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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를 뚫어라

아프리카를 뚫어라

한국석유공사의 백오규(44) 팀장은 숨이 턱턱 막혀왔다. 2005년 8월 26일 나이지리아의 수도 아부자는 섭씨 50도를 웃돌았고 습기까지 가득했다. 아부자 셰러턴 호텔에 마련된 국제 입찰장엔 전 세계에서 수백 명이 몰려들었다. 나이지리아 앞바다에 묻힌 ‘검은 황금’의 채굴권을 따내기 위해서다. 미국의 셸, 엑손모빌, 셰브론텍사코, 프랑스의 토탈, 이탈리아의 ENI 등 쟁쟁한 메이저 석유회사가 대거 참가했다. 매물로 나온 광구는 나이지리아 근해의 심해 광구 두 곳(OPL321과 OPL323). 원유 매장량은 각각 10억 배럴로 추정됐다. 치열한 경쟁 끝에 유전 개발 전반을 책임지는 ‘운영권’은 한국석유공사가 주축이 된 한국 컨소시엄에 돌아갔다. 한국이 초우량급 해외 유전 개발권을 획득한 최초의 순간이었다. 비결은 ‘패키지 딜’이었다. 석유개발권을 확보하는 대신 산유국에 필요한 발전소 등 인프라를 지어주는 방식이다. 두 곳의 유전 탐사와 개발은 앞으로 30년간 한국이 주도한다. 한국 컨소시엄이 60%(석유공사 45%, 한국전력 9%, 대우조선해양 6%)의 지분을 갖고 나머지는 영국 이퀘이터사 30%, 나이지리아 현지 회사 10%의 지분 참여가 최종 결정됐다. 다시 말해 두 광구에서 석유가 발굴되면 그 60%를 한국 컨소시엄이 소유한다는 의미다. 남에게 팔아도 되고 국내 반입도 가능하다. 한국 컨소시엄이 운영권의 60%를 장악하려면 나이지리아 정부에 3억2000만 달러를 지불해야 한다. 앞으로도 계속 필요한 탐사나 개발 비용은 이와 별도다. 그 부분은 지분 참여 비율로 영국 이퀘이터사 등과 나눠 추가로 분담하게 된다. 그러나 나이지리아 정부는 한국 컨소시엄에 9000만 달러만 내라고 했다. 2억3000만 달러를 깎아 준 셈이다. 한국전력이 이번의 석유 개발과 별도로 225만㎾ 규모의 발전소와 가스관로 1200㎞를 건설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2010년까지 33억 달러가 소요되는 대규모 투자다. 이 발전소가 완공되면 나이지리아 전체 전력 공급량의 20%를 담당하게 된다. 한전은 건설공사가 완료된 후 20년간 전기료와 가스관 사용료를 받아 투자 원리금을 회수하게 된다. 한국석유공사에서 18년째 근무해 온 백 팀장(나이지리아 사무소 파견 예정)은 “낙찰 순간까지도 우리가 대규모 광구를 획득했다는 실감이 전혀 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입찰장에서 사회자가 한국 컨소시엄에 낙찰됐다고 발표하는 순간에야 정말 우리가 따냈구나 하는 안도감이 밀려왔다”고 한다. 한국이 아프리카 석유에 주목한 것은 1995년 북아프리카 알제리 부라레(Bourarhet) 광구의 석유 탐사가 처음이었다. 사계절의 경계가 흐릿한 북아프리카 지역의 여름 날씨는 마치 건식 사우나와 같았다. 여름엔 섭씨 50도까지 올라간다. 사무실도 이웃 나라인 튀니지 수도 튀니스에 둬야 했다. 알제리 현지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외국인이나 외국 자본에 강한 반감을 보여 납치·살해의 위협이 잦았기 때문이다. 한 달에 한 번꼴로 비행기로 알제리 수도 알제까지 간 뒤 또다시 비행기를 갈아타고 하시메사우드로 갔다. 거기에서 차로 몇백㎞를 더 달려야 개발 중인 내륙 유전지대가 나왔다. 96년 9월까지 백 팀장은 6개월간 탐사 현장 소장을 포함한 다국적(영국·프랑스·중국인) 시추 인력을 감독했다. 그러나 1년 반의 고된 탐사에도 불구하고 시추는 결국 실패로 끝났고, 백 팀장은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백 팀장은 97년 9월 귀국 후 며칠이 지나 “national concession”(국가가 유전 개발 일체를 외국에 위임하는 방식) 구역인 리비아 NC174 광구를 담당했다. 매일 시추 상황을 기록하는 ‘시추일보’에서 좋은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추관에서 가스 성분이 증가하기 시작했고, 암석 파편 단면(cuttings)을 분석한 결과 형광반응이 일어났다. 현미경을 통한 정밀 관찰 결과도 고무적이었다. 그런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 석유공사 사무실에선 일제히 환성이 터졌다. 마치 ‘검은 황금’이 시추 파이프에서 솟구칠 때 나는 소리 같았다. NC174 광구는 현재 이탈리아의 거대 국영 석유개발회사 ENI와 공동 조업한다. ENI가 33.3%, 한국컨소시엄이 16.6%의 지분을 보유했다. 이 광구는 재작년부터 석유 생산에 들어갔다(그러나 석유공사 측은 공동 개발자인 ENI 측을 의식해 매장량과 생산량을 밝히지 않았다). 아프리카는 새로운 ‘제2의 중동’이다. 아프리카 대륙의 석유 매장량(2005년 1월 기준)은 전 세계 매장량의 7∼8% 수준인 1000억 배럴로 추정된다. 주로 기니만(Gulf of Guinea)을 중심으로 한 서부 지역과 리비아·알제리·수단 등으로 이뤄진 북부 지역으로 양분된다. 이 중 리비아(39.0%)와 알제리(11.7%)가 아프리카 전체 매장량의 절반을, 나머지를 나이지리아(35.3%), 앙골라(5,4%), 가봉(2.5%) 등 기니만 인접 국가가 차지한다. 특히 기니만 지역은 아직 미개척지다. 많은 에너지 전문기관은 이 지역을 세계에서 가장 잠재력이 높은 곳으로 꼽는다. 미 에너지정보국(EIA)은 최근 보고서에서 “서아프리카의 유전 개발 잠재력은 (흔히 제2의 중동으로 알려진) 카스피해나 남미보다 높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2030년께면 하루 생산량이 900만 배럴에 육박한다고 전망했다(지난해 한국의 하루 평균 석유 소비량은 약 20만 배럴). 그 중심에 나이지리아가 있다. 석유수출기구(OPEC) 회원국이자 세계 10위 석유수출국인 나이지리아는 국제 에너지시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품질도 고질의 저유황 원유로 정평이 나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매장량만 350억 배럴(한국이 60년 간 쓸 수 있는 양)이다. 대부분 해안 지역인 니제르 삼각주(Niger Delta)에서 나온다. 나이지리아는 최근 들어 석유 메이저들의 심해 유전 개발 확대로 대규모 유전이 잇따라 발견돼 내년께면 하루 생산량이 400만 배럴을 넘을 전망이다(현재는 쿠웨이트 수준인 하루 250만 배럴). OPL321, 323 광구도 바로 그런 심해 유전 지대 중 하나다. 실제로 두 광구 바로 옆에 셸, 셰브론텍사코, 엑손모빌이 이미 조업 중이다. 그만큼 석유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2004년 20년에 걸친 미국의 경제제재가 해제된 리비아도 눈여겨볼 만하다. 아프리카 최대 원유 보유국인 리비아는 확인된 원유 매장량만도 390억 배럴이다. 이번에 한국 컨소시엄이 확보한 OPL321, 323 광구만 한 10억 배럴 이상의 초대형 유전만 12곳이 넘는다. 게다가 국토의 70%가 아직 미개발 지역이다. 아프리카에서 국토 면적이 최대인 알제리도 예외가 아니다. 확인된 매장량만 118억 배럴이다. 알제리산 원유도 저유황 성분의 경질유로서 높은 품질로 정평이 나있다. 한국의 아프리카 진출은 아직 미미하다. 알제리 진출은 실패했고, 리비아에서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다. 이제 나이지리아에서 매장량이 각각 10억 배럴쯤으로 전망되는 유전 두 개를 확보했을 뿐이다. 그러나 수십 년간 아프리카에 공을 들여 온 중국은 이젠 ‘맏형’ 노릇을 한다. 일본은 유엔 안보리 진출까지 함께 노리며 아프리카를 겨냥한 경제 지원을 대폭 강화 중이다. 미국은 탁월한 기술력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점을 앞세워 언제든 진출이 가능하다. 메이저 석유사들은 아프리카 산유국의 정치적 불안 탓에 내륙 유전에의 진출은 꺼린다. 그러나 중국은 달랐다. 나일강을 낀 수단의 육상 유전 진출을 과감하게 시도 중이다. 수단은 중국이 전략적 석유 공급처로 집중 개발하는 국가다. 유전 개발뿐 아니라 정유공장까지 지어준다. 2004년 4월엔 유엔 안보리가 대규모 인종학살(일명 ‘Dafur 사태’)이 자행되는 이곳에 경제제재안을 상정하려 하자 중국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반면 대규모 자금을 수단의 석유산업에 투자했다. 미 미주리대에서 ‘에너지 오일 시스템과 국제협조(Energy Oil System and International Cooperation)’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준범 박사는 중국이 “거의 독과점 형태라 할 정도로 에너지 개발 분야를 싹쓸이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현지 유전 보호를 명분으로 많게는 1만 명의 인민해방군이 수단 기지에 들어가 있다는 말도 들린다. 특히 중국은 해외 석유의 80% 이상이 들어오는 말라카 해협을 낀 미얀마에 해군기지까지 건설해 미국의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한 미 해군 관리는 “해상 수송로의 안전은 미 해군이 지켜주는데 왜 중국이 굳이 미얀마에 해군기지까지 건설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고 이 박사는 전했다. 그러나 중국으로선 충분히 이해할 만한 조치다. 중국은 한국이 최초로 개발권을 따낸 나이지리아에도 거액을 투자했다. 중국 국영 석유회사인 중국해양석유(CNOOC)는 최근 22억7000만 달러를 투자해 나이지리아 악포 유전 지분 45%를 확보했다. 2000년 발족한 ‘중국-아프리카 협력 포럼’의 이면에도 아프리카 석유 확보라는 전략적 의미가 담겨 있다. 이미 중국은 수입 원유의 30%를 아프리카에서 들여오며 이 비중을 2025년까지 45%로 높일 계획이다. 지난달 말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은 워싱턴에서 부시와 정상회담이 끝나기 무섭게 기수를 나이지리아·모로코·케냐로 틀었다. 석유 확보를 겨냥한 행보다. 5월 19일로 예정된 나이지리아 4개 유전 개발 입찰에선 중국석유천연가스공사(CNPC)가 우선 취득권을 인정받았다고 알려졌다. 지분 45%를 인수하되 나이지리아 국영 정유회사의 설비 개선 지원과 철도·발전소 건설 등에 40억 달러를 투자한다는 조건이라고 한다. 중국의 저돌적 아프리카 공략에 미국도 바짝 긴장했다. 미국의 싱크탱크인 미 외교협회(CFR)는 2005년 12월 아프리카 전략 보고서(More than Humanitarianism: A Strategic U. S. Approach Toward Africa)에서 “미국은 중국의 급속한 영향력 확대로 아프리카에서 주요 도전에 직면해 있다”며 “새로운 아프리카 접근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 국가안보 보좌관을 지낸 앤서니 레이크가 이끄는 팀이 작성한 그 보고서는 중국이 국제적 지위와 개도국 이미지를 앞세워 아프리카에서 석유뿐 아니라 광산물·목재 할 것 없이 각종 원자재를 싹쓸이한다고 지적했다. 그 과정에서 인종 학살과 폭력사태가 자행되는 수단·짐바브웨 등 ‘불량국가’(rogue states)들에까지 무기를 공급하며 무차별적 지원을 한다고 경고했다. 사실 미국도 클린턴 행정부 당시인 90년대부터 아프리카에 공을 들여 왔다. 부시 행정부 들어서도 2003년 8월 아프리카 순방 등을 통해 아프리카 중서부 산유국들을 공략했다. 중동 석유의 미래가 여전히 불안하고, 남미 최대 산유국 베네수엘라에 좌파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은 그 대안으로 서아프리카를 주목하고, 이를 국가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다룬다. 석유업계·의회·국무부 등으로 구성된 미 아프리카석유정책그룹(AOPIG)은 2015년까지 서아프리카 원유 도입 물량을 현재보다 2.5배 많은 하루 250만 배럴로 늘리기로 했다. 나이지리아·앙골라·적도기니 등 기니만을 미국의 새로운 전략적 석유 공급 기지로 규정하고 개발계획을 본격화하는 까닭도 같은 맥락이다. 그렇게 되면 미국의 아프리카산 석유 비중이 지금의 15%에서 2015년엔 25%로 늘어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 지역 국가들의 독재·부패·종족 학살을 눈감아주는 게 아니냐는 의혹도 인다. 사실 부시 행정부는 8년 전 클린턴 행정부 때 인권 탄압을 이유로 대사관을 철수한 적도기니에 2003년 다시 대사관을 열었다. “그만큼 원유 확보에 사활을 건다는 얘기”라고 이 박사는 말했다.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50년대 후반 일본은 제국주의 시대 때 일본군 군용막사 건설업자로 큰 돈을 번 야마시타 다로(山下太郞)가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 중간의 카프지(Kafji) 해양 유전 개발권을 땄다. 그러나 99년 조광권이 만료되자 사우디 측은 일본에 철로 건설을 조건으로 조업권을 연장해 주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일본에선 경제성이 맞지 않는다며 강한 반론을 제기했다. 그때 아사히 신문은 ‘카프지의 석양’이란 제목의 사설에서 “우리에겐 야마시타 같은 사람이 없다”며 조업 연장을 강력히 촉구했다. 논설위원들이 석양에 저무는 광대한 카프지 유전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쓴 그 사설을 계기로 일본은 해외 대형 석유 개발에 적극 나섰다. 자본과 인력의 집중을 목표로 석유회사 인펙스와 데이고쿠세키유(帝國石油)를 합병, 몸집을 키우고 생산량을 늘릴 계획이다. 또 일본은 93년 제1차 ‘아프리카 개발을 위한 국제회의’(TICAD) 이후 5년마다 회의를 개최해 아프리카 개발 문제를 논의한다. 93년 이후 지금까지 일본의 대 아프리카 정부개발원조(ODA)는 무려 100억 달러에 이른다. 아프리카에 이미 적지 않은 우호세력이 형성돼 있다는 의미다. 한때 아프리카를 식민통치한 유럽 국가들은 ‘기득권’ 보유자다. 세계 석유시장은 엑손모빌, BP, 로열더치셸, 셰브론텍사코 등 영미계 4대 메이저가 주축이었지만 최근엔 토탈(프랑스), ENI(이탈리아), 렙솔(스페인) 등 유럽 기업들이 강력한 도전자로 부상했다. 90대 중반까지만 해도 약체였던 이들이 90년대 후반 업계 거물로 성장한 배경엔 전폭적인 정부 지원이 있었다. 아예 국가가 앞장서 국영 에너지 기업의 몸집을 불리고, 국가 원수와 정부 고위급 각료가 수시로 아프리카 산유국을 들락거리며 옛 식민 국가와의 에너지 유대를 강화했다. 그 결과 프랑스는 현재 에너지 자급률이 86%에 이른다. 이탈리아도 노조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영 석유·가스업체인 AGIP, ANIC, SNAM 등을 합병시키고 외국 업체도 잇따라 인수해 ENI의 몸집을 불렸다. 그러나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취약한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경쟁에서 크게 뒤졌다(현재 독일의 석유·가스 자급률은 11%에 불과). 최근 산업자원부는 해외 유전 개발 기능 강화를 목표로 한국석유공사 내 해외개발본부를 자회사로 독립시킬 계획이다. 한 발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민영화를 추진할 생각이다(시기는 미정). 정부가 100% 지분을 가진 공사 체계로는 갖가지 장애 요인 탓에 해외 유전 개발에 드는 엄청난 자금부담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인식 때문이다. 2013년까지 원유 자급률 18% 달성에 드는 약 16조원의 재원을 마련하는 방편으로 산자부가 올 하반기에 1조6000억원이 넘는 유전개발펀드 개설을 고려 중인 것도 그런 생각에서다. 물론 민영화를 통한 효율 극대화의 취지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광구 획득·탐사·시추·경제성 확보에 길게는 10년이 걸리는 유전 개발 사업에 투자자의 돈이 몰릴까? 대신증권 자산영업부의 최일환 대리는 “요즘 펀드 투자자들은 투자기간에 가장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고 말했다. 끈기 있게 기다리지 못한다는 뜻이다. 신창동 산자부 자원개발총괄팀장은 “일부는 채권에 투자하고, 안정적 수익을 보장하도록 보증보험도 아울러 준비 중”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에너지 전문가의 시각은 약간 다르다. 에너지경제연구원 이원우 박사는 “에너지 자원 같은 전략물자 확보엔 정부가 직접 나서야 효율적이란 점이 유럽 사례를 통해 입증됐다”고 말했다. 흔히 석유 개발은 고위험, 고수익(high risk, high return) 사업으로 통한다. 그만큼 오래 버틸 자금력과 전략적 끈기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약소국이든, 강대국이든 에너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나라는 일본과 독일뿐이다. 한국도 동북아 중심국가든, 뭐든 좋지만 민간 차원의 접근보다 정책결정자의 전략적 판단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시스템을 갖출 필요가 있다. 처칠은 BP의 발판을 구축했고, 루스벨트는 아람코(미국이 세우고 사우디가 국영화한 세계 최대 석유회사)의 토대를 구축했으며, 드골은 오늘의 프랑스 거대 기업 토탈의 설립 기반을 닦았다. “모두 21세기 에너지 전쟁을 길게 내다봤기 때문”이라고 이준범 박사는 말했다. 에너지 확보전의 또 다른 중요한 교훈은 ‘필요할 때 찾아가면 절대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중국이나 미국 지도자가 뻔질나게 아프리카를 들락거리는 이유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난 3월 아프리카 3국 순방도 사실 그런 차원에서 이뤄졌다. 노 대통령은 얼마 전 나이지리아에서 ‘아프리카 개발 이니셔티브’를 발표하며 공약을 했다. 대 아프리카 ODA를 2008년까지 세 배로 늘리고, 향후 3년간 총 1000명의 아프리카인을 초청해 개발 경험을 전수하며, 의료 보건환경 개선과 정보 격차 해소에도 지원한다는 등의 내용이다. 그러나 정부가 주도하는 아프리카 진출의 첫 단추는 이제 겨우 채워졌을 뿐이다. 그래도 정부의 부족한 역할은 민간 부문이 메운다. 일본은 미쓰이(三井), 이토추(伊藤忠), 미토모(住友), 마루베니(丸紅) 등 종합상사들이 가봉 등 아프리카 자원 개발권을 노린다. 이들 5대 상사는 2004년 순수익의 50%가량을 자원사업에서 얻었다[미쓰이가 해외 유전 개발을 통해 확보한 원유만 약 20억 배럴(매장량 기준)에 이른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국내 종합상사들도 최근엔 수출대행업 일변도를 벗어나 자원 개발 사업 투자를 확대 중이다. 삼성물산은 이미 알제리 이사우안 석유광구 개발에 17% 지분으로 참여했다. 카자흐스탄 아다 광구를 탐사 중인 LG상사는 ‘제2의 중동’ 카스피해의 해상 유전에 투자를 검토 중이다. 아프리카 진출의 선두주자 대우인터내셔널의 이재덕 상무는 “나이지리아·앙골라·리비아를 계속 두드린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 보이는 관심은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저조하다. 국내 종합상사의 한 관계자는 “아프리카는 지역적으로도 생소하고, 시장 자체도 확신이 서 있지 않다”고 말했다. 더군다나 국내 기업들은 지분 투자를 통해 이익 배당금만 챙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직접 탐사·채굴하는 능력은 선진국에 크게 못 미친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종합상사의 한 관계자는 “우리는 탐사에서 메이저를 따라가지도 못하고, 또 그럴 여력이 없어 현재로선 주로 유망 광구 입찰에 지분 참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심해 유전 개발 기술은 세계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을까? 한국이 최초로 ‘주도적’으로 실시한 해외 시추는 2003년 11월 5일부터 생산에 들어간 베트남 15-1 광구다. 수심이 불과 50m 남짓한 수역이다. 그러나 나이지리아의 OPL321, 323 광구는 수심이 2000m를 넘는 곳도 있는 ‘심해’ 유전지대다. 따라서 그만큼 높은 기술력이 요구된다. 백오규 팀장은 “한국도 동해 심해 가스전 개발을 통해 축적된 노하우가 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해저 석유 시추는 수심에 비례해 난도가 높아지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BP 관계자의 견해는 약간 다르다.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다며 익명을 요구한 그는 “한국은 유전 운영 능력에선 메이저들과 큰 차이가 없지만 탐사 능력에선 아직 크게 뒤진다”며 “BP의 경우 (유망 광구가 많은 나이지리아에선) 시추 성공률이 70%를 넘는다”고 밝혔다(석유회사의 평균 시추 성공률은 5%선으로 알려졌다). 시추 성공률은 경제성 있는 유전을 발견하는 경우를 말한다. 아프리카는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다. 우선 정치적 불안에 따른 위험 부담이 크다. 나이지리아·알제리·앙골라 등에선 여전히 내전과 종족분쟁이 계속된다. 특성상 장기간이 소요되는 석유 개발 사업으로선 큰 위험 부담이 따르는 이유다. 한국의 60, 70년대를 연상케 하는 케케묵은 관행도 문제다. 지난해 3월 이후 관련 정보 수집차 매달 나이지리아를 방문해 온 백 팀장은 얼마 전 현지의 라고스 공항에서 당황스러운 일을 겪었다. 세관의 보안요원이 그의 가방을 열어 이것저것 뒤졌기 때문이다. “돈을 달라는 표시”라고 그는 설명했다. 아프리카는 유전 개발 비용도 많이 든다. 서아프리카의 경우 대부분 유전이 심해에 위치해 시추 장비 등 관련 장비 수송과 채굴 비용이 훨씬 많다. 이 때문에 “사우디 원유의 경우 배럴당 판매가가 2∼5달러면 수익성이 유지되지만 심해 원유는 배럴당 14∼16달러 수준은 돼야 타산이 맞는다”고 대외경제연구원(KIEP)의 아프리카 전문가 박영호 박사는 말했다. 유전 개발과 관련된 모든 기반시설이 취약한 현실도 문제다. 쉽게 말해 도로·전력 등이 부족해 유전 개발에 많은 애로를 겪기 때문이다(이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국내총생산의 3%를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수송 거리가 너무 멀어 원유를 개발, 생산해 이를 국내시장으로 운송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든다. 그러나 난관은 곧 기회이기도 하다. 아프리카는 지리적으로 최대 소비 시장인 미국·유럽과 가까워 우리가 생산한 원유를 이들 시장에 판매하면 된다. 석유시장은 가스시장과 달리 현지에서 뽑아 올린 원유를 석유회사들끼리 교환하는 스와프 방식이 보편화돼 있다. 예컨대 우리가 생산한 원유와 미국 셸이 사할린 광구에서 생산한 원유와 맞교환하는 방식이다. 게다가 아프리카는 자체 석유공사를 두고 외국 기업의 신규 진입을 막는 중동과 달리 아직 ‘개방적’ 자세를 가졌다. 그만큼 자원민족주의 경향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취약한 인프라 건설이 시급하다는 뜻이다. 이번에 한국이 OPL321, 323 광구의 조업권 확보를 성사시킨 까닭도 한전·대우조선해양 등 인프라 관련 기업을 참여시킴으로써 아프리카 국가의 개발을 향한 갈증을 다소 해소시켰기 때문이다. 인적 자질도 상대적으로 우수하다. KIEP의 박영호 박사는 “아프리카에 진출한 중국 인력은 우리에 비해 질이 크게 떨어진다”고 강조했다. 경제 개발 모델에 관한 ‘지식전수’에선 충분히 비교우위가 있다는 얘기다. KIEP가 11월께 자체적으로 발족할 예정인 한-남아공 경제포럼 문제 협의차 4월 초 남아공을 방문한 박 박사는 “(2010년 월드컵 개최를 앞둔) 남아공 부통령은 한국의 개발 스토리를 굉장히 배우고 싶어한다”고 강조했다. 2002년 월드컵 개최와 세계로 뻗어가는 한류의 ‘지원 사격’은 한국의 아프리카 진출 전망을 밝게 한다. 박영호 박사는 국제회의 참석차 이집트를 방문해 버스로 지중해를 따라 알렉산드리아로 가던 때를 돌이켰다. 도중에 한 이집트 승객이 자신은 한국을 너무 좋아한다며 사과를 권했다(최근 이집트의 한 TV 채널에선 한국 드라마가 방영된다). 로마발 알제리행 비행기 안에선 알제리 출신의 한 승객이 “한국은 지금 몇 시냐?”고 물어 왔다(알제리는 프랑스 축구영웅 지네딘 지단 선수가 태어난 곳). 월드컵 때 한국이 보여준 경기 내용과 응원에 감명을 받았다며 건네온 질문이다. 이제 백 팀장은 그런 지원 사격을 등에 업고 6월 1일 또다시 나이지리아로 떠난다. 7명의 팀원과 함께 교포 수가 200명도 채 안 되는 적도 국가의 앞바다에서 원유를 시추하기 위해. 만일 그가 라고스행 비행기 안에서 꿈을 꾼다면 아마도 한국에 두고 가는 아내와 아들·딸 앞에서 시커먼 원유를 온통 뒤집어 쓰고 싱긋이 웃는 꿈일 것이다. t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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