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서울, 그리고 한국 축구의 추억
2002년 서울, 그리고 한국 축구의 추억
스물두 명의 남자는 녹초가 됐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고 뼈마디 어느 한곳 아프지 않은 데가 없었다. 그중 한 명이 남은 힘을 다해 수비수를 따돌리고 왼쪽에서 높이 솟구쳐오는 공에 머리를 갖다 대며 몸을 틀었다.
공은 허망한 표정의 골키퍼 곁을 지나 절묘하게 그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가 입맞춘 결혼 반지와 그의 사자 갈기머리가 우상의 상징으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안정환 선수는 그 순간만큼은 오로지 방금 이뤄낸 쾌거의 기쁨을 만끽하는 듯했다. 그로써 예상을 완전히 뒤집고 한국이 월드컵 16강에 올랐다. 2002년 한ㆍ일 월드컵 당시의 이야기다. 그게 나의 첫 한국 경험이었다. 우리는 공항에서 안내원을 만나 차를 타고 호텔로 갔다.
하지만 아무도 우리를 체크인해주는 데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호텔 직원들은 손님들과 함께 거대한 TV 화면 주위에 몰려가 축구공에 눈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이탈리아 공격수가 공을 잡을 때면 손으로 만져질 듯 긴장이 팽팽해졌다. 월드컵 열병에 단단히 걸린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영국인이다.
그런 분위기를 알고도 남는다. 마침내 골이 터졌을 때 그들이 보인 반응을 보며 앞으로 한동안 머물기에 이 세상에서 이곳보다 더 나은 곳이 없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브라질의 축제를 연상시켰다. 다만 리듬이 삼바가 아니라 한국식이라는 점만 달랐다. 그 주 내내 우리는 어디를 가나 축구공을 들고 다녔다.
거리를 지나가던 낯선 사람들이 우리와 게임을 하자고 했다. 그런 게임은 종종 즉흥적인 먹고 마시는 자리로 이어졌다. 한국 전체가 현실에서 벗어나 휴가를 즐기기로 작심한 듯했다. 너무도 멋진 일탈이었다. 아무도 쓸 엄두를 못 낼듯한 각본을 따르듯 이탈리아전의 영광은 스페인전의 빛에 가려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잊혀졌다.
운 좋게도 나는 친구들과 함께 부산의 해운대 해변에서 조선호텔 곁에 세워진 대형 스크린으로 그 경기를 관람했다. 아니 바다에서 봤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 모른다. 이미 해변의 모래 한 알 한 알이 전부 다른 사람들의 발에 가려진 듯했다. 스페인전의 승부차기에서 5 대 3으로 한국이 승리하자마자 우리가 구입한 준결승전 티켓이 독일 대 한국의 경기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부산이 마디그라 축제(매년 시드니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의 동성애 축제)처럼 흔들리는 동안 우리의 한쪽 눈은 지금까지보다 더 대단한 경기에 가 있었다. 개최국 팀이 개최국 수도에서 뛰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축구 경기였다. 한국으로서는 전혀 기대치 않았던 4강 진출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운이 닿는 한 여세를 몰아가며 맘껏 즐기기로 작심한 듯했다. 스페인전이 사실상 월드컵 결승전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붉은 셔츠에 맞춰 얼굴에 붉은 색을 칠했다. 한국말 어휘가 짧았지만 (당시엔 거의 ‘안녕하세요’ ‘맥주’밖에 몰랐다) 목이 터져라 하고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 했다.
그때쯤 우리는 이 기이하고 놀라울 정도로 흥에 찬 나라와 한 몸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경기장 밖에서 암표상들이 우리가 가진 표 한 장에 100만원까지 줄 테니 팔라고 제의했다. 하지만 그 열 배를 준다고 해도 표를 포기할 생각이 없을 듯했다. 하지만 독일팀은 세계 축구에서 용두사미식 승리의 대가다.
따라서 경기 자체는 지금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지루하고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점은 따로 있었다. 진정한 승리는 상대적으로 약했지만 모두가 한마음으로 뛴 한국팀의 그 위대한 정신에 돌아갔다. 그들은 조국의 모든 사람에게 믿음을 줬고, 골치 아픈 일상을 잠시나마 떨쳐버릴 기회를 선사했다.
그래서 그날 밤 우리가 합류한 파티(서울 혜화동 마로니에공원에서 자발적으로 벌어졌다)는 이전처럼 춤추고 마시는 즐거움만이 아니라 따뜻함과 엄숙함마저 감돌았다.
꿈은 이제 끝났다. 하지만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최고를 열망하는 사람에게 2등, 아니 심지어 3등도 결코 불명예가 아니다.” 특히 최고를 겨루는 자리까지 가리라고 상상도 못했을 때는 더욱 의미가 크다.
2002 월드컵은 내 인생의 길도 바꿔 놓았다. 과장이 아니다. 대학 졸업 후 대다수 친구가 곧바로 런던으로 가서 은행에 취직했다. 부모님은 많이 실망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늘 해외에서 살아보길 꿈꿨다. 내게 그런 강한 인상을 심어준 한국이 당연한 선택인 듯했다. 그 뒤로 3년을 한국에서 머물렀다.
한동안 다시 서울을 떠나 있었지만 다음 주엔 다시 서울로 돌아가 한동안 살 작정이다. 불행하게도 2006년 독일 월드컵은 2002년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농담처럼 느껴졌다. 나의 사랑하는 조국 잉글랜드팀은 준준결승전에서 탈락했다. 한국은 슬프게도 그 이전으로 돌아가 16강에도 들지 못했다.
독일 월드컵을 보며 더욱 실망스러웠던 점은 과도한 기업 후원으로 상업화가 기승을 부렸고, 인기 스타 선수들만이 부각됐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동기는 뻔하고 예측도 가능한 일이었지만 2002년 대회의 순수함과 진정한 기쁨이 사라지고 무미건조하고 상혼이 판치는 패러디로 전락했다.
2002년 월드컵이 너무도 놀라운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사실 2006년도 똑같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게다가 2002년 경험의 가장 특별한 점은 일생에 단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라는 사실이다. 하늘에서 몇 개의 별이 어쩌다가 최상의 상태로 일치한 경우와 같았다. 다른 어떤 점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놀라웠던 2002년 여름 내 마음속에 머물던 다른 모든 문제(학위 과정의 마지막 해였고, 진로를 두고 고민이 많았다)는 그 짧은 순간의 환희에 밀려 의미를 잃었다. 다른 많은 사람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정신이 말짱한 사람이라면 그런 식의 현실 일탈이 일상적이고 예측 가능하게 되기를 원치 않는다.
원래의 그 신비로운 마술이 사라질까 두렵기 때문이다. 최고의 영광은 대개 가장 빨리 사라진다. 그래서 그 순간은 아름다운 동시에 슬프다. 이제 남아공에서도 한국팀의 멋진 선전 소식이 들려온다. 한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때의 전율이 온몸을 휘감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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