMobil)에 이어 세계 2위다.
알렉페로프는 지난 10여 년 동안 막대한 원유 판로를 개척하는 데 골몰해 왔다. 옛 소련권 국가들에 수천 개의 주유소를 세우고, 이어 미국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휘발유를 펑펑 써대는 미국은 가장 좋은 시장이다. 알렉페로프의 목표는 러시아 유전에서 생산한 가솔린을 미국인 운전자들에게까지 공급하는 것이다.
많은 러시아 기업들의 다각적인 해외 진출은 자본도피로 여겨지고 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천연자원의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크렘린이 러시아의 또 다른 거대 석유기업 유코스(Yukos)에 탈루 세금을 추징하면서 유코스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다. 러시아의 부호들은 가능한 한 빨리 자산을 외국으로 빼돌리려고 정신이 없다.
그러나 알렉페로프는 푸틴 측근이어서 다르다. 과거 경쟁자였던 유코스의 CEO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Mikhail Khodorkovsky)가 처한 곤경을 그는 “우리는 정부 방침에 따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알렉페로프의 사무실 책상에 푸틴 사진이 한 장 놓여 있다. 알렉페로프는 2003년 후반 뉴욕 맨해튼에 있는 한 게티 주유소에 미국에서 처음으로 루코일 간판을 달았다. 그 자리에 푸틴이 직접 참석해 기념 테이프를 끊었다. 알렉페로프의 재산은 35억 달러로 추정되고 있다.
러시아와 미국의 에너지부 장관들은 1년에 몇 차례 만난다. 루코일 미국 법인의 CEO 바딤 글루즈만(Vadim Gluzman·42)은 “이 모임에 항상 참석해 왔다”며 “미 정부가 에너지원 다각화에 관심이 많다”고 들려줬다.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주해 온 글루즈만은 알렉페로프를 만나게 된 경위는 함구하고 있다. 이미 22억 달러 규모의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 글루즈만이 미국으로 건너온 이후의 행적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는 로드아일랜드주에 있는 한 정원용 호스 제조업체에서 일했던 것만 인정하고 있다. 글루즈만은 소매나 에너지 분야에서 일한 경험이 전혀 없다. 하지만 4년 전 루코일이 러시아 기업 사상 처음으로 미국의 상장기업 게티 페트롤리엄 마케팅(Getty Petroleum Marketing)을 성공적으로 인수하는 데 한몫했다.
게티사 인수로 루코일은 미국 동부 해안지역의 1,300개 주유소를 수중에 넣었다. 경험 많은 일부 이사에게는 회사에 그대로 남아달라고 부탁했다. 게티의 CEO 빈센트 디 로렌티스(Vincent De Laurentis)는 “합병 바람 속에서 아침에 깨어나면 누구와 일하게 될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루코일 미국 법인의 2인자로 남았다.
과거 게티는 프랜차이즈와 임대 주유소 체제로 운영됐다. 주유소 자산 대부분은 해체 과정을 거쳐 부동산투자신탁(리츠) 체제로 재편됐다. 디 로렌티스의 말을 들어보자. “게티는 프랜차이즈·임대 체제를 그대로 유지할 것이지만, 루코일은 주유소 소유를 원한다. 아예 소유할 경우 이미지에 관한 통제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 주유소 건물을 헐고 새로 지을 수도 있지만 직원들에게 장사를 하루 이틀 하다 그만두는 건 아니겠구나 하는 인상도 심어줄 수 있다.”
루코일은 지난 몇 년 동안 조용히 인수작업을 벌이는 가운데 동부 해안지역의 더 많은 주유소 매입에 나섰다. 루코일이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원유를 들여오는 데 성공할 경우 러시아산 석유는 대서양과 가장 가까운 그들 주유소가 판매하게 된다. 하지만 글루즈만은 부동산 문제를 숙고하며 인구밀집 지역의 주유소 신설이 어려운 현실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들려줬다. “동부 해안지역에서 주유소 신설 허가를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시도해 왔다. 텍사스주와 루이지애나주 같은 곳에서는 누구에게든 허가해준다.” 이론상 인허가가 까다롭다는 것은 가격책정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2004년 5월 글루즈만은 모빌 주유소 800곳을 매입했다. 엑슨이 모빌을 인수할 때 미 연방 공정거래위원회(FTC)의 규정상 모빌 소매망에서 떨어져 나온 주유소들이다. 그 가운데 일부는 높은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석유업계의 혼란스러운 합병 와중에서 이들 주유소는 토스코(Tosco)에 매각됐다. 토스코는 그 뒤 코노코(Conoco)로 넘어가고 코노코는 필립스(Phillips)에 인수됐다.
2003년 코노코필립스는 동부 해안지역의 주유소 1,000개를 매물로 내놨다. 루코일은 수익성 높은 뉴저지주와 펜실베이니아주의 주유소만 원했다. 그것은 몇몇 다른 입찰 업체도 마찬가지였다. 글루즈만의 말처럼 ‘이전투구’였다. 결국 루코일이 2억7,000만 달러에 낙찰받았다. 이로써 루코일의 미국 내 소매 매출은 두 배로 늘었다. 자동차 보유 대수가 많은 뉴저지주에서 루코일의 시장점유율은 17%에 이르고 있다. 루코일은 현재 미국에 러시아(1700개)보다 400개가 많은 주유소를 거느리고 있다.
글루즈만은 각기 다른 주유소들을 루코일로 통합하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는 “2004년 5월 거래를 마무리 짓고 10월에 이미 뭘 인수했는지 잊어버렸다”고 말했다. 석유회사들 대부분이 소매망을 축소하고 직영 주유소만 겨우 살아남는 요즘 루코일은 사업 확장에 나서고 있다. 글루즈만은 “리브랜딩이 끝난 뒤 주유소를 더 인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루코일은 2005년 초반 뉴저지주·펜실베이니아주의 모빌 주유소에 하얀 바탕에 빨간 글씨로 디자인한 루코일 간판을 내걸 계획이다. 온갖 판촉 수단을 통해 이번 행사가 널리 알려질 것이다. 마케팅 예산 3,000만 달러 중 일부는 스포츠 후원에 투입될 예정이다.
모빌 주유소의 리브랜딩이 끝나면 게티 주유소도 맨해튼 주유소처럼 새단장하게 될 것이다. 알렉페로프는 “주유소들이 새 단장을 마치면 루코일의 국제 기준에 부합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준이란 무엇일까. 더 깨끗한 화장실? 더 친절한 종업원?
뉴욕주 롱아일랜드에 있는 루코일 미국 법인 본사에서 글루즈만은 <주유소 디자인 비법> (How to Design a Successful Petrol Station)을 뒤적였다. 그는 동유럽 루코일 주유소의 K자 모양 간판이 실린 지면을 펼쳤다. 루코일의 디자인이 여러 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루코일 주유소에 형광 불빛이 번쩍이면 달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다. 소유주가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러시아 시장에서도 루코일 브랜드가 널리 알려져 신뢰받고 있다. 최근까지만 해도 루코일은 자사 휘발유를 가짜와 구분하기 위해 붉은 색이나 파란 색으로 출하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루코일이 출처도 모르는 석유나 파는 회사가 아니라는 것부터 소비자에게 각인시켜야 했다.
글루즈만과 디 로렌티스는 미국 소비자들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설문조사에 나섰다. 무작위로 운전자들에게 두 가지를 직접 물어본 것이다. 이번 설문조사를 담당한 뉴저지주 포트리 소재 홍보업체 퍼스트 인터내셔널 리소시스(First International Resources)의 조셉 슈워츠(Joseph Shwirtz)는 “대다수 소비자들은 주유한 기름이 어느 나라에서 생산된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고 밝혔다. 브리티시석유(BP)의 휘발유를 주유한 운전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것이 영국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BP 휘발유는 북해산 아니면 베네수엘라산일 가능성이 크다.
조사요원들은 이어 루코일을 들어봤느냐고 물었다. 대다수가 금시초문이라고 답했다. 슈워츠는 “루코일이 러시아의 세계적인 석유업체라고 설명하면 소비자들은 대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들려줬다. 중동과 무관한 가솔린을 주유한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소비자들이 종종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산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루코일의 매출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루코일로 리브랜딩한 주유소의 판매량이 늘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루코일이 판매한 기름 가운데 적어도 지금까지 러시아산은 한 방울도 없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러시아 항만은 깊지 않아 유조선이 드나들 수 없다. 러시아 석유가 대부분 유럽에서 거래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러시아에서는 공급이 풍부해 원유가 배럴당 24달러에 팔리고 있다.
알렉페로프는 수년 동안 대서양 횡단 원유 수송로를 이용할 수 있도록 무르만스크의 한 부동항을 개방해달라고 요구해 왔다. 러시아에서 새로운 파이프라인과 항구를 건설하는 데는 수년이 걸린다. 따라서 알렉페로프는 러시아 정부와 다른 관심사를 논의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중국과 일본에 더 많은 석유를 판매하고 싶을 것이다. 루코일이 미국에서 판매하는 가솔린은 도매로 구입한 것이다. 2004년 5월 모빌 주유소를 인수하면서 체결한 계약에 따라 대부분 코노코필립스로부터 공급받는다.
러시아산 석유를 미국으로 운송할 방법이 전혀 없는데 주유소 수천 개는 왜 인수한 것일까.
글루즈만은 “무엇보다 소매망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알렉페로프는 오는 2007년까지 시베리아의 몇몇 루코일 터미널을 통해 미국으로 직접 원유 공급에 나섰으면 하는 바람이다. 루코일은 그런 날이 오리라는 확신 아래 뉴저지주 뉴어크에서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까지 이어지는 대서양 연안에 8개 터미널을 확보했다.
알렉페로프는 그동안 투자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투자자들은 그가 장악하고 있는 옛 소련 유전지대에서 더 많은 수익을 짜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호도르코프스키는 보드카 중독자들을 해고하고 유코스를 한층 투명하게 해 수익 제고에 성공했다. 하지만 루코일 지분 중 최소 10%(직원들은 11%)를 보유한 알렉페로프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원한다면 그냥 앉아 엄청난 배당금이나 챙길 수 있다”며 “하지만 루코일은 지금까지 어마어마한 돈으로 채굴권을 사들이고 유전도 개발해 왔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주유소도 사들이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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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 주유소로 들어서는 미국인 운전자들은 미국의 괴짜 석유부호 폴 게티(Paul Getty)가 유산으로 남긴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는다고 생각한다. 빨강·하양·파랑으로 디자인한 낯익은 모빌(Mobile) 간판을 달고 있어서 합병된 엑슨(Exxon) 주유소일 것 같지만 펜실베이니아주와 뉴저지주는 다르다. 낯익은 간판 뒤에 버티고 선 남자는 러시아 석유회사 루코일(Lukoil)의 CEO인 바지트 알렉페로프(Vagit Alekperov ·54)다. 루코일은 메인주에서 버지니아주에 이르는 2,100개 주유소와 매장량이 풍부한 러시아의 유전 일부를 소유하고 있다.
알렉페로프는 ‘조용한 올리가르히(Oligarch·러시아의 신흥 재벌)’로 알려져 있을 뿐 그의 야심은 알려진 게 없다. 그는 10여 년 전 “7명의 누나들은 이제 남동생이 생겼으니 주의해야 할 것”이라는 모호한 말을 던졌다. 옛 소련 석유장관 출신 알렉페로프는 소련 붕괴 이후 혼란기에 러시아 국영 석유회사들을 통폐합해 루코일을 설립했다. 그 뒤 루코일의 몸집은 4배로 성장했다. 하지만 알렉페로프는 루코일을 세계적 통합 석유회사로 탈바꿈시킨다는 자신의 꿈을 아직 실현하지 못했다. 작업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루코일이 보유하고 있는 석유 매장량은 확인된 것만 200억 배럴이다. 엑슨모빌(ExxonMobil)에 이어 세계 2위다.
알렉페로프는 지난 10여 년 동안 막대한 원유 판로를 개척하는 데 골몰해 왔다. 옛 소련권 국가들에 수천 개의 주유소를 세우고, 이어 미국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휘발유를 펑펑 써대는 미국은 가장 좋은 시장이다. 알렉페로프의 목표는 러시아 유전에서 생산한 가솔린을 미국인 운전자들에게까지 공급하는 것이다.
많은 러시아 기업들의 다각적인 해외 진출은 자본도피로 여겨지고 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천연자원의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크렘린이 러시아의 또 다른 거대 석유기업 유코스(Yukos)에 탈루 세금을 추징하면서 유코스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다. 러시아의 부호들은 가능한 한 빨리 자산을 외국으로 빼돌리려고 정신이 없다.
그러나 알렉페로프는 푸틴 측근이어서 다르다. 과거 경쟁자였던 유코스의 CEO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Mikhail Khodorkovsky)가 처한 곤경을 그는 “우리는 정부 방침에 따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알렉페로프의 사무실 책상에 푸틴 사진이 한 장 놓여 있다. 알렉페로프는 2003년 후반 뉴욕 맨해튼에 있는 한 게티 주유소에 미국에서 처음으로 루코일 간판을 달았다. 그 자리에 푸틴이 직접 참석해 기념 테이프를 끊었다. 알렉페로프의 재산은 35억 달러로 추정되고 있다.
러시아와 미국의 에너지부 장관들은 1년에 몇 차례 만난다. 루코일 미국 법인의 CEO 바딤 글루즈만(Vadim Gluzman·42)은 “이 모임에 항상 참석해 왔다”며 “미 정부가 에너지원 다각화에 관심이 많다”고 들려줬다.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주해 온 글루즈만은 알렉페로프를 만나게 된 경위는 함구하고 있다. 이미 22억 달러 규모의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 글루즈만이 미국으로 건너온 이후의 행적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는 로드아일랜드주에 있는 한 정원용 호스 제조업체에서 일했던 것만 인정하고 있다. 글루즈만은 소매나 에너지 분야에서 일한 경험이 전혀 없다. 하지만 4년 전 루코일이 러시아 기업 사상 처음으로 미국의 상장기업 게티 페트롤리엄 마케팅(Getty Petroleum Marketing)을 성공적으로 인수하는 데 한몫했다.
게티사 인수로 루코일은 미국 동부 해안지역의 1,300개 주유소를 수중에 넣었다. 경험 많은 일부 이사에게는 회사에 그대로 남아달라고 부탁했다. 게티의 CEO 빈센트 디 로렌티스(Vincent De Laurentis)는 “합병 바람 속에서 아침에 깨어나면 누구와 일하게 될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루코일 미국 법인의 2인자로 남았다.
과거 게티는 프랜차이즈와 임대 주유소 체제로 운영됐다. 주유소 자산 대부분은 해체 과정을 거쳐 부동산투자신탁(리츠) 체제로 재편됐다. 디 로렌티스의 말을 들어보자. “게티는 프랜차이즈·임대 체제를 그대로 유지할 것이지만, 루코일은 주유소 소유를 원한다. 아예 소유할 경우 이미지에 관한 통제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 주유소 건물을 헐고 새로 지을 수도 있지만 직원들에게 장사를 하루 이틀 하다 그만두는 건 아니겠구나 하는 인상도 심어줄 수 있다.”
루코일은 지난 몇 년 동안 조용히 인수작업을 벌이는 가운데 동부 해안지역의 더 많은 주유소 매입에 나섰다. 루코일이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원유를 들여오는 데 성공할 경우 러시아산 석유는 대서양과 가장 가까운 그들 주유소가 판매하게 된다. 하지만 글루즈만은 부동산 문제를 숙고하며 인구밀집 지역의 주유소 신설이 어려운 현실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들려줬다. “동부 해안지역에서 주유소 신설 허가를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시도해 왔다. 텍사스주와 루이지애나주 같은 곳에서는 누구에게든 허가해준다.” 이론상 인허가가 까다롭다는 것은 가격책정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2004년 5월 글루즈만은 모빌 주유소 800곳을 매입했다. 엑슨이 모빌을 인수할 때 미 연방 공정거래위원회(FTC)의 규정상 모빌 소매망에서 떨어져 나온 주유소들이다. 그 가운데 일부는 높은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석유업계의 혼란스러운 합병 와중에서 이들 주유소는 토스코(Tosco)에 매각됐다. 토스코는 그 뒤 코노코(Conoco)로 넘어가고 코노코는 필립스(Phillips)에 인수됐다.
2003년 코노코필립스는 동부 해안지역의 주유소 1,000개를 매물로 내놨다. 루코일은 수익성 높은 뉴저지주와 펜실베이니아주의 주유소만 원했다. 그것은 몇몇 다른 입찰 업체도 마찬가지였다. 글루즈만의 말처럼 ‘이전투구’였다. 결국 루코일이 2억7,000만 달러에 낙찰받았다. 이로써 루코일의 미국 내 소매 매출은 두 배로 늘었다. 자동차 보유 대수가 많은 뉴저지주에서 루코일의 시장점유율은 17%에 이르고 있다. 루코일은 현재 미국에 러시아(1700개)보다 400개가 많은 주유소를 거느리고 있다.
글루즈만은 각기 다른 주유소들을 루코일로 통합하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는 “2004년 5월 거래를 마무리 짓고 10월에 이미 뭘 인수했는지 잊어버렸다”고 말했다. 석유회사들 대부분이 소매망을 축소하고 직영 주유소만 겨우 살아남는 요즘 루코일은 사업 확장에 나서고 있다. 글루즈만은 “리브랜딩이 끝난 뒤 주유소를 더 인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2003년 뉴욕 맨해튼의 게티 주유소에 루코일 간판을 올리는 행사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앞줄 가운데)이 환하게 웃고 있다. |
모빌 주유소의 리브랜딩이 끝나면 게티 주유소도 맨해튼 주유소처럼 새단장하게 될 것이다. 알렉페로프는 “주유소들이 새 단장을 마치면 루코일의 국제 기준에 부합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준이란 무엇일까. 더 깨끗한 화장실? 더 친절한 종업원?
뉴욕주 롱아일랜드에 있는 루코일 미국 법인 본사에서 글루즈만은 <주유소 디자인 비법> (How to Design a Successful Petrol Station)을 뒤적였다. 그는 동유럽 루코일 주유소의 K자 모양 간판이 실린 지면을 펼쳤다. 루코일의 디자인이 여러 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루코일 주유소에 형광 불빛이 번쩍이면 달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다. 소유주가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러시아 시장에서도 루코일 브랜드가 널리 알려져 신뢰받고 있다. 최근까지만 해도 루코일은 자사 휘발유를 가짜와 구분하기 위해 붉은 색이나 파란 색으로 출하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루코일이 출처도 모르는 석유나 파는 회사가 아니라는 것부터 소비자에게 각인시켜야 했다.
글루즈만과 디 로렌티스는 미국 소비자들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설문조사에 나섰다. 무작위로 운전자들에게 두 가지를 직접 물어본 것이다. 이번 설문조사를 담당한 뉴저지주 포트리 소재 홍보업체 퍼스트 인터내셔널 리소시스(First International Resources)의 조셉 슈워츠(Joseph Shwirtz)는 “대다수 소비자들은 주유한 기름이 어느 나라에서 생산된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고 밝혔다. 브리티시석유(BP)의 휘발유를 주유한 운전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것이 영국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BP 휘발유는 북해산 아니면 베네수엘라산일 가능성이 크다.
조사요원들은 이어 루코일을 들어봤느냐고 물었다. 대다수가 금시초문이라고 답했다. 슈워츠는 “루코일이 러시아의 세계적인 석유업체라고 설명하면 소비자들은 대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들려줬다. 중동과 무관한 가솔린을 주유한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소비자들이 종종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산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루코일의 매출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루코일로 리브랜딩한 주유소의 판매량이 늘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루코일이 판매한 기름 가운데 적어도 지금까지 러시아산은 한 방울도 없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러시아 항만은 깊지 않아 유조선이 드나들 수 없다. 러시아 석유가 대부분 유럽에서 거래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러시아에서는 공급이 풍부해 원유가 배럴당 24달러에 팔리고 있다.
알렉페로프는 수년 동안 대서양 횡단 원유 수송로를 이용할 수 있도록 무르만스크의 한 부동항을 개방해달라고 요구해 왔다. 러시아에서 새로운 파이프라인과 항구를 건설하는 데는 수년이 걸린다. 따라서 알렉페로프는 러시아 정부와 다른 관심사를 논의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중국과 일본에 더 많은 석유를 판매하고 싶을 것이다. 루코일이 미국에서 판매하는 가솔린은 도매로 구입한 것이다. 2004년 5월 모빌 주유소를 인수하면서 체결한 계약에 따라 대부분 코노코필립스로부터 공급받는다.
러시아산 석유를 미국으로 운송할 방법이 전혀 없는데 주유소 수천 개는 왜 인수한 것일까.
글루즈만은 “무엇보다 소매망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알렉페로프는 오는 2007년까지 시베리아의 몇몇 루코일 터미널을 통해 미국으로 직접 원유 공급에 나섰으면 하는 바람이다. 루코일은 그런 날이 오리라는 확신 아래 뉴저지주 뉴어크에서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까지 이어지는 대서양 연안에 8개 터미널을 확보했다.
알렉페로프는 그동안 투자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투자자들은 그가 장악하고 있는 옛 소련 유전지대에서 더 많은 수익을 짜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호도르코프스키는 보드카 중독자들을 해고하고 유코스를 한층 투명하게 해 수익 제고에 성공했다. 하지만 루코일 지분 중 최소 10%(직원들은 11%)를 보유한 알렉페로프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원한다면 그냥 앉아 엄청난 배당금이나 챙길 수 있다”며 “하지만 루코일은 지금까지 어마어마한 돈으로 채굴권을 사들이고 유전도 개발해 왔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주유소도 사들이지 않았는가.
러시아의 석유왕 |
바지트 알렉페로프는 카스피해 연안의 바쿠에서 태어났다. 바쿠에서는 일찍부터 석유가 발견됐다. 조로아스터교도가 숭배한 영원한 불기둥은 그곳 바위 틈새에서 새어 나오는 가스를 연료로 삼은 것이었다. 마르코 폴로는 기름이 나오는 바쿠의 한 샘에 대해 언급했다. 먹을 수는 없지만 태울 수 있는 기름이라고 기록했다. 19세기 후반 노벨(Nobel) 일가는 바쿠에서 원시적인 석유산업을 정유소·송유관·철로·소매상 제국으로 일궈냈다. 로스차일드(Rothschild) 일가도 마찬가지다. 세계의 등유산업을 장악하려던 존 록펠러(John Rockefeller)의 세계적 야망은 풍부한 바쿠 유전지대로 인해 무산됐다. 바쿠는 정유소들이 내뿜는 검은 연기 때문에 ‘검은 도시(Black Town)’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검은 연기 밑에서 출판사를 세웠다. 레닌이 출판사에서 찍어낸 혁명논문은 역설적으로 국영 석유 유통망을 통해 러시아 전역으로 배포됐다. 스탈린은 바쿠에서 석유 노동자들의 파업을 조직했다. 노동자들의 파업은 결국 러시아 전역으로 확산됐다. 알렉페로프가 태어난 해는 1950년이다. 당시 바쿠 등 아제르바이잔에서 생산된 석유는 소련의 주요 에너지원이었다. 알렉페로프의 아버지는 무슬림 석유 노동자로 그가 어렸을 때 사망했다. 어머니는 러시아정교 신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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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시장 위험' 강남 아파트값 연율 30% '껑충'[일문일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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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트럼프 조세폭탄에 韓 연기금 비상…기재부와 대응 회의
성공 투자의 동반자마켓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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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상 실패’ HLB테라 하한가 직행…브릿지바이오·에이비온은 上[바이오맥짚기]
바이오 성공 투자, 1%를 위한 길라잡이팜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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