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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물면 다 아픈 열한 손가락”

“깨물면 다 아픈 열한 손가락”

1993년 미국 LA의 한 전자제품 양판점.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은 이곳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제법 잘 만들었다고 생각한 TV가 구석 자리에서 외면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 회장은 87년 취임 당시부터 GE를 비롯한 세계 유명 기업들의 관심을 받았지만, 세계 소비자들을 상대로 ‘삼성’을 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며칠 후 LA의 한 호텔. 이 전 회장은 전자 관련 분야 사장단과 ‘수출상품 비교평가회의’를 열었다. 미국 GE, 일본 소니, 네덜란드의 필립스 같은 세계 최고 가전제품들과 삼성 제품을 비교하는 이 회의는 나흘간 계속됐다. 그리고 같은 해 이 전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신경영’을 선포한다. “전국체전에서 1등 했다고 자랑하지 마라. 그런 말을 들으면 화가 난다.” “2등 정신을 버려라. 세계 제일이 아니면 앞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 “0.1점 차로 (세계 일류시장에서) 10등 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10점 차로 (국내) 2등 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전국체전 1등 해봤자 소용없어” 이 전 회장은 끊임없이 세계 1등을 강조했다. 그의 바람대로 92년 D램이 세계 1위의 영광을 안겨줬다. 이후 15년 동안 1등 제품은 11개로 늘었다. 삼성전자는 90년대 초까지 컬러TV를 한 대 생산할 때마다 기술료를 내야 했다. 선진업체에 비해 원천기술이 부족했다는 얘기다. 미국의 고급백화점에서는 취급조차 않는 ‘싸구려’가 세계 1등 제품으로 재탄생하는 데는 이 전 회장의 창조적 발상과 독려가 있었다. 세계 1등 11개 중 절반이 반도체 관련 제품이다. 메모리 반도체인 D램, S램, 낸드플래시는 각각 92, 95, 2002년 첫 세계 1위를 달성한 이후 이제까지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이 전 회장은 반도체 사업에 유난히 애착을 가진 것으로 전해진다. 1974년 동양방송 이사로 근무하던 이 전 회장이 개인 재산으로 인수한 부천의 한국반도체 공장이 삼성전자 반도체의 모태다. 당시 반도체 사업을 선뜻 허락하지 않던 고(故) 이병철 회장에게 이 전 회장은 꼭 해보고 싶은 사업이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83년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고, 기흥 공장을 계획보다 1년 이상 앞당겨 완공했다. 그해 11월 64KB D램을 개발하면서 세계무대에 두각을 드러냈다. 94년에는 세계 최초로 256MB D램을 개발했고, 이어 96년에 1GB, 2004년 2GB 등 점점 용량을 늘려가면서 선두업체로서 선진 회로 공정 기술을 선보였다. 물론 위기도 있었다. 97년 외환위기 때는 40%에 달하는 인력을 감축하고, 120개가 넘는 사업과 제품을 철수했다. 2004년에는 후발업체를 따돌리기 위해 원가의 40%를 내리기도 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도 ‘황의 법칙(메모리반도체의 용량이 매년 두 배로 커진다는 황창규의 기술)’을 발표하는 등 삼성전자는 굳건히 반도체 왕좌를 지켜왔다. 최근에는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도 최고 기술을 인정받았다. 전체 반도체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비메모리 반도체는 다품종 소량 생산해 부가가치가 높지만 투자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당장 수익을 낼 수 없는 구조다. 삼성전자는 1997년 비메모리 반도체를 전담하는 시스템LSI 사업부를 신설해 꾸준히 투자해온 결과 2002년 디스플레이구동칩(DDI)이 1등으로 올라섰다. 최근 1, 2년 사이 스마트카드용 IC, 미디어플레이어 칩 제품도 정상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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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LCD·TV 시장 석권
이 전 회장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다음 선택은 액정디스플레이(LCD). 삼성전자는 95년 기흥 공장에서 첫 LCD 제품을 생산했지만 불량률이 50%에 달하는 등 초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게다가 삼성을 경계한 도시바, 샤프 같은 일본 선진업체들이 값을 내려 패널 값이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이때 소집한 대책회의에서 일부 경영진은 “반도체로 번 돈을 다 까먹으려고 하는 것이냐”고 LCD 사업을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전 회장은 오히려 LCD를 10년 뒤 먹고살 주 사업으로 선택했다. 이후 일본 업체들의 전략을 벤치마킹하고, 순이익보다 더 많은 연구개발비를 투자하면서 2002년 LCD 시장마저 석권했다. 반도체의 뒤를 이을 21세기 먹거리를 개발한 셈이다. 90년대 초반까지 소니의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업체였던 삼성전자가 2004년 충남 아산 LCD 공장에서 소니와 합작 투자사인 S-LCD 출범식을 한 것은 세계시장에서 달라진 삼성전자의 위상을 말해준다. 20년 동안 삼성그룹을 이끌면서 이 전 회장은 많은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세계 1등 제품 11개를 완성하기까지 가장 어려웠던 것은 국내 1위라는 자만에 빠진 직원들의 눈을 해외 경쟁시장으로 돌리는 일이었다. 그는 ‘1등주의’에 젖어있는 직원들에게 쉴새 없이 위기의식을 일깨웠다. 또 그는 미래 전자시장의 변화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5년, 10년 전부터 변화에 대비했다. 이 전 회장은 어릴 때부터 전자제품을 해체·조립하는 일을 즐겼다고 한다. 92년 LA 출장 중 갑자기 사라진 이 전 회장이 호텔방에서 외제 명품 VTR을 ‘뜯어보고’ 있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93년 디자인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후쿠다 보고서’를 접한 뒤로 강조해온 ‘디자인 경영’도 최근 빛을 보기 시작했다. 2006년 TV 시장에서도 1위를 달성한 것이다. TV나 모니터 같은 세트 제품은 D램처럼 기술로만 승부할 수 없다. 소비자들이 직접 선택하는 제품이기 때문이다. 2000년대 중반까지 ‘TV 하면 소니’라고 할 정도로 소비자들의 소니에 대한 충성도는 높았다. 36년 동안 TV 사업에 매달렸음에도 이 전 회장이 미국 양판점에서 참담함을 느낀 이유다. 하지만 최근 아날로그(브라운관) TV 대신 디지털(PDP, LCD) TV가 각광 받으면서 삼성전자는 기회를 잡았다. 소니의 빈틈을 타고 디지털 시장을 노린 것이다. 이 전 회장이 국제올림픽조직위원회(IOC)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세계 각국에 대대적인 스포츠 마케팅을 펼친 것도 주효했다. 삼성전자는 이 외에도 무선 휴대인터넷 서비스인 와이브로 기술을 개발해 세계시장을 선점했다. 이 사업은 2006년부터 이탈리아, 일본, 브라질 등 여러 나라에서 상용화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는 것처럼 반도체, TV, 와이브로 등 11개 제품 모두 이 전 회장에게는 매우 특별할 것”이라며 “그가 자식과도 같은 1등 제품을 말하면서 눈물을 보인 이유를 알 것도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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