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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Way My Life ] “욕망 줄이고 사람과 친한 집 지어야”

[My Way My Life ] “욕망 줄이고 사람과 친한 집 지어야”


인터뷰가 있던 날 서울 북촌의 오후는 눈이 맵도록 추웠다. 대목 신영훈 선생의 ‘한옥문화원’에 도착해서야 굳은 몸이 풀리기 시작했다. 사랑방에 꼿꼿이 앉은 그 품새가 마치 잘 지은 한 채의 한옥을 연상케 했다.

신씨는 1934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올해 75세, 그가 한옥과 연을 맺은 지 반세기 이상 흘렀다. 그는 한옥에 관한 한 ‘이론과 경험의 조화를 이룬 예술가’라는 세간의 평을 들어 왔다.

하지만 그는 늘 경험과 현장을 더 중시하는 예인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옥은 손수 지어 봐야 그 진가를 알아. 설계도만으로는 몰라.”

그는 임천·전형필·최순우 등 당대의 문화재 대가들에게서 한옥 문화의 진수를 이어받았다. 그의 스승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또한 현장에서 일어서서 현장 속에서 일가를 이뤘다.

“한옥은 창문의 크기와 위치를 정할 때도 사람을 먼저 생각해. 어깨너비와 얼추 들어맞는 크기, 사람의 체형과 눈높이를 고려해 위치를 정하거든. 안방 아랫목 야트막한 창을 만들 때도 앉아서 팔꿈치를 편히 얹어 놓을 만한 높이를 구한다고! 사람하고 친한 집을 만드는 거지.” 그는 대뜸 한옥의 멋과 맛, 그 인간 친화적인 성정(性情)을 이렇게 설명했다.

두 칸 남짓 사랑방엔 맞은편 벽이나 문 말고 걸릴 게 아무것도 없다. 한지로 도배한 바닥에선 해맑은 향이 나오는데, 건너편 은은한 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절로 집중력이 생기는 듯하다. 자연 이곳에서 옛 선비들의 궁리가 깊어지고 생각이 익어 갔을 것이다. 경박함을 경계하는 습성이 훈육됐을 것이다.

“부친이 개성에서 장사로 일가를 이뤘어. 개성에선 알부자 소리를 들었지. 열 살 때 새로 지은 2층 한옥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해. 그 집 지을 때 도편수 역할을 했던 고종사촌을 도와 허드렛일을 했는데, 그것이 내가 맺은 한옥과의 첫 인연이지.”

그는 개성 시내에 있던 옛집을 찾아볼 심산으로 개성 관광을 두 번이나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나 엄격히 제한된 개성 관광으로 인해 끝내 옛집을 방문하지 못했다. 지척에 옛집을 놔두고 들러 보지 못한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그는 그냥 허허 웃고 말았다.

“두 번째는 50m 앞까지 갔었어. 관광버스가 우리 집 골목 앞에서 펑크가 난 거야. 그것참, 기막힌 기회였는데…. 내가 살짝 내려 골목 안을 기웃거리니까 북측 안내원이 막아서는 거야. 어찌나 야속했던지. 그 골목길만 접어들면 우리 집을 볼 수 있었는데 말이야. 나중에 안내원한테 물어봤더니 그 집이 여전히 그대로 있다고 하데.”

신씨의 호는 ‘목수(木壽)’다. ‘손 수’ 자 대신 ‘목숨 수’를 썼으니 우리가 흔히 부르는 목수의 의미는 아니다. 집 짓는 일을 기획하고 청부해 설계와 시공을 총괄 관리, 결과를 책임지는 일을 ‘지유(指諭)’라고 하는데 집 지을 때의 그의 역할이 바로 이 지유다. 그러나 목수 일을 모르고 어떻게 지유가 될 수 있겠는가?


신영훈 선생이 지은 강화도의 한옥.

그는 목수와 지유의 일을 굳이 구분하지 않는다.“석굴암 보수 공사가 내 경력의 시작이었어. 임천 선생이 총책임을 맡았고, 나는 조수로 따라다녔지. 전실이 있느냐 없느냐를 두고 굉장한 논란이 일었던 공사였는데 결국 전실이 있었다는 임천 선생의 판단이 옳았어. 전실을 만들고 나니 석불의 빛이 살아났고, 경내 습기가 사라졌거든.”

지난해 숭례문이 불타던 날 그는 독일 브레멘의 한 대학에 있었다. 귀국 직후인 2월 17일 불탄 숭례문 현장으로 달려갔다. 40여 년 전 중수 과정에서 손수 부재를 매만졌고, 지날 때마다 항상 마음으로 문안했던 큰 어른 같은 건물이 시커먼 재로 변한 모습에 그의 가슴도 무너졌다.

“60년대 중수할 때 보니까 누각의 나무 부재들이 임진왜란 이전 것도 있고 이후 것도 있고, 다 만들어진 시점이 달랐어. 다듬거나 치수를 잰 방식도 다르지. 내가 중수에 참여했을 때 장인들은 대대로 전해진 전통 공구를 썼고, 척도도 옛날 것을 썼었지. 한옥 자체가 시대별·지역별·장인별로 개성이 뚜렷한 건물이어서 완벽한 부재의 복원은 어렵겠지. 그러나 현시점에서 건축사적 맥락으로 그간의 연구 성과들을 온전히 반영해야 하겠지. 정신적 기반을 다시 세운다는 심정으로, 정말이지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이 위대한 건축물을 중건해야지.” 60년대 숭례문 보수 공사, 이후 송광사 중창, 경복궁 복원, 황룡사 9층 석탑 이래 최대 규모인 충북 진천 보탑사의 3층 목탑 건설 등 굵직한 문화재 복원에 그의 손이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그는 늘 “내 이름에 거품이 있다”고 겸양한다.

그는 자신보다 자신이 이끌었던 ‘드림팀’의 완벽했던 호흡을 내세웠다. 설계 박태수, 시공의 주무 김영일, 도편수 조희환, 기록 김대벽, 건축도예 조정현, 단청의 한석성씨 등이 그의 드림팀을 구성했던 멤버다.

“우리는 늘 함께 일했어. 예를 들어 사진 기록을 맡은 김대벽씨의 경우 정말 어려운 작업을 잘도 해 줬지. 우리 한옥의 처마라는 것이 말이야, 그게 참 묘하거든. 처마는 이차원적인 곡선이야. 겉으로도 휘었지만 안으로도 휘어 있어. 그 내면의 곡선을 나는 글로, 그 사람은 사진으로 표현했는데 두 사람의 완벽한 호흡이 없었으면 결코 해내지 못할 작업이었지.”

그는 한국의 주택문화를 압도하고 있는 아파트 건축 광풍에 대해 서글픔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보기에 아파트라는 집은 ‘되바라진 형식’에 ‘사람을 질식시키는 재료’로 이뤄진 거대한 흉물이다. 그 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거니와 좁은 땅에서 많은 집을 짓기 위한 고육지책이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도 그는 역정을 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사랑방 이야기를 꺼내 설명했다. “한옥에는 사랑채가 있어. 주인과 손님을 가르는 공간이야. 자연스럽게 분리되는 것이지. 아파트의 구조는 손님과 주인 가족이 분리되는 공간이 없어. 객을 청하기 어렵고, 객과 주가 자연스럽게 어울릴 공간이 없어. 사람은 오직 경제적인 효율만 따지며 살 수 없는 존재야. 욕망을 줄이고, 그 대신 사람에게 이로운 집을 이젠 만들어야 해. 그 해답이 바로 한옥 안에 있어.”

63년 당시 박정희 정부는 숭례문 중건 공사를 시작했다. 그때도 임천 선생이 중앙감독관을, 신영훈 대목이 현장감독관을 맡았다. 숭례문은 6·25 때 직격탄을 맞아 임시 복구 공사를 했으나 건물 전체가 한쪽으로 기우는 등 불안해 전체를 뜯어내고 석축부터 다시 쌓아야 했다.

채 서른이 안 된 청년에게 국보 1호 숭례문을 헐고 새로 짓는 사업이란 정말이지 소중한 기회였을 것이다. “혼자 힘으론 분명 무리였겠지. 그러나 함께 참여한 기술자 중엔 일흔이 넘은 나이의 임 목수, 배 목수 같은 어른이 계셨는데 이분들을 한데 모으니 일이 저절로 됐어. 노인들은 나를 데리고 놀다시피 했지. 감독님 소리는 한 번도 들은 적도 없고 ‘야 이놈아, 네가 감독이냐. 감독이면 이것 한번 그려 봐라’. 뭐 이런 식이었어. 난 감독이 아니라 한참 어린 조수에 불과했지. 그분들 말씀 듣고 무엇이든 직접 해 보려 했으니 숭례문 보수 공사장은 나에겐 학교였던 셈이지.”

우리가 대목 신영훈의 인생에 한 번 더 탄복하게 되는 것은 그의 놀라운 기록벽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전국에 걸쳐 있는 자신의 작업 과정과 결과를 꼼꼼하게 기록해 무려 4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 70년대 초 월간지 ‘ 공간 ’에 ‘고건축 단장’을 30회 연재한 것이 그 시작이다.

저술의 방대한 양도 양이려니와 그가 뿌린 거대한 문화운동의 씨앗은 한국학의 연구 방향에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신씨는 아파트가 범람하고, 공과대 건축학과에서 한옥을 가르치지 않으며,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모두 서양식으로만 지어지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천근만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결국 한옥의 인간다움, 숨겨진 기능과 효용, 환경친화 정신이 반드시 되돌아올 것이란 희망도 여전히 품고 있다. “한옥에는 은근히 끄는 매력이 있어. 들어앉으면 심신이 편안하고 넉넉해지거든. 좁은 공간이라도 답답지 않고 오밀조밀하면서도 운치가 있어. 한옥은 불편하다는 것도 편견이야. 잘못 지은 한옥이라서 불편할 뿐이지. 살다가 허물어도 그 재료가 모조리 자연으로 돌아가니 쓸데없는 게 있어야지! 몸이 바닥에 척 붙어 단잠이 솔솔 들고 자고 나면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지. 뒷산과 옆집이 신기하게 잘 어울리니 그게 바로 진짜 집이라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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