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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골드워터(왼쪽 사진 오른쪽)는 미국 서부지역을 ‘정의로운 반란’의 본거지로 여겼다. 레이건(1980년 공화당 전당대회)은 국민적 호응을 얻지 못한 골드워터 식의 의분을 매력적인 미소로 표출해 대선에서 승리했다. |
1986년 미국 애리조나주의 연방 하원의원 존 매케인은 대담한 선언을 했다.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당시 49세인 매케인은 하원의원이 된 지 4년도 안 된 상태였다. 또 애리조나주의 주민이 된 지는 6년, 열성적 공화당원이 된 지는 10년이 안 된 시점이었다. 그러나 그의 출마 선언에서 더 대담한 점은 은퇴하는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의 빈자리를 자신이 메울 수 있다고 믿었던 사실이다. 골드워터는 애리조나 정계의 최대 거물일 뿐만 아니라 현대 보수주의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의 상원의원직을 물려받으려는 정치인이라면 자신이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위대한 혁명 전통을 계승할 만한 사람이라고 자부할 수 있어야 했다. 분명히 매케인은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훗날 집필한 자서전에서 매케인은 골드워터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진정으로 독립적인 정치인이었다. 민주당의 애리조나주 정계 장악, 그리고 동부 기성세력의 공화당 장악을 깨버린 인물이었다. 의분을 느낄 줄 아는 원칙주의자이자, 극도로 독립적이고 애국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골드워터는 매케인이 되고 싶어했던 바로 그런 유형의 보수주의자였다. 매케인은 그해 가을 골드워터의 상원의원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매케인은 자신에 대한 골드워터의 생각이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골드워터는 매케인을 각별히 따뜻하게 대한 적이 없었고, 상원의원 자리를 매케인에게 넘겨준다는 생각엔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드러냈다. 자서전에서 매케인은 이렇게 썼다. “골드워터는 나의 원칙과 본능에 딱 들어맞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내게도 그런 식의 호감을 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다.”매케인은 자신이 보수주의 운동의 가장 영웅적인 계승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는 그 점이 의문이었다. 골드워터의 불만은 매케인이 서부지역 출신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골드워터는 서부가 ‘정의로운 반란’의 본거지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보수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그에게 서부는 동부의 부패한 정치 세력과 싸우는 성지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우리가 동부 해안지대를 톱으로 잘라내 대서양으로 떠내려가도록 할 수만 있다면 미국이 좀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다.” 그는 군부 기성세력 가문의 후손이자 동부에서 교육 받은 매케인에게는 서부의 요소가 부족하다고 우려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된 매케인은 아직도 자신에 대한 골드워터의 생각이 틀렸음을 입증하려 애쓴다. 매케인은 소년 시절부터 위대한 남성다움이란 이미지에 이끌렸다. 용감한 행동으로 영광을 누리거나 전사한 사나이들의 얘기에 심취했다. 그가 가장 좋아한 작가는 헤밍웨이고, 그의 영웅은 시어도어 루스벨트다. 불굴의 의지를 요구하는 예측 불능의 삶이야말로 유일하게 가치 있는 인생이라고 가르친 위인들이다. 매케인은 보수주의를 이념보다는 생활방식으로 받아들이면서 드라마와 모험으로 가득하며 불꽃처럼 격렬한 정치를 추구했다. 그런 성향은 매케인을 현대 보수주의의 위대한 지도자들에게로 인도했다. 윌리엄 F 버클리 2세, 골드워터, 로널드 레이건, 뉴트 깅리치 등 가장 성공적인 보수주의 정치가들은 항상 우파 세력의 존립 목표를 악에 대항하는 서사시적이고 절박한 투쟁으로 규정했다. 매케인이 예상 밖으로 알래스카 주지자 세라 페일린을 부통령 후보로 선택한 일은 극적인 정치를 즐기는 자신의 취향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러나 보수주의의 극적인 전통을 중시하는 매케인의 성향은 우파 진영 안에서 많은 문제를 자초하기도 했다. 레이건 혁명이 시작된 지 약 30년이 지난 지금 보수주의는 공화당에서 유일한 ‘교회’가 됐다. 정통적 믿음에서 벗어나길 즐기는 매케인으로선 불행이었다. 애당초 자신을 보수주의로 이끌었던 도발적인 천성 때문에 오늘날 그는 보수주의 운동에서 소외돼 있다. 8년간의 부시 치하에서 많은 상처를 입은 유권자들은 변화를 열망하면서도(지난주 버락 오바마의 민주당 대선 후보 지명대회가 열린 인베스코 필드에 8만 명이 운집한 것을 생각해 보라) 우파 진영에서 더 많은 모험적인 조치가 나올까 봐 경계한다. 올가을 본격적인 유세전이 시작될 때 매케인의 최대 과제는 보수주의자를 비롯한 국민의 삶에 더 많은 드라마가 필요하다고 설득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현대 보수주의 운동은 늘 스스로를 낭만적인 투쟁과 동일시해 왔다. 시사 주간지 ‘내셔널 리뷰’를 창간한 현대 보수주의 운동의 시조 버클리는 어린 시절부터 ‘반란’을 배웠다. 뉴욕주 더치스 카운티 소재 밀브룩 스쿨 재학 시절 그는 자신의 언론 자유를 억압했다며 한 교사를 고소했다. 첫 저서인 ‘예일의 신과 인간(God and Man at Yale)’에선 나약한 지식인들을 비판했다. 또 골드워터는 크렘린의 화장실을 향해 핵탄두를 날려보내겠다고 협박한 적이 있다. 그는 간단한 보수주의 교리를 내걸었다. 개인에 대한 존중, 정부에 대한 불신, 세계에서 유일하게 미국만이 선하고 계몽된 나라라는 신념 등이다. 현대 보수주의의 선구자들과 추종자들은 국가라는 사탄을 상대로 서사시적인 투쟁을 하는 외로운 전사들로 자처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감성적인 언어를 동원했다. 1964년 실패로 끝난 골드워터의 대선 운동 막바지에 TV 찬조연설에 나선 레이건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과 저는 운명의 여신과 랑데부했습니다. 우리는 전 세계 인류에 마지막으로 남은 최선의 희망을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습니다. 또는 후손들로 하여금 1000년간의 암흑기 속으로 첫 발을 내딛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약 10년 뒤 레이건은 똑같이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매케인의 관심을 사로잡게 된다. 매케인이 이 보수적인 캘리포니아주 지사를 처음으로 알게 된 건 TV나 영화를 통해서가 아니었다. 베트남전에서 오랜 세월 베트콩의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동료 미군 포로들이 감옥 벽을 두드려 보낸 모스 부호를 통해서였다. 그들은 레이건 주지사가 미군 포로들의 비참한 처지에 각별한 관심을 보인다고 전했다. 매케인은 그때부터 레이건을 기억하고, 감옥에서 풀려나 미국에 돌아온 뒤 그와 교류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매케인에게 레이건은 아직은 현실세계보다는 상상 속의 지도자이자 믿음과 희망의 대상이었다. 보수주의는 레이건 치하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를 누렸다. 배우 출신인 그는 국민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레이건 혁명은 강력하고 감성적인 이미지들 사이의 선택으로 보수주의 이념을 제시해 정치적으로 성공했다. 예컨대 불안감 대(對) ‘상쾌한 미국의 아침’, 혹은 ‘악의 제국’ 대 ‘언덕 위의 찬란한 도시’ 같은 이미지였다. 레이건은 국민적 호응을 얻지 못한 골드워터나 버클리 식의 의분을 매력적인 미소로 표출해 대선에서 승리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보수주의 하면 따분한 정장 차림에 머리가 벗겨진 백인 남성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는 레이건 혁명의 체제 전복적인 에너지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하원의원 시절 매케인은 레이건의 폭넓은 보수주의를 목격하고 이를 모방하려 했다. 매케인은 레이건 시절을 자주 언급하면서 그가 감세 정책을 추구하고 정부 주도 프로그램을 싫어한 것에 경의를 표한다. 세계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위상에 대한 레이건의 웅대한 비전을 묘사할 때 특히 매케인의 눈은 빛이 났다. 매케인은 “미국의 위대함에 대한 확신, 미국 예외주의에 대한 믿음, ‘언덕 위의 빛나는 도시’에 대한 잦은 언급 등 레이건이 웅변적으로 제시한 비전”을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매케인의 정치활동은 대부분 레이건이 은퇴한 뒤 이뤄졌다. 출중한 지도자를 잃은 보수 세력은 레이건의 정치유산을 철저히 따를 것을 요구했다. 거기에 대한 반발은 용납되지 않았다. 심지어 새로운 보수주의 운동가들이 볼 때는 선구자인 골드워터조차 충분히 순수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자유주의는 상원의원직에서 은퇴한 뒤 더 굳어졌다. 그는 낙태와 동성애자 권리를 강력히 지지했다. 그리고 공화당 내 기독교 우파의 득세를 개탄했다. 이는 사회적 보수주의자들을 자극했고, 그들은 골드워터의 이름을 보수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하지만 마침내 골드워터와 교분을 맺은 매케인은 자신의 옛 영웅인 그의 명예를 지키려 애썼다. 그러나 매케인은 우파 진영에서 다른 정치인의 순수성을 보증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클린턴과 부시 행정부 시절 매케인이 정통 보수주의 원칙에 어긋난 행동을 한 목록은 매우 길다. 예컨대 그는 총기 규제법의 허점을 메우는 법안에 찬성했다. 환자의 권리를 강화하는 법안에 서명하고, 줄기세포 연구를 지지했다. 그가 부시의 감세 법안에 반대한 것은 가장 유명한 반란일 듯하다. 이런 표결 기록만이 보수진영의 분노를 산 게 아니었다. 그들을 정말로 화나게 만든 건 매케인의 반란에 원칙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는 어떤 때는 당 원로들이 정통성에 지나치게 얽매인다고 비난하다가, 어떤 때는 그들이 정치적 편의주의란 명분으로 보수주의 원칙을 양보했다고 책망한다. 예컨대 1996년 통신산업 규제 강화 입법 과정에서 당 지도부가 중개인 노릇을 하자 매케인은 격노했다. 매케인은 그 법안에 반대표를 던진 유일한 공화당원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곤 골드워터가 의분을 느낄 때 자주 사용하던 표현을 인용해 “원칙을 저버리고 타협한다”며 지도부를 비판했다. 그는 당 지도부의 접근방식을 “나쁜 타협이 무(無)타협보다는 낫다”는 식이라고 조롱했다. 그러나 우파의 시각에서 볼 때는 오히려 매케인이 너무 쉽게 정통 보수주의 원칙을 저버린다. 비판자들은 정치자금제도 개혁에 관한 매케인-파인골드 법안을 그가 열렬히 밀어붙인 것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보수파 지도자들은 매케인이 유일하게 일관성을 보이는 것은 지도부에 반항하면서 즐거워하는 태도뿐이라고 비꼰다. 2000년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그는 복음주의파 목사인 제리 팔웰을 “편협성의 대리인”이라고 지칭하면서 기독교 우파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냈다. 또 “우리 공화당은 로널드 레이건의 당이지 팻 로버트슨 목사의 당이 아니다”라고 질타했다. 매케인이 그런 발언을 한 곳은 바로 로버트슨의 고향인 버지니아 비치였다. 올해 매케인은 마침내 보수주의 운동의 지도자 역할을 꿰찼다. 이를 위해 한때 자신이 중시했던 반란의 전통마저 부정했다. 오바마와의 싸움에선 공화당의 진부한 보수적 유세 방식을 구사한다. 측근들은 매케인의 투쟁정신을 당 내부가 아닌 오바마 쪽으로 돌리려고 애쓴다. 그러곤 오바마를 현실을 모르는 엘리트주의자라고 매도한다. 이런 식의 공격이 효과를 낼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선 전복적이거나 극적이거나 새로운 면을 느낄 수 없다. 더욱이 매케인은 이제 보수진영의 한 집단, 즉 신보수주의 세력에만 ‘남성다운 드라마’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신보수주의자들의 정책이 버클리나 골드워터의 세계관에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해도 말이다. 사회적 보수주의자이자 감세론자인 세라 페일린을 부통령 후보로 선택한 것조차 매케인에 관한 우울한 진실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 매케인은 원칙을 위한 드라마보다는 드라마 자체를 위한 드라마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선 아직도 오래된 보수주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레이건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그의 눈이 반짝일 때만 그런 측면이 보인다 해도 말이다. 하기야 레이건은 원칙이 명확하고 극적인 수사법을 동원하는 보수주의 전통을 활용했다. 그런 방식으로 복잡하고 타협이 필요한 현실정치에 성공적으로 대처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이념적 순수성을 요구하지 않았다. 자신의 원칙에 대한 확신이 강했기 때문에 추종자들 사이의 반대 의견도 허용했다. 그는 1981년 세금을 감면했지만 83년과 84년엔 세금을 인상했다. 낙태 반대론을 주창했지만 이를 위해 의미 있는 법안을 내놓은 적은 없다. 그는 언제 자신의 원칙을 고수해야 하고, 언제 정치 현실에 순응해야 할지를 알았다. 오늘날 매케인이 우파의 열성분자들에게 굴복하고 영합할지라도 그는 큰 원칙과 작은 타협을 구분했던 레이건의 통치술을 기억하고 있다. 만약 매케인이 대통령이 되면 그는 요즘 득세하는 기독교 우파에 대항해 골드워터의 노선을 복권시킴으로써 보수주의 운동을 부활시킬지도 모른다. 보수주의가 본래의 극적이고 역동적인 뿌리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로 스릴 만점의 드라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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