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매 앓던 선친 뜻 이제야 깨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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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아도, 타인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결코 알 수 없다.’ 필립 클로델이 쓴 『회색 영혼』이란 소설에 나오는 말이다. 치매 환자를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딱 저렇지 않을까. 치매 환자가 사랑했던 가족이라면 소통의 어려움은 더욱 답답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타인의 속마음을 알 수 없다고 해서 그 사람과의 관계까지 포기하지는 않는다. 끈질기게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타인의 마음속에 따뜻한 존재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계속 가지고 있다. 그 대상이 가족이라면 더욱 그렇다. 염모제 ‘세븐에이트’로 유명한 동성제약의 이양구 사장과 선친인 고 이선규 회장의 관계가 꼭 그랬다. 이선규 회장은 1994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치매와 중풍을 앓기 시작했다. 이양구 사장을 비롯한 가족들의 노력으로 증상이 많이 호전됐지만 얼마 전 예상하지 못한 폐렴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향년 84세였다. 이 사장은 선친의 영정에 『치매, 그와 관련된 질환들』(약사공론)이라는 책을 바쳤다. 약학박사인 권중무 부사장과 이 사장이 공동으로 쓴 책이다. 외국 서적을 번역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데 6년이 걸렸다. 이 사장은 “고인이 살아계실 때 완성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며 “그래도 부친이 소망하신 일 중 하나를 이뤄 기쁘다”고 말했다. “선친이 쓰러졌을 때 많이 놀랐죠. 그런데 곧 회복하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치매, 중풍을 모두 앓으셨지만 간병인을 두지 않을 정도로 강인하셨죠. 그래도 올해 들어 많이 약해지셨다는 생각은 들었어요.” 이선규 회장은 다시 건강을 회복했지만 97년에 다시 한 번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결국 2001년 아들인 이 사장에게 CEO 자리를 물려줬다.
부친과 건강식품 사업 놓고 갈등 “병을 앓기 시작하시면서 선친에겐 두 가지 바람이 있었습니다. 치매에 관련된 책을 발간해 관련 정보를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치매와 당뇨, 뇌졸중에 관련된 의약품을 개발해 싼값에 공급하는 것이었어요. 책을 발간했으니 부친의 염원 중 하나는 이룬 셈입니다.” 이 사장은 부친 곁에서 알뜰한 간병을 하진 못했다. 부친이 쓰러진 직후 회사를 온전히 떠안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강하던 부친의 아픈 모습을 가족의 입장에서 지켜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부친은 평생 제약회사에 열정을 바친 분이 아닌가. 동성제약은 1957년 창립한 제약회사다. 국내 최초의 염색약 양귀비 1호를 개발한 것을 시작으로 염모제 ‘세븐에이트’와 일반의약품인 ‘정로환’을 통해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다른 제약회사들과 달리 의약품 부분이 약한 편이지만 현재는 이선규 회장의 바람대로 노인성 질환과 관련된 의약품을 개발하고 라이선스를 통한 외국과의 협력을 추진 중이다. “선친은 뇌졸중으로 처음 쓰러진 94년 이전부터 노인성 질환에 대해 관심이 많았어요. 어쩌면 선견지명이기도 한데, 이쪽 시장이 크게 확대될 것이라는 확신을 하셨습니다. 한번은 치매 치료차 일본에 있는 병원을 가셨다가 기능성 건강식품을 접하셨는데 그 제품의 가능성을 보시고 곧바로 수입을 결정하시기도 했죠.” 이 사장을 포함해 회사 간부들은 제품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기능성 건강식품 시장은 규모도 작았고, 소비자들에게 신뢰를 주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부친의 뜻이 워낙 확고해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이 사장의 염려대로 수입한 건강식품은 기대에 못 미쳤다. 이 사장은 선친과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기능성 건강식품이 성과가 없는 것을 선친은 광고가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했어요. 치매로 기억력이 감소하신 탓에 과거 광고 시장에 대한 기억만을 가지고 계셨던 거죠. ‘그 돈으로 왜 광고를 더 하지 않느냐’고 많이 다그치셨습니다. 실제로는 광고도 많이 했어요. 근데 매체가 많이 늘어나면서 지면 광고의 효과가 별로 없었던 거죠. 시장도 협소했고…. 그때 마음고생 많이 했습니다.” 이 사장이 키우려는 제품과 부친이 미는 제품이 달라 이견을 좁히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 사장은 회사를 성장시키자면 주력 제품에 대한 투자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데 반해 이 회장은 본인이 직접 앓고 있는 노인성 질환 의약품과 건강식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이선규 회장의 막내아들인 이 사장은 30세 무렵부터 회사에서 경영수업을 쌓았다. 회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회사에 대한 애정도 선친 못지않았다고 자부했다. 동성제약은 선친의 지나온 인생이 모두 담겨 있는 회사였기 때문에 회사에 대한 애정은 더욱 각별했다. 이 사장은 “선친이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 제일 가슴 아팠다”고 말했다. “선친의 바람을 이루고 싶은 마음은 자식들이라면 누구나 하지 않나요?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선친이 몸을 회복하는 것만큼 선친이 키운 회사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했죠. 그래서 선친의 뜻을 무조건 따를 수는 없었어요. 물론, 싫은 소리도 하고 반대도 많이 했지만 아버지의 바람을 이루고 싶다는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요.” 이선규 회장은 열여섯 살에 서울로 상경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약 장사를 시작했다. 그 후 고려은단주식회사를 인수해 회사를 키웠다. 동성제약을 인수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망해가던 동성제약은 제자리를 찾았고 곧 성장 궤도에 올라섰다. 컬러 염색약 ‘훼미닌’ ‘세븐에이트’, 배탈·설사약 ‘정로환’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선친은 자수성가하신 분이고, 또 다른 창업 1세대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판단에 대한 확신이 상당하셨어요. 병을 앓고 계시면서도 회사 일에 관심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병 중에도 인사 문제는 꼭 선친의 결재를 받아야 했어요. 2005년이 되어서야 구체적인 업무에는 신경을 쓰지 않을실 정도였죠.” 치매의 치명적인 약점은 자신의 상태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치매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 회사의 CEO라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이 사장은 부친이 시장성이 약한 건강기능식품에 대한 고집을 부릴 때마다 회사 간부들과 함께 말리며 위기를 넘겼다고 말했다.
‘이선규 의학상’ 통해 노인성 질환 약학자 발굴 “회사 간부들이 설득을 못하면, 제가 또 설득을 하고, 제가 설득을 못하면 어머니까지 설득에 나섰죠. 사실 어머니의 역할이 컸어요. 선친이 어머니 말씀은 들으셨거든요. 다행스러운 건 회사 간부들이나 나나 아버지가 왜 그런 생각과 판단을 했는지 이해를 했다는 겁니다. 무조건 치매 환자로 부친을 대했다면 지금 동성에서 치매백신 개발이나 노인성 질환과 관련된 외국 의약품 수입을 적극적으로 하겠습니까? 부친도 질병을 앓고 계셨지만 절실했던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이해를 한 거죠. 물론 건강식품은 이제 포기를 했지만요.” 동성제약은 동성장학재단을 설립해 15년 동안 소년·소녀 가장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왔다. 그리고 10년 전부터는 ‘이선규 약학상’을 제정해 뛰어난 의약품을 개발한 약학자를 지원하고 있다. 현재는 노인성 질환과 관련된 의약품을 개발하는 약학자 위주로 수상자를 고른다. 동성제약이 개발하고자 하는 제품에 시너지 효과를 불러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다. “처음에 건강식품을 수입할 때는 오로지 돈이 목적이었어요. 회사 CEO라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달라졌어요. 노인성 질환 관련 제품을 개발하고 수입하는 것은 투자 이외의 보람도 있습니다. 노인성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한 줄기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선친의 뜻을 깨달은 거죠. 당시엔 아버지가 왜 저러실까 많이 답답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 생각이 결국 맞았던 게 아닌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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