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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비아대학교 / 워런 버핏 배출한 가치창조 메카

컬럼비아대학교 / 워런 버핏 배출한 가치창조 메카

▶ 김현종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컬럼비아대는 1754년 식민지 시대 뉴욕지방 유지들이 영국왕 조지2세의 인가를 받아 설립한 킹스칼리지(King’s College)로 출발했다. 독립전쟁 중이던 1776년에 휴교했다가 1784년에 다시 개교하면서 대학의 이름을 컬럼비아 칼리지(Columbia College)로 바꿨다. 1767년에 ‘College of Physicians and Surgeons’와 합병, 의과대학을 신설하면서 미국 내에서 최초로 M.D(의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1896년 근대적인 종합대학으로 개편하고, 1912년 정식 명칭을 ‘뉴욕시 컬럼비아 대학교(Columbia University in the City of New York)’로 바꿨다. 미국 대학 사상 다섯 번째로 설립된 유서 깊은 대학으로 학교에는 오랜 전통을 지닌 유럽풍의 건물과 현대식 건물이 공존하고 있다. 브로드웨이와 암스테르담 애비뉴 등 유서 깊은 도로들이 학교를 여러 부문으로 나누면서 지나고 있다. 맨해튼 112번가와 121번가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컬럼비아대 동쪽에는 모닝사이드 파크가 대학을 따라 남북으로 위치해 할렘과 경계를 이룬다. 북쪽에는 맨해튼 음악학교, 유니온 신학교, 유대인 신학교 등이 자리하고 있다. 교정을 나와 서쪽으로 5분 정도의 거리에는 허드슨강을 따라 리버사이드 파크가 자리 잡고 있다. 맨해튼의 모닝사이드에 있는 메인 캠퍼스에 기숙사를 포함한 37개 동의 건물이 있다. 컬럼비아대 학부 과정은 크게 ‘컬럼비아 칼리지’(CC), ‘스쿨 오브 엔지니어링’(SEAC), ‘스쿨 오브 제너럴 스터디스’로 나뉜다. 컬럼비아칼리지는 일반 대학의 인문학 과정과 다를 바 없지만 ‘스쿨 오브 제너럴 스터디스’는 편입생이나 고교 졸업 후 뒤늦게 입학하는 학생들을 위한 대학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


컬럼비아대학교

구분: 사립대
개교연도: 1754년
소재지: 미국 뉴욕시
교수 1인당 학생수: 8명
장서: 약 680만 권
학교 특징: ‘실사구시(實事求是)’ 학풍으로 유명하다. 미국 경제ㆍ금융 중심지인 뉴욕 맨해튼 북부지역에 위치해 있어 이론에 머물지 않고 실제적인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학문 분야가 강하다. 그래서 한국 동문들은 경제학, 경영학, 법학 등 실용 학문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
한국 동문: 한국 동문은 등록된 사람만 700명을 넘는다. 등록하지 않은 사람까지 합하면 대략 1000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 재계에서의 활동이 왕성하다. 대표적인 재계 인사로는 정재은 신세계 명예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 등이 있다. 정재은 신세계 명예회장은 1964년 전기공학 학부를 졸업하고 산업공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정통 컬럼비아맨이다.
컬럼비아대는 14개나 되는 대학원과 전문대학으로 그 명성이 높다. 2005년 현재 컬럼비아대학, 의과대학, 법과대학, 공학·응용과학대학, 간호대학, 사회사업대학, 치과·구강외과대학, 공중보건대학, 국제·행정대학, 일반대학, 예술대학등의 학부와 문리과대학원, 건축·계획·보존대학원, 언론대학원, 경영대학원 등의 대학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외에 교원양성대학(Teachers’ College)이 있다. 신문방송학 대학원은 미국 최고로 인정받고 있으며, 매년 신문, 극장, 음악, 문학 등의 분야에 수상되는 퓰리처상이 저널리즘 스쿨에서 관리되고 있다. 신문왕 조셉 퓰리처가 기증한 50만 달러의 기금으로 제정된 이 상은 높은 권위와 명성을 유지하며 1917년 이래 매년 5월에 시상되고 있다. 컬럼비아대 의과대학 센터(Columbia Presbyterian Medical Center)는 의과대학, 치과대학, 간호대학, 그리고 보건위생학대학 등 4개의 학교로 구성되는데 모두 뛰어난 학교로 알려져 있다. 특히 컬럼비아대는 러시아연구소, 라몬트 해양연구소, 그리고 텔리 커뮤니케이션 연구소, 지질학연구소 등으로 유명하다. 다른 대학보다 앞서 광산학부·교원대학·도서관학부·사회사업학부 등을 개설해 새로운 학문 분야를 개척했다. 현재 컬럼비아대는 25개의 부속도서관에 약 870만 권의 각종 도서와 590만 점이 넘는 마이크로필름 자료를 비롯해 66만 권의 희귀도서를 소장하고 있다. 부대시설로는 미술관, 플라네타리움,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국, 지질연구센터, 미립자물리연구센터 등이 있다. 60명에 가까운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으며, 지금까지 15명의 뉴욕시장과 12명의 뉴욕주지사를 배출했다.

▶ 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

컬럼비아대 한국 동문은 등록된 사람만 700명을 넘는다. 등록하지 않은 사람까지 합하면 대략 1000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컬럼비아대는 한국의 민주화 과정과도 관련이 깊다. 컬럼비아 유학생들은 유신 말기 한국의 정치, 경제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연구하고 토론하기 위해 ‘코리아포럼’이란 모임을 만들었다. 현 총동문회장 박진원 변호사(법무법인 세종)는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노동·민주화·한반도 비핵화 문제 등에 대해 폭넓게 토론했고, 내 젊은 시절 청춘과 열정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고 회고했다. 컬럼비아대는 실사구시(實事求是) 학풍으로 유명하다. 미국 경제·금융 중심지인 뉴욕 맨해튼 북부 지역에 위치해 있어 이론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적인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학문 분야가 강하다. 그래서 경제학, 경영학, 법학 등 실용 학문이 발달했다. 가치투자의 대명사인 워런 버핏도 이 학교 경영대학원 재학 시절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유승필, 곽태선, 최홍씨도 동문 앨런 긴스버그(작가), 리처드 로저스와 오스카 해머스타인(브로드웨이 뮤지컬 작가), 엠마누엘 액스(피아니스트), 아트 가펑글(가수 겸 배우), 브라이언 드 팔마(영화 감독), 제임스 캐그니(배우), 로린 힐 등이 컬럼비아 출신 유명인이다. 컬럼비아 한국 동문들은 국내 재계에서의 활동도 왕성하다. 대표적인 재계 인사로는 정재은 신세계 명예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 등이 있다. 정재은 신세계 명예회장은 64년 전기공학 학부를 졸업하고 산업공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정통 컬럼비아맨이다. 1969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삼성전자·삼성전관 사장, 삼성항공·삼성종합화학 부회장을 거친 삼성의 대표적 이공계 CEO다.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의 사위로, 1969년 이 회장의 막내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과 결혼했다. 1997년 신세계가 삼성에서 분리되자 조선호텔 회장을 맡으며 이명희 회장과 함께 신세계를 이끌어 왔다. 작년 자신의 지분을 정용진 부회장 등에게 넘기며 사실상 기업 운영을 2세에게 물려준 상태다.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 차남인 신동빈 부회장은 1980년에 컬럼비아대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호남석유화학 상무, 일본 (주)롯데 이사, (주)코리아세븐 전무, 그룹기획조정실 부사장을 거쳐 1997년 2월부터 그룹 부회장을 맡고 있다. 식품산업에서 롯데를 삼성과 같은 글로벌 브랜드로 키우겠다는 것이 신 부회장의 최근 경영 목표다. 아시아권 시장을 기반으로 식품업계에서 롯데라는 브랜드를 글로벌 톱 브랜드로 키우겠다는 포부다. 유승필 유유산업 회장과 동생인 유승식 유유칼믹 사장은 컬럼비아대 출신. 형인 유 회장은 경영대학원에서 재정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1979년 국제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유승식 사장은 1985년 국제학 석사학위를 땄다. 곽태선 세이에셋코리아자산운용 대표(80년 역사학 학사), 고필재 H&Q AP코리아 사장(82년 경제학 학사), 신종원 베인&컴퍼니 대표(83년 경제학 학사), 최홍 랜드마크투신운용 사장(92년 경영학 박사), 김성한 더페이스샵 부사장(95년 경영학 석사) 등도 컬럼비아대 동문 맥을 잇는 재계리더다. 컬럼비아대는 아이비리그 중 국적과 인종의 벽이 가장 낮은 곳으로 통한다. 아시아인이 전체 학생 중 20%가 넘는 수준이며 흑인과 히스패닉을 합치면 40%를 넘는다. 그러나 외국인을 차별하지 않는 만큼 봐주는 것도 없다. 1986년부터 약 2년 간 컬럼비아 로스쿨에서 수학했던 구충서 변호사는 당시 치열했던 동문들의 학구열과 각박한 경쟁을 이렇게 털어놨다. “나는 졸업식에서 로스쿨 가운을 입고 무척 감동했다. 외국인이라 해서 무엇 하나 봐주는 것이 없던 컬럼비아 로스쿨, 노트도 빌려주기를 거절하던 컬럼비아 로스쿨 학생들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컬럼비아는 법률 리포트를 보내주고 있다. 가끔 돈 내라는 편지와 함께….” 컬럼비아 로스쿨 한국법연구소장을 지낸 노정호 연세대 법대 교수는 “미국 로스쿨에는 ‘세계화’라는 구호가 없다. 미국 로스쿨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세계 경제의 요구를 유연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국 로스쿨의 교육 내용 자체가 세계화의 한 현상인 탓이다. 노 교수는 “정보기술(IT)과 법, 경제와 법 같은 학제 간 강의들은 미국의 로스쿨에서는 10여 년 전부터 개설된 강의”라고 덧붙였다. IT 산업의 급격한 팽창과 관련한 법률 수요, 경영과 경제 영역으로 지평을 넓혀 가는 법률의 최신 트렌드를 미국의 로스쿨은 이미 오래전부터 교육 과정에 반영했다는 얘기다. 미국 로스쿨들은 지향의 다양성도 강점이다. 컬럼비아대는 국제공법과 회사법, 뉴욕대는 세법, 조지타운대는 국제통상법이 강하다.

박진원 변호사 등 법조계 막강 한국 법조계에도 컬럼비아대 출신들의 활약이 대단하다. 컬럼비아대 한국동창회장을 맡고 있는 박진원 변호사는 1980년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고 약 10년 동안 미국 법조계에서 활동한 미국 변호사다. 이종찬 변호사(87년 객원교수), 권순일 대전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92년 법학석사), 김상준 대전고등법원 부장판사(94년 법학석사), 서동원 김앤장 상임고문(89년 법학석사) 등도 컬럼비아대 동문이다. 정계 인사 가운데도 컬럼비아대 출신이 많다. 현홍주 전 주미대사(69년 법학석사), 홍순영 전 외교통상부 장관, 김화중 전 보건복지부 장관(80년 간호학석사), 김현종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85년 법학박사) 등이 컬럼비아대를 나왔다. 또 염홍철 대전시장,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김영춘 열린우리당 의원 등이 프로페셔널 펠로(방문연구원) 자격으로 컬럼비아대에서 연구했다. 대학 강단에서 후학을 지도하고 있는 컬럼비아 동문들도 막강하다. 300~4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김종량 한양대 총장은 83년 컬럼비아대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컬럼비아 사범대의 막강한 실력과 파워는 미국 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는 것으로 잘 알려졌다. 그는 1993년부터 한양대 총장을 맡아 공대 중심이었던 한양대가 인문·사회 분야까지 국내 유수 사학으로 자리잡는 데 주도적인 몫을 했다. 이상범 서울시립대 총장도 컬럼비아대 동문이다. 1985년에 경영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 총장은 미국 뉴욕시립대 조교수,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를 거쳐 2003 년부터 이 학교 총장을 맡고 있다. 이필상 고려대 교수(82년 경영학박사), 홍원탁 서울대 교수(66년 경제학박사), 이성휘 서울대 교수, 김신행 서울대 교수(70년 경제학박사), 곽수일 서울대 명예교수(65년 경영학석사), 이재성 서울대 명예교수(68년 공학박사), 유세희 한양대 명예교수(74년 국제학박사), 안병준 연세대 명예교수(72년 정치학박사), 김인준 연세대 교수(85년 경영학박사) 등도 후진 양성을 통해 국가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곽수일 서울대 명예교수는 1967년 서울대 강단에 선 후 작년 8월 정년퇴임 때까지 꼬박 40년을 강단에 섰다. 그 동안 거쳐간 제자가 1만 명이 넘고 최고경영자에 오른 제자도 수천 명에 달한다. 그는 ‘CEO의 영원한 스승’으로 불리고 있다. 김인준 연세대 교수는 컬럼비아 학부에서는 응용화학을,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김 교수는 “작고한 부친이 뉴욕 방문 후 돌아가는 길에 배웅하지 못한 일이 아직도 죄송하다”고 말했다. 떠나시던 날 마침 수업이 있었다는 것이다. 치열하게 공부했던 컬럼비아인들의 초상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유세희 교수는 컬럼비아대에서 국제정치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정의감이 강한 천재이자 신사 교수로 통한다. 대학 3학년 때 서울대 내 4·19혁명을 주도했고, 당시 이수정(전 문화부 장관), 황선필씨(전 MBC 사장)와 함께 혁명궐기문과 격문을 작성했다. 이 궐기문과 격문은 훗날 국문학자들이 손꼽을 만큼 명문(名文)으로 유명하다.


잊을 수 없는 나의 모교


“사회적으론 진보, 경제 이슈엔 보수 색깔” 이성량 동국대 경제과 교수

▶ 약력 1955년생, 컬럼비아대 경제학박사, 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컬럼비아대는 아이비리그 학교들 중 국제적 색채가 가장 진한곳이고 경제학을 공부한 필자에게는 이론을 바탕으로 실무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뉴욕시, 그것도 맨해튼에 위치한 관계로 학교 전체에 다민족, 다국가적풍토가 자연스럽게 배어 있다. 필자가 공부했을 당시 경제학과에는 아프리카, 남미, 유럽, 중동, 아시아 등 세계 곳곳에서 온 유학생들이 많았다. 또한 뉴욕은 미국에서 가장 문화적인 다양성이 풍부한 곳이므로 학생들이 학교 공부 외에도 전공과 관련된 실무적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연방준비은행을 방문해 지하 금고에 보관되어 있는 금괴를 실제로 보기도 하고, 세계 금융의 중심인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직접 거래 현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를 공부하는 필자에게는 정말 흥분되는 일이었다. 미술이나 건축 혹은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구겐하임 현대미술관, 그리고 소호의 수많은 화랑이 얼마나 큰 영감의 보고인지, 뉴욕 특히 맨해튼에 살아본 사람이 아니면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컬럼비아대는 내게 크나큰 축복이었다. 컬럼비아 학생들은 학교 부근뿐만 아니라 뉴욕시의 모든 식당, 카페, 극장, 서점 등에서 싼값에 다양한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뉴욕의 특성 때문에 컬럼비아대 생활이 미국 어느 대학보다 낭만적이고 추억이 많았던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컬럼비아대의 분위기는 사회적 이슈에는 진보적이었으며, 경제적 이슈에는 시장을 가장 중요시하는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다. 이 대학은 1960년대에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이 가장 격렬했던 곳이다. 그러나 학문의 기풍은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경제학의 예를 보면, 통화이론의 대가인 밀턴 프리드먼을 배출했고, 경제학과의 기풍은 일반균형이론이 지배적이었다. 일반 용어를 쓰자면 경제에 대한 풍선효과 이론이다. 시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정부의 정책이 경제에 제재를 가하면 어떤 형태로든 부작용이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공부하던 80년대 초 중반 한국 유학생 사이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생각이 강했다. 오늘날처럼 유학생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며 또 당시 한국은 신군부 집권 이후 언론 통제와 폭압정치로 어렵던 시절이었다. 유학생들에 대한 정보기관의 감시도 심심찮게 드러났었고 또 한편으론 한국의 정계인사, 관료, 관변학자들이 뉴욕에 왔다가 컬럼비아대의 유학생들을 상대로 군사독재를 옹호하던 사례도 종종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한국 컬럼비아대 동문회 현 회장인 박진원 변호사를 비롯한 유학생들은 미국 내 한반도 전문가들과 한국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독립성, 공정성, 교육성을 유지하며 한국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알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1983년 코리아포럼을 발족했다. 코리아포럼은 당시 유학생들이 한국사회에서 혜택 받은 집단이란 자각 아래 한국사회에 대한 책임감 및 고국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되었으며, 그러한 학생들의 열정과 수고로 코리아포럼은 오늘날 미국 내 한국학 및 한국 관련 실무분야에서 성공적인 포럼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필자가 공부했을 당시 경제학과에서는 1996년에 노벨상을 받은 윌리엄 빅거리 교수, 1999년에 노벨상을 받은 로버트 먼델 교수, 2006년에 노벨상을 받은 에드먼드 펠프스 교수의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빅거리 교수는 한국 유학생들이 진행하는 코리아포럼의 공개 세미나에 종종 참석했다. 한 손에는 구겨진 뉴욕 타임스, 다른 손에는 학생회에서 준비한 과자나 음료를 들고, 연사의 강연 중에는 마치 조는 듯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가 끝날 때만 되면 질문이 있다고 손을 들곤 하던 빅거리 교수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먼델 교수는 그 뛰어난 유머감각만큼 학생들에게는 항상소탈하고 재미있는 교수님이었다. 펠프스 교수는 노벨상을 받을 만큼 거시경제의 대가였으나, 그분의 강의는 내가 들은 강의 중 최악이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펠프스 교수에 대한 농담이 있었다. 펠프스 교수를 보면 사람들은 세 가지 점에 놀란다고 한다. 첫째, 교수 같지 않고 오히려 월가의 은행가나 회사의 CEO처럼 보인다(항상 양복을 멋있게 입는다). 둘째, 펠프스 교수의 논문을 읽으면 (상당히 이해하기 어렵게 글을 씀) 그의 천재성을 볼 수 있다. 셋째, 펠프스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 과연 그가 논문을 썼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펠프스 교수의 부인이 논문을 썼다고 농담을 하곤 했다. 컬럼비아! 그곳은 나의 인생에서 너무나도 귀한 곳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교수님들로부터 배웠고,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경험함으로써,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암울했던 80년대 미국에 한국을 바로 알리고자 하는 학생들의 열정과 노력을 불태웠던 코리아포럼, 친구들과 함께했던 소중한 추억들…. 나의 인생에서 정말로 후회 없는 특별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가슴 깊숙이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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