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카지노업체 모니터 절반이 우리 제품”
“미국 카지노업체 모니터 절반이 우리 제품”
코텍 기술연구소에서 최신형 슬롯머신용 모니터를 개발할 방법을 논의 중인 연구원들. |
2000년 말 국내 한 유명 탤런트의 가족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100억원대의 잭팟을 터뜨려 뭇 사람들의 부러움을 산 적이 있다. 세계 최대 슬롯머신 제작업체인 미국 IGT의 ‘휠 오브 포춘’이란 게임이다. 그런데 이 게임기에 장착된 모니터는 국산이었다.
중소기업 코텍(Kortek)의 제품이다. 슬롯머신을 비롯한 게임기용 디스플레이를 주로 생산하는 이 회사의 모니터는 미국 전역의 카지노에 깔린 슬롯머신 두 대 중 한 대꼴에 장착됐다(세계시장 점유율 45%). 2위는 미국의 월스 가드너(25%), 3위는 한국의 토비스(16%)다. 요즘도 네바다주 리노에 위치한 미국 지사와 한국 본사를 바삐 오가며 일하는 최영근(50) 전무는 “세계시장 점유율로만 본다면 국내 어떤 대기업보다 낫다”고 말했다.
해외진출 성공의 첫 낭보는 1996년 2월 유럽에서 날아들었다. 최 전무는 유럽 최대 게임기 제작업체인 오스트리아의 ‘아트로닉(Atronic)’문을 두드렸다. 1987년 IBM이 개발한 ‘비디오 그래픽 표준(VGA)’의 솔루션조차 없어 일반 PC를 구입해 프레임을 다시 최적화하고 고생 끝에 개조한(당시로선 고해상도였던 640×480) 모니터를 준비해 갔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알프스 기슭의 그라츠시(市)엔 그날 따라 차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폭설이 내렸다. 우여곡절 끝에 그 제품을 들고 회사로 찾아가 시연을 한 뒤 87만 달러어치의 주문을 받아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찡하다”고 최 전무는 말했다.
87년 세주전자로 출발한 코텍의 세계시장 첫 진출이었다. 그러나 카지노 모니터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미국 시장은 유럽보다 ‘진입장벽’이 더욱 높았다. 게임문화의 차이 때문이다. 카지노산업이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미국에선 슬롯머신이 주종을 이루지만 유럽에선 일부 카지노를 제외하면 AWP(Amusement With Prize) 게임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흔히 유럽의 선술집이나 바 등에 설치된 AWP 게임기는 지불한도(payout limit)가 50유로일 경우 잭팟이 터져도 50유로밖에 못 받아가지만 슬롯머신은 지불한도가 없어 수천만 달러를 챙겨간다. 구매자 입장에선 위험부담도 그만큼 커진다는 얘기다. 결국 모니터에도 일반 모니터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엄격한 기준을 요구한다(정전기 규제가 극히 까다로운 이유도 그 때문이다).
미국에선 새로운 게임기를 출시하거나, 모니터 등 중요 부품을 교체할 때면 반드시 각 주 게임위원회(Gaming Commission)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승인에만 최소 3개월이 소요된다). 더구나 미국 시장은 아는 사람이 없으면 공략이 어려운 인맥 네트워크(‘Good Ole Boy’ 네트워크)에 크게 의존한다.
“유럽 시장을 1년이 채 안 돼 개척한 반면 미국 시장 진입에 3년 반이란 긴 시간이 필요했다”고 최 전무는 당시를 돌이켰다. 게임기용 모니터 시장은 한국의 코텍과 토비스를 비롯해 미국의 웰스 가드너, 세로닉스, 크리스텔, 엘로, 그리고 대만의 다퉁(大同), 영국의 펜트로닉스 등 8개사가 세계 전체 수요의 99% 이상을 공급하는 과점 형태다.
동시에 중소기업에 맞는 ‘틈새시장’이기도 하다. 우선 슬롯머신 제작업체가 설정한 제한된 공간(비디오 플랫폼)에 그들이 원하는 설계(customized design)를 해줘야 하기 때문에 맞춤형 다품종 소량생산이 될 수밖에 없다(따라서 대기업이 뛰어들기엔 부적합하다). “회사 창업자인 이한구(61) 회장은 20여 년 전 그 가능성을 보고 이 분야에 뛰어들었다”고 김추성 경영지원팀 과장이 말했다.
코텍은 2008년 전년 대비 63.7% 늘어난 1386억원의 매출을 냈다. 영업이익도 175.3% 증가한 201억원을 기록했다. 이처럼 놀라운 성장의 일등공신은 뭐니뭐니해도 카지노용 모니터다. 우선 전 세계에 공급하는 카지노용 모니터의 경우 슬롯머신에 탑재하는 LCD 모니터 수가 기존의 1~2개에서 4~5개로 늘어나는 추세여서 수요가 급증했다.
또 지난해 하반기엔 “패널 2장을 겹쳐 3D를 하드웨어적으로 구현하는 MLD(Multi Layered Display)를 세계 최초로 개발해 이 부문의 매출도 크게 늘었다”고 천성렬 기술연구소장(상무)은 말했다. 초고속 성장이 가능한 또 따른 이유는 상대적으로 높은 연구인력 비중이다. 코텍은 전체 직원 173명 중 43명(25%)이 연구개발직이다.
한국의 열악한 디스플레이업계 사정을 감안할 때 “직원 4명 중 1명이 연구개발직에 투입된 경우는 흔치 않다”고 대우증권의 이규선 애널리스트는 말했다. R&D 투자도 지난해 총 매출의 3%에서 올해 3.2%(60억원)로 늘어난다. 카지노 업계의 최근 추세도 유리하게 돌아간다. 게임기용 디스플레이가 대형화·고급화되면서 시장 규모가 지금보다 훨씬 더 커졌기 때문이다.
특히 기존의 브라운관형 CRT 모니터가 몇 년 전부터 급속히 LCD로 교체되는 추세다. 슬롯머신도 전에는 릴이 돌아가는 기계식에서 지금은 MLD를 통한 전자식으로 바뀌고, 디스플레이도 점차 터치스크린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렇다고 게임기 시장에 안주하겠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현재는 슬롯머신용 디스플레이가 주력이지만 앞으론 그보다 훨씬 더 비싼 의료용 모니터뿐만 아니라 지능형 멀티스크린 등 DID(디지털 정보 디스플레이)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겨갈 계획이다. 이를 위해 지난해 매출의 83.3%를 차지했던 카지노용 모니터의 비중을 올해엔 61.1%로 낮추는 대신 DID와 의료용 모니터 매출은 6.9%에서 32.2%로 늘려 잡았다.
그러나 게임기용 모니터는 TV처럼 완제품이 아니어서 그 존재감이 덜한 측면도 부인하기 어렵다. “3M은 8만여 가지 부품으로 매년 300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게 3M 제품인지 잘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최 전무는 말했다. 그러나 부품산업의 ‘숙명’도 코텍의 앞길을 가로막기엔 역부족일지 모른다.
시장의 크기를 계속 키워나가고, 새로운 분야를 선점해 승세를 굳히면 산업용 디스플레이의 블루오션이 열린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확신은 경험과 실력, 그리고 자신감에서 나온다. 코텍의 정문에 들어서면 눈에 띄는 구호가 이를 잘 말해준다. Let’s Go! World’s No.1 Display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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