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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내려갔다

한국도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내려갔다

12월 1일부터 3일 사이 섭식장애 전문 클리닉 ‘마음과 마음’ 이정현 원장에게 예약된 환자는 모두 30명이고 5명은 중·고등학생이었다. 4년 전만 해도 섭식장애 환자래야 20대 초·중반 여성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중·고생들도 많아졌다. 지난 3월에는 초등학교 5학년생도 식욕 부진을 호소하며 찾아왔다. 고명자(42·가명)씨는 2년 전 가을 충격적인 일을 겪었다. 23㎏이던 초등학교 3학년 딸애의 몸무게가 불과 4개월 만에 8㎏이나 빠졌다. 아무리 여자애고 또래에 비해 체구가 작은 편이지만 체중이 15㎏까지 떨어지자 훅 불면 부러질 듯이 가냘팠다. 한창 성장할 나이에 이게 웬일인가 싶었다. 놀란 고씨는 딸을 서울의 종합병원 소아과에 입원시켰다. 병원에서는 규칙적으로 식사도 하고 의사의 지시도 잘 따랐다. 체중은 곧 회복됐고 겨울이 오기 전에 퇴원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고씨는 올 3월 딸애와 함께 또 ‘마음과 마음’을 찾아야 했다. 근래 들어 딸은 조그만 일에도 쉽게 화를 내고 다니던 일본인 학교(아빠가 일본인이다)에 적응하지 못해 엄마 속을 태웠다. 동생 뒷모습만 보면 짜증난다며 뒤통수를 때린 적도 있다. 체중도 한달 만에 2㎏이 다시 줄었다. 고씨는 “2년 전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했다”고 말했다. 고씨의 딸은 평소 “나는 얼굴이 크다” “나는 다리 색깔이 예쁘지 않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래서 외모 스트레스에서 오는 식욕 부진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정현 원장은 단순히 ‘몸짱 열풍’에서 오는 문제가 아니라고 진단했다. 아이는 엄마하고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자신감이 현저하게 결여돼 있었다. 일본에서 살다가 부모를 따라 한국에 건너와 일어·한국어, 어느 쪽도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지능이 떨어진다고 여겨졌고, 교우관계나 학업 성적도 시원찮았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는 공부보다 몸매나 외모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유혹에 빠져들었다. 멀쩡한 아이가 식욕 부진에 빠지고 병원을 찾을 정도면 부모는 아이에게 온갖 관심과 애정을 쏟아붓는다. 환자는 부모의 관심을 끄는 데 이만한 무기(거식증)도 없다는 사실을 이미 2년 전에 터득했기 때문이다. 신경성 식욕부진증은 이미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퍼져 있다. 지난해 백상신경정신과가 한달 단위로 조사한 결과 환자의 35% 정도가 10대 청소년이었다. 이 중 30%는 초등학생이었다. 올해 이 병원을 다녀간 초등학생은 약 20명 선이라고 강희찬 원장은 집계했다. 1999년 개원 당시엔 초등학생이 연간 한두 명에 불과했다. 인제대 상계 백병원의 김봉석 교수도 2001년 식욕 부진 증세로 병원을 찾은 초등학교 3학년생을 치료했다고 말했다. 얼마 전 초등학교 6학년생을 치료해 준 서울대 소아정신과 황준원 교수는 “식욕 부진 초발 연령이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내려갈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처럼 초등학생 식욕 부진 환자가 늘지만 체계적인 통계조사는 아직 없다. 관련 학회나 학계의 체계적인 연구도 미흡하다. 섭식장애의 초발 연령은 왜 낮아져 갈까? 섭식장애 전문 ‘나눔클리닉’의 이영호 원장은 “성인의 미적 기준, 날씬함은 이제는 아이들마저 자신들이 추구해야 할 가치로 인식하게 됐다. 또 발육상태가 좋아지면서 몸의 변화(사춘기)가 오는 연령도 낮아졌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언론매체를 통해 날씬함을 선망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어린애들에게도 그대로 노출된 결과라는 얘기다. 다른 한편으로는 가정 내 권위주의, 불화 혹은 소외감이 영향을 주기도 한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발병에 관계된 복수의 원인들을 제대로 알고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올해 초등학교 5학년생인 희수(여·가명)는 지난해 반에서 1, 2등을 다투는 우등생이었다. 얼굴도 예쁜 편이다. 36~37㎏하던 체중이 29㎏으로 뚝 떨어진 지난 7월 병원을 찾았다. 불과 3개월 만이었다. 희수의 신장 148㎝를 고려할 때 한 달만 더 방치했더라면 탈수로 인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오후 7시 이후에는 물도 안 먹고, 운동에 광적으로 매달렸다. 밥에는 거의 입을 대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자기 몸을 만지면 질색했다. 희수는 “신체검사를 앞두고 날씬한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희수를 진찰한 백상신경정신과 강희찬 원장이 보기에 아이가 몸매에 집착하게 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가정환경이라고 판단했다. 고소득 전문직에 종사하는 아빠는 매사에 권위주의적인 반면, 엄마는 심성이 온순했다. 항상 아빠에게 눌려 사는 엄마를 위로하려는 마음에서 희수는 말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성적이 공부한 만큼 나오지 않고 계속 떨어지자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게 됐다. 평소 예쁘다는 말을 들어온 희수는 결국 살빼기를 통해 잘난 모습을 보여주자는 생각에 이른다. 또 성취지향적이었던 아빠는 희수의 성적이 올라가면 칭찬하고 내려가면 냉랭하게 대했다. 식욕 부진은 그런 아빠의 관심과 애정을 유도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부모의 관심이 남자 형제에게만 집중될 때도 여자아이는 마음고생을 하다가 섭식장애에 빠진다. 초등학교 4학년생인 현진(여·가명)이는 지난 6월 지방의 한 대학병원에 급성췌장염으로 입원했다. 검사를 위한 단식이 탈수증세로 이어졌고 이후 신장 138㎝에 29㎏이던 체중이 계속 줄었다. 소아과·신경정신과 등등을 전전하다 체중은 20㎏까지 줄었고, 비강관으로 영양 공급을 받을 즈음 섭식장애 전문 클리닉에 입원하게 됐다. 의사는 처방에 앞서 가정환경을 살펴봤다. 바로 위의 오빠가 저체중에다 식사가 영 시원치 않았고, 부모의 관심은 자연 오빠의 식사와 건강에 집중됐다. 현진이는 그래도 개의치 않고 자기 일을 잘해왔다. 그러나 췌장염으로 입원하고 부모가 현진이를 돌보면서부터 자기도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됐다. 오빠가 독점했던 부모의 관심이 내게도 올 수 있다니! 이때부터 현진이는 비록 의도하진 않았지만 어디라도 아파야만 부모의 애정과 관심을 받는다는 생각에 지배되기 시작했다. 현진이 같은 경우엔 주로 가족치료법이 사용된다. 부모가 아무리 아이를 다그친다고 해서 음식을 먹게 하진 못한다. 전문가들은 절대 강요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식욕 부진은 심리적인 이유에서 오기 때문에 먼저 그 이유를 알아야만 한다. 그래서 부모와 아이가 한 자리에서 속을 터놓고 하는 대화가 치료의 지름길이다. 아이가 속마음을 터 보이고 부모가 그에 반응하면 된다. 약이 아닌 대화와 이해가 우선이다. 아버지가 폭력적인 경우 엄마도 위축되면서 아이와의 애착관계가 흔들릴 수 있다. 아빠가 권위주의적이거나 엄마가 바깥일로 바빠 아이를 돌보지 못하는 가정환경도 섭식장애 발병의 원인이다. 어쩌면 치료의 대상은 아이가 아니라 가정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환경에 놓인 아이들에게 모두 발병하지는 않는다. 개인의 기질과 가족력, 유전적 소인 등과 같은 내부 요인이 더해지면서 강박적 성향으로 발전한다고 의학계는 추정한다. 혹시 집안에 우울증 강박증을 가진 가족이 있다면 아이들을 더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의사들의 경험에 따르면 부모가 우울증 치료를 받는다면 아이도 유사한 증세 혹은 식욕 부진 증세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 김준기 정신과전문의는 지난 여름방학 동안 식욕 부진 치료차 중국에서 귀국한 한국인 아이를 진료한 적이 있다. 아이는 “뚱보”라는 놀림이 싫어 식사량을 확 줄였다고 했다. 같이 온 아이의 아버지도 문제였다. 성격이 급하고 화를 많이 내는 타입이면서 약간의 불안 강박증세를 보였다. 또 결벽증 혹은 완벽주의적 경향이 있거나 남의 시선에 예민한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강희찬 원장은 말했다. 어릴수록 더 그렇다. ps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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