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아 누드는 내 작품”
“신정아 누드는 내 작품”
지난해 여름 신정아 사건이 터지면서 관심의 표적으로 떠올랐던 중진 사진작가 황규태(70)씨의 독점 인터뷰를 싣는다. 현재 그는 미국 연방자금횡령죄로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의 연방교도소에서 1년3개월째 수감생활 중이다. 황씨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미주 동아일보, 벤처융자회사 ‘LA 캐피탈’ 등을 운영했다. 수감생활은 1985년 기업이 부도난 뒤 처리과정에서 벌금(26만 달러) 납부 없이 한국으로 귀국(1992년)했기 때문이다. 2006년 11월부터 복역해 온 그는 1년4개월 수감생활이 끝나는 3월 24일 출소하며, 이후 서울에서 작가활동을 재개하겠다고 밝혀왔다. 인터뷰에서 황씨는 현지 수감생활의 일상은 물론 신정아 사건의 누드사진 파문과 유출과정,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작품 구입 경위 등을 밝혔다. 인터뷰는 황씨의 지인(知人) 조우석(전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씨가 지난해 9월 이후 그와 주고받은 편지·연하장 왕래 6차례, 국제통화 20여 회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황씨와의 일문일답에 이어 강운구·주명덕씨와 함께 한국 사진의 중진 트리오이자 ‘포스트모던 사진작가’인 그의 작품세계도 조감한다. <편집자주>편집자주>
사진작가 황규태씨가 필자에게 첫 편지를 보내온 시점은 지난해 9월 말께였다. 수인번호가 선명한 연방교도소 규격 봉투에 담긴 편지였다. 신정아 사건이 막 정점을 지나던 무렵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 조금도 억울하다거나 분노하고 있지 않습니다”는 심경 고백과 함께 “서울의 친구들이 신정아의 모든 과실을 묻어주고 위로해 주길 바랍니다”는 부탁까지 있었다. 자신 역시 신씨의 가장 가까운 지인이라는 점을 조금도 부인하려 들지 않았다. 필자는 즉각 답신을 보냈다. 크리스마스 전후에는 서울의 친구들에게 전해 달라며 연하장 4장도 보내왔다. 교도소 옆방 동료가 손으로 그린 ‘파스텔화 사제(私製) 연하장’이었다. 그 직후 통화도 이뤄졌다. 황씨가 서울로 걸어온 국제전화였다. 미국 교도소는 재소자에게 한 차례에 15분씩 외부 전화를 허용하는데, 한 시간 간격으로 하루 세 차례 통화하기도 했다. 그의 말대로 “서울의 지인 중 당신이 유일하게 내 소식을 전하는 대상”이었다. 이어진 편지왕래와 통화에서 황씨는 신정아 누드는 합성된 사진이 아니고 신씨의 동의 아래 서울 성북동 작업실에서 자기가 직접 찍었다고 밝혔다. 황씨가 밝힌 누드사진의 유출 경위는 이랬다. 아마추어 사진작가이자 황씨의 제자라고 자칭하는 A여인이 5년 전 무단으로 작업실에서 그 사진을 훔쳐갔다. 아마도 그를 통해 문화일보가 사진을 입수했을 개연성이 높다는 얘기였다. 황씨는 작가의 동의 없이 누드사진을 공개한 언론사에 유감을 표했다. 그러나 문화일보에 대한 명예훼손 고소 등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 그는 현재 공판이 진행 중인 학위 위조와 관련해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말했으며,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성곡미술관에서 전시했던 사진작품 ‘큰일 났다, 봄이 왔다’를 전시장에서 보고 구입의사를 밝혀와 매매가 성사됐다고 밝혔다. 변 전 실장이 너무 좋아하니까 실거래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해 달라고 신정아씨가 요구했고, 그에 기꺼이 응했다는 말이다. 다음은 일문일답이다.
신정아 사건이 터졌던 지난해 여름 황규태라는 이름이 언론에 빈번하게 등장했습니다. 그런 소식은 알고 있는지요. 물론입니다. 교도소에서 중앙일보 미주판과 한국일보를 구독하니까요. 절반은 맞지만, 절반은 사실과 다른 이야기들로 홍수를 이루는 지면을 보면서 심한 무력감과 허탈감을 느꼈습니다. 설사 사실관계는 대충 맞는다 하더라도 앞뒤 맥락이 전혀 다른 데다 색안경을 끼고 보니까 엄청난 음모나, 스캔들로 비치는 게 매우 안타까웠지요.
변양균 전 실장 이름이 주로 등장했지만, 황 선생님은 신씨의 가장 가까운 지인으로 소개됐습니다. 특히 작품 ‘큰일 났다, 봄이 왔다’가 변 전 실장이 근무했던 예산기획처 장관 집무실에 걸려 있어 셋 사이의 커넥션을 추측하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저는 신정아씨의 재능을 높이 산 작가입니다. 대중적 이해가 부족한 현대사진을 이해해 주는 신정아의 안목을 높이 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가장 가까운 지인임을 부인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가 미국에서 돌아와 금호미술관에 근무할 때부터 알았으니, 10년이 넘는 셈입니다. 신정아가 금호미술관을 사직한 뒤 성곡미술관에 취직시키려고 노력도 했습니다.
누드 사진이 궁금합니다. 합성인가요 아닌가요.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어찌됐든 제가 찍은 게 분명합니다. 5∼6년 전 서울 성북동 제 작업실에서 찍었습니다. 합성이냐, 아니냐는 논란이 있자 누드 사진의 배경이 내 작업실과 비슷하다는 견해가 일부 등장하던데, 그게 옳습니다. 사실 ‘언제라도 누드를 찍고 싶으면 내가 찍어줄게’라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사석에서 신정아에게 말하곤 했습니다. 작가로서 자연스러운 제안 아니던가요? 상대방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요. 그러다가 어느 날 신정아가 선뜻 응해온 겁니다.
실은 그 말씀을 제가 옆에서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 선생님을 모시고 셋이 자주 만났으니까요. 누가 들어도 자연스런 대화로 받아들였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누드 사진 자체가 잘못됐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외설스럽다거나 추하게 본다면 그 사람의 시선이 문제겠지요. 섹스 스캔들의 물증이라고 다짜고짜 규정하거나, 관음증(觀淫症)시선으로 보는 게 되레 이상하지 않습니까? 물론 큰 사회적 사건과 얽혀 있어서 사람들이 의아한 시선으로 볼 가능성은 아주 없지 않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작업실 사진이 어떻게 유출됐는지 궁금합니다. 그 과정이 좀 문제 있습니다. A여인에게 유출 책임이 있습니다. 그 여인이 제가 없는 내 작업실에 몰래 들어와서 사진을 뒤져 챙겨뒀던 것입니다.
그 여인은 누구인지요. 벌써 5∼6년 전 일이지요. 예전에 저는 서울대와 상명여대 등에 출강해 왔으니 제자들이 꽤 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사진을 가르쳐 달라고 접근한 중년 여성이 A입니다. 50대인 그에게 셔터 누르기, 앵글잡기를 포함해 기초에서 고급과정까지 두루 가르쳤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스승과 제자 사이네요? 문제는 그 여성의 정신상태가 사회통념상 정상은 아니라는 판단 때문에 어느 날 분명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그랬더니 거의 스토커로 변신해 저를 시종 괴롭혔지요. 4년 전이던가요? 당시 문화일보갤러리에서 개인전을 마련해준 다음 앞으로는 만나지 않겠다는 뜻을 전달했습니다.(황씨는 문제의 A여인의 자녀들이 이미 장성해 대기업에 취직한 정상적인 가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이름과 성을 밝히기는 거부했다.)
미술계 소문으로는 그 여성이 선생님의 개인전 경비도 대줬다는 말도 들리던데요. 선생님 작업실을 찾았던 이유도 빚 독촉 때문이라는 말이죠. 개인전 경비는 아무런 조건 없는 돈이라고 해서 받긴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들으니까 자기가 돈을 꿔줬는데 갚지 않는다는 헛소문이 들려오기에 아무 소리 못하게 되돌려줬고요. 이후 그 여성이 훔친 누드사진을 가지고 신정아를 따로 만나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공갈협박이었죠. 신정아와 저는 아무런 남녀 관계도 아닌데도 그 여성이 오판했죠. 한번은 주차장에 있는 신정아의 BMW 자동차를 쇠꼬챙이로 마구 긁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거의 100군데나…. 분명 정상은 아니지요.
문화일보에 게재된 신정아 누드사진도 그 여인의 소행일까요? 그건 제가 그저 가늠할 뿐입니다. 전시회 하면서 그 신문사 미술담당 기자를 알게 되고, 사건이 터지자 누드 사진이 무슨 물증 제보랍시고 덜컥 건넨 것으로 보입니다. 신정아 사건이 한창이던 지난 여름 그 누드가 섹스 스캔들인양 대중을 오도한 결과를 빚은 셈이지요. 문화일보는 취재원 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워 그 여성을 비호하려들었고….
신씨는 합성사진이라고 발뺌했는데요. 신정아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이해 못할 이유도 없지요. 당시 상황이 어떠했습니까. 변 전 실장과의 스캔들 물증인 양 ‘이것 보라’며 들이대는 기자들에게 일단 부인하고 싶은 심리가 아니었을까요? 소동이 가라앉은 지금 저는 밝힐 것은 밝히고, 사람들에게 정상적인 이해를 구하고 싶은 생각입니다.
문화일보에 명예훼손 소송도 준비하시나요? 아닙니다. 저도 신문기자 출신이고, 한때 미주 동아일보사를 운영했던 발행인이었습니다. 신정아에게 상처를 주고, 저에게 ‘포르노 사진가’ 이미지를 심어줬던 신문이 유감이지만, 소송은 하지 않겠습니다. 단 문화일보가 조철봉이 주인공인 연재소설 ‘강안남자’로 유명한 신문인데, 따라서 제 사진을 무단 게재한 사실은 ‘강안남자일보’다운 결정일 뿐, 신문의 정도(正道)는 아닌 게 분명하지요. 그점 분명히 해둡니다. (황씨는 미국에 건너가기 전인 62∼65년 경향신문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신정아의 허위학력 혐의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제가 쉽게 말할 수가 있나요? 신정아가 본래 언론을 좋아했습니다. 큐레이터니까 홍보를 위해서라도 언론이 필요했겠지만, 그러던 신정아 이름이 엉뚱한 방식으로 신문을 수개월 동안 도배하다시피 했으니 어쨌거나 소원을 푼 게 아닌가요?(웃음)
말씀은 그렇게 하지만 괴로우시죠? 20여 년 전의 기업활동 때문에 감옥살이하는 판에 제가 마치 포르노 작가인 양 이미지가 구겨져 마음 아픕니다. 그러나 어디 신정아만큼 크게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젊은 그 여성부터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신정아 사건은 곡해 속에서 부풀려진 사건이 분명하지만 스캔들을 좇는 언론 입장에서는 좋은 먹잇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정아 사건을 ‘권력형 비호’ 사건으로 인정한다는 말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마음을 비우고 멀리서 바라보니 세상 호기심 앞에 까발려지고 대중 입맛에 엔조이될 요소를 일부 가졌다는 판단일 뿐입니다. 하지만 예술 지원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습니다. 변 전 실장이 어설픈 아마추어 애호가였지만, 그를 덮어놓고 욕할 수 없습니다. 또 신정아 입장에서 봅시다. 어느 세상에 누가 혼자 힘으로 크던가요? 특히 멘토(조언자) 등의 도움을 받으며 네트워킹(인맥 형성)도 하지요. 성경 말씀대로 ‘누가 이 여인을 돌로 칠 수 있느냐?’라고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진행 중인 재판에서도 신정아가 학위위조의 당사자인가, 피해자인가를 두고 설전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변 전 실장도 신정아의 학력은 추호도 의심치 않았을 것입니다. 제 경우도 예일대 책임교수의 인터넷 강의를 듣는 신정아를 직접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또 때가 되면 현지 수업을 받으러 가는 것도 보았고요.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데 참고문헌으로 쓰라며 ‘프리미티브 아트(원시예술)’라는 500쪽 분량의 원서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그 점은 재판 과정에서 밝혀질 일이지만, 저는 정말 허위학력 주장을 믿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 작품 ‘큰일 났다, 봄이 왔다’ 구입 경위도 의혹 대상이었습니다. 의혹이라니요? 그 작품은 2005년 4월 성곡미술관에서 처음 전시됐습니다. 그때 변 전 실장이 전시장을 찾아온 것으로 압니다. 그 작품을 보고 관심이 있다면서 신정아에게 구입의뢰를 했습니다. 단 본래 제 작품 가격의 몇 분의 1 수준으로 해 달라고 하도 졸라서, 제가 망설인 끝에 오케이를 했습니다.
사실 공공건물에 컬렉션 된다는 것은 작가로서 영광이니까요. 그럼요. 제가 작품가격을 싸게 해준 것은 국비를 아껴준 게 아니던가요? 그 작품을 샀다는 자체가 국비낭비라고 지적했던 지난해 여름 언론의 마녀사냥식 공격은 제 눈에는 문화 문맹(文盲)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그런 언론에는 굳이 대응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잠시 확인해 볼 것은 ‘큰일 났다, 봄이 왔다’는 절묘한 사진 제목이 은근히 세간에 화제였습니다. 선생님이 만든 것인가요? 아, 그거요? 강현국 시인의 작품 ‘후렴’에서 따온 것입니다. ‘큰일 났다, 봄이 왔다/…/가난한 내 사랑도 꿈틀거린다’로 이어지는 작품이지요. 봄의 소생을 그토록 감각적으로 처리해 제가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저를 포함해 서울의 지인 몇 분에게 보냈던 연하장에도 ‘봄’을 주제로 한 시 작품을 쓰셨잖아요. 그건 제가 끼적여 본 것입니다. 심심할 때 짧은 글을 메모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나저러나 강현국 시인의 작품 제목을 무단 차용해 문제가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저작권 문제는 없겠지만 혹시 지난해 소동으로 그분께 누가 된 것은 아닌가도 싶어서요. 서울에 가면 양해를 구해야겠습니다.
사람들은 왜 명망 높은 작가 황규태가 미국 연방교도소에서 수감생활하는지 모릅니다. 국내 언론에는 보도되지 않았거든요. 간단하게 말해 경제사범입니다. 지난 85년이던가요? 미국 생활 20년째였는데, 내 사업이 잘 굴러갔습니다. 그해에 미주 동아일보사를 인수했는데, 그게 화근이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같은 해에 ‘LA윌셔뱅크’를 미국 친구들과 함께 공동 설립했고, 벤처융자회사 ‘LA 캐피탈’을 세웠습니다. 규모가 너무 커진 것이죠.
얼핏 듣기엔 벤처융자회사가 문제였네요? 미 연방자금 지원금과 내 개인자금을 자본으로 설립했는데, 외형이 커지면서 자금압박이 왔습니다. 제 소유의 호텔을 매각하고 은행주식과 부동산 등을 팔아 신문사 운영에 썼습니다. 하지만 밑 빠진 독처럼 자금을 쏟아 부어야 했는데, 제가 겁이 없었지요. 충분한 앞뒤 계산 없이 ‘LA 캐피탈’의 연방자금 지원금을 뽑아서 신문사 운영에 집어넣었습니다.
연방자금 운용상의 불법이네요? 그렇죠. 횡령혐의죠. 어쨌거나 청산 과정은 잘 마무리됐습니다. 그런데 벌금 26만 달러가 남아 있었는데, 깜빡 처리를 못한 채 92년 서울에 돌아왔습니다. 귀국 후 15년 가까이 저는 작가 생활을 하느라 내처 잊고 지냈는데, 미국 공권력은 저를 찾고 있었습니다. 2006년 여름 출국금지 통보를 받았습니다. 어쨌거나 지금 공짜 밥을 먹는 교도소는 당시 40대 중후반 나이에 제가 너무 오만방자했던 결과가 아닌가 반성하고 있습니다.
교포신문에 따르면, 미국 내 재판이 진행될 무렵 교포사회에 끼친 공로 등 피의자 황규태의 정상을 참작해 달라는 탄원운동이 벌어졌습니다. 더없이 고맙고도 분에 넘치는 일이지요.
출국정지 통보를 받은 전후의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지요. 2006년에 제가 잘한 일 중 하나가 정면돌파를 결정한 것입니다. 물론 서울과 미국에 있는 변호사 친구들에게 의견을 구했습니다. ‘도망쳐도 당신을 찾지 않을 것이다’는 견해가 우세했습니다. 그러나 꼬리를 남긴 채 찜찜하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해 한·미 범죄인인도협정을 지키는 한국 당국에 내 발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게 11월입니다.
그 직후 서울구치소에서 몇 개월 수감돼 있었던 걸로 압니다. 3개월이었습니다. 그 뒤 미국에 이송돼 재판 받고 지난해 3월 벌금 26만 달러를 냈습니다. 재판에서 받았던 형량은 4년형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오는 3월에 출소를 하죠? 여기 복역 기준이 형량의 3분의 1만 채우면 가석방을 합니다. 단 저는 미국적을 포기했던 사람이니까, 가석방은 저에게 해당사항이 없지요. 저는 14개월 복역을 모두 마친 3월24일에 깨끗하게 풀려납니다.
죄송합니다만 그곳 생활은 어떤지요. 농담할까요? 세상의 소란으로부터 차단된 절대적 안전지대가 이곳입니다. 세상 바이러스 감염으로부터 면제됐지만, 역시 저는 들끓는 세상이 좋더라고요. 어쨌거나 제 사진의 주요한 테마이기도 한 진짜와 가짜, 현실과 비현실 사이,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 그런 것들을 지금 조용히 음미해 보고 있습니다. 우리말에 요지경이라는 말이 있죠? 그게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선생님 사진이 본래 철학적이지만, 철학자가 다 되셨네요? (웃음)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물라시옹(파생실재)이 있지요? 그에 따르면 세상은 본디 디즈니랜드 같은 허구의 테마파크랍니다. 디즈니랜드는 왜 설치해 놓고 있느냐고요? 세상이 허구임을 감추려고 만들어놓은 장치일 뿐이지요. 우리 선조들은 그걸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요지경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는 게 요즘 제 생각입니다.
생각보다 편안하게 말씀하시네요. 인과응보의 비싼 교훈을 배운 지금 제 마음은 그저 조용한 호수와도 같아요. 억울하지도 않고, 분노를 느끼지도 않습니다. 더 호되게 당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삽니다. 다시 세상에 나가면 모두를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화장을 지운 채 민얼굴로…. 미움도 모두 털어내고 살아야겠지요. 신정아에게도 그런 제 마음과 말을 잘 전해 주세요.
가족 외에 면회를 거부해 지난해 제가 편지 한 통 보낸 게 전부입니다. 신정아의 모든 과실 접어주고 위로해 주고 싶은 제 마음 이해하시겠어요? 아침에 이곳에서 문득 깨어나 보면 두 칸 철제 침대가 전부입니다. 그게 인생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2평짜리 방은 그런대로 살 만하고 일년 내내 에어컨 펑펑 틀어주니 긴팔 입고 호화생활을 합니다. 엘리트 재소자들을 모아놓은 곳이라서 쾌적할 정도입니다. 홀에는 텔레비전과 운동기구 심지어 라면까지 있답니다. 하지만 3월 24일 가석방 뒤에 단 하루만 더 있으라 해도 단호히 거부할 겁니다. 자유가 없는 곳이 바로 이곳 지옥이니까요.(웃음)
사진계, 미술계에 전할 말이 있다면…. 저는 어찌 보면 화려하면서도 나락에 떨어지는 요지경 인생사를 제대로 맛보는지도 모릅니다. 나가면 모두를 사랑할 겁니다. 비뚤어져 있던 저라는 그릇도 바로 펼 것이고, 하늘만큼 땅만큼 넓게 살려고 합니다. 앞으로는 그렇게 살자는 제 말을 전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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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황규태씨가 필자에게 첫 편지를 보내온 시점은 지난해 9월 말께였다. 수인번호가 선명한 연방교도소 규격 봉투에 담긴 편지였다. 신정아 사건이 막 정점을 지나던 무렵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 조금도 억울하다거나 분노하고 있지 않습니다”는 심경 고백과 함께 “서울의 친구들이 신정아의 모든 과실을 묻어주고 위로해 주길 바랍니다”는 부탁까지 있었다. 자신 역시 신씨의 가장 가까운 지인이라는 점을 조금도 부인하려 들지 않았다. 필자는 즉각 답신을 보냈다. 크리스마스 전후에는 서울의 친구들에게 전해 달라며 연하장 4장도 보내왔다. 교도소 옆방 동료가 손으로 그린 ‘파스텔화 사제(私製) 연하장’이었다. 그 직후 통화도 이뤄졌다. 황씨가 서울로 걸어온 국제전화였다. 미국 교도소는 재소자에게 한 차례에 15분씩 외부 전화를 허용하는데, 한 시간 간격으로 하루 세 차례 통화하기도 했다. 그의 말대로 “서울의 지인 중 당신이 유일하게 내 소식을 전하는 대상”이었다. 이어진 편지왕래와 통화에서 황씨는 신정아 누드는 합성된 사진이 아니고 신씨의 동의 아래 서울 성북동 작업실에서 자기가 직접 찍었다고 밝혔다. 황씨가 밝힌 누드사진의 유출 경위는 이랬다. 아마추어 사진작가이자 황씨의 제자라고 자칭하는 A여인이 5년 전 무단으로 작업실에서 그 사진을 훔쳐갔다. 아마도 그를 통해 문화일보가 사진을 입수했을 개연성이 높다는 얘기였다. 황씨는 작가의 동의 없이 누드사진을 공개한 언론사에 유감을 표했다. 그러나 문화일보에 대한 명예훼손 고소 등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 그는 현재 공판이 진행 중인 학위 위조와 관련해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말했으며,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성곡미술관에서 전시했던 사진작품 ‘큰일 났다, 봄이 왔다’를 전시장에서 보고 구입의사를 밝혀와 매매가 성사됐다고 밝혔다. 변 전 실장이 너무 좋아하니까 실거래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해 달라고 신정아씨가 요구했고, 그에 기꺼이 응했다는 말이다. 다음은 일문일답이다.
신정아 사건이 터졌던 지난해 여름 황규태라는 이름이 언론에 빈번하게 등장했습니다. 그런 소식은 알고 있는지요. 물론입니다. 교도소에서 중앙일보 미주판과 한국일보를 구독하니까요. 절반은 맞지만, 절반은 사실과 다른 이야기들로 홍수를 이루는 지면을 보면서 심한 무력감과 허탈감을 느꼈습니다. 설사 사실관계는 대충 맞는다 하더라도 앞뒤 맥락이 전혀 다른 데다 색안경을 끼고 보니까 엄청난 음모나, 스캔들로 비치는 게 매우 안타까웠지요.
변양균 전 실장 이름이 주로 등장했지만, 황 선생님은 신씨의 가장 가까운 지인으로 소개됐습니다. 특히 작품 ‘큰일 났다, 봄이 왔다’가 변 전 실장이 근무했던 예산기획처 장관 집무실에 걸려 있어 셋 사이의 커넥션을 추측하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저는 신정아씨의 재능을 높이 산 작가입니다. 대중적 이해가 부족한 현대사진을 이해해 주는 신정아의 안목을 높이 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가장 가까운 지인임을 부인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가 미국에서 돌아와 금호미술관에 근무할 때부터 알았으니, 10년이 넘는 셈입니다. 신정아가 금호미술관을 사직한 뒤 성곡미술관에 취직시키려고 노력도 했습니다.
누드 사진이 궁금합니다. 합성인가요 아닌가요.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어찌됐든 제가 찍은 게 분명합니다. 5∼6년 전 서울 성북동 제 작업실에서 찍었습니다. 합성이냐, 아니냐는 논란이 있자 누드 사진의 배경이 내 작업실과 비슷하다는 견해가 일부 등장하던데, 그게 옳습니다. 사실 ‘언제라도 누드를 찍고 싶으면 내가 찍어줄게’라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사석에서 신정아에게 말하곤 했습니다. 작가로서 자연스러운 제안 아니던가요? 상대방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요. 그러다가 어느 날 신정아가 선뜻 응해온 겁니다.
실은 그 말씀을 제가 옆에서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 선생님을 모시고 셋이 자주 만났으니까요. 누가 들어도 자연스런 대화로 받아들였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누드 사진 자체가 잘못됐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외설스럽다거나 추하게 본다면 그 사람의 시선이 문제겠지요. 섹스 스캔들의 물증이라고 다짜고짜 규정하거나, 관음증(觀淫症)시선으로 보는 게 되레 이상하지 않습니까? 물론 큰 사회적 사건과 얽혀 있어서 사람들이 의아한 시선으로 볼 가능성은 아주 없지 않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작업실 사진이 어떻게 유출됐는지 궁금합니다. 그 과정이 좀 문제 있습니다. A여인에게 유출 책임이 있습니다. 그 여인이 제가 없는 내 작업실에 몰래 들어와서 사진을 뒤져 챙겨뒀던 것입니다.
그 여인은 누구인지요. 벌써 5∼6년 전 일이지요. 예전에 저는 서울대와 상명여대 등에 출강해 왔으니 제자들이 꽤 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사진을 가르쳐 달라고 접근한 중년 여성이 A입니다. 50대인 그에게 셔터 누르기, 앵글잡기를 포함해 기초에서 고급과정까지 두루 가르쳤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스승과 제자 사이네요? 문제는 그 여성의 정신상태가 사회통념상 정상은 아니라는 판단 때문에 어느 날 분명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그랬더니 거의 스토커로 변신해 저를 시종 괴롭혔지요. 4년 전이던가요? 당시 문화일보갤러리에서 개인전을 마련해준 다음 앞으로는 만나지 않겠다는 뜻을 전달했습니다.(황씨는 문제의 A여인의 자녀들이 이미 장성해 대기업에 취직한 정상적인 가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이름과 성을 밝히기는 거부했다.)
미술계 소문으로는 그 여성이 선생님의 개인전 경비도 대줬다는 말도 들리던데요. 선생님 작업실을 찾았던 이유도 빚 독촉 때문이라는 말이죠. 개인전 경비는 아무런 조건 없는 돈이라고 해서 받긴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들으니까 자기가 돈을 꿔줬는데 갚지 않는다는 헛소문이 들려오기에 아무 소리 못하게 되돌려줬고요. 이후 그 여성이 훔친 누드사진을 가지고 신정아를 따로 만나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공갈협박이었죠. 신정아와 저는 아무런 남녀 관계도 아닌데도 그 여성이 오판했죠. 한번은 주차장에 있는 신정아의 BMW 자동차를 쇠꼬챙이로 마구 긁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거의 100군데나…. 분명 정상은 아니지요.
문화일보에 게재된 신정아 누드사진도 그 여인의 소행일까요? 그건 제가 그저 가늠할 뿐입니다. 전시회 하면서 그 신문사 미술담당 기자를 알게 되고, 사건이 터지자 누드 사진이 무슨 물증 제보랍시고 덜컥 건넨 것으로 보입니다. 신정아 사건이 한창이던 지난 여름 그 누드가 섹스 스캔들인양 대중을 오도한 결과를 빚은 셈이지요. 문화일보는 취재원 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워 그 여성을 비호하려들었고….
신씨는 합성사진이라고 발뺌했는데요. 신정아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이해 못할 이유도 없지요. 당시 상황이 어떠했습니까. 변 전 실장과의 스캔들 물증인 양 ‘이것 보라’며 들이대는 기자들에게 일단 부인하고 싶은 심리가 아니었을까요? 소동이 가라앉은 지금 저는 밝힐 것은 밝히고, 사람들에게 정상적인 이해를 구하고 싶은 생각입니다.
문화일보에 명예훼손 소송도 준비하시나요? 아닙니다. 저도 신문기자 출신이고, 한때 미주 동아일보사를 운영했던 발행인이었습니다. 신정아에게 상처를 주고, 저에게 ‘포르노 사진가’ 이미지를 심어줬던 신문이 유감이지만, 소송은 하지 않겠습니다. 단 문화일보가 조철봉이 주인공인 연재소설 ‘강안남자’로 유명한 신문인데, 따라서 제 사진을 무단 게재한 사실은 ‘강안남자일보’다운 결정일 뿐, 신문의 정도(正道)는 아닌 게 분명하지요. 그점 분명히 해둡니다. (황씨는 미국에 건너가기 전인 62∼65년 경향신문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신정아의 허위학력 혐의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제가 쉽게 말할 수가 있나요? 신정아가 본래 언론을 좋아했습니다. 큐레이터니까 홍보를 위해서라도 언론이 필요했겠지만, 그러던 신정아 이름이 엉뚱한 방식으로 신문을 수개월 동안 도배하다시피 했으니 어쨌거나 소원을 푼 게 아닌가요?(웃음)
말씀은 그렇게 하지만 괴로우시죠? 20여 년 전의 기업활동 때문에 감옥살이하는 판에 제가 마치 포르노 작가인 양 이미지가 구겨져 마음 아픕니다. 그러나 어디 신정아만큼 크게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젊은 그 여성부터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신정아 사건은 곡해 속에서 부풀려진 사건이 분명하지만 스캔들을 좇는 언론 입장에서는 좋은 먹잇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정아 사건을 ‘권력형 비호’ 사건으로 인정한다는 말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마음을 비우고 멀리서 바라보니 세상 호기심 앞에 까발려지고 대중 입맛에 엔조이될 요소를 일부 가졌다는 판단일 뿐입니다. 하지만 예술 지원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습니다. 변 전 실장이 어설픈 아마추어 애호가였지만, 그를 덮어놓고 욕할 수 없습니다. 또 신정아 입장에서 봅시다. 어느 세상에 누가 혼자 힘으로 크던가요? 특히 멘토(조언자) 등의 도움을 받으며 네트워킹(인맥 형성)도 하지요. 성경 말씀대로 ‘누가 이 여인을 돌로 칠 수 있느냐?’라고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진행 중인 재판에서도 신정아가 학위위조의 당사자인가, 피해자인가를 두고 설전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변 전 실장도 신정아의 학력은 추호도 의심치 않았을 것입니다. 제 경우도 예일대 책임교수의 인터넷 강의를 듣는 신정아를 직접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또 때가 되면 현지 수업을 받으러 가는 것도 보았고요.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데 참고문헌으로 쓰라며 ‘프리미티브 아트(원시예술)’라는 500쪽 분량의 원서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그 점은 재판 과정에서 밝혀질 일이지만, 저는 정말 허위학력 주장을 믿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 작품 ‘큰일 났다, 봄이 왔다’ 구입 경위도 의혹 대상이었습니다. 의혹이라니요? 그 작품은 2005년 4월 성곡미술관에서 처음 전시됐습니다. 그때 변 전 실장이 전시장을 찾아온 것으로 압니다. 그 작품을 보고 관심이 있다면서 신정아에게 구입의뢰를 했습니다. 단 본래 제 작품 가격의 몇 분의 1 수준으로 해 달라고 하도 졸라서, 제가 망설인 끝에 오케이를 했습니다.
사실 공공건물에 컬렉션 된다는 것은 작가로서 영광이니까요. 그럼요. 제가 작품가격을 싸게 해준 것은 국비를 아껴준 게 아니던가요? 그 작품을 샀다는 자체가 국비낭비라고 지적했던 지난해 여름 언론의 마녀사냥식 공격은 제 눈에는 문화 문맹(文盲)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그런 언론에는 굳이 대응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잠시 확인해 볼 것은 ‘큰일 났다, 봄이 왔다’는 절묘한 사진 제목이 은근히 세간에 화제였습니다. 선생님이 만든 것인가요? 아, 그거요? 강현국 시인의 작품 ‘후렴’에서 따온 것입니다. ‘큰일 났다, 봄이 왔다/…/가난한 내 사랑도 꿈틀거린다’로 이어지는 작품이지요. 봄의 소생을 그토록 감각적으로 처리해 제가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저를 포함해 서울의 지인 몇 분에게 보냈던 연하장에도 ‘봄’을 주제로 한 시 작품을 쓰셨잖아요. 그건 제가 끼적여 본 것입니다. 심심할 때 짧은 글을 메모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나저러나 강현국 시인의 작품 제목을 무단 차용해 문제가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저작권 문제는 없겠지만 혹시 지난해 소동으로 그분께 누가 된 것은 아닌가도 싶어서요. 서울에 가면 양해를 구해야겠습니다.
사람들은 왜 명망 높은 작가 황규태가 미국 연방교도소에서 수감생활하는지 모릅니다. 국내 언론에는 보도되지 않았거든요. 간단하게 말해 경제사범입니다. 지난 85년이던가요? 미국 생활 20년째였는데, 내 사업이 잘 굴러갔습니다. 그해에 미주 동아일보사를 인수했는데, 그게 화근이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같은 해에 ‘LA윌셔뱅크’를 미국 친구들과 함께 공동 설립했고, 벤처융자회사 ‘LA 캐피탈’을 세웠습니다. 규모가 너무 커진 것이죠.
얼핏 듣기엔 벤처융자회사가 문제였네요? 미 연방자금 지원금과 내 개인자금을 자본으로 설립했는데, 외형이 커지면서 자금압박이 왔습니다. 제 소유의 호텔을 매각하고 은행주식과 부동산 등을 팔아 신문사 운영에 썼습니다. 하지만 밑 빠진 독처럼 자금을 쏟아 부어야 했는데, 제가 겁이 없었지요. 충분한 앞뒤 계산 없이 ‘LA 캐피탈’의 연방자금 지원금을 뽑아서 신문사 운영에 집어넣었습니다.
연방자금 운용상의 불법이네요? 그렇죠. 횡령혐의죠. 어쨌거나 청산 과정은 잘 마무리됐습니다. 그런데 벌금 26만 달러가 남아 있었는데, 깜빡 처리를 못한 채 92년 서울에 돌아왔습니다. 귀국 후 15년 가까이 저는 작가 생활을 하느라 내처 잊고 지냈는데, 미국 공권력은 저를 찾고 있었습니다. 2006년 여름 출국금지 통보를 받았습니다. 어쨌거나 지금 공짜 밥을 먹는 교도소는 당시 40대 중후반 나이에 제가 너무 오만방자했던 결과가 아닌가 반성하고 있습니다.
교포신문에 따르면, 미국 내 재판이 진행될 무렵 교포사회에 끼친 공로 등 피의자 황규태의 정상을 참작해 달라는 탄원운동이 벌어졌습니다. 더없이 고맙고도 분에 넘치는 일이지요.
출국정지 통보를 받은 전후의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지요. 2006년에 제가 잘한 일 중 하나가 정면돌파를 결정한 것입니다. 물론 서울과 미국에 있는 변호사 친구들에게 의견을 구했습니다. ‘도망쳐도 당신을 찾지 않을 것이다’는 견해가 우세했습니다. 그러나 꼬리를 남긴 채 찜찜하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해 한·미 범죄인인도협정을 지키는 한국 당국에 내 발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게 11월입니다.
황규태는 누구인가 항상 캐주얼한 청바지 차림에 야구모자를 걸치고 다니는 덩치 큰 사람. 황규태는 얼핏 50대 중년으로 보이며,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 때문에 ‘영락없는 소년’으로 비친다. 말도 어눌하다. 술을 한 잔도 걸치지 못하는 황씨는 1938년 충남 예산 태생이다. 예산농고와 동국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그는 한국 현대사진의 자궁으로 통하는 ‘현대사진연구회’를 통해 1961년 예술사진에 입문했다. 경향신문 기자 생활 2년 직후인 1965년 바로 미국에 건너갔다. 미국에서는 사업을 하느라 사진을 멀리했으나 틈틈이 잊지 않고 카메라를 만졌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작품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상상력의 무한질주와 함께 포스트모던한 사진작업 본능이 살아났다. 영구 귀국(92년) 전인 1989년 서울문예진흥원에서 개인전을 열었던 그는 이후 워커힐미술관, 광주비엔날레, 금호미술관, 선재아트센터 등에서 전시회를 열며 ‘젊고 신선한 시선’을 자랑해 왔다. 클래식을 좋아하지만 존 케이지, 죄르지 리게티 등 현대작곡가들의 음악과 함께 록음악을 즐기는 젊은 취향도 흥미롭다. 작업실은 서울 성북동 |
그 직후 서울구치소에서 몇 개월 수감돼 있었던 걸로 압니다. 3개월이었습니다. 그 뒤 미국에 이송돼 재판 받고 지난해 3월 벌금 26만 달러를 냈습니다. 재판에서 받았던 형량은 4년형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오는 3월에 출소를 하죠? 여기 복역 기준이 형량의 3분의 1만 채우면 가석방을 합니다. 단 저는 미국적을 포기했던 사람이니까, 가석방은 저에게 해당사항이 없지요. 저는 14개월 복역을 모두 마친 3월24일에 깨끗하게 풀려납니다.
죄송합니다만 그곳 생활은 어떤지요. 농담할까요? 세상의 소란으로부터 차단된 절대적 안전지대가 이곳입니다. 세상 바이러스 감염으로부터 면제됐지만, 역시 저는 들끓는 세상이 좋더라고요. 어쨌거나 제 사진의 주요한 테마이기도 한 진짜와 가짜, 현실과 비현실 사이,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 그런 것들을 지금 조용히 음미해 보고 있습니다. 우리말에 요지경이라는 말이 있죠? 그게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선생님 사진이 본래 철학적이지만, 철학자가 다 되셨네요? (웃음)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물라시옹(파생실재)이 있지요? 그에 따르면 세상은 본디 디즈니랜드 같은 허구의 테마파크랍니다. 디즈니랜드는 왜 설치해 놓고 있느냐고요? 세상이 허구임을 감추려고 만들어놓은 장치일 뿐이지요. 우리 선조들은 그걸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요지경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는 게 요즘 제 생각입니다.
생각보다 편안하게 말씀하시네요. 인과응보의 비싼 교훈을 배운 지금 제 마음은 그저 조용한 호수와도 같아요. 억울하지도 않고, 분노를 느끼지도 않습니다. 더 호되게 당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삽니다. 다시 세상에 나가면 모두를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화장을 지운 채 민얼굴로…. 미움도 모두 털어내고 살아야겠지요. 신정아에게도 그런 제 마음과 말을 잘 전해 주세요.
가족 외에 면회를 거부해 지난해 제가 편지 한 통 보낸 게 전부입니다. 신정아의 모든 과실 접어주고 위로해 주고 싶은 제 마음 이해하시겠어요? 아침에 이곳에서 문득 깨어나 보면 두 칸 철제 침대가 전부입니다. 그게 인생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2평짜리 방은 그런대로 살 만하고 일년 내내 에어컨 펑펑 틀어주니 긴팔 입고 호화생활을 합니다. 엘리트 재소자들을 모아놓은 곳이라서 쾌적할 정도입니다. 홀에는 텔레비전과 운동기구 심지어 라면까지 있답니다. 하지만 3월 24일 가석방 뒤에 단 하루만 더 있으라 해도 단호히 거부할 겁니다. 자유가 없는 곳이 바로 이곳 지옥이니까요.(웃음)
사진계, 미술계에 전할 말이 있다면…. 저는 어찌 보면 화려하면서도 나락에 떨어지는 요지경 인생사를 제대로 맛보는지도 모릅니다. 나가면 모두를 사랑할 겁니다. 비뚤어져 있던 저라는 그릇도 바로 펼 것이고, 하늘만큼 땅만큼 넓게 살려고 합니다. 앞으로는 그렇게 살자는 제 말을 전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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