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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 깨고 신의 생각 읽은 시대의 반항아

고정관념 깨고 신의 생각 읽은 시대의 반항아

이런 시절이 정말 있었을까? 기자들이 어느 유명 인사의 집을 둘러쌌다. 그 바람에 그 유명인사는 성가신 기자들을 피해 숨었다. 신문에는 온갖 소문과 추측이 난무한다. 그런데 그 유명 인사는 정치인이나 영화배우가 아니라 이론 물리학자다. 게다가 그 소문과 추측도 정치 스캔들이나 불륜 때문이 아니다. 전자기력과 중력이라는 자연의 두 물리력 이론을 합친 통일장 이론이 어떻게 진전했느냐는 소문과 추측이다. 그런 시절이 정말 있었다. 다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기에 가능했던 이야기다. 아인슈타인은 사람들이 이해는커녕 들어본 일도 없는 금시초문의 분야에서 이룩한 획기적 업적과 뛰어난 지적 능력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아인슈타인 이전이나 이후의 어느 과학자(이론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다른 분야의 학자도 마찬가지)도 그런 대접을 받지 못했다. “기적의 해”인 1905년 발표된 논문 네 편은 특수상대성 이론을 제창하고, 원자의 존재를 입증했으며, 양자역학을 탄탄한 실험적 기반에 올려놓고, 과학에서 가장 유명한 등식으로 자리잡는 E = mc2를 공개했다. 그중 하나만 있어도 위대한 물리학자의 반열에 이름을 올리기에 충분했다. 그가 미국에 건너오자 수천 관중이 나와 반겼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국민 여론에 굴복해 1952년 그 신생국가의 대통령직을 그에게 제의했다. 그러나 그가 새 조국으로 택한 미국의 지도자들은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FBI의 아인슈타인 파일은 1427쪽으로 늘어났다. 비밀취급 인가증이 나오지 않는 바람에 그는 맨해튼 프로젝트(핵개발 계획)의 진행 관련 정보에 깜깜했다. 자신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서신으로 탄생한 프로젝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쯤 되면 온갖 책이 나와 아인슈타인의 연구와 생활의 구석구석을 캔 사실도 놀랄 일이 아니다. 심지어 사생아(이 딸의 운명이 어찌 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의 행방을 좇기도 했다. 언론인 프레드 제롬은 걸작 ‘아인슈타인 파일(Einstein Files)’에서 그에게 용공 혐의를 덧씌우려던 매카시 시절의 사례들을 폭로했다(아인슈타인은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적어도 1932년 이후로 소련을 비판했고 절대로 그 나라를 방문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그럴 듯한 명분을 내건 사람들에게 쉽게 명의를 빌려줬으며 그중에는 일부 공산주의자의 위장 간판도 있었음이 드러났다). 한편 여러 학자·친척·동료와 심지어 아인슈타인 본인이 전기를 썼다. 1940년대 초 러시아 첩자와 잠깐 사랑을 나눈 일도 기록으로 남았다. 타임지가 2000년 아인슈타인을 “금세기의 인물”로 선정할 때 그 잡지 편집장이었으며 현재 애스펜 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는 월터 아이작슨은 그 많은 아인슈타인 관련 문서를 모두 읽었다. 그 결과 탄생한 ‘아인슈타인의 생애와 우주(Einstein: His Life and Universe)’는 단순한 대표 걸작선의 재포장이 아니다. 일반 독자가 읽을 만한, 영어로 된 가장 포괄적인 아인슈타인 전기다. 헤브류 대학(예루살렘) 아인슈타인 문서고에서 보관 중이며 지난해 7월 공개된 편지와 기타 문서의 내용도 반영했다(역사가들은 그 편지들을 묶어 총 30권으로 발간할 예정인데 현재까지 10권을 냈다). 새로 공개된 서류에 놀라운 소식은 없다. 다만 그가 이혼을 추진할 때 부인이 쓴 편지나 결국 그가 이혼하면서 버린 셈인 자식들의 분노와 불만이 담긴 편지들을 통해 이 위인의 더욱 인간적인 면모를 접하게 되고, 맏아들이 자신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을 때 느꼈던 고통이 드러났다. 아이작슨은 이것들을 아주 자연스러운 이야기로 엮었다. 아인슈타인을 가리켜 “인류에게 긴밀한 유대감을 느낀 외톨이, 늘 넘치는 존경을 받은 반항아…, 우주 창조자의 생각을 읽는 사람이 된 상상력 풍부하고 건방진 특허국 사무원”이라 불렀다. 아인슈타인은 전기의 소재로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아이작슨이 적확하게 표현했듯이 “마치 통일장의 일부”처럼 그의 업적은 성격의 자연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혁명적 기질이 있으며 사회규범을 거부한 아인슈타인은 따분하게 생각되는 교수의 수업은 듣지 않았으며, 실험을 토대로 하는 물리학의 표준 연구방식을 거부하고 사유(思惟)의 실험을 선호했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발상(광선 옆에 나란히 날아가면서 빛을 보면 어떻게 보이겠느냐는 의문)이 결국 특수상대성 이론을 낳았다. 이 이론은 공간과 시간이 절대적이고 고정된 실체라는 뉴턴식 고정관념을 뒤엎었다. 대신 사람이 관찰하는 사물은 그가 서 있는 공간과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을 수학 계산으로 증명했다. 결과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관찰자가 볼 때 고속으로 돌아가는 시계는 움직임이 느려지고 길이가 줄어든다. 아이작슨은 학자들이 최근에야 비로소 이해했고 대다수 교재에도 잘못 나온 사실을 소개한다. 아인슈타인이 미켈슨-몰리 실험을 계기로 특수상대성 이론을 발견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1887년의 그 실험은 모든 공간을 채우면서 절대 좌표계로 활동한다고 생각되던 에테르의 존재를 간파하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정밀한 원칙들과 직관적인 물리학 감각으로 시작한 추론의 결과로 그 발견에 도달했다.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는 그가 서재(또는 스위스 특허국 사무실 책상)에 앉아 수첩과 펜만 들고 순전히 생각만으로 우주의 신비를 파헤쳤다는 천재성을 확인하는 사례다. 앞뒤가 꽉 막힌 유럽 과학계 노인들의 입장에서 그런 발상은 물리학이라기보다 철학에 가까웠다. 그 정도면 양반이지만 머지않아 “유대인 과학”으로 전락한다. 아인슈타인이 대학 일자리를 찾지 못해 특허국 직원으로 취직한 사실을 놓고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아이작슨은 만일 아인슈타인이 대학에 자리를 얻었더라면 결코 아인슈타인이 되지 못했으리라고 주장했는데 꽤 일리 있는 말이다. 만일 그랬다면 당대의 정설에 따라야 하는 압력을 느끼면서 “안전한 출판물을 양산하고 몸을 사리느라 기존 개념에 도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19세기 말 유럽 과학계에서 “기존 개념”은 사방에서 도전을 받았다. 다른 물리학자들이 절대 운동, 절대 공간, 절대 시간의 개념에 의문을 표시했다. 또 다른 물리학자들, 특히 독일 이론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는 소위 양자 혁명의 첫 신호탄을 쐈다. 그러나 앞의 의문들을 엮어 특수상대성 이론을 만들고, 양자를 플랑크보다 더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이 아인슈타인이었다. 플랑크는 양자를 물리적 실재가 아니라 수학적 개념으로 생각했다. 다른 위대한 과학자들이 꽁무니 뺀 데서 아인슈타인이 도약한 이유가 뭘까? 따분한 강의 듣기를 거부했던 건방진 소년은 대담한 사람으로 자라 플랑크처럼 옛것에 안주하느니 공간과 시간에 관한 뉴턴식 원칙을 버릴 용의가 있는 반항아가 됐다. 아인슈타인은 “권위에 기반한 정설에 제약받지 않고…, 그 혼자서 수세기 동안 과학을 정의해 온 종래의 사고를 팽개칠 만큼 반항적이었다”고 아이작슨은 적었다. 독립심과 정설을 거부하는 혐오감이 그의 개인 생활과 정치 생활에 그대로 이어졌다. 첫 부인 밀레바와의 관계가 너무 악화돼 1914년에는 부인에게 계약서를 내밀고 서명을 요구할 정도였다. “매일 자기 방에 세 끼 식사를 가져다주고, 사회적 이유로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한 나와의 인간관계를 일체 끊고, 내가 요구하면 내게 말을 걸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정치에서는 국가주의를 혐오하고 제1차 세계대전 내내 확고한 반전주의자였으나 나치의 악령이 분명해지자 연합군을 지지했다. 아인슈타인은 역설적으로 인생 후반의 30년을 구질서의 수호자 역할을 하면서 양자론의 대담한 암묵적 의미를 거부했다. “상대성 이론이란 급진적 개념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엄격한 인과관계의 법칙을 따른다”고 아이작슨이 적었다. “그러나 양자론은 그 인과관계를 어지럽혔다.” 아인슈타인은 한 미립자가 다른 미립자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확실하거나 결정론적이지 않고, 확률론적이라는 생각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1929년 예언한 대목을 읽으면 애석한 생각이 든다. 양자 물리학자들은 “확률 추구의 한계에 도달해 후회하면서 시공간 개념으로 돌아가리라”고 말했다.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에서 사는 22년 동안 아인슈타인은 당시 알려진 자연의 두 가지 힘인 중력과 전자기력을 아우르는 통일장 이론을 내놓으려고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신문의 열광과는 달리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또 사회와 정치 운동에도 투신했다. 작게는 민권운동에서 “군사력을 독점하는”, 특히 원자탄을 독점하는 세계정부 구성에 몰두했다. 물리학과 정치에서 보여준 그 두 가지 목표의 추구에는 “그의 초월적 질서 본능이 반영됐다”고 아이작슨은 적었다. “과학에서 우주를 관장하는 통일이론을 추구했듯이 정치에서도 지구를 관장할 통일이론을 추구했다.” 1929년 어느 랍비가 아인슈타인에게 전보를 보냈다. “신을 믿는가? 회신비용 완불. 50자.” 아인슈타인은 즉시 신성을 거론하면서 신은 “교묘하지만 심술궂지는 않다”고 말하고, (양자역학의 확률론적 법칙에 반대하면서)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고 했다. 유대교도로 자란 그는 그 신앙을 버렸다가 다시 받아들였으며, 나중에 불가지론을 믿으면서 또다시 버렸다. 그 랍비에게는 “존재하는 만물의 정당한 질서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스피노자의 신을 믿으며, 인류의 운명과 행위에 개입하는 신은 믿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본문 분량 551쪽에 전거와 주석이 89쪽이나 되는 책을 두고 뭔가 아쉽다고 푸념하기는 좀 그렇다. 다만 아인슈타인이 양자론에 반대한 이유를 좀 더 깊이 캐고 들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한다. 특히 관찰자와는 무관하게 객관적인 물리적 실재가 존재한다는 생각과, 물리학이란 양자역학에서 주장하듯 자연을 보는 우리의 인식을 다루기보다는 자연에 실제로 존재하는 그 무엇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생각을 자세히 다뤘더라면 좋았겠다. 그 논쟁은 지금도 한창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스피노자(아인슈타인이 신봉한 개념의 신을 묘사한 17세기 네덜란드 윤리 철학자) 역시 사실주의를 옹호했다. 이 책은 또 좀 더 아이작슨답게 분석이 더 많이 들어갔으면 좋았겠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의 행동과 업적만 읽으며 페이지를 술술 넘기는 행진에 제동이 걸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인슈타인 이후로는 그토록 열정적으로 세상일에 신경 쓰면서 과학적 유산에 버금가는 인도적 유산을 남긴 과학자가 없다. 지금은 아인슈타인 식의 정치적·사회적 개입을 비방하고 심지어 배짱 좋게 감히 그렇게 하는 사람들(작고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 같은 사람)을 배척하기까지 하는 과학자가 너무 많다. 세상은 그래서 더 나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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