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계체결 부품 창고의 혁신
삼성은 아이마켓코리아(IMK), LG는 ‘서브원’이란 대형 구매대행사를 계열사로 거느리고 그룹에 필요한 사무용품과 볼트·너트 등 소모성 자재(MRO)를 조달한다. 그러다 보니 그룹사 물량(captive market)이 거의 90%를 차지한다. 그러나 코오롱 계열의 MRO 구매대행사인 KeP(2008년 예상 매출 3500억원)는 그룹사 물량 의존도가 10%도 채 안 되지만 업계 4위를 달린다.
그만큼 시장 개척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우석 KeP 사장은 “진정한 의미에서는 우리가 시장점유율 1위 업체”라고 말했다. 이 회사의 선전에는 회사의 최대 고객으로 꼽히는 공작기계 분야 세계 3위 업체인 두산인프라코어(전체 매출 3조원)의 도움이 컸다. 중소 협력업체들로부터 소모품 자재를 공급받아 두산인프라코어에 대량으로 납품해온 이 사장은 고객(두산)에 어떤 부가가치를 추가로 제공할 수 없을까를 늘 고민했다.
그러던 중 2006년 초 볼트·너트 등 기계체결 부품전문 유통회사인 한국화스너㈜의 김덕한(58) 대표에게서 눈이 번쩍 뜨이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김 대표가 스위스계 합작투자법인인 한국보싸드 대표 시절 한국형으로 개발에 성공한 전자저울식 재고관리(DSL) 시스템을 제안해온 것이다.
DSL 시스템은 그간 재고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던 기계체결 부품의 무게를 전자저울로 달아 언제 어디서든 컴퓨터 화면으로 재고 파악과 발주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김 대표는 그 공로로 2004년 한국물류대상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이 사장은 즉각 두산 측에 재고관리 개선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원가절감 효과가 크다는 점을 설득했다.
공작기계 생산업체의 특성상 볼트와 너트의 중요성이 어느 업종보다 큰 두산으로서는 그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두산도 그간 그 중요성에 비해 하찮게 취급되던 기계체결 부품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시스템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산라인의 효율을 개선해온 Lean TF팀의 관계자(두산 측은 내부 사정을 이유로 실명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는 DSL 시스템을 두산 중앙창고 관리에 접목해 보자는 의견을 낸 뒤 상부의 허락을 얻어 지난해 11월부터 1년 넘게 생산 현장에 이를 적용해왔다.
그는 “작업자의 업무 효율이 좋아진 점까지 감안하면 잠재적으로 연간 수십억원 정도의 비용절감 효과가 생겼을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의 중앙창고는 훨씬 가벼워졌고 속도감 있게 대응할 수 있게 됐다.” 현재 두산인프라코어는 중앙 물류창고에 보관된 1000여 가지 품목 중 60~70%가 체결부품이며 개수로는 거의 3000만 개에 이른다.
주요 부품을 중심으로 현재 전자저울 402개가 설치돼 있다. 두산의 생산관리를 총괄하는 한 임원은 “그때그때 재고를 파악하던 기존의 ‘스폿 관리’에서 체계적이고 자동화된 재고관리 체제로 바뀌면서 작업자의 이동 및 결품으로 인한 조립대기를 최소화할 수 있었고, 재고 회전율을 두 배가량 높였으며, KeP 및 한국화스너 등 협력사들과도 동반성장을 위한 전략적인 파트너십을 구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사실 기계체결 부품은 그간 재고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측면이 많았다. 볼트·너트류는 단가도 상대적으로 싸고 흔히 기계의 핵심부품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에 자재관리 측면에서 등한시됐기 때문이다. 창고에 수북이 쌓아뒀다가 필요하면 가져가고 재고가 바닥나면 적당한 때에 발주하는 식이었다.
그 결과 사용하지 않는 부품은 많이 쌓이고, 정작 필요한 부품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다른 대기업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생산관리를 전공한 한양대 경영대학의 김승철 교수는 “체결 부품은 표준화도 덜 돼 있고, 상대적으로 중요성도 낮아(흔히 C급 자재로 분류) 관리가 등한시돼 왔지만 기계의 품질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요소”라며 “우리는 아직 기계체결 부품 분야가 ‘사각지대’여서 이를 체계화시키고 효율화시키면 국내 기계산업의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으레 그렇듯 변화에 저항도 따랐다. 앞서 말한 두산의 임원은 “전에는 재고가 여러 군데 수북이 쌓여 있었지만 그걸 줄이는 과정에서 작업자들 간에 오히려 불편하다는 불평도 많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로 중복 보관하던 것을 전자저울이 부착된 박스로 깨끗이 정리하고 처음 몇 달간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은 완전히 안착됐다.
그는 “DSL 재고관리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확보된 이상 이 시스템을 계속 이용할 작정”이라고 덧붙었다. 그런 신뢰감은 협력사에 대한 보답으로 이어졌다. 지난 5월 두산은 한국화스너 측에 “충분한 단가 인상”을 해줬다. 한국화스너의 김 사장도 이에 화답해 미국의 유명 볼트·너트 제조사인 운브라코 한국지사장 근무 시절에 터득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볼트 제작 과정을 간소화한 합체형 볼트(일명 플랜지형 볼트)의 개발에 나서 대기업의 부품조달 비용 절감까지 돕고 있다.
사실 중소기업의 노하우는 대기업의 경쟁력을 키우는 원천이다. 일례로 완제품 제작에 소요되는 부품 수는 항공기가 10만 개, 자동차가 2만 개, 디지털TV가 700여 개에 이르며 제조업 생산원가의 63%를 차지한다. 글로벌화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부품은 결국 중소기업이 만든다.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상생협력 필요성이 더욱 커지는 이유다.
그렇다고 ‘상생관계’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전유물은 아니다. 중견기업인 KeP는 한국화스너와의 협력관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중소기업들에 걸맞은 구매대행 방법을 개발했다. MRO 구매를 대행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대기업에 어울리는 모델이지 중소기업엔 어울리지 않는 모델이라는 판단에서다(실제 두산의 구매팀 안에 KeP 직원이 들어가서 일하며 자재 구매를 대행해 준다).
그러나 중소기업은 어디서 무엇을 사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다고 KeP 직원이 중소기업 안에 머물면서 구매를 대행해 주기엔 무리가 따른다.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중소기업에 맞는 한국형 ‘Big Vender’ 모델을 꾸준히 개발해왔고 그 서비스를 시작했다”고 이 사장은 말했다.
바로 중소기업이 매달 필요로 하는 소모성 자재에 대한 분석을 해주고 가장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하루에 한두 차례씩 차로 직접 배송해 주는 시스템이다. “이런 서비스는 우리가 세계 최초”라는 그는 “이 어려운 시기에 한 푼이라도 원가를 절감해야 하는 처지의 중소기업들에 맞는 모델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대기업이든, 중견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상대에 대한 배려와 상생을 모색할 때 나온다.
조달·재고관리‘사각지대’ 확 바꿨다 Q&A 김덕한 한국화스너 대표 “자체 실험실 갖추고 품질 관리” 김덕한 한국화스너 대표는 볼트·너트 등 기계체결 부품의 선진형 유통에 ‘올인’한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다. 미국 메릴랜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그는 잠시 독일계 무역회사를 거쳐 1990년대 미국계 기계체결 부품 제조사인 운브라코 한국지사장, 스위스의 세계적인 기계체결 부품 유통사인 보싸드와 합작한 한국보싸드㈜의 대표를 거쳤다. 국내 최대 공작기계 제조사인 두산인프라코어에 전자저울식 재고관리(DSL) 시스템을 납품해 큰 호응을 얻은 그를 강태욱 기자가 만났다. 한국형 DSL 시스템을 개발한 이유는? 볼트·너트류는 소모품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기술품목’이다. 선진국에선 이 분야에서도 전문적인 유통회사가 있다. 역사가 200년이 된 스위스 보싸드사는 자사가 납품하는 대기업의 재고량까지 파악해 알아서 공급해 주는 시스템(VMI, Vendor Managed Inventory)을 가동한다. 삼성·현대 등은 특히 자동차업계를 중심으로 선진적인 재고관리 시스템을 가동하지만 자동차 분야를 제외하면 기계체결 부품의 유통·재고관리는 아직 사각지대다. 국내의 기계체결 부품 제조와 유통엔 어떤 문제가 있나? 200~300개에 이르는 국내 업체는 규모가 영세해 신기술을 개발하려는 모티브가 부족하다. 아직도 30년 전과 큰 차이가 없다. 그렇다 보니 국내 체결부품의 60%는 저가 중국산이 차지한다. 그러나 우리는 소규모 유통업체지만 체결 부품의 자체 실험실까지 갖추고 품질관리를 하며 제조사와 공동으로 신제품도 개발한다. 현재 두산에 2000종이 넘는 제품을 납품한다. 선진국의 기계체결 부품 유통 실태는 어떤가? 일본만 해도 기계체결 부품을 전문적으로 유통하는 대형 회사가 100여 군데나 있지만 한국은 거의 전무하다. 제조 분야도 마찬가지다. 영국·미국·독일·프랑스 등 선진국은 모두 볼트와 와셔를 하나로 묶은 합체형 제품으로 옮겨가 원가절감에 성공했지만 우리는 크게 뒤처져 있다.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의 상생에는 어떤 장애물이 있나? 외국 기업들은 중소기업에 발주할 때 대개 최소한 6개월 정도의 여유를 두고 장기발주를 한다. 그러나 한국은 보름이나 한 달 발주가 대부분이다. 그렇다 보니 중소기업 입장에선 생산 코스트도 올라가고 원자재 확보도 어렵다. 상호간의 신뢰와 공생의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기계체결 부품 분야가 발전하려면 뭐가 필요한가? 사실 VMI는 기계체결 부품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의 부품에 해당된다. 우리가 개발한 전자저울 시스템을 통해 유통과 조달 과정을 합리화시키면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 유통업체에도 도움이 되며 일선 중소제조업체들에도 도움이 된다. 그렇게만 된다면 기계체결 부품을 제조하는 중소업체와 우리 같은 전문 유통업체, 대형 유통업체, 그리고 대기업 간의 ‘원-윈-윈 상황’이 된다. 두산인프라코어에서 DSL 시스템을 도입하는 데 장애물은 없었나? 두산인프라코어 창원공장의 물류창고에 들어 있던 기존 설비를 들어내고 재배치하는 데 꼬박 사흘이 걸렸다. DSL 시스템에 기초한 새로운 조달관리 체계가 자리 잡는 데도 한 달이 소요됐다. 새로운 시스템을 적용하는 데 불평도 더러 있었지만 두산 측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기계체결 부품의 유통 합리화가 갖는 의미는? 어떤 기계와 장비도 체결 부품이 없이는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다. 그 효율적인 생산뿐만 아니라 효율적인 조달관리에 대한 정책입안자들의 큰 관심이 요구된다. 조달과 재고 합리화가 전 산업으로 확산된다면 정부가 추구하는 지식경제형 산업 구조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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