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드리 헵번도 그의 구두에 반했다
"이탈리아 남부 항구도시 나폴리에서 동쪽으로 100㎞ 정도 차를 몰고 가면, 나오는 길이 어디인지 모를 외딴 마을에 도착하게 된다. 보니토(Bonito)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이 내가 태어난 곳이다.”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자서전 <꿈을 꾸는 구두장이> (Shoemaker of Dreams)의 서문이다. 지금은 전 세계 45개국, 1200개의 부티크를 가진 브랜드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창립자는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형제만 14명, 페라가모는 11번째로 태어난 아이였다. 가난 때문에 학교는 9세까지만 다닐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인생에 강렬한 영감을 준 것은 바로 집 근처에 있는 구두 가게였다.
구두장이가 작업하는 모습을 본 아홉 살 소년은 새벽 동이 트는 것도 모른 채 두 여동생이 교회에 신고 갈 하얀 구두를 만들었다. 11세가 되던 해 그는 나폴리의 구두 가게에 견습생으로 들어간다.
열세 살이 됐을 때 구두 가게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여성 전용 맞춤 구두 가게를 냈다. ‘구두방에 없는 구두’ 즉, 맞춤 구두로 승부를 건 어린 페라가모의 전략은 당시 마을 부인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가난한 집의 11번째 아이 꿈을>
▎투명한 샌들 바닥에 눈을 댄 채 바라보는 페라가모.
너무 가난했던 그는 외국으로 나가는 것만이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길이라 생각했다. 결국 16세의 페라가모는 ‘미국으로 건너간 뒤 기계로 신발을 만들어 부자가 되겠다’며 보스턴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그는 결심대로 커다란 신발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거대한 기계가 있는 작업환경은 놀라웠다. 하지만 곧 기계로 생산하는 신발의 품질에 한계를 느꼈다.
그는 다시 캘리포니아 샌타모니카로 장소를 옮겼다. 페라가모는 먼저 미국에 가 있던 또 다른 형과 함께 그곳에서 구두 가게를 열었다. 그가 오픈한 샌타모니카 매장 바로 옆에는 아메리칸 필름 컴퍼니(AFC)라는 영화 스튜디오가 있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영화산업이 그야말로 불같이 일어나고 있던 시기였다.
그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영화사를 대상으로 한 수제 구두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영화사를 들락거리던 그는 뜻밖의 상황을 목격한다. 구두를 신고 카메라 앞에서 오랜 시간 연기하는 배우들이 불편한 신발 때문에 매우 힘들어했던 것. 이때 그는 정말 편안한 신발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신발을 신는 사람들의 발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20%의 사람이 평발이며 많은 이가 티눈 등의 문제로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질 낮은 가죽과 기계로 생산된 구두는 많은 사람의 발에 고통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페라가모는 ‘마치 맨발로 두꺼운 카펫 위를 걷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구두를 만들고자 결심했다.
이를 위해 UCLA 대학에서 인체해부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연구를 통해 사람이 똑바로 서 있을 때 몸 전체의 체중이 4㎝의 면적에 불과한 발의 중심에 쏠린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됐다. 페라가모는 장심(발의 중심)이 놓이는 바닥 부분이 마치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리는 듯 고정될 수 있는 신발을 만들었다.
이는 발이 앞으로 밀리는 현상을 방지, 발가락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역할까지 해주었다. 이런 편안함에 대한 자신감이 낳은 페라가모의 어록은 유명하다. “아름다움은 따라 할 수 있지만 편안함을 따라 할 수는 없다.”
▎1955년 페라가모가 제작한 금색 구두.
구두와 영화산업의 만남 캘리포니아의 영화산업이 할리우드로 옮겨가자, 페라가모 역시 뒤따라 갔다. 그는 1923년에 ‘할리우드 부츠 숍’이라는 이름의 새 매장을 오픈했다. 편안하기로 이미 유명세를 탄 페라가모 구두를 맞추기 위해 수많은 배우가 이곳을 찾았다. 메리 픽퍼드(Mary Pickford), 루돌프 발렌티노(Rudolf Valentino), 존 베리무어 주니어(John Barrymore Jr.), 더글러스 페어뱅크스(Douglas Fairbanks), 글로리아 스완슨(Gloria Swanson) 등 전설적인 1세대 할리우드 스타들이 단골이 됐다.
후대에 길이 남을 장면에도 페라가모 슈즈는 빠지지 않았다. 메릴린 먼로가 영화 ‘7년 만의 외출’에서 지하철 환풍구 바람에 날리는 스커트를 잡고 서 있던 바로 그 장면, 그때 메릴린 먼로가 신은 구두가 페라가모 제품이다.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 에바 페론 역시 페라가모 구두의 팬이었다.
훗날 마돈나가 에바 페론 역을 맡은 영화 ‘에비타’에서는 고증에 따라 모든 신발을 페라가모에서 제작하기도 했다. 밀려드는 고객의 주문량을 채우지도 못할 정도가 되자 페라가모는 새로운 사업 계획을 세웠다. 수제화를 대량 생산하는 시스템을 만들고자 한 것.
그가 원하는 만큼의 품질을 내놓지 못하는 미국 노동자를 쓰느니 차라리 아예 이탈리아에 수제화 공장을 세우되 이를 작업별로 분업하는 형태로 대량 생산을 시작했다. 이렇게 생산된 구두를 다시 전 세계 매장에 수출할 계획을 짰다. 하지만 때는 1929년. 대공황으로 여기저기서 아메리칸 드림이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페라가모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파산했고, 결국 이탈리아 피렌체로 돌아온다. 자서전에서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언제나 구두 제작자였지, 사업가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파산 직후 진정한 사업가로 거듭났다.
대공황, 그리고 파산 페라가모는 자서전에서 파산 직후의 심경을 이렇게 회상한다. “침대에 누워 창밖으로 포근한 밤을 응시하자, 선명하고 밝은 미래가 보였다. 나는 두려움이 아닌, 오직 자신감만을 느꼈다. 1927년에 품었던 꿈, 전 세계에 페라가모 숍과 페라가모 소매점을 내는 꿈이 이제는 실현 불가능한 허상이 아니라 실질적인 가능성으로 변해 있었다.
다시 한번 시작하는 거야. 이번에는 절대 실패하지 않으리라.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과거의 슬픔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밝게 비춰줄 뿐, 그 길을 어둠으로 물들이지는 않는다. 과거의 교훈은 쓸모가 있으며, 절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미래가 나를 부르고 있다.” 그는 여섯 명의 직원으로 다시 작업장을 만들었다.
샘플을 만들었고 이를 미국으로 보냈다. 이는 수출의 출발점이 됐다. 무엇보다 페라가모를 다시 일어서게 했던 것은 품질과 명성이었다. 그레타 가르보, 소피아 로렌, 오드리 헵번 같은 스타들과 윈저공 같은 유명인들이 구두를 맞추기 위해 제트기를 타고 피렌체로 모여들었다. 결국 그는 피렌체에서 가장 멋진 중세시대 성 ‘스피니 페로니(Spini Feroni)’를 구입해 멋진 아틀리에를 열었다.
이곳은 현재까지 페라가모의 본사로 쓰이고 있다. 무솔리니 정권이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제2차 세계대전의 기운이 꿈틀거리던 불안한 시기였다. 페라가모는 난국에 오히려 역사적인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가죽과 금속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자가 전쟁을 위해 몰수됐지만 페라가모는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소재를 사용해 구두를 만들기 시작했다.
나무, 라피아, 펠트, 합성수지 등 불가능한 것은 없었다. 결국 그는 오늘날까지도 여름이면 많은 여성에게 애용되는 코르크 소재의 웨지힐을 만들어냈다. 그 외에도 메릴린 먼로의 골드 샌들로 메탈을 강화한 스틸레토 힐, 윗부분을 나일론 실로 만들어 투명하게 제작한 인비저블(Invisible) 샌들, 스웨이드 가죽을 패치워크한 구두 등 그의 작업에는 한계가 없었다.
덕분에 1947년에는 구두 디자이너로는 최초로 패션계의 오스카상이라고 불리는 ‘니먼 마커스 상’을 수상했다. 1960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만들어낸 구두는 무려 1만 종 이상이었다.
페라가모의 우먼파워 1940년, 페라가모는 고향인 보티토 지역 의사의 딸이었던 완다 밀레티(Wanda Miletti)와 결혼한다. 이후 둘은 3명의 아들(Ferruccino, Leonardo, Massimo)과 3명의 딸(Fiamma, Giovanna, Fulvia)을 낳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1960년 페라가모가 사망하자 회사는 처음으로 한 달간 문을 닫았다. 사람들은 페라가모가 없는 페라가모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38세의 젊은 미망인 완다 여사는 17세의 큰딸부터 2세인 막내까지, 여섯 남매를 키우며 경영전선에 뛰어들었다. 지금은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명예회장인 완다 여사는 한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남편의 책상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멍했어요. 가족 같은 직원의 도움이 없었다면 제가 경영을 하는 건 불가능했을 겁니다.”
어머니를 가장 많이 도운 것은 장녀인 피암마 페라가모였다. 이미 아버지로부터 견습을 받았던 그녀는 1961년 세계 패션의 각축장이었던 런던에 페라가모를 성공적으로 상륙시켰다. 그녀는 또 액세서리 디자인에 앞선 감각을 발휘하며 페라가모가 세계적인 브랜드로 정착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아버지가 구두 디자이너로는 최초로 탔던 니먼 마커스 상을 정확히 20년 뒤인 1967년 딸인 피암마 페라가모가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그녀는 페라가모 최고의 히트작을 내놓는데, 바로 1978년 첫선을 보인 ‘바라(Vara) 슈즈’가 그것이다. 디자인뿐만 아니라 페라가모의 생산 라인을 구축한 것 역시 피암마였다.
그녀는 아버지가 고집한 전통적인 기초를 장인들에게 교육시키는 한편, 거의 맞춤에 가까운 사이즈 스펙을 만들어 1950년까지 700명의 직원이 하루에 350켤레 만들어내던 슈즈 생산량을 1만 켤레까지 늘렸다. 페라가모는 한때 자녀들의 경영권 다툼으로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가족경영이 빠지기 쉬운 함정에 걸려든 것이다.
완다 여사는 분열을 막는 데 집중했다. 아들에게는 지역별로, 딸에게는 제품 라인별로 역할을 분담했다. 장남인 페루치오에게 회장직을 맡기고, 차남 레오나르도는 유럽겲틱첸?사장직을, 막내인 마시모에게는 미국 시장을 담당하도록 했다. 장녀인 풀비아는 여성 액세서리를, 차녀인 지오바나는 여성 기성복을 책임지게 했다.
이와 함께 그녀는 상장을 통해 외부 자금 확보를 계획하고 이를 진두지휘할 인물로 발렌티노의 CEO였던 미켈레 노르샤를 영입해 전문경영인 체제를 만들었다. 96년에는 발렌티노사를 인수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완다 여사의 작품이다.
대부분 가족경영 브랜드들이 거대 패션하우스에 영입됐음에도 가족경영을 유지하는 페라가모의 힘은 놀랍다. 1920년부터 유명 인사들을 피렌체로 몸소 찾아오게 만들었기 때문일까? 페라가모에 대한 피렌체 시민들의 사랑은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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