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人 야전사령관의 우여곡절記
6人 야전사령관의 우여곡절記
치열한 패싸움 끝에 백(白)이 중원을 잡는 데 성공했다. 마지막 바둑알이 승부를 갈랐다. 많은 사람이 묘수였다며 감탄한다. 하지만 그뿐이랴.
마지막 한 알이 적진의 심장부를 초토화하기 전 던져진 다른 바둑알의 활약상에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이들이 흑(黑)의 야심 찬 반격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다면 마지막 한 알은 묘수가 아닌 ‘패착’으로 전락했을지 모른다.
한국의 차세대 원전 APR1400이 아랍에미리트(UAE)에 수출된다. 1978년 고리 원전 1호기를 가동한 지 30여 년 만의 쾌거다. 발주 금액은 400억 달러. 1980년대 리비아 대수로 2단계 공사금액 63억 달러를 훌쩍 넘는 사상 최대 수출 규모다. 많은 사람이 이명박 대통령의 ‘스킨십 외교’가 판세를 갈랐다고 말한다.
김쌍수 한국전력 사장의 통 큰 리더십과 거미줄 인맥이 한몫했다는 평도 나온다. 틀린 말은 물론 아니다. 원자력 시장은 민간 기업끼리 경쟁하는 만만한 곳이 아니다. 세계 각국 정부가 직·간접적으로 가세하는 격렬한 전쟁터다. 민관(民官)이 힘을 합쳐 대응하는 국가도 많다.
이은철 서울대(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정부의 후방지원이 약하면 원전을 수출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런 측면에서 이 대통령과 김 사장의 ‘깜짝 활약’을 평가절하해선 안 된다. 하지만 두 사람보다 더 오래, 더 치열하게 헌신한 사람들도 있지 않겠는가. 3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온갖 편견과 비판을 감내하며 원전 기술 개발에 매달린 그런 사람들 말이다.
이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원전 수출은 무모한 도전에 그쳤을지 모를 일이다. 원전 쾌거의 숨은 주역인 한국수력원자력 산하 원자력발전기술원 소속 6인의 우여곡절기를 들었다.
이주상 원자력발전기술원장
아이디어 출중한 혁신 마에스트로지금으로부터 꼭 40년 전인 1970년, 국내 최초 원전이 착공됐다. 용량은 587㎿. 2009년 12월 UAE에 수출이 확정된 APR1400 용량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조그만 원전이었다.
그런데도 한국은 모래와 자갈을 운반하는 초보적 역할만 했다. 주요 업무는 세계적 원전 건설업체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담당했다. 이유는? 원전을 건설할 수 있는 기술력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건설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한국과 웨스팅하우스는 당시 ‘고정가격제’로 계약을 체결했다. 자재 값이 치솟아도 우리로선 손해 볼 게 없는 장사였다는 얘기다.
하지만 웨스팅하우스는 1973년 오일쇼크가 터진 직후 배짱을 튕겼다. 건설비 상승으로 기존 계약금으론 공사하기 어렵다고 버텼던 것. 갈등은 수년간 계속됐고, 해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쪽은 우리였다. 글로벌 원전 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웨스팅하우스로선 ‘포기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김용준 전 한전 사장은 1976년 취임하자마자 박정희 전 대통령을 찾아가 이렇게 호소했다. “고정가격제론 원전 건설을 계획대로 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께서 용단을 내려주십시오.” 박 전 대통령의 답이다. “고정가격제를 파기하고 돈을 더 주겠다고 하라. 단, 기일 내에 건설하지 못하면 페널티를 물리겠다고 말하라.”
방사성 폐기물 유리화 기술 고안해1978년 상업운전을 시작한 고리 원전 1호기엔 이런 우여곡절이 숨어 있다. 불과 30여 년 전만 해도 한국은 원전 수출은커녕 원전을 지어달라고 애걸해야 하는 처지였던 셈이다. 이주상(55) 원자력발전기술원장은 고리 1호기 건설이 막바지에 접어든 1977년 한국전력에 입사했다. 서울대 원자핵공학과를 졸업한 이주상 원장은 ‘원전 기술자를 키우라’는 정부 방침에 따라 미국 MIT 석사과정(1981~84)을 마쳤다.
유학 이후 전력연구원 원자력연구실 선임연구원, 원자력발전처 방사물관리부장, 원자력환경기술원 건설기술실장, 안전기술처장 등을 두루 섭렵하며 한국 원전의 건설 및 운영, 연구개발 분야의 브레인으로 명성을 쌓았다. 이 원장의 족적이 가장 뚜렷한 분야는 방사성 폐기물이다. 그는 방사성 폐기물량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저감기술’(1993)을 도입했다.
방사성 폐기물 압축 비율을 10t에서 1000t으로 높여, 호기당 1000드럼 나오던 폐기물을 300드럼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 기술을 개발한 공로를 인정받은 이 원장은 1995년 원자력기술대상을 받았다. 2009년 4월 세계 최초로 개발한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유리화’ 기술을 고안한 주인공도 그다.
이 기술은 원전에서 발생하는 방사성 물질을 유리에 가두는 것이다. 유리 속에 갇힌 방사성 물질은 외부 환경에 전혀 유출되지 않는다. 유리가 깨져도 그렇다고 한다. 방사성 폐기물 유리화 기술이 가장 안정적이고 친환경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 기술은 현재 미국 수출이 추진된다.
한국수력원자력은 2008년 미 에이켄시티 사바나리버연구소와 ‘방사성 폐기물 유리화 기술 제공에 대한 협약각서’를 체결하고 사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한수원 관계자는 “유리화 기술의 수출이 본격화하면 수억 달러 이상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한국 원전 기술력의 비약적 발전에 감개무량하다고 했다.
“한전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의 원전 기술은 척박하기 짝이 없었죠. 그런데 지금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괄목성장이죠.” 이 원장은 또 “1990~95년 국정감사의 단골손님은 원자력이었다”며 “이번 원전 수출 성공은 숱한 어려움을 극복한 결과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이제 첫걸음을 뗐을 뿐”이라며 연구개발을 소홀히 해선 큰코다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 원전 기술자는 혁신의 고삐를 더 바짝 당겨야 하고, 자신은 그런 혁신을 이끄는 마에스트로가 되겠다는 포부다. 이 원장의 별명은 리틀 자이언트다. 작지만 매섭다는 뜻인데, 미국·프랑스 등 강대국과 일합의 대결을 벌이는 한국과 오버랩되는 이유는 뭘까.
강용철 처장(기술정책팀장)
강씨 고집으로 표준형 원전 초석 다져1978년 고리 1호기가 상업운전을 개시한 후 한국 원전은 부흥기를 맞는다. 1989년까지 월성 1호기, 고리 2·3·4호기, 영광 1·2호기 등 총 8기의 원전이 건설됐다.
하지만 우리 기술력으로 지은 게 아니었다. 외국 업체의 힘을 빌렸다. 외국 기술에 의존하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원전을 건설할 능력이 없었다는 얘기다.
1984년 한국은 ‘원자력 발전경제성 제고방안 정책’을 수립하고 원전 국산화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그 일환으로 건설된 원전이 1986년 6월 착공한 영광 3·4호기다.
건설은 미국 CE사가 맡았고, 조건은 기술이전이었다. 1978년 한전에 입사한 강용철(53) 처장(기술정책팀장)은 영광 3·4호기 설계기술을 담당한 주인공이다.
그에 따르면 CE사의 기술이전 과정은 진통의 연속이었다. 한국 원전 대부분을 건설한 웨스팅하우스가 대놓고 딴죽을 걸었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당시 감사원에 ‘미 CE와 한국이 이면계약을 체결했다’는 민원을 넣으며 압박 수위를 높였다. 강용철 처장은 아픈 기억을 곱씹었다.
질문 560개 만들어 외국 원전 기술자 압박“기술개발은커녕 매일 감사원에 끌려다녔죠. CE사와 정당하게 계약을 체결했을 뿐 아니라 지금 필요한 것은 원전 기술력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호소해도 도통 먹히지 않았어요. 기술 없는 국가의 애환을 통감했던 시절입니다.”
‘CE와 체결한 계약은 문제없다’는 판정을 받은 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번엔 CE와 함께 원전 디자인을 맡은 미 SNL사와 갈등이 생겼다. SNL이 한국이 바라는 것과 다른 원전 모양을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요컨대 한국은 원자로와 터빈 등 주요 기기가 ‘평행’으로 배치되길 원했다. 터빈이 터져도 원자로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우리의 원전 건설 제1원칙은 안전이었던 셈이다. 반면 SNL은 ‘원자로 밑에 터빈 등 주요 기기를 배치하겠다’는 입장에서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원전 설계를 맡은 강 처장은 난감했다. 논리적으로 항변해도 SNL 측은 고압적 태도로 일관했다고 한다. 그는 고육책으로 웨스팅하우스, 프랑스 프라마톰사가 건설한 원전 모양을 일일이 검토해 560개의 질문을 작성했다.
한국이 왜 원자로와 주요 기기 배치를 ‘평행’으로 만들고자 하는지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살이 15㎏가량 빠질 정도로 고된 작업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커피 한 잔 마시고 곧장 질문지를 만들었죠. 한국형 원전의 초석을 놓는다는 생각으로 불철주야로 이 일만 했습니다. 그러자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던 SNL도 점차 논리에서 밀리기 시작했죠.”
이런 우여곡절 끝에 1995년, 1996년 상업운전이 개시된 영광 3·4호기는 한국 표준형 원전(OPR 1000)의 효시로 꼽힌다. 이 원전을 바탕으로 한국은 기술자립도를 95%로 끌어올려 ‘원전 복제 건설 능력’을 확보했다. 원전 건설의 ‘툴’(tool)만 있으면 외국 도움 없이도 우리 스스로 원전을 건설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것이다.
이를테면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가 깔린 PC를 스스로 조작할 수 있게 됐다’고 이해하면 쉽다. 특히 강 처장에게 영광 3·4호기에 대한 감회는 남다르다. 원자로와 주변 기기 배치방식이 평행으로 결정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방식은 UAE에 수출된 APR1400의 기초가 되지 않았는가. ‘강씨 고집’이 원전 수출의 밑거름이었다는 얘기다.
강 처장은 실제 ‘Mr. 쇳덩어리’라고 불린다. 웬만해선 물러서지 않는 그의 고집을 빗댄 별명이다. “원전 수출이 성사됐다는 보도를 접했을 때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영광 3·4호기를 건설할 때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죠. 그때 ‘강씨 고집’을 제대로 부리길 잘했나 봅니다.” 너스레를 떨면서 ‘허허’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가엔 어느새 이슬이 맺혔다. Mr. 쇳덩어리의 눈물엔 한국 원전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는 듯했다.
김병섭 건설기술실 처장
7년 死鬪 끝에 APR1400 개발한국이 OPR1000 개발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을 무렵, 미국은 신형 원자로 개발에 착수했다. 프랑스 등 유럽국가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정부는 바짝 긴장했다.
‘간신히 따라잡았는데, 또 벌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에서다. 1992년 노태우 정부는 OPR1000 개발과 별도로 한국 신형 원전, 다시 말해 APR1400의 개발을 선언한다.
차세대 원전 개발을 국가선도기술개발사업으로 선정하고, 연 2300여 명의 인력과 2340억원의 연구비를 투입했다. 한양대를 졸업하고 1981년 한전에 입사한 김병섭(54) 건설기술실 처장은 고리 1호기 기술부·전력연구원 노심설계·신형원전개발센터 등 연구개발파트에 근무했다. APR1400 개발팀에 합류한 것은 1992년의 일이다.
김 처장은 정부의 목표를 듣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무엇보다 목표 용량이 1400㎿로, OPR1000보다 무려 400㎿ 컸다. 수명은 40년에서 60년으로, 지진에 대비한 발전소 설계도 6.5에서 7.5로 상향 조정해야 했다. 세계 시장을 겨냥한 원전을 만들겠다는 야심 찬 포부가 깔려 있었지만 실무자로선 이만저만 난감한 게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개발 노형을 선정해야 했던 김 처장의 고민은 날로 깊어갔다. 닥치는 대로 해외 문헌을 탐독했지만 미공개 자료가 너무 많았다. 미국·프랑스 등 원전 선진국이 자신들의 기술력을 쉽게 공개할 리 만무했던 것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선진 기술력을 가진 원전 업체를 일일이 찾아다녔다.
그렇지만 가치 있는 정보를 내줄 만한 허술한 기업이 있겠는가. 오히려 문전박대를 당하고, 출입이 금지되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1992년 말 김 처장이 세계적 원전 업체 프랑스 아레바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이 회사가 개발하는 원전 형식이 무엇인지 캐야 했던 그는 ‘젊은 피’를 무기 삼아 아레바 부사장에게 속사포처럼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아레바 부사장은 불같이 화를 내며 이렇게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당신들은 우리와 제휴하기로 해놓고 단 한 번도 약속을 지킨 적 없소. 우리의 기술과 연구개발 동향에 대해선 어떤 말도 듣지 못할 테니, 당장 나가시오!!”
프랑스 아레바 부사장이 고함 지른 이유그렇다고 포기할 김 처장이 아니었다. 그의 별명은 면도칼. 빈틈만 보이면 날카롭게 치고 들어가는 성격이다. 모진 괄시를 당해도, 때론 출입금지 조치가 떨어져도 외국 업체 정보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길 2년, 김 처장을 비롯한 APR1400 설계팀은 신형 노형을 선정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남은 일은 설계를 구체화하고, 주요 기기의 배치 및 사양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이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컨대 지진에 완벽하게 대비하기 위해 원자로 외벽을 두껍게 하면 주요 기기의 배치가 꼬였다. 기기 배치를 최적화하면 원전의 안정성을 담보하기 힘들었다.
때마침 외환위기까지 터져 이들의 사정은 더욱 악화됐다.
원전 설계를 구체화하려면 실험이 필수적인데, 실험장비 구입비가 뚝 끊겼던 것이다. 김 처장 등 APR1400 설계팀은 200여 일 가까이 정부 부처를 찾아가 ‘지원해 달라’고 매달렸다. ‘이렇게 죽여도 되느냐’고 따지기도 했다. 그는 “기억조차 하기 싫다”며 혀를 끌끌 찼다.
“우리만 힘든 게 아니었지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6개월 넘게 정부 부처를 방문해 때론 애원하고 때론 협박도 했죠. 그때처럼 국가관이 투철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우리 설계팀의 진심이 통했는지 실험장비 구입비가 나왔습니다. 벼랑 끝에서 간신히 탈출한 기분이었죠.”
이런 각고의 노력 끝에 1999년 APR1400의 원전 설계를 마무리했다. 1992년 이후 7년 동안 이어진 사투(死鬪)의 과실이다. 하지만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다. 규제기관의 심사(표준설계 인가)를 거쳐야 했다. 원전은 개발에 성공해도 규제기관의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세상의 빛을 볼 수 없다.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총 다섯 차례에 걸쳐 2200건의 질의를 받았죠. 정말 숨 막히는 순간이었습니다. ‘잘못 답변하진 않았나’ ‘오류는 없을까’라며 가슴 졸이기 일쑤였죠.”
2001년 표준설계 인가를 획득했을 때 김 처장은 “족보에 남길 만한 역작을 만들었다”고 자부했다. 여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차세대 원전 중 가장 경제적이다. ㎾당 건설단가가 2300달러 수준으로, 프랑스 EPR(2900달러), 일본 ABWR(2900달러), 미국 AP1000(3582달러)보다 훨씬 싸다.
복합 안전 시스템을 적용해 세계 어떤 원전보다 우수한 안정성도 확보했다. 여기에 UAE에 수출까지 확정됐으니, 이보다 더 큰 영예가 있을까. 그럼에도 김 처장의 도전은 쉼 없이 계속되고 있다. 2007년부턴 APR1400의 업그레이드 원전 APR+ 개발을 이끈다. 2012년까지 국내 표준설계 인가를 획득하는 게 목표다.
“1985년부터 지금까지 원전 기술개발 업무에만 종사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결실은 APR1400이죠. 우리의 노력이 깃들어 있는 APR1400의 수출이 확정됐을 땐 가슴이 떨릴 정도로 감격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할 겁니다. 2012년 APR+가 개발완료하면 세계 원전 시장을 제대로 흔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신영철 계전설계팀장
계측제어 시스템 개발…경쟁력 껑충APR1400의 수출에 성공했지만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는 여전히 많다. 특히 원전 설계 핵심코드·원전 계측제어 시스템 등 핵심 기술을 서둘러 갖춰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국의 원전 기술 능력을 두고 95% 수준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핵심 기술 개발을 완료하면 우리 기술 능력은 비로소 100%에 도달한다. 이 중 원전 계측제어 시스템 개발을 이끄는 주인공은 신영철(52) 계전설계팀장이다.
서울대, 미국 남가주대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한 신 팀장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계측제어 시스템 전문가 중 한 명. 한전에 입사한 후엔 전력계통 신뢰도를 분석했고, APR1400 개발에도 참여했다.
원전 계측제어 시스템은 원전을 안전하고 경제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필요하다. 열을 발생시키는 원자로와 전기를 생산하는 터빈 설비의 움직임을 계측해 정확하게 운전하도록 제어하는 것이다.
자동차를 제어하는 핸들·브레이크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신 팀장은 내로라하는 계측제어 전문가지만 숱한 시행착오를 피하진 못했다. “무엇보다 계측제어 시스템의 완전 디지털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었다”고 그는 말했다. 계측제어 시스템 개발에 착수한 1994년의 일이다.
신 팀장은 파트너사인 두산·코텍 관계자와 첫 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그는 제어 시스템의 완전 디지털화를 주장했지만 반발이 생각보다 심했다. “당시는 디지털 개념이 완전하게 정립되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 부담스러워했죠. 하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세계적 원전 업체와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완전 디지털화를 꾀할 수밖에 없었죠.”
호기당 1000억원 수입대체 효과도신 팀장은 스스로 “전형적인 A형 타입”이라고 했다. 한번 결정하면 끝까지 밀어붙이고, 웬만해선 물러서는 법이 없다고 말했다. 돌격형이라는 거다. 그는 주변의 반발을 무릅쓰고 프랑스의 N4원전,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AP600 등과 경쟁할 수 있는 완전 디지털 계측제어 시스템 구축을 선언한다.
공수표를 날린 게 아니다. 준비도 철저히 했다. 이 시스템의 최적화를 위해 미 CE사 설계자를 직접 불러들였을 정도다. 원전 운전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도 했다. 운전자의 구미에 꼭 맞는 시스템을 구축할 목적이었다고 한다. 노력의 결실은 제법 알차다. 이 시스템의 기본설계는 2002년 완료했다.
프랑스 아레바·미국 웨스팅하우스·GE·일본 APWR에 이어 네 번째 보유다. 지금까지 우리는 웨스팅하우스의 계측제어 시스템을 활용했다. 로열티를 주고 말이다. 이제 남은 일은 기본설계를 바탕으로 계측제어 시스템을 제작하는 것. 그러면 2015~16년 완공을 목표로 추진되고 있는 신울진 1·2호기에 적용할 수 있을 전망이다.
건설 예정인 신고리 5·6호기 및 후속호기에도 쓰일 예정이다. 또 이 기술로 호기당 1000억원이 넘는 수입대체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완전 디지털화된 제어 시스템을 구축하면 경쟁력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원자력 부흥기에 대비할 수 있을 겁니다.” 돌격형 신 팀장의 숨가쁜 발걸음이 한국 원전의 세계화를 재촉하고 있다.
김한곤 계통설계팀장(박사)
“옷 벗을 각오로 일한다”
없으면 당연히 로열티를 지불하고 남의 코드를 활용해야 한다. PC에 비유하면 MS의 윈도를 빌려 쓰는 격이다. 이 핵심 코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연료의 장전량을 결정하는 노심설계 코드와 원전에서 발생 가능한 모든 사고를 예측할 수 있는 안전해석 코드다.
중국 굴욕사건 후인 2007년 정부는 이 코드의 개발을 적극 추진했다. 원자력 관련 기관 5곳에서 200여 명의 전문가를 차출했다. 이들을 이끄는 사람은 원자력발전기술원 김한곤(45) 박사(계통설계팀장)다.
서울대 원자력공학과를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에서 석·박사를 받은 김 박사는 1997년 2월 미국 미시간대에서 포스트 닥터까지 마친 인재. 원전 설계 핵심 코드 개발을 이끌기 전엔 APR1400 개발에도 적극 관여했다.
핵심 코드 개발은 순조롭다. 노심설계 코드는 완성 단계다. 2010년 4월 인가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안전설계 코드 개발은 시간이 더 걸려야 할 것 같다. 목표는 2012년이다. 김 박사는 “애당초 2017년 목표로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UAE 원전 수출 성공 이후 2012년으로 앞당겨졌다”며 “UAE 측에서 원전을 설계할 때 한국의 핵심 코드를 활용하기 바라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그래서 개발팀이 느끼는 압박감이 상상을 초월한다”며 힘겨운 기색을 내비쳤다. 스스로도 부담감을 많이 느끼는 모양이다. 관련 부처 장관에게 ‘옷 벗을 각오로 일하라’는 엄명도 수차례 받았다고 한다. 원전 설계 핵심 코드가 개발되면 한국은 명실상부한 원전기술 자립국가로 발돋움한다.
원전 선진국과 기술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설계 핵심 코드를 보유한 국가는 미국(웨스팅하우스), 프랑스(아레바) 등 2곳뿐이다. 일본은 아직 없다. 그의 학창 시절 별명은 ‘꺼벙이’다. 뭔가에 빠지면 그것밖에 모른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요즘도 그렇다. 김 박사는 하루 종일 설계 코드 개발 생각뿐이다.
“24시간이 모자랍니다”며 너스레를 떤다. 개발팀원들도 밤낮 가리지 않고 개발에 전력을 기울인다. “연구자 모두 골방에 앉아 설계 코드만 구상하고 있어요. 아마 잘될 겁니다. 리스크는 있지만 최고의 코드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문용식 엔지니어링실 ISI기술팀장
독보적 검사능력으로 안정성 높여이번 원전 수출에서 한국 원전이 높은 평가를 받은 이유 중 하나는 안정성이 높아서다. 우리의 원전 이용률은 93.4%로, 세계 평균 79.4%보다 14%포인트 높다. 6기 이상 원전을 보유한 국가 가운데 1위다.
이 이용률은 원자력 발전설비가 고장 없이 운용되는지를 판단하는 잣대다. 원전 이용률이 높다는 얘기는 운전 및 정비능력이 뛰어나다는 의미다. 우리나라 원전의 고장 정지율은 연 평균 1호기당 1회를 넘지 않는다.
한국 원전의 안정성이 뛰어난 것은 비파괴검사 기술 덕분이다. 비파괴검사란 재료 또는 제품의 원형과 기능을 변화시키지 않고 빛·열·방사선·초음파 등 물리적 에너지를 투사해 조직의 결함을 확인하는 거다. 사람에 비유하면 초음파 또는 방사선 검사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 검사를 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이 없었다. 선진국의 검사 인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한국에도 전문가가 많다. 문용식(46) 엔지니어링실 ISI기술팀장이 일인자로 꼽힌다.
충남대에서 석사를 밟은 그는 한전에 입사한 후 지금까지 기계유지보수(3년)·품질관리(7년)·검사(8년) 등 안전검사 분야를 두루 섭렵했다. 2001~02년엔 미국에서 검사 관련 연수도 받았다.
원전 파워 인맥 더 키워야그의 장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집중력이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다른 것엔 신경을 쓰지 못하는 성격 덕분이다. 그래서 별명도 ‘성실한 짱구’다. 문용식 팀장은 “한국의 비파괴 검사기술력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다”며 “이 분야의 기술 자립은 이미 확보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고 평가했다.
한국 원전의 UAE 수출은 어쩌면 기적이다. 오랜 역사와 경험을 가진 미국·프랑스를 상대로 이뤄낸 쾌거라는 점에서 더욱 눈부시다. 특히 두 나라는 1980년대 만들어진 한국 초기 원전 대부분을 건설하지 않았는가.
그야말로 청출어람이자 짧은 기간과 소수 병력으로 거둔 빛나는 승리다. 그 중심에 수십 년 동안 원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은 사람들이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그들이야말로 이번 원전 쾌거의 진짜 주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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