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무엇이 방아쇠를 당기게 했나
버지니아 공대의 조용한 아침을 피비린내 나는 악몽으로 바꾼 세상을 향한 분노와 박탈감 만일 당신이 독일어 수업을 듣는 20세의 생물학도라면 총을 맞는 데 적응하기까진 분명 상당한 시간이 걸리리라. 데릭 오델은 처음엔 검은색 옷을 착용한 가녀린 몸매의 청년이 권총을 들고 나타나자 필시 짓궂은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그러곤 청년의 발포로 탄피가 권총 밖으로 튕겨나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델은 뉴스위크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의 눈도 보았다. 그것은 어쩌면 가장 끔찍한 모습이었다. 그의 눈에는 공허함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들의 눈을 바라보면 그의 인생과 삶의 이야기를 알게 된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오직 공허함뿐이었다.” 조승희에게도 삶과 살아온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두운 꿈 속을 제외하면 누구와도 그것을 나누려 하지 않을 각오인 듯했다. 그리고 그는 미국 대학 사상 가장 흉폭한 최후의 살인극을 펼쳤다. 버지니아 공대에서, 그리고 어쩌면 대학에 들어가기 오래전부터 집에서 그는 황량하고 조그만 자신의 세계 속에 갇혀 살았다. 그에게 다가가 도우려는 교사와 급우들의 노력을 거부했으며 나머지 사람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는 젤리라는 이름의 수퍼모델 여자친구를 상상으로 지어냈고, 환상 속에서 그녀의 연인(스팽키)을 자처했다. 스스로를 “물음표”로 부르기도 했다. 불을 켠 채 잠을 잤으며 자면서도 신음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상하리만치 표현력이 뛰어났다. 기숙사 방 벽에는 누군가를 동경하듯 휘갈겨 쓴 ‘샤인’이란 제목의 노래 가사가 적혀 있다(“내게 말해 주고, 암시해 주소서/내가 어디를 봐야 하는지 가르쳐주고…. 내가 무엇을 찾을지 알려주소서/오 하늘이시여, 당신의 빛이 내려쪼이게 해주소서.”) 4월 16일 오전 7시 조금 지나 학생 2명을 살해하고 9시30분 직후 30명을 더 살해하는 사이 조는 우체국으로 달려가 뉴욕에 있는 NBC방송으로 소포를 부쳤다(그가 우편번호를 잘못 기재하는 바람에 하루 늦게 도착했다). 소포에는 자신과 “약하고 무방비 상태”인 다른 사람들을 강간하고, 윤간하고, 모욕하고, 괴롭한 “기독교 범죄자들”에게 복수하는 일종의 천사로 자신을 묘사한 천박한 선언문이 들어 있었다. 그는 자기 고통의 원인을 부유층에게서 찾는 듯했다. “너희는 너희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졌지. 이 녀석들아, 너희는 벤츠로도 부족했지? 이 속물들아, 너희는 금목걸이로도 부족했지? 그리고 신탁기금으로도, 보드카로도, 코냑으로도 부족했지?” 그러나 그의 분노는 대체로 일관성이 결여됐다. 그는 아마도 불특정 다수에게 복수를 하는 ‘이스마엘의 도끼’를 자처했을지 모른다. 그는 “반 테러리스트”를 자처하는 테러리스트인 동시에 1999년 컬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사건에서 13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디오 게임 중독자 “에릭과 딜런”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그는 끔찍할 정도로 미국적인 학교·직장 총기사건의 새로운 기준을 수립하려 한 듯하다(조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캠퍼스 총기 난사사건의 기록 보유자는 1966년 오스틴의 텍사스대 타워 꼭대기에 올라가 엽총으로 16명을 살해하고 31명에게 부상을 입힌 찰스 휘트먼이었다). 어쩌면 누군가 어디선가 조에게 악의 씨앗을 심어 준 듯하다. 만일 악마 자신이 아니라면 어떤 낯선 사람이나 친척이 말이다. 개인적으로 어떤 손상을 입었다면 그 상처는 한국 출신의 소년이 학업적 성공을 향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과정에서 느꼈을 고립감과 수모감 탓에 깊게 악화됐다. 조는 정체성 혼란에 휩싸였다. 부모처럼 한국인도 아니고, 친구들처럼 미국인도 아니었다. 그의 부모는 자식의 정서적 문제로 교회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교회에서도 그는 청년부(특히 부유층 아이들)의 따돌림을 받았다. “조는 성경의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을 지닌 영리한 학생이었다”고 버지니아주 센트레빌 한국장로교회의 한 목사는 말했다. 조의 어린 시절 목사였던 그는 언론의 추가 인터뷰를 피하려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목사는 조가 성경을 믿었는지에 관해 의구심을 나타냈다. 선언문에서 조는 기독교 신자들을 맹렬히 비난하고, 자신을 십자가에서 순교한 예수에 비유했다. 외로운 소년 시절에서 대량 학살로 이어지는 조의 성장 과정은 사악한 전조로 가득하다. 만일 누군가 조의 문제를 미리 파악했더라면 피했을지 모를 현대적 비극이다. 조는 한국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서울에서 방 두 칸짜리 작은 집에서 살았다. 조의 외삼촌(한국 언론에선 단지 ‘김씨’로 표현)은 조카가 특히 누나 선경씨에 비해 조용한 성격이었다고 말했다. 수만 명의 한국인처럼 조의 가족도 1992년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미국으로 이민갔다(조씨 가족은 버지니아주 교외의 40만 달러짜리 연립주택에 살았다). 그러나 이민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자녀 교육이었다. 이민 당시 조의 나이는 여덟 살이었다. 한국의 이민자들은 선발기준이 매우 까다로운 미국 일류대학 입학을 매우 중시한다. 그중에서도 아이비 리그를 선호한다. 선경씨는 프린스턴대에 진학해 경제학을 전공했다. 조씨의 아버지는 자식의 학비를 대려 세탁소에 취직해 하루 12시간 일했다. 점심은 주차장에 세워둔 차 안에서 먹었다. 그는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 자랑스럽다고 말할 때를 제외하곤 좀처럼 말이 없었다(외삼촌 김씨는 한국 기자에게 자신의 누이가 프린스턴대에 진학한 딸에 관해선 많이 이야기했지만 버지니아 공대에 간 아들에 관해선 별로 말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버지니아 공대에 다니는 조의 급우들은 그를 끼워주려 애썼다. 기숙사 친구들은 그를 사교클럽 파티에 데려갔고, 조는 술마시기 시합을 즐겼다. 보드카와 쿨-에이드를 비우고, 비어퐁 게임(컵에 맥주를 붓고 상대편 컵에 탁구공을 던져 들어가면 다 마셔야 하는 게임)을 했다. 조는 즐거운 표정을 짓지는 않았지만 탁구공을 맥주컵에 던지는 데는 능숙했다. “그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마지막 한모금까지 다 마셨다”고 기숙사 동료 앤디 코치는 말했다. 조는 미국의 대학 커뮤니티 사이트 ‘페이스북(facebook.com)’에 ‘멋진 아이들(The Cool Kids)’이나 ‘멋지게(Be Cool)’ 같은 제목으로 자신의 그룹들을 소개했다(물론 스스로 그렇다고 느끼진 않았을 테지만). 그의 기숙사 방은 그 자신처럼 냉랭했다. 그 흔한 포스터도, 사진 한 장도 없는 휑한 콘크리트 블록뿐이었다. 2005년 가을 조는 영어 선생들과 급우 중 일부를 섬뜩하게 했다. 죽음에 관해 쓰고, 학생 중 일부의 사진을 몰래 찍어 깜짝 놀라게 했다(휴대전화 카메라를 책상 밑에 숨기고 여학생들을 촬영했다). 조는 수업 시간에 거의 말이 없었다. 일부 학생이 그로 인해 수업을 회피하자 시를 가르치는 니키 지오반니 교수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조에게 시의 사악한 내용을 바꾸든가, 아니면 수업을 포기하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러자 조는 “당신은 내게 강요하지 못한다”고 대답했다고 지오반니는 워싱턴 포스트와의 회견에서 밝혔다. 조는 창작 과목의 공동 책임자인 루신달 로이 교수에겐 특히 골칫거리였다. 지난주 언론과 가진 일련의 인터뷰에서 로이 교수는 조를 돕거나 도움을 주려는 노력에 관해 침울하게 설명했다. 그녀는 조가 “거만하고 매우 해로운 존재”임을 알았지만 그를 지도하려 노력했으며 그에게 상담을 받도록 권유했다. 그러나 조는 그녀의 제안을 거부했다. 깜짝 놀란 로이 교수는 그런 사실을 학생처, 쿠크 상담센터, 시퍼트 건강센터, 버지니아 공대 구내경찰, 그리고 문리과 대학에 통보했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사안의 민감성을 이유로 익명을 요구한 한 경찰 소식통은 로이 교수가 도움을 청하지 않았으며 대신 “자신이 조를 보살피겠다”고 제의했다고 밝혔다). 로이 교수는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대학들은 학생이 도움을 구하도록 장려하고 그들의 사생활을 보호하려고(만 18세 이후엔 음주만 제외하고 모든 면에서 성인이다) 학생의 개인 정보나 건강 정보를 부모에게까지도 잘 알려주지 않는다. 직접적 폭력의 위협이 없으면 대학당국은 학생에게 전문적 도움을 받으라고 강권하지 않는다. 조는 누구에게도 위협적이고 폭력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최소 2명의 여학생을 스토킹했다. 평소 같으면 목석 같은 조가 한 여성과 인터넷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직접 그녀를 찾아갔다. 존 에디라는 이름의 룸메이트와의 흔치 않은(동시에 뭔가를 시사하는) 대화에서 조는 자신이 그녀를 만난 이유는 “그녀의 눈을 보고 그녀가 얼마나 멋있는지 알아보려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에디는 CNN과의 회견에서 “조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고 헤픈 여자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조는 그녀의 방에서 자신을 ‘물음표’로 소개했다. “그 여학생은 그 말에 기겁을 했다”고 에디는 말했다. 그 여학생은 교내 경찰에 연락했다. 2005년 11월 27일 조는 경찰 조사를 받았으나 여학생은 처벌을 원치 않았다. 이 사건은 그 후 교내 규율관리부로 이관됐지만 그 부서에선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전혀 제재받지 않은 조는 이제 다른 여성을 괴롭히기 시작했고 그녀도 교내 경찰에 연락했다. 그러나 또다시 아무 혐의도 씌워지지 않았다. 경찰 조서를 읽은 한 경찰 소식통은 그 두 사건은 사소한 사건이기 때문에 “스토킹”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두 번째 사건 이후 조는 기숙사 친구 앤디 코치에게 “자살하는 편이 좋겠다”고 털어놓을 만큼 충격받은 듯하다. 코치는 경찰에 연락했다. 조는 이번에는 지역사회 정신건강센터로 이송됐다. 판사는 조에게 버지니아주 래드퍼드에 있는 성 올반스 행동건강센터에 잠시 지내도록 명령했다. “정신 질병의 결과로 자신이나 타인에게 즉각적인 위험이 된다”(비자발적 일시 감금의 경우 즐겨 쓰는 상투적 표현)는 판단에서다. 이튿날 한 정신과의사는 조의 “정신이 메말라 있으며 정서가 우울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는 자신은 자살 의도가 없다고 주장했으며 정신과의사도 “그의 통찰력과 판단력은 정상”이라고 결론지었다. 조는 당일로 풀려났다. 그 센터의 에릭 언하트 대변인은 “우리는 수사를 방해할 생각이 없으며 당국과 충분히 협조하고 있기 때문에 따로 논평할 사항이 없다”고 말했다. 조가 법원이 명령한 치료를 받았는지는 불분명하다. 상담과 치료를 받았을 가능성은 있다. 어느 이유에서건 그 해엔 스토킹 사건이 재발하지 않았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생각은 계속 그를 괴롭혔다. 2006년 가을 조는 에드 팔코 교수가 가르치는 희곡 수업에 ‘리처드 맥비프’라는 제목의 작품을 제출했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13세 소년 존은 계부 리처드가 자신의 무릎에 손을 갖다대자 불쾌한 반응을 보인다. “나는 딕이란 이름의 나이 들고, 머리가 벗겨지고, 과체중이고, 소아 성도착적인 계부에게 희롱당할 수 없다!”며 “당장 내게서 그 손을 집어치워, 이 멍청아!”라고 존은 소리친다. 자기 방으로 돌아온 존은 혼잣말로 이렇게 뇌까린다. “딕을 죽여야 해, 딕을 죽여야 해. 딕은 죽어야 해. 딕을 죽이자.” 존은 아침식사 대용 시리얼 바를 그의 목구멍에 가득 밀어넣어 딕을 죽이려 하지만 실제론 딕이 “치명적인 일격”으로 존을 살해한다. 조의 또 다른 희곡(‘미스터 브라운스톤’)에선 교사가 학생들을 괴롭히고 강탈한다.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팔코 교수는 조의 작품이 “매우 사춘기적이며 멍청한 내용”이라고 밝혔다. 수업 시간에도 팔코 교수와 학생들은 “그를 조심스럽게 대하려 했다”고 팔코는 말했다. 흥미롭게도 팔코 교수는 조가 다른 학생의 희곡에 관해 쓴 비평은 명료하고 깊은 사고력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았다. 팔코 교수는 학생들이 조의 희곡을 논의할 때면 조가 인정을 받는다는 희미한 증거를 찾았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적인 일”일 뿐이었다. 팔코 교수는 조에게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그는 로이 교수를 비롯해 글쓰기를 지도한 또 다른 교수인 리자 노리스와도 상의했다(조는 노리스 교수의 수업도 들었다). 노리스 교수는 팔코 교수에게 자신이 매리 앤 루이스 부학생처장에게 조에 관해 이미 알렸다고 말했다. 노리스 교수는 뉴스위크에 보낸 e-메일에서 루이스 부학생처장이 자신을 도우려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녀로부터 조의 정신건강 문제에 관한 어떤 언급도, 경찰 조서도 찾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루이스 부학생처장은 이에 관한 언급을 거부했다). 대학당국은 지난주 머뭇거리며 조가 경찰과 정신건강센터에 불려간 사실이 학생부 기록에서 사라진 과정을 설명하려 진땀을 뺐다. 경찰 보고서는 대학 내 상담센터로 전달되지 않은 듯하다. 학교 행정당국자들은 “사태를 조사 중”이라며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팀 케인 버지니아 주지사는 조사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총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이 사는 버지니아주에선 총기 구입이 쉽다. 신원확인이 끝날 때까지 대기하는 기간도 없고, 배경검사도 최소 수준에 그친다. 3월 13일 조는 로아노키 총포상에 가 신용카드로 9mm 구경의 글록19 권총 한 자루와 탄알 50발이 든 탄창을 571달러에 구입했다. 가벼운 반자동 권총인 글록은 경찰과 갱들이 모두 애호하는 총으로 초당 5발까지 발사 가능하다. 탄두 부분이 화산 분화구처럼 팬 형태인 ‘할로 포인트(hollow-point)’형 특수 총탄(장기 파손 가능)을 33발까지 장전 가능한 탄창은 2초 내에 갈아낄 수 있다. 조가 왜 에밀리 힐셔를 첫 번째 희생자로 택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두 사람은 함께 수업을 들은 적도 없고, 그녀의 방은 다른 기숙사 건물에 있었다. 방의 위치도 엘리베이터 뒤쪽에 떨어져 있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기 어렵다. 그러나 힐셔는 밝고 푸른 눈을 가진 예쁜 여학생이었고, 조는 그녀가 남자 친구인 칼 손힐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 4월 16일 오전 7시5분쯤 손힐이 그녀를 웨스트 앰블러 존스턴 기숙사 건물로 데려다 줬을 때 말이다. 그 후 조는 힐셔의 뒤를 따라가 그녀의 방에서 사살한 뒤 옆방에 살던 기숙사 사감 라이언 클라크가 끼어들자 그도 살해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 후 조는 피묻은 발자국만 일부 남긴 채 사라졌다. 한편 힐셔의 여자친구 헤더 휴(18)는 오전 8시쯤 남자 친구 방에서 웨스트 앰블러 존스턴 기숙사 건물의 자기 방으로 돌아왔을 때 형사들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그녀는 힐셔의 남자 친구 손힐이 총을 가졌으며 그가 최근 자신과 힐셔를 사격연습장에 데려갔다고 진술했다. 형사는 이런 사실을 결정적 단서로 여긴 듯하다. 휴는 뉴스위크에 “경찰은 그 사건이 치정관계로 인해 일어났다고 보고 손힐이 힐셔를 죽이려 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휴는 힐셔와 손힐이 “서로를 끔찍하게 좋아했으며 손힐은 폭력적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경찰은 손힐을 제1 용의자로 “확신”한 듯하다고 전했다. 경찰은 곧 손힐을 신문했으며 그의 집에서 살인용 무기를 수색했다. 이런 일은 그 후 엄청난 판단착오임이 드러난다(살인의 경우 제1 용의자는 대개 남자 친구나 배우자다. 경찰은 당시 제공된 정보에 바탕해 최선을 다했다고 밝혔다). 버지니아 공대 찰스 스테거 총장은 전에도 학내 비상사태를 경험했다. 지난해 가을 초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기결수가 버지니아 시골 지역에서 갈수록 커지는 이 대학 캠퍼스 부근으로 탈출해 병원 경비원 한 명과 부보안관 한 명을 총으로 살해했다. 스테거 총장은 일부 학생에게 교실 건물에서 대피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번엔 대학 내 고위 관리들과 대응책을 논의하며 스테거는 전에 내린 그 같은 결정을 재고했다고 말했다. 대피령으로 인해 학생들이 살인자의 총기 조준경에 그대로 노출되면 어쩌나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을 그대로 있게 함으로써 공황사태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스테거 총장과 부하 직원들이 9시45분쯤 버레스홀의 대학 이사실에서 대책을 논의하는 순간 경찰 보고서가 도착했다. 총기 난사가 또 한 차례 발생했다는 내용이었다. 스테거 총장은 총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곤 고개를 들었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그는 그 소리가 인근 공사장에서 나는 소리가 아닐까 생각했다. 순간 노리스홀 쪽으로 달려가는 경찰의 모습이 보였다. 스테거는 경비원들에게 총장실로 가는 문을 걸어 잠그라고 지시했다. “총장실이 목표물일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했다”고 그는 말했다. 생물학도로 초급 독일어 수업을 듣던 데릭 오델도 ‘탕탕’ 하는 소리가 인근 공사장에서 나는 소리려니 생각했다. 수업을 듣던 학생 중 누군가 그 소리가 총성일지 모른다고 큰 소리로 외쳤지만 다른 학생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총소리는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는 이유에서다. 바로 그때 검은 가죽 재킷에 짙은 청바지를 입은 한 남자가 방에 들어섰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그 남자는 수업을 가르치던 크리스토퍼 제임스 비숍 교수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그러곤 207호실 앞줄 부근에 있던 사람들을 쏘아 죽이고, 책상이 놓인 열을 따라 계속 발포하며 학생들을 살해했다. 오델은 책상 밑으로 엎드린 뒤 교실 뒤쪽을 향해 기기 시작했다. 오른팔 상부에 총알 구멍이 나면서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순간 난사자가 “불과 2초 만에” 총을 재장전하는 소리와 함께 철저하고 의도적으로 다시 살인을 저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남자는 떠났다. 오델은 고개를 들고 몇 안 되는 생존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들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고 그는 회상했다. 살인자가 되돌아오지 않도록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옆방 211호에선 조슬린 쿠투르-노왁이 중급 프랑스어를 가르치던 중 총소리를 들었다. “저게 내가 생각하는 소리가 아니어야 하는데”라고 그녀는 소리쳤다. 그녀의 수업을 듣던 콜린 고더드(21)는 나중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우린 그녀에게 별 문제 아니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노리스홀에선 많은 공사가 진행돼 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학기 내내 소음을 불평했다.” 여전히 걱정이 된 쿠투르-노왁은 문을 열고 복도를 힐끗 바라본 뒤 즉시 문을 닫았다. “그토록 놀란 표정을 본 적이 없다”고 고더드는 말했다. 그녀는 “911에 전화해”라고 말했다. 고더드는 휴대전화기를 움켜쥐고 911 교환원에게 알렸으나 교환원은 그의 말을 알아듣는 데 애로를 겪었다. 바로 그때 살인자의 모습이 힐끗 보였다. “그는 단지 책상 열을 따라 발포하며 사람들에게 여러 차례 발포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었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총을 쏠 뿐이었다.” 고더드는 살인자가 911 교환원의 소리를 들을까봐 두려워 휴대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때 여학생 한 명이 그 휴대전화기를 집어들고 경찰에 신속한 출동을 간청했다. 그러자 조는 그 여학생에게 고개를 돌려 등에 발포했다. 고더드는 소리내면 그의 주목을 끌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순간 살인자가 고더드의 다리에 총을 쏘았다. 고더드는 죽은 체했다. “그에 맞서 영웅이 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고더드는 당시를 돌이켰다. 다시 207호실. 오델은 책상 위로 쏜살같이 달려 문을 향해 다가갔다. “만일 그 문으로 그가 다시 들어오면 우리 모두 죽는다고 생각했다”고 그는 당시를 돌이켰다. 그와 3명의 다른 생존자는 번갈아가며 발과 손으로 교실 문을 떠받쳤다. 그러면서도 몸은 최대한 문에서 떨어져야 했다. 우스운 행동이었지만 다른 방법은 별로 없었다. 연단은 바닥에 고정돼 있었고, 의자와 책상은 너무 가벼워 방책으로 이용하지 못했다. 2층 창문은 뛰어도 못 이를 정도로 너무 높았다(다른 교실에선 학생들이 더러 창문을 통해 탈출했다). 학생들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 누군가의 목에서 피가 콸콸 흘러나오는 소리와 힘겹게 숨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살인자는 2분 내로 되돌아왔다. 그는 큰 소리를 내며 문을 두들겼고, 틈새를 1인치가량 벌렸다. 문 손잡이 주위에 약 5발을 쏜 뒤 그는 포기했다. 목표물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러곤 다시 ‘쾅’ 소리가 나며 211호실 문이 열렸다. 살인자가 다시 돌아왔다. “그는 다시 그 방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쏘기 시작했다”고 고더드는 말했다. 이 통로, 저 통로 휩쓸며 결국 고더드에게까지 왔다. 여전히 죽은 체하던 고더드는 갑자기 총탄 한 발이 자신의 어깨에, 다른 한 발은 엉덩이에 박힌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조용히 누워있던 고더드는 몇 발의 총성을 더 들었다. 그러곤 마지막으로 한 발의 총성이 들렸고, 그 후 조용해졌다. 경찰이 도착해 생존자들에게 손을 위로 들라고 소리쳤다. 노리스홀로 들어가는 주요 문은 조가 이미 쇠사슬로 묶었기 때문에 경찰로선 산탄총을 쏘아 문을 부수는 수밖에 없었다. 조는 산탄총을 쏘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권총을 자신의 머리에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을지 모른다. 조는 많게는 200발을 쏘았다. 조가 카메라를 향해 증오에 찬 분노를 표출하는 화면을 TV로 보던 조의 소년 시절 목사는 도저히 못 믿겠다는 반응이었다. “이건 승희가 아니야”라고 그는 스스로 말했다. 우선 그는 조가 문장을 완전히 끝맺는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기도하라고 하면 1분 정도 지난 뒤에야 말하기 시작했고, 기도는 항상 짧았다”고 그는 돌이켰다. 그는 어린 시절 놀림당하던 조를 걱정했다. 그러나 조는 결코 반항적이지 않았다. “나는 승희가 자폐증이 약간 있어 어머니에게 병원에 데려가기를 권했다. 그러나 그녀는 나와 생각이 달랐다. 이젠 그녀에게 강력하게 병원에 데려가도록 촉구하지 않은 점을 후회한다”고 그는 말했다(의료 전문가들은 자폐증과 폭력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조의 누나인 선경씨는 지난주 “우리는 절망감과 무력감, 상실감을 느낀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나와 함께 자라고 내가 사랑한 아이다. 내가 동생을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 친구들은 조가 11세 때 수학과 농구를 잘 하고, 조용하긴 했지만 정상적 범주의 아동이었을 때를 기억했다. 다시 말해 아직 미래가 있는 아이로 말이다. 팔에 총탄을 맞은 데릭 오델은 4월 20일 버지니아 공대에서 열린 미 암협회의 한 모금행사에서 뛰지는 못해도 걸을 정도로 건강이 회복됐다. 그는 월요일이면 다시 수업 참석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학교 별명을 들먹이며 그는 “한번 ‘호키’는 영원한 호키 ”라고 말했다(호키는 버지니아 공대의 상징인 상상의 칠면조). 그러나 그는 TV 화면에 나타나는 조의 모습을 지켜보지 못한다. 한 살인자의 공허한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기 때문이다. With reporting from ARIAN CAMPO-FLORES, PAT WINGERT, DAREN BRISCOE, CATHERINE SKIPP, LYNN WADDELL and JINKEOL PARK (The Korea Daily) in Blacksburg; and EVE CONANT, HOLLY BAILEY and MARK HOSENBALL in Washington, 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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