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이름 마피아
‘대부’ 실제 모델 조셉 보나노 후손들 영광과 치욕의 과거 잊고 평범한 생활 게이 탤리즈는 1971년 ‘아버지를 존경하라(Honor Thy Father)’라는 책을 냈다. 마피아 단원 빌 보나노와 6년을 함께 지내면서 보고 느낀 대로 쓴 작품이었다. 당시 빌 보나노는 아버지 조셉(조 바나나스)이 세운 뉴욕 마피아 패밀리 안에서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 경쟁세력과 경찰을 피해 숨어 지냈다. 탤리즈의 책은 오메르타(침묵의 계율)를 깨고, 현대 마피아 단원들 생활의 특성인 난폭한 면과 평범한 면의 묘한 조합을 포착한 최초의 논픽션이었다. 보나노는 폭력적이고, 매력적이며, 이기적이거나 신중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항상 인간적이었다. 다음해 영화 ‘대부’가 개봉됐다. 대하 오페라 같은 그 영화는 1974년 속편으로 이어지면서 모두 아홉 개의 아카데미상을 휩쓸었다. 그러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그린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었다. 탤리즈의 이야기가 사실이었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지금 시청자들은 소프라노 가문이라는 또 다른 가공의 마피아 패밀리 이야기에 푹 빠졌다. 얼마 전 여섯 번째 시즌을 끝낸 ‘소프라노스(The Sopranos)’는 ‘아버지를 존경하라’와 마찬가지로 범죄보다 인물에, 멋보다 근성에, 마피아 패밀리보다 평범한 가족의 모습에 주안점을 둔 홈드라마다. 마지막 방송분에서 이 드라마는 탤리즈 책의 핵심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 마피아의 피와 이름을 물려받고 태어난 보나노(또는 소프라노) 가문의 후손이 어떤 인생을 살아갈까 하는 의문이다. ‘아버지를 존경하라’가 성공하자 탤리즈는 그 수익금으로 교육신탁을 설립했다. 빌과 로잘리 보나노 부부의 자녀들이 원하면 어떤 학비라도 대주려는 취지였다. 탤리즈는 마피아 이야기의 대단원에 관심 있는 독자들을 위해 애리조나주 투손에 있는 보나노 자택으로 다시 돌아가 이제 40줄에 접어든 찰스, 조셉, 펠리파, 살바토레 4남매가 21세기 벽두에 마피아 집안의 후손이라는 멍에와 어떻게 씨름해 왔는지를 단독 취재했다. 1960년대 중반 뉴욕에서 처음으로 찰스 보나노를 만났다. 마피아 집안에서 살던 소심하고 겁 많은 소년이었다. 경호원들은 밤마다 그 집의 소파와 마루에 누워 코를 골며 잤다. 찰스는 아침에 학교에 가려다가 그들의 발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잦았다. 한번은 가구에 머리가 부딪쳐 깨지면서 카펫에 핏자국을 남기기도 했다. 당시는 마피아 조직에 계엄령이 내려진 시기였다. 450명으로 이뤄진 보나노 조직이 그 분쟁의 중심이었다. 찰스가 여섯 살 때인 1964년, 시칠리아 태생인 할아버지 조셉 보나노(1930년대의 금주 시대 이후 미국 최대 마피아 조직의 두목)는 어느 날 밤 맨해튼의 파크 애비뉴 사우스에서 느닷없이 무장괴한들에게 납치됐다. 다음날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그가 모처로 끌려가 최후를 맞이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로부터 1년도 더 지나 조셉 보나노가 살았다는 공식 증거가 아직 없었을 (그는 여전히 숨어 지냈다) 때였다. 찰스의 아버지 빌 보나노(당시 31세)가 경쟁 파벌 간의 화해를 중재하러 가던 길에 심야 기습을 받아 거의 죽을 뻔했다. 그 기습은 보나노 지도부가 오래전부터 우호적 영역으로 간주했던 브루클린 지역에서 발생했고 보도와 벽돌 건물에 맞고 튕긴 총알이 20발이나 됐다. 빌 보나노가 숨어 지내던 며칠 동안 부인 로잘리는 네 자녀와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롱아일랜드 이스트 메도의 교외 자택에서 창문에 블라인드를 내리고 지냈다. 경찰차가 정기적으로 거리를 순찰하고, 때로는 기자들이 보도에 진을 치고 서서 인근 학교로 등교하는 보나노 집안 어린이들의 사진을 찍고 질문을 던졌다. “할아버지 어디 계시니?” 그들의 질문은 여덟 살 생일이 지난 지 얼마 안 됐는데도 기꺼이 집안 대변인 역할을 자처한 맏아들 찰스에게 집중됐다. “몰라요.” 찰스의 대답이었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냐?” “몰라요.” 찰스는 아우들을 데리고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같은 대답만 되풀이했다. 사실 난 그때 아이들 아빠가 어디 있는지 알았다. 브루클린에서 암살 위기를 겪은 직후 빌은 맨해튼 내 아파트의 초인종을 눌렀기 때문이다. 난 1년 전인 1965년 처음 그를 만났다. 뉴욕 타임스 기자로 근무한 마지막 해에 그가 FBI 뉴욕 지부에 소환돼 아버지 조셉의 행방을 추궁 당했다는 기사를 썼기 때문이다. 빌은 그때 ‘모른다’로 일관했고 덕분에 법정 모독죄로 5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석방된 그를 따라다니며 종종 인터뷰 신청을 했지만 소득은 없었다. 그는 간혹 ‘비보도’를 전제로 만나주기로 동의하고, 뉴욕의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그가 예약할 필요없이 수시로 드나들던 레스토랑이었다. 1966년 겨울에는 그의 신뢰를 얻었을 뿐 아니라 아무 때고 롱아일랜드 자택에 찾아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의 자택을 방문하면서 그의 부인은 물론 네 자녀와도 점점 친해졌다. 초록색 눈동자의 입양아 찰스는 생후 18개월 때 해군 수병에게 버림 받은 샌디에이고의 술집 여급에게서 얻어다 길렀다. 그 밑으로 갈색 눈동자의 보나노 가문 핏줄들로는 병약한 다섯 살배기 조셉, 세 살배기 살바토레(호전적 성격이고 경호원들과 레슬링 하기를 좋아했다), 두 살배기 펠리파(버릇이 없었고 구멍을 뚫은 귀에는 작은 다이아몬드 귀고리가 달렸었다)가 있었다. 간혹 훗날 이 아이들의 인생이 어떻게 될까 궁금했다. 경호원 없는 집에서 살게 될까? 그렇게 되면 집안에서 물려받은 그 악명에서 누가 그들을 보호해줄까? 보나노 가문의 이 신세대들은 성을 바꿀까? 부모들의 배경을 부인할까? 마피아의 후손들이 가문이 아니라 더 큰 공동체의 법을 준수하면 사회는 어느 정도나 그들을 용인해줄까? 돈벌이 집단으로서 보나노 범죄 패밀리는 분명 쇠락의 길을 걸었다. 보나노 가문을 다룬 책[‘아버지를 존경하라(Honor Thy Father)’]을 낸 1971년 내 눈엔 그것이 확실히 보였다. 조셉 보나노가 세운 이 조직은 범죄 전문 저널리스트들이 “바나나 전쟁”이라고 부른 조직 싸움에서 이미 패배했다. 부하들과 함께 뉴욕에서 쫓겨난 빌 보나노는 처자식을 데리고 캘리포니아 북부의 새너제이로 이사갔다. 다음 몇 해를 도망자 신세로, 또는 본인 표현으로 “정부의 손님 신세로” 지냈다. 빌 보나노는 뉴욕에서 열린 연방 재판에서 훔친 신용카드를 마구 긁어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1971~74년 로스앤젤레스 인근의 터미널아일랜드에서 4년 형을 살았다. 여덟 시간 동안 차를 모는 장거리 여행임에도 불구하고 로잘리는 자녀를 데리고 꼬박꼬박 면회를 다녀왔다. 그때마다 로잘리는 평소 이탈리아제 고급 양복에 고급 구두만 신던 남편이 헐렁한 신발을 신고 카키색 죄수복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고 울적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갔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교도소 면회가 즐거운 재회의 시간이었다. 열다섯 살 때 운전면허를 따고 엄마를 대신해 운전대를 잡게 된 찰스가 특히 그 여행을 좋아했다. 현재 찰스 보나노(49)는 신장 185cm, 몸무게 108kg의 노총각으로 장거리 화물차를 운전하는 일에 만족하며 산다. 바퀴가 열여덟 개나 되는 대형 트럭에 골프채와 낚시도구도 넣고 다닌다. 주로 혼자서 길가 식당이나 드라이브인 패스트푸드점에 다니지만, 어쩌다가 한 번씩 좀 더 근사한 레스토랑에 여성을 데리고 저녁식사를 하러 갈 때 입을 만한 옷도 갖고 다닌다. 내가 처음 만났을 때 찰스는 공부를 별로 잘하지 못했다. 그러나 손재주가 뛰어나 세 동생이 망가뜨리는 물건을 모두 고쳤다. 툭하면 고장이 잘 나는 로잘리의 소형 중고차도 잘 고치고 관리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자동차 정비소에 취직했고 용접 일도 배웠다. 안타깝게도 20대 중반으로 한창 소득을 늘리고 싶어 한 1980년대에 자동차 부품을 훔쳐 거래하는 일당의 일원이라는 혐의를 받았다. 그래서 캘리포니아 북부에 있는 제임스타운 교도소에서 2년을 보냈다. 그때 아버지가 교도소로 면회를 왔다. 사실 해외로 도망가려던 찰스에게 차라리 자수하라고 설득한 사람이 아버지였다. “도망칠 수는 있겠지.” 빌 보나노는 아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넌 아직 젊은데 평생 누가 쫓지 않나 뒤돌아보면서 살아서야 되겠니.” 형기를 마친 찰스는 피닉스의 코스트코 자동차 정비소에 취직해 10년 동안 착실하게 산 다음 장거리운송 트럭 기사로 변신했다. 그러나 보나노라는 성이 뒤를 따라다녔다. 어느날 프레스노에서 브리티시 컬럼비아로 물품 수송을 하게 되자 배차 담당에게 여권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필요 없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는 대답을 들었다. 캐나다 국경 검문소에서 운전면허를 제시하자 세관원이 컴퓨터로 그의 신원을 조회한 뒤 물었다. “혹시 조셉 보나노나 빌 보나노와 어떤 친척 관계인가?”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라고 대답하자 세관원은 “그러면 당신은 입국 금지”라고 말했다. 찰스는 차를 돌려 배차 담당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다. 그러고는 교대 기사가 올 때까지 사흘 동안 차 안에서 지냈다. 그 기사가 찰스의 트럭을 몰고 캐나다까지 갔다 오는 동안 찰스는 대신 그가 타고 온 트럭으로 미국에서 짐을 배달했다. 보나노의 둘째아들 조셉은 어릴 때 천식을 심하게 앓았다. 새너제이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학교에 못 가는 날이 많았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 지내다 보니 독서와 크로스워드퍼즐에 취미를 붙였고, 결석을 자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공부를 힘들이지 않고 따라갔다. 로잘리는 그의 침실을 매일 진공청소기로 청소했다. 먼지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바닥의 카펫조차 치웠다. 그래도 조셉은 늘 기침을 하고 가래를 뱉었다. 어린이 호흡기 질환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어느 의사가 관심을 가지면서 조셉의 건강은 차츰 나아졌다. 일본계 미국인인 그 의사는 조셉보다 키가 별로 크지 않고 빼빼 마른 체격이었으나 환자만큼은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로잘리가 전화만 하면 쾌활한 표정으로 득달같이 달려왔다. 한밤중이거나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도 그랬다. 그는 늘 조셉의 침대머리에서 든든한 기둥이 되어줬다. 그 사람 덕분에 조셉은 커서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조셉은 1978년 가을 애리조나 대학 의대 예과에 들어갔다. 1987년 애리조나로 돌아와 세인트조셉 병원(피닉스)의 소아과 인턴으로 취직했다. 그곳에서 20년 전의 자기 모습을 상기하며 많은 어린이 환자를 치료했다. 환자들 병상에도 자주 찾아갔는데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복장으로 갔다. 셔츠는 물론 넥타이까지 동화책이나 디즈니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그려진 복장이었다. 1년 남짓 그 병원에서 근무한 어느 날 선배 의사가 찾아와 일을 잘한다고 칭찬한 다음 “실은 보나노라는 성 때문에 채용을 안 할 뻔했다”고 알려줬다. 의사 조셉 보나노는 대학생 시절 애리조나 캠퍼스에서 만난 여자와 결혼했으며 현재 세 아이를 뒀다. 1986년 5월 열린 결혼식과 피로연에는 아버지까지 포함해 보나노 가족이 몽땅 참석했다. 아버지는 당시 공모 혐의로 새크라멘토에서 재판을 받던 중이었지만 판사의 허락을 얻어 참석했다. 피로연이 한창일 때 조셉은 역시 이름이 같은 할아버지 조셉(81)의 목소리까지 들었다. 할아버지는 당시 법정 모독죄로 켄터키주 렉싱턴 연방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그는 용케도 교도소 전화를 이용해 결혼식장 연단에 설치된 스피커로 신랑·신부에게 뿌듯하게 말했다. “이렇게 좋은 날 너희들과 함께 못해서 유감이구나. 하지만 너희도 알다시피 난 여전히 지중해에서 휴가 중이란다.” 할아버지 보나노는 2002년 투손 자택에서 97세로 타계했다. 빌과 로잘리 부부의 셋째아들 살바토레(1963년생)는 거친 성격의 포악한 청년으로 자랐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마피아가 요즘처럼 변하지만 않았다면 마피아에 딱 어울리는 성격이었다. 지금 마피아는 사라져 가는 생활방식이다. 신화를 만들어내는 할리우드 감독이나 ‘소프라노스’ 같은 텔레비전 드라마 때문에 아직도 살아있는, 정신 나간 노인네들이나 집착하는 봉건적 삶이다. 살바토레와 의사 조셉 보나노는 ‘소프라노스’를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아도 즐겨 본다. 그러나 일간지 애리조나리퍼블릭이 2006년 3월 토니 소프라노를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비교하는 기사를 싣자 살바토레는 화가 났다. 토니 소프라노는 천한 밑바닥 인생이며 자기 할아버지처럼 세련된 판단력이나 품위가 없다고 살바토레는 주장했다. 애리조나 대학을 나왔으며, 형 조셉이 예과 재학 중 한동안 방을 함께 썼던 살바토레는 현재 피닉스에서 컴퓨터 시스템 회사를 차려 운영한다. 애리조나리퍼블릭에 2006년 기사가 실렸던 무렵에는 애리조나의 한 인디언 보호구역에 있는 카지노 내부의 보안 시스템 설치 공사를 따낸 회사에 들어가 프로젝트 간부로 일했다. 살바토레는 문제의 신문기사가 나온 날 사장이 자신을 부르더니 카지노에서 다른 업무로 보직을 바꿨다고 말했다. 신문을 읽은 어떤 사람이 보나노 집안 사람이 그 카지노의 일을 해준다는 소문이 나면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화가 난 살바토레는 연봉 9만 달러짜리 일자리를 그 자리에서 때려치웠다. 사장이 봉급을 올려주겠다고 달랬어도 두 번 다시 생각하지 않았다. 로잘리와 빌 부부의 네 자녀 가운데 막내딸인 펠리파(42)는 아마도 보나노라는 성 때문에 개인적 수모를 겪지 않은 유일한 가족일 것이다. 어릴 때는 온실의 화초처럼 자랐다. 엄마와 함께 미사에 꼬박꼬박 나가고, 나이가 들면서 가톨릭의 엄격한 교리를 준수했다. 그래서 낙태에 결사 반대한다. 네바다주 레이크 타호와 가까운 소읍에서 탁아소를 운영하던 스무 살 때 남편을 만나 자녀 열 명을 키웠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오는 10월 또 한 명을 낳을 예정이다. 펠리파가 새너제이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가장 좋아한 일은 아기 돌보기였다. 2년제 전문대학에서 아동 조기개발 과정을 마친 뒤 사립학교의 유치원 보모가 됐고 나중에 직접 탁아소를 차렸다. 요즘도 매일 미사에 참석하고 영성체를 한다. 이들 부부는 집에서 자녀들과 함께 기도하고, 가족 단위로 지역사회에 나가 자선행사 등에 참여한다. 결혼하면서 남편 성을 따라 이제 보나노라는 이름과는 관계 없지만 그래도 펠리파는 새너제이에서 보낸 어린 시절 어머니가 네 남매에게 자주 하던 경고를 결코 잊지 않는다. “너희는 보통 아이들과 다르단다. 착해지려는 노력을 두 배는 해야 돼. 다른 사람보다 훌륭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 집안의 이름 때문에 세상이 두 번 다시 잘할 기회를 주지는 않을 거야.” 얼마 전 투손의 부모 집에서 이들 가족이 재회했다. 거기서 펠리파와 오빠들을 만났다. 아버지는 이제 75세이고 어머니는 71세다. 올해 초에는 결혼 50주년을 기념했다. 로잘리는 투손에서 신부 면사포 만드는 사업을 계속하면서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유품을 이베이에서 팔기도 한다. 예컨대 지불 완료된, 그의 서명이 든 개인수표 따위다. 로잘리와 빌의 네 자녀는 총각인 찰스만 빼고, 모두 자기 자녀(총 17명)를 낳았을 뿐 아니라 손자도 몇 명 보았다. 또, 역시 찰스만 빼고, 보나노의 후손들 중에 “정부 손님”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족이 재회한 그날 우리는 함께 동네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다른 손님들 눈에는 여느 평범한 가족의 모임으로 보였음이 틀림없다. 부부들, 자녀들, 그리고 어른들 틈에 끼어 앉은 네 손자. 내가 기회를 보아 의사 조셉 보나노에게 한마디 했다. “이제 자네 이름의 핸디캡은 극복했겠지?” “극복했죠.” 그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도피는 안 했어요.” [필자는 뉴욕타임스 기자로 일했으며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낸 원로 작가로 뉴스위크를 위해 본 기사를 직접 취재·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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