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유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고유가로 원유 고갈 논쟁이 재연되고 있지만 100년 안에는 바닥나지 않아 지구의 석유 매장량은 얼마나 될까. 확실한 사실은 그간의 추정치가 워낙 부정확해 실소를 자아낸다는 점뿐이다. 1920년대 당시 앵글로-페르시안 석유사(지금은 BP)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지분 참여를 거부했다. 그곳에선 석유가 한 방울도 안 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19년 미 지질연구소는 미국의 석유가 9년 내로 바닥난다고 예측했다. 그러나 9년 후 텍사스주의 ‘블랙 자이언트’ 등 대규모 유전 발견으로 석유가 과잉 공급되면서 석유업계는 거의 파산 지경까지 갔다. 70년대엔 다시 암울한 전망이 고개를 들었다. 석유 생산이 80년대 중반 정점에 이른 뒤 가파르게 감소한다는 예측이었다. 유명한 CIA의 보고서는 가용 유전의 “급속한 고갈”을 점쳤고, 지미 카터 대통령은 “세계적인 석유 고갈”을 경고했다. 그러나 전에도 수차례 그랬듯 엄청난 공급 붐이 1986년에 일면서 유가는 곤두박질쳤다. 암울한 전망이 다시 돌아왔다. 간단히 말해 최대 20년 내로 석유가 바닥을 드러낸다는 예측이다. 새로운 재앙론자들의 예고는 보다 설득력 있게 들린다. 왜냐하면 지표 아래의 비밀을 꿰뚫는 듯한 통계·확률 모델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모델도 지구의 비밀을 꿰뚫기엔 역부족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지하자원을 잘 모르기 때문에 미래를 낙관해도 좋다. 역사적으로 고유가는 항상 투자 확대와 석유 소비 감소로 이어졌다. 바로 지금이 그렇다. 투자자들은 기존의 석유에서 타르 모래와 석유 함유 암석 등 새로운 석유자원뿐 아니라 천연가스·바이오연료·액화석탄 등 대체 가능한 모든 에너지 개발에 수천억 달러를 쏟아붓는다. 다시 말해 고유가가 반드시 세계경제에 나쁜 소식이 아니라는 뜻이다. 고유가가 석유 절약을 장려하는 동시에 혁신과 효율성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산업국가들에선 2006년 석유 수요증가 추정치가 하락했다. 미국에서조차 운전자들은 연비가 낮은 차량에 등을 돌렸다. 그럼에도 이런 시기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지하에 묻힌 자원에 관한 우리의 무지를 고려하면 단지 석유시장이 최고점과 최저점을 오가며 수십 년간 주기적으로 변하리라는 예측이 가장 안전하다. 지금은 70년대와 유사한 고유가 시대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점도 있다. 오늘날엔 예전과 달리 산유국이 석유 매장량의 90% 이상을 장악하며 산유국 다수가 자원민족주의를 표방한다. 유가를 떠받치려는 이런 국수주의적 경향은 새로운 개발 노력을 저지할지 모른다. 게다가 자원국수주의는 가뜩이나 고조되는 산유국과 소비국 간의 긴장을 더욱 고조시켜 유럽은 러시아와, 미국은 베네수엘라 등과 적대관계에 놓일지도 모른다. 간단히 말해 석유 문제는 지하의 문제가 아니라 지상의 문제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일반인은 석유가 고갈된다는 인식에 워낙 강력히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그동안 온갖 억측이 나돈 이유는 최첨단 기술조차 지구의 원유 매장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매장지를 정확히 찾아내거나, 이미 알려진 매장지의 실제 규모를 측정하는 방법도 개발되지 않았다. 석유 자원이 유한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긴 하지만 얼마나 한정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설상가상으로 러시아의 해묵은 이론에 미미하게나마 다시 관심이 인다. 석유는 지표 가까이에서 화석이 부패하면서 만들어지지 않고 지구 깊숙한 곳에서 화학반응이 일어나면서 계속 생겨날 가능성이 있다는 이론이다. 이런 주장은 가망성은 별로 없지만 그럴듯한 전망(즉 석유가 ‘재생 가능한’ 자원일지 모를 가능성)을 제기한다. 기본적인 화석이론조차 많은 수수께끼를 남긴다. 화석 이론은 유기체가 사멸·부패하면서 원유가 생긴다는 이론이다. 이후 수천 년간 퇴적물과 암석층에 덮였다가 서서히 땅 속 깊이 침투해 더 이상 뚫고 들어가지 못하는 지하 2100~4500m의 암반층에 부딪친다. 거기서 엄청난 압력과 고온으로 화학반응이 일어나면서 유기물 퇴적층이 석유와 가스로 바뀐다. 그 석유는 일명 ‘퇴적 분지’의 구멍이 많은 바위 속에 갇힌다. 이미 충분한 탐사가 이뤄진 퇴적 분지는 지금까지 존재가 확인된 전체 퇴적 분지의 약 30%에 지나지 않는다. 3차원 지진 반응에 기초해 하층토의 구조와 성분을 알아내는 최첨단 기술조차 탄화수소의 존재 가능성만 시사해줄 뿐이다. 지진파를 이용한 탐사 방식은 종종 의료용 초음파 검사에 비유되지만 초음파처럼 비교적 분명한 영상을 보여주진 않는다. 지진파는 하층토 내부 지층에서 반사돼 나오는 미미한 궤적만 보여줄 뿐이다(이 궤적은 최첨단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통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기본 영상을 만들어낸다). 이 방법은 비교적 새롭고 매우 비싸지만 소금층이 지진파를 막기라도 하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이 방법이 지금까지 극소수의 퇴적 분지에만 활용된 이유다. 간단히 말해 우리의 석유 지질학 지식은 해저 지형에 관한 지식보다 훨씬 얕다. 이 때문에 지하 지형도는 아직도 ‘예술적 상상력’의 대상일 따름이다. 탐사 유정만이 지표 아래 무엇이 있는지 보다 정확히 알려준다. 그러나 유정 탐사는 일반인들의 생각보다 훨씬 덜 보편화돼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북미 지역에 편중됐다. 1930년대께 무모한 채굴업자들이 텍사스주 킬고어 등지의 유전 지대를 마구잡이로 파헤쳤다. 심지어 교회 앞뜰까지 유정탑이 들어섰다. 모두 합쳐 약 100만 개의 유정이 미국에서 뚫렸다. 이와 대조적으로 페르시아만에선 2000개가 뚫렸을 뿐이다(사우디아라비아 300개 포함). 요즘도 유정 탐사의 70% 이상이 미국과 캐나다에 집중된다. 이 두 나라는 합쳐 봐야 세계 석유 매장량의 3%에 불과하다. 거꾸로 중동 지역엔 세계 석유의 70% 이상이 매장됐지만 1992~2002년 사이 전체 탐사 유정 중 약 3%만 뚫렸다. 탐사 유정에서 끌어올린 지층 분석 결과를 두고도 전문가는 정반대 결론을 내릴 가능성도 있다. 2000대 초 셸사와 인도의 탐사 파트너인 카인 에너지는 뽑아올린 퇴적층의 석유 함유 여부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결국 셸은 탐사 지역을 카인 에너지 측에 떠넘겼고, 카인 에너지는 그 후 3억8000만~7억 배럴의 원유를 뽑아 올렸다. 따라서 석유 탐사는 아직 인간의 판단에 의존한다. 동시에 기존의 유전에서 석유를 뽑아 올릴 때도 뜻밖의 결과가 나온다. 유전은 그 복잡한 속성 때문에 매우 장기간 집중적으로 채굴한 뒤에도 항상 매장량의 일부가 남아 있게 마련이다. 석유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아 이젠 고갈됐다고 판단되는 유전도 일정 양의 탄화수소를 저장했다는 뜻이다. 다만 현재의 기술로는 비용대비 효과적인 채굴이 불가능할 뿐이다. 요즘 평균 원유 채굴률은 추정 석유 매장량의 35% 정도다. 쉽게 말해 100배럴 중 35배럴만 채굴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35배럴 중 일부만이 ‘확인 매장량’(즉각 생산과 상업화가 가능한 원유)으로 간주된다. 여기서 기술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지난 수십 년간 이뤄진 기술 발전 덕에 추출 가능한 원유의 양도 크게 증가했다. 수평 시추, 수압 분쇄, 물과 천연가스를 주입하는 방식 등이 동원된 결과다. 이 모두는 평균 채굴률을 높였다. 일례로 30년 전만 해도 평균 채굴률이 지금의 약 20%, 60년 전엔 15%에도 못 미쳤다. 미래엔 새로운 기술이 등장해 보다 나은 성과를 거두게 된다. 간단히 말해 새로운 탐사 방법은 새 유전 발견 없이도 기존의 매장량을 늘렸다. 석유업계엔 이런 사례가 널려 있다. 가장 놀라운 예는 1899년 캘리포니아주에서 발견된 컨 리버 유전이다. 1942년 당시 그 유전의 ‘잔여 매장량’은 5400만 배럴로 추정됐다. 그러나 그 유전은 그 후 1986년까지 7억3600만 배럴을 생산했고, 아직도 9억7000만 배럴이 남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석유 매장량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계속 수정되며 대개는 상향 조정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지난 수십 년간 지구의 석유 매장량을 추정하려는 모든 시도가 지나치게 보수적이었음이 드러났다. 앞으로 유전이 추가로 발견되고 채굴률이 높아질 개연성까지 감안해 내놓은 수치인데도 너무 낮게 잡았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대체 땅 속에 얼마나 많은 원유가 묻혔을까. 최근 국제에너지기구(IEA)가 미 지질연구소의 이전 작업에 기초해 계산한 채굴 가능 석유는 2조6000억 배럴 가량이다. 이 중 1조1000억 배럴이 ‘확인 매장량’이다. 나머지 1조5000억 배럴은 이미 발견됐지만 아직 개발되지 않은 석유, 그리고 앞으로 높아질 채굴률 증가분과 향후 발견될 유전에서 나올 원유를 고려한 수치다. 오늘날 세계는 연간 300억 배럴의 원유를 소비한다(추정 소비 증가율은 매년 2% 이하). 따라서 만일 IAEA의 추정치가 옳다면 금세기 대부분을 버티기에 충분한 원유가 있다는 뜻이다. 매장된 석유를 다 소비하려면 훨씬 더 오래 걸릴 듯하다. 앞서 언급한 채굴 가능 석유엔 추가로 추정되는 1조 배럴을 감안하지 않았다. 초중질유, 역청 편암(瀝靑 片岩), 타르 모래 등 기술적으로 굴착 가능한 ‘비재래식 원유’를 감안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자원을 이용한 석유 생산은 갈수록 늘어난다. 유가가 워낙 높을 뿐 아니라 새롭고 비용 대비 효과적인 기술이 등장하면서 그런 ‘비재래식 석유’에도 가격 경쟁력이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IEA가 내놓은 석유 매장 추정치는 지나치게 낮게 잡은 수치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오랫동안 지속될 경우 에너지 시장뿐 아니라 에너지 경제가 세계를 움직이는 방식까지 극적으로 바꿀 가능성이 있는 시대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석유 시대일 뿐 우리가 생각하는 석유의 종말이 아니다. 석유시대는 어쨌건 금세기 안에는 끝나지 않는다. [필자는 ‘석유의 시대: 세계에서 가장 논란 많은 자원의 신화, 역사 그리고 미래’(The Age of Oil; The Mythology, History and Future of the World’s Most Controversial Resource, Praeger사, 2006년)의 저자이자 이탈리아 석유회사 에니의 수석 부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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