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ENCE] 뉴런 생성이 중단되는 시기는?
[SCIENCE] 뉴런 생성이 중단되는 시기는?
A. 유아기 B. 42세 C. 53세
정답: 없음 과학자들은 순진하지 않다. 그래서 원한을 동정심으로, 증오를 자비심으로 바꿔버리는 요술봉을 발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심리학자인 필립 셰이버와 마리오 미쿨린서는 오랜 연구를 통해 그 요술봉을 발견했다는 희망을 북돋는 증거를 많이 발견했다. 그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정서적 안전감(安全感)의 정도에 따라 이타적이거나 이기적이 되며, 관대해지거나 공격적이 되고, 개방적이거나 방어적이 된다. 옛날 같았으면 그런 연구 결과는 그냥 하나의 주장에 불과하다며 무시됐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뿌리가 무엇이든 이런 인간의 특질들은 일단 성인이 되고 나면 컴퓨터의 마더보드처럼 두뇌 속에서 단단하게 구조화된다는 이론이 학계의 정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천년의 시작과 함께, 과학자들은 두뇌의 신경회로 구조가 심지어 성인이 된 뒤에도 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데이비스 캠퍼스) 교수인 셰이버와 이스라엘 바르-일란 대학 교수인 미쿨린서는 바로 그 점에 착안했다. 사용되지 않는, 혹은 휴지 상태에 있는 신경회로를 활성화시켜 동정심과 자비심의 토대인 안전감을 유발할 방법은 없을까? 그 답을 찾으려고 두 교수는 실험 자원자들에게 두뇌의 특정 신경회로를 활성화하는 명시적 혹은 암시적인 신호를 보냈다. 그 신경회로에는 부모·연인·하느님처럼 무조건적인 사랑과 보호를 제공한 사람의 기억이 담겨 있었다. 실험 목표는 피실험자의 안전감을 유발해 이타적인 행동, 혹은 적어도 비이기적인 행동을 보일 확률을 높이는 일이었다. 실험은 성공했다. 피실험자들은 헌혈과 봉사 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리고 다른 인종 집단에 덜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수단 다르푸르(내전으로 수백만 명의 난민이 발생한 곳)에서 구호활동에 참여하겠다고 나서지는 않았다. 그러나 10년 전까지만 해도 신경과학자가 성인의 두뇌 신경회로 구조를 변화시켜 동정심을 발휘하거나 이타주의적인 행동을 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가는 학계에서 매장됐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럴 염려가 없다. 현대의 과학자들은 과거의 교조주의적 학설을 내던져버렸다. 지난날 과학자들은 인간의 뇌가 3세 정도만 되면 형태와 기능이 어느 정도 고정된다고 간주했다. 물론 새로운 기억이 형성되고, 새로운 기술을 터득하는 일도 가능하며, (일부 사람은) 지혜를 얻기도 한다는 점은 인정됐다. 그렇다 해도 성인 두뇌의 기본적인 지도는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정신과 의사인 노먼 도이지는 그런 사고방식을 “신경학적 허무주의”라고 표현한다. 그는 최신 저서 ‘스스로 변화하는 두뇌(The Brain That Changes Itself)’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신경학적 허무주의가 우리의 문화 속에 확산됐다. 그런 태도는 인간 본성을 보는 종합적인 견해의 발달마저 방해했다. 두뇌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곳에서 파생되는 인간 본성 역시 필연적으로 고정불변인 듯 보였다.” 그러나 과거의 정설은 틀렸고, 신경학적 허무주의는 근거가 없다. 지난 몇 년 간 신경과학자들은 그 정설의 기둥을 하나씩 제거해 왔다. 그러면서 우리의 인간관에 심원한 의미를 부여했다. 캘리포니아대(샌프란시스코 캠퍼스·UCSF)의 신경과학자 마이클 메르제니치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발견들 덕분에 우리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우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지금의 모습이 됐는지를 판단하는 모든 기준이 바뀌었다. 우리는 이제 시간의 한 지점에서 우리를 규정하는 특질들이 두뇌의 경험으로부터 파생된다는 사실을 안다. 그 경험은 뇌의 물질적 구조와 기능을 형성하며, 우리가 살아있는 한 그런 작용을 계속한다.” 두뇌는 뉴런(신경 단위)의 할당 같은 지극히 기초적인 작용에도 평생 관여한다. 수십 년 동안 과학자들은 복잡한 두뇌에 새로운 뉴런들을 추가할 경우 문제만 발생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98년 스웨덴 살그렌스카 대학병원의 페터 에릭슨과 동료들은 뇌가 60~70세까지 “신경 발생(neurogenesis)”을 계속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새로 생긴 뉴런들은 해마에 나타난다. 두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해마는 생각과 인식작용을 관장하며, 그 내용을 항구적인 기억으로 전환시켜 보관한다. 두뇌 구조는 또 우리의 생활과 생각들의 흔적을 기록하면서 단련된다. 특정한 임무, 예컨대 바이올린 연주에 전념하는 뇌 신경 부위의 면적은 사용할수록 넓어진다. 그리고 뇌의 어떤 부위가 뇌졸중 등으로 손상되면, 다른 부위(거울에 비치는 이미지처럼 좌우대칭 지점의 부위인 경우가 많다)가 그 기능을 대신 떠맡는다. 이런 현상은 1861년부터 견지돼온 ‘국지주의(localizationism)’ 학설을 뒤엎었다. 당시 프랑스의 외과의사 폴 브로카는 인간의 언어능력이 대뇌의 좌측 전두엽에 있는 한 곳에서만 나온다고 국한시켰다. 뇌의 특정 부위는 특정 기능만 수행하며, 이런 메커니즘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런 믿음과는 달리, 시각피질 같은 기초적인 두뇌 부위에서도 기능 전환 현상이 나타난다. 어린 시절에 시력을 상실한 사람의 경우는 시각피질이 촉각, 청각, 언어 능력을 관장한다. 눈으로부터 아무런 시각 정보가 들어오지 않는데 ‘고도를 기다리며’ 식으로 무한정 기다리지만은 않는다는 얘기다. 시각피질은 잠자는 신경회로들을 재활성화시켜 다른 임무를 수행한다. 시각피질처럼 두뇌의 기초적인 부위가 유전적 숙명을 떨쳐버리기만 한다면, 다른 부위의 신경회로들이 그렇게 한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어떤 신경회로가 과잉활동으로 강박신경증을 야기한다면 심리요법으로 이를 완화시키는 일도 가능하다. 또 신경회로가 우울증의 원인이 되는 활동 양식을 보인다면, 환자가 슬픈 생각을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그 패턴을 바꿀 수 있다. 활동이 너무 둔해 특정 언어음(‘d’혹은 ‘p’같은 스타카토식 소리)을 제대로 감지하는 못하는 신경회로는 훈련을 통해 이를 교정하는 일도 가능하다. 이런 방법은 어린이들의 난독증 극복에 도움이 된다. 두뇌 기능상의 변화는 특히 어린 시절에 수월하게 일어난다. 그러나 변화를 위한 기회의 창문은 평생 닫히지 않는다. 이런 성공적인 실험 결과들로부터 신경과학자들은 귀중한 교훈을 이끌어냈다. 만일 그들이, 예컨대 난독증을 일으키는 두뇌의 잘못된 부위를 찾아내는 일이 가능하다면, 비정상적인 신경회로를 정상화시키는 일도 가능할지 모른다. 과도하게 활동하는 신경회로는 진정시키고, 둔한 신경회로는 활성화시키면 된다. 물론 하룻밤 사이에 이뤄질 일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변화하는 두뇌 능력의 극히 일부분만을 목격했을 뿐이라고 UCSF의 메르제니치 교수는 생각한다. 그의 말을 들어 보자. “한 인간을 규정하는 특질들은 나름대로 신경학적인 주소를 지녔지만, 융통성도 있다. 어떤 정신병 환자의 경우는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도 공감하지 못한다. 감정이입을 관장하는 두뇌 부위에서 아무런 활동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런 상태를 바꾸는 일이 가능할까? 정확한 방법은 모르지만,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믿는다. 17세 젊은이를 데려다가 엄격한 (군사, 혹은 체력) 기초훈련을 시켜 폭력적인 상황을 견뎌내도록 만드는 일은 가능하다. 그렇다면 무감각한 사람을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게 만드는 일도 가능하다고 믿는다. 우리를 규정하는 이런 특성들은 변화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런 일을 얼마나 쉽게,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할지는 더 많은 연구를 통해 밝혀질 것이다. 그런 연구는 지금도 계속된다. 그러나 인간의 성격과 기질을 형성하는 유전자들의 경우는 어떤가? 여기서도 훈련 내지 단련의 원리가 적용된다.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런 단련의 효과는 동물 실험에서 가장 쉽게 나타난다. 쥐의 성격은 양육 방식에 따라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특히 어미 쥐가 새끼들을 세심하게 돌봐주고 자주 핥아주면, 새끼들은 적응력이 발달하고 유순해지며 호기심이 많아진다. 그래서 신경증에 잘 걸리지 않는 어른 쥐로 성장한다. 그러나 어미가 무관심하면, 새끼들은 소심하고 과민하며 신경질적으로 자란다. 과거에는 어미의 양육 태도가 새끼들에게 오로지 사회적인 영향만을 미친다고 생각됐다. 그러나 최근에는 어미의 양육 방식이 새끼들의 DNA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어미의 무관심한 태도는 새끼들의 두뇌 속에 있는 감각 수용체들을 관장하는 유전자들을 침묵시킨다. 그 결과 새끼들은 감각 수용체가 거의 발달하지 못하며, 따라서 과민한 스트레스 반응을 보인다. 어미의 자상한 양육 태도는 그런 유전자가 계속 활동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새끼들의 두뇌는 많은 감각 수용체를 발달시키고 스트레스 반응도 억제된다. 무관심한 어미는 또 암컷 새끼의 두뇌 속에 있는 에스트로겐(여성 호르몬) 수용체를 관장하는 유전자의 활동을 둔화시킨다. 그런 암컷 쥐들은 성장해 더욱 무관심한 어미가 된다. 컬럼비아대의 프랜시스 샹파뉴 교수는 “이런 현상은 라마르크의 진화설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했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用不用說: 자주 사용하는 장기는 진화하고 덜 사용하는 장기는 퇴화한다는 학설)은 일종의 획득형질 유전론인데, 학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한 생애에서 얻은 경험은 다음 세대로 전해진다”고 샹파뉴는 말했다. 이제 과학자들은 인간에게서도 이런 현상의 첫 조짐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수줍음과 관련된 5-HTT라는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유아들은 대체로 조용하고 내성적이다. 그러나 7세가 되면 그들 중 다수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네이선 폭스가 이끄는 메릴랜드대 연구팀은 발견했다. 그때까지 ‘수줍음 유전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유아들은 특정한 경험 속에서 살아왔다. 스트레스로 가득한 어머니 밑에서 정서적·신체적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자라온 아이들이었다. 삶의 경험은 신경회로 같은 분자 메커니즘을 통해 DNA의 이중 나선구조에 영향을 미치며, 유전자의 잠재력을 억제하거나 발현시킨다. 그런데 실험실 쥐의 경우와 달리 인간에게서는 이런 메커니즘이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그러나 인간이 필연적으로 유전자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다는 첫 번째 신호는 확인된 셈이다. 최근 학계에서 신경학적 허무주의와 유전자 결정론의 신뢰도가 떨어져왔다는 사실을 아는 일반인은 거의 없다. 여전히 대다수는 자신의 운명이 (DNA에 의해 발현되는)두뇌 신경회로를 통해 DNA 속에 기록돼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 UCSF의 메르제니치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결정론이 그토록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사실이 곤혹스럽다. 인간은 자신을 명확히 정의(定義)되는 실체로 보고, 또 자신의 운명이 이미 결정됐다고 보는 데서 매력을 느끼는 듯하다.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인간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과 특질(예컨대 학업 능력, 혹은 새로운 일을 경험할 때의 개방성이나 대처 능력)이 고정됐다고 믿으면, 이를 개선하려는 외부의 노력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2006년 출간된 저서 ‘사고방식(Mindsets)’에서 인성과 여타 특질들을 변화시키는 신념의 힘을 탐구한 스탠퍼드대 심리학자 캐럴 데웩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두뇌의 변화 가능성을 알려주면 그들은 큰 자극을 받는다. 의욕과 학업 성적 같은 측면에서, 혹은 좌절 상태에서 회복하는 능력 면에서 급속한 향상이 이뤄진다.” 그러나 자신의 두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서는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혹시 일어난다 해도 믿는 사람들처럼 수월하게 개선되지는 않는다. 모든 일이 새로운 두뇌과학의 주장처럼 진행되리라는 얘기는 아니다. 인간 내면에는 어떤 변화도 거부하는 측면들도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 어쩌면 그런 측면이 존재한다는 점에 기뻐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도 오랜 세월 과학은 두뇌를 과소평가했다. 지금은 신경학적 허무주의와 전쟁을 벌이는 때다. 두뇌의 자기변형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구석이 존재한다고 선언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How to Think Like a Scientist 과학이란? 인간에겐 23쌍의 염색체가 있고, 그 염색체들에는 약 2만 개의 유전자가 있다. DNA는 모든 생체 세포에 들어있는 유전정보를 지닌 분자다. 물질은 원자들로 구성되고, 원자 속에는 양성자ㆍ중성자ㆍ전자가 있다…. 미국과학진흥협회(AAAS)의 최고경영자인 앨런 레슈너는 이런 지식들을 무턱대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AAAS는 과학전문지 사이언스를 발행하며 과학 지식을 보급하는 단체다. “사람들이 과학의 핵심 개념들을 최소한 대략적이나마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그런 지식은 많을수록 좋다”는 데는 레슈너도 동의한다. 그렇게만 돼도 사람들이 여론조사원들에게 말하듯이 “그 안에 유전자가 들어있다는 이유로” 유전자 변형 식품을 거부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이유인가? 살아있는 모든 세포에 유전자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얘기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지구가 1년에 한 번씩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문제가 아니다(실제로 미국 성인의 25%가 이를 모른다). “진짜 문제는 무엇이 과학이고, 무엇이 과학이 아닌지 사람들이 모른다는 사실이다”고 레슈너는 말했다. 과학은 자연계를 관찰하고 측정한다. 그런 자료를 바탕으로 과학은 물리적ㆍ생물학적 과정을 지배하는 경험법칙을 추론해낸다. 대규모 현상의 설명체계는 실험으로 입증되는 예측을 제시해야 하고, 또 논리적인 반박이 가능해야 한다. 다시 말해 또 다른 관찰을 통해 그 설명체계의 오류를 논증할 방법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과학자들은 그런 포괄적인 설명체계를 이론이라고 부른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흔히 나타나는 즉흥적인 추측과는 다르다는 뜻이다). 이런 논박 가능성이라는 요건은 초자연적인 설명을 배제한다. 예컨대 신앙과 관련된 주장은 논박하기가 어렵다. 다양한 생물종이 수백만 년에 걸쳐 진화해온 듯 보이게 하려고 하느님이 각종 화석들을 여러 지질층에 뿌려놓았다는 주장을 생각해 보자. 신이 정말로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결코 알 길이 없고, 또 그렇지 않다고 논박할 방법도 없다. 과학은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와 달리 겸허하다. 모든 발견은 잠정적이며, 다음 실험 때까지만 유효할 뿐이다(과학의 여러 분야에 쌓여온 증거의 무게는 너무 엄청나기 때문에 뒤엎기가 쉽지는 않을 테지만 말이다). 과학은 진정한 효과와 무작위적인 우연을 구별한다. 그래서 실험에서는 ‘대조’ 집단을 이용한다. 대조 집단이 복용한 신약의 효과가 그 약을 복용하지 않은 집단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하려는 목적에서다. 훌륭한 과학은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구별한다. 폭력적인 내용의 비디오 게임을 즐기는 아이들이 폭력을 더 많이 휘두른다고 치자. 그럴 경우 비디오 게임을 원인으로 지목하기 전에 확인해야 할 점이 있다. 원래 폭력적인 성향의 아이들이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보다 폭력 비디오에 더 심취하지는 않았나 하는 점이다. 만일 그랬다면 폭력적인 성향이 폭력 비디오 게임을 즐기는 원인이다. 그 역(逆)이 아니라는 얘기다. S.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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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없음 과학자들은 순진하지 않다. 그래서 원한을 동정심으로, 증오를 자비심으로 바꿔버리는 요술봉을 발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심리학자인 필립 셰이버와 마리오 미쿨린서는 오랜 연구를 통해 그 요술봉을 발견했다는 희망을 북돋는 증거를 많이 발견했다. 그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정서적 안전감(安全感)의 정도에 따라 이타적이거나 이기적이 되며, 관대해지거나 공격적이 되고, 개방적이거나 방어적이 된다. 옛날 같았으면 그런 연구 결과는 그냥 하나의 주장에 불과하다며 무시됐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뿌리가 무엇이든 이런 인간의 특질들은 일단 성인이 되고 나면 컴퓨터의 마더보드처럼 두뇌 속에서 단단하게 구조화된다는 이론이 학계의 정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천년의 시작과 함께, 과학자들은 두뇌의 신경회로 구조가 심지어 성인이 된 뒤에도 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데이비스 캠퍼스) 교수인 셰이버와 이스라엘 바르-일란 대학 교수인 미쿨린서는 바로 그 점에 착안했다. 사용되지 않는, 혹은 휴지 상태에 있는 신경회로를 활성화시켜 동정심과 자비심의 토대인 안전감을 유발할 방법은 없을까? 그 답을 찾으려고 두 교수는 실험 자원자들에게 두뇌의 특정 신경회로를 활성화하는 명시적 혹은 암시적인 신호를 보냈다. 그 신경회로에는 부모·연인·하느님처럼 무조건적인 사랑과 보호를 제공한 사람의 기억이 담겨 있었다. 실험 목표는 피실험자의 안전감을 유발해 이타적인 행동, 혹은 적어도 비이기적인 행동을 보일 확률을 높이는 일이었다. 실험은 성공했다. 피실험자들은 헌혈과 봉사 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리고 다른 인종 집단에 덜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수단 다르푸르(내전으로 수백만 명의 난민이 발생한 곳)에서 구호활동에 참여하겠다고 나서지는 않았다. 그러나 10년 전까지만 해도 신경과학자가 성인의 두뇌 신경회로 구조를 변화시켜 동정심을 발휘하거나 이타주의적인 행동을 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가는 학계에서 매장됐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럴 염려가 없다. 현대의 과학자들은 과거의 교조주의적 학설을 내던져버렸다. 지난날 과학자들은 인간의 뇌가 3세 정도만 되면 형태와 기능이 어느 정도 고정된다고 간주했다. 물론 새로운 기억이 형성되고, 새로운 기술을 터득하는 일도 가능하며, (일부 사람은) 지혜를 얻기도 한다는 점은 인정됐다. 그렇다 해도 성인 두뇌의 기본적인 지도는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정신과 의사인 노먼 도이지는 그런 사고방식을 “신경학적 허무주의”라고 표현한다. 그는 최신 저서 ‘스스로 변화하는 두뇌(The Brain That Changes Itself)’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신경학적 허무주의가 우리의 문화 속에 확산됐다. 그런 태도는 인간 본성을 보는 종합적인 견해의 발달마저 방해했다. 두뇌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곳에서 파생되는 인간 본성 역시 필연적으로 고정불변인 듯 보였다.” 그러나 과거의 정설은 틀렸고, 신경학적 허무주의는 근거가 없다. 지난 몇 년 간 신경과학자들은 그 정설의 기둥을 하나씩 제거해 왔다. 그러면서 우리의 인간관에 심원한 의미를 부여했다. 캘리포니아대(샌프란시스코 캠퍼스·UCSF)의 신경과학자 마이클 메르제니치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발견들 덕분에 우리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우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지금의 모습이 됐는지를 판단하는 모든 기준이 바뀌었다. 우리는 이제 시간의 한 지점에서 우리를 규정하는 특질들이 두뇌의 경험으로부터 파생된다는 사실을 안다. 그 경험은 뇌의 물질적 구조와 기능을 형성하며, 우리가 살아있는 한 그런 작용을 계속한다.” 두뇌는 뉴런(신경 단위)의 할당 같은 지극히 기초적인 작용에도 평생 관여한다. 수십 년 동안 과학자들은 복잡한 두뇌에 새로운 뉴런들을 추가할 경우 문제만 발생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98년 스웨덴 살그렌스카 대학병원의 페터 에릭슨과 동료들은 뇌가 60~70세까지 “신경 발생(neurogenesis)”을 계속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새로 생긴 뉴런들은 해마에 나타난다. 두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해마는 생각과 인식작용을 관장하며, 그 내용을 항구적인 기억으로 전환시켜 보관한다. 두뇌 구조는 또 우리의 생활과 생각들의 흔적을 기록하면서 단련된다. 특정한 임무, 예컨대 바이올린 연주에 전념하는 뇌 신경 부위의 면적은 사용할수록 넓어진다. 그리고 뇌의 어떤 부위가 뇌졸중 등으로 손상되면, 다른 부위(거울에 비치는 이미지처럼 좌우대칭 지점의 부위인 경우가 많다)가 그 기능을 대신 떠맡는다. 이런 현상은 1861년부터 견지돼온 ‘국지주의(localizationism)’ 학설을 뒤엎었다. 당시 프랑스의 외과의사 폴 브로카는 인간의 언어능력이 대뇌의 좌측 전두엽에 있는 한 곳에서만 나온다고 국한시켰다. 뇌의 특정 부위는 특정 기능만 수행하며, 이런 메커니즘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런 믿음과는 달리, 시각피질 같은 기초적인 두뇌 부위에서도 기능 전환 현상이 나타난다. 어린 시절에 시력을 상실한 사람의 경우는 시각피질이 촉각, 청각, 언어 능력을 관장한다. 눈으로부터 아무런 시각 정보가 들어오지 않는데 ‘고도를 기다리며’ 식으로 무한정 기다리지만은 않는다는 얘기다. 시각피질은 잠자는 신경회로들을 재활성화시켜 다른 임무를 수행한다. 시각피질처럼 두뇌의 기초적인 부위가 유전적 숙명을 떨쳐버리기만 한다면, 다른 부위의 신경회로들이 그렇게 한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어떤 신경회로가 과잉활동으로 강박신경증을 야기한다면 심리요법으로 이를 완화시키는 일도 가능하다. 또 신경회로가 우울증의 원인이 되는 활동 양식을 보인다면, 환자가 슬픈 생각을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그 패턴을 바꿀 수 있다. 활동이 너무 둔해 특정 언어음(‘d’혹은 ‘p’같은 스타카토식 소리)을 제대로 감지하는 못하는 신경회로는 훈련을 통해 이를 교정하는 일도 가능하다. 이런 방법은 어린이들의 난독증 극복에 도움이 된다. 두뇌 기능상의 변화는 특히 어린 시절에 수월하게 일어난다. 그러나 변화를 위한 기회의 창문은 평생 닫히지 않는다. 이런 성공적인 실험 결과들로부터 신경과학자들은 귀중한 교훈을 이끌어냈다. 만일 그들이, 예컨대 난독증을 일으키는 두뇌의 잘못된 부위를 찾아내는 일이 가능하다면, 비정상적인 신경회로를 정상화시키는 일도 가능할지 모른다. 과도하게 활동하는 신경회로는 진정시키고, 둔한 신경회로는 활성화시키면 된다. 물론 하룻밤 사이에 이뤄질 일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변화하는 두뇌 능력의 극히 일부분만을 목격했을 뿐이라고 UCSF의 메르제니치 교수는 생각한다. 그의 말을 들어 보자. “한 인간을 규정하는 특질들은 나름대로 신경학적인 주소를 지녔지만, 융통성도 있다. 어떤 정신병 환자의 경우는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도 공감하지 못한다. 감정이입을 관장하는 두뇌 부위에서 아무런 활동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런 상태를 바꾸는 일이 가능할까? 정확한 방법은 모르지만,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믿는다. 17세 젊은이를 데려다가 엄격한 (군사, 혹은 체력) 기초훈련을 시켜 폭력적인 상황을 견뎌내도록 만드는 일은 가능하다. 그렇다면 무감각한 사람을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게 만드는 일도 가능하다고 믿는다. 우리를 규정하는 이런 특성들은 변화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런 일을 얼마나 쉽게,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할지는 더 많은 연구를 통해 밝혀질 것이다. 그런 연구는 지금도 계속된다. 그러나 인간의 성격과 기질을 형성하는 유전자들의 경우는 어떤가? 여기서도 훈련 내지 단련의 원리가 적용된다.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런 단련의 효과는 동물 실험에서 가장 쉽게 나타난다. 쥐의 성격은 양육 방식에 따라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특히 어미 쥐가 새끼들을 세심하게 돌봐주고 자주 핥아주면, 새끼들은 적응력이 발달하고 유순해지며 호기심이 많아진다. 그래서 신경증에 잘 걸리지 않는 어른 쥐로 성장한다. 그러나 어미가 무관심하면, 새끼들은 소심하고 과민하며 신경질적으로 자란다. 과거에는 어미의 양육 태도가 새끼들에게 오로지 사회적인 영향만을 미친다고 생각됐다. 그러나 최근에는 어미의 양육 방식이 새끼들의 DNA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어미의 무관심한 태도는 새끼들의 두뇌 속에 있는 감각 수용체들을 관장하는 유전자들을 침묵시킨다. 그 결과 새끼들은 감각 수용체가 거의 발달하지 못하며, 따라서 과민한 스트레스 반응을 보인다. 어미의 자상한 양육 태도는 그런 유전자가 계속 활동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새끼들의 두뇌는 많은 감각 수용체를 발달시키고 스트레스 반응도 억제된다. 무관심한 어미는 또 암컷 새끼의 두뇌 속에 있는 에스트로겐(여성 호르몬) 수용체를 관장하는 유전자의 활동을 둔화시킨다. 그런 암컷 쥐들은 성장해 더욱 무관심한 어미가 된다. 컬럼비아대의 프랜시스 샹파뉴 교수는 “이런 현상은 라마르크의 진화설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했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用不用說: 자주 사용하는 장기는 진화하고 덜 사용하는 장기는 퇴화한다는 학설)은 일종의 획득형질 유전론인데, 학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한 생애에서 얻은 경험은 다음 세대로 전해진다”고 샹파뉴는 말했다. 이제 과학자들은 인간에게서도 이런 현상의 첫 조짐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수줍음과 관련된 5-HTT라는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유아들은 대체로 조용하고 내성적이다. 그러나 7세가 되면 그들 중 다수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네이선 폭스가 이끄는 메릴랜드대 연구팀은 발견했다. 그때까지 ‘수줍음 유전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유아들은 특정한 경험 속에서 살아왔다. 스트레스로 가득한 어머니 밑에서 정서적·신체적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자라온 아이들이었다. 삶의 경험은 신경회로 같은 분자 메커니즘을 통해 DNA의 이중 나선구조에 영향을 미치며, 유전자의 잠재력을 억제하거나 발현시킨다. 그런데 실험실 쥐의 경우와 달리 인간에게서는 이런 메커니즘이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그러나 인간이 필연적으로 유전자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다는 첫 번째 신호는 확인된 셈이다. 최근 학계에서 신경학적 허무주의와 유전자 결정론의 신뢰도가 떨어져왔다는 사실을 아는 일반인은 거의 없다. 여전히 대다수는 자신의 운명이 (DNA에 의해 발현되는)두뇌 신경회로를 통해 DNA 속에 기록돼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 UCSF의 메르제니치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결정론이 그토록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사실이 곤혹스럽다. 인간은 자신을 명확히 정의(定義)되는 실체로 보고, 또 자신의 운명이 이미 결정됐다고 보는 데서 매력을 느끼는 듯하다.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인간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과 특질(예컨대 학업 능력, 혹은 새로운 일을 경험할 때의 개방성이나 대처 능력)이 고정됐다고 믿으면, 이를 개선하려는 외부의 노력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2006년 출간된 저서 ‘사고방식(Mindsets)’에서 인성과 여타 특질들을 변화시키는 신념의 힘을 탐구한 스탠퍼드대 심리학자 캐럴 데웩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두뇌의 변화 가능성을 알려주면 그들은 큰 자극을 받는다. 의욕과 학업 성적 같은 측면에서, 혹은 좌절 상태에서 회복하는 능력 면에서 급속한 향상이 이뤄진다.” 그러나 자신의 두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서는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혹시 일어난다 해도 믿는 사람들처럼 수월하게 개선되지는 않는다. 모든 일이 새로운 두뇌과학의 주장처럼 진행되리라는 얘기는 아니다. 인간 내면에는 어떤 변화도 거부하는 측면들도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 어쩌면 그런 측면이 존재한다는 점에 기뻐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도 오랜 세월 과학은 두뇌를 과소평가했다. 지금은 신경학적 허무주의와 전쟁을 벌이는 때다. 두뇌의 자기변형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구석이 존재한다고 선언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우주 창조의 비밀 인간의 오만을 얘기해 보자. 과학에서 가장 도발적인 개념은 인간의 관찰ㆍ측정ㆍ지력으로 우주의 기원이 밝혀진다는 생각이다. 인간은 1960년대부터 바로 그런 일을 시도해 왔다. 당시 천문학자들은 우주에 충만한 방사선을 발견하고 바로 그것이 우주를 탄생시킨 ‘빅뱅’의 속삭임이라고 설명했다.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의 물리학자 로런스 크라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근원적인 의문 중 하나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이곳에 있게 됐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인류의 가장 위대한 지적 승리 중 하나는 우주에 시작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낸 점이다.” 빅뱅은 137억 년 전에 발생했다. 대폭발로 모든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공간과 시간이 창조됐다. 우주는 매우 뜨겁고 응축된, 오늘날 블랙홀에서 발견되는 ‘단일체(singularity)’로부터 팽창해 나갔다. 입자들은 팽창하는 시공(時空)의 바다 위에서 빠르게 퍼져나가면서 별들과 은하계로 합체됐다. 때론 별이 폭발하면서 우주 공간에 원자들을 흩뿌렸고, 그 원자들은 나중에 인간의 몸을 구성했다. 인간은 별들의 먼지다. 우주는 팽창을 계속하고, 은하계들은 부풀어오르는 거대한 풍선 위의 작은 점들처럼 보인다. S.B |
How to Think Like a Scientist 과학이란? 인간에겐 23쌍의 염색체가 있고, 그 염색체들에는 약 2만 개의 유전자가 있다. DNA는 모든 생체 세포에 들어있는 유전정보를 지닌 분자다. 물질은 원자들로 구성되고, 원자 속에는 양성자ㆍ중성자ㆍ전자가 있다…. 미국과학진흥협회(AAAS)의 최고경영자인 앨런 레슈너는 이런 지식들을 무턱대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AAAS는 과학전문지 사이언스를 발행하며 과학 지식을 보급하는 단체다. “사람들이 과학의 핵심 개념들을 최소한 대략적이나마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그런 지식은 많을수록 좋다”는 데는 레슈너도 동의한다. 그렇게만 돼도 사람들이 여론조사원들에게 말하듯이 “그 안에 유전자가 들어있다는 이유로” 유전자 변형 식품을 거부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이유인가? 살아있는 모든 세포에 유전자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얘기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지구가 1년에 한 번씩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문제가 아니다(실제로 미국 성인의 25%가 이를 모른다). “진짜 문제는 무엇이 과학이고, 무엇이 과학이 아닌지 사람들이 모른다는 사실이다”고 레슈너는 말했다. 과학은 자연계를 관찰하고 측정한다. 그런 자료를 바탕으로 과학은 물리적ㆍ생물학적 과정을 지배하는 경험법칙을 추론해낸다. 대규모 현상의 설명체계는 실험으로 입증되는 예측을 제시해야 하고, 또 논리적인 반박이 가능해야 한다. 다시 말해 또 다른 관찰을 통해 그 설명체계의 오류를 논증할 방법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과학자들은 그런 포괄적인 설명체계를 이론이라고 부른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흔히 나타나는 즉흥적인 추측과는 다르다는 뜻이다). 이런 논박 가능성이라는 요건은 초자연적인 설명을 배제한다. 예컨대 신앙과 관련된 주장은 논박하기가 어렵다. 다양한 생물종이 수백만 년에 걸쳐 진화해온 듯 보이게 하려고 하느님이 각종 화석들을 여러 지질층에 뿌려놓았다는 주장을 생각해 보자. 신이 정말로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결코 알 길이 없고, 또 그렇지 않다고 논박할 방법도 없다. 과학은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와 달리 겸허하다. 모든 발견은 잠정적이며, 다음 실험 때까지만 유효할 뿐이다(과학의 여러 분야에 쌓여온 증거의 무게는 너무 엄청나기 때문에 뒤엎기가 쉽지는 않을 테지만 말이다). 과학은 진정한 효과와 무작위적인 우연을 구별한다. 그래서 실험에서는 ‘대조’ 집단을 이용한다. 대조 집단이 복용한 신약의 효과가 그 약을 복용하지 않은 집단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하려는 목적에서다. 훌륭한 과학은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구별한다. 폭력적인 내용의 비디오 게임을 즐기는 아이들이 폭력을 더 많이 휘두른다고 치자. 그럴 경우 비디오 게임을 원인으로 지목하기 전에 확인해야 할 점이 있다. 원래 폭력적인 성향의 아이들이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보다 폭력 비디오에 더 심취하지는 않았나 하는 점이다. 만일 그랬다면 폭력적인 성향이 폭력 비디오 게임을 즐기는 원인이다. 그 역(逆)이 아니라는 얘기다. S.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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