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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즘’은 취업의 또 다른 벽

‘루키즘’은 취업의 또 다른 벽



한때 ‘뚱뚱교’가 인기였다. KBS 개그콘서트의 ‘출산드라’ 때문이다. “이 세상의 날씬한 것들은 가라. 이제 뚱뚱한 자들의 시대가 오리니!” 출산드라가 이렇게 외칠 때마다 내심 가슴이 후련했던 사람 꽤 많았다.

그의 말처럼 과연 루키즘(외모지상주의·Lookism)은 가고, ‘뚱뚱한 자들의 시대’가 왔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뉴스위크 한국판이 취업포털 인크루트와 공동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서는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외모’가 구직의 성공 여부를 가르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8월 18일부터 1주일간 기업 인사담당자들을 대상으로 한 e-메일 설문조사에 응답자의 94.4%는 ‘외모도 경쟁력’이란 말에 동의했다. 설문에 참여한 270명의 인사업무 실무자는 ‘최종면접에서 외모도 평가기준의 한 잣대가 되느냐’는 질문에는 78.1%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또한 89.6%의 응답자는 최종면접에서 학력·능력이 비슷할 때 외모가 뛰어난 지원자를 더 선호한다고 답했다. 심지어 75.6%는 최종면접에서 다른 조건이 비슷하다면 뚱뚱한 지원자보다 날씬한 지원자가 낫다고 말했다. ‘학력이나 능력이 다소 부족해도 외모가 뛰어난 지원자를 더 선호한다’고 답한 응답자도 22.2%였다.

취업 희망자들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인크루트 회원인 구직자들을 e-메일로 조사했더니 응답자 614명 가운데 95.4%가 ‘외모도 경쟁력’이라고 답했다. ‘최종면접에서 외모도 평가의 한 잣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엔 86.6%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취업을 위해 돈이 들어가는 외모관리나 시술을 받아본 적이 있다면 모두 합쳐서 어느 정도 비용을 들였느냐’는 질문에는 응답자의 33.1%가 ‘100만원 이상’이라고 답했다. 여성(35.2%)은 물론 남성(29.6%)도 100만원 이상을 외모관리에 투자했다고 응답했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취업희망자들이 정보를 나누는 인터넷 커뮤니티에도 외모와 관련된 고민이 종종 올라온다.

“항상 면접가면 ‘말씀 잘하시네’ 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면접의 분위기가 항상 좋고 면접관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분위기인데 항상 떨어집니다. 한두 번이 아니에요. 부모님께선 ‘네가 아무래도 뚱뚱해서 떨어지는 것 같다’고 하십니다. 아무래도 (정말) 외모가 문제가 되나요?”

다음의 ‘취뽀’(취업뽀개기) 카페에 올라온 한 구직자의 걱정이다. 또 다른 구직자는 “요즘 면접을 보면 대답 내용보다 인상과 외모에 더 많은 비중을 둔다는 생각이 든다”며 “작은 키에 마르고 잘생기지 않아 영업직에 적합한 외모가 아니라서 그러는 게 아닐까 (고민)한다”고 적었다.

외모차별은 남성보다는 여성이 더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이번 설문조사에서도 ‘최종면접에서 학력이나 능력이 비슷할 경우 외모가 뛰어난 지원자가 더 유리하리라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여성(97.8%)이 남성(88.5%)보다 많았다. ‘최종면접에서 학력이나 능력이 다소 부족해도 외모가 뛰어난 지원자가 더 유리하리라 생각하느냐’는 물음에도 ‘그렇다’고 답한 여성(46.2%)의 비율이 남성(33.6%)보다 많았다.

그러나 1988년부터 시행된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은 ‘여성근로자를 모집·채용할 때 그 직무 수행에 필요하지 않은 용모, 키, 체중 등의 신체적 조건, 미혼 조건 등을 제시·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못박았다. 이를 어길 경우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그런데도 불과 몇 년 전까지 공공기관조차 현행법을 어겼다. 2006년 ‘대통령 자문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가 낸 보고서에 따르면, 공공기관의 46.7%가 용모를 면접심사표의 평가항목으로 뒀다. 민간기업(36.8%)의 경우보다 많았다. 또 공공기관의 80%, 민간기업의 85.4%가 이력서에 사진, 키, 몸무게를 적도록 요구하기도 했다.

정부의 실태조사 이후 공공기관들의 이런 관행은 상당부분 개선됐지만 일부 민간기업은 여전하다. 최근 인터넷 포털사이트 프리챌이 전략기획·대외협력 부문 경력사원을 뽑으면서 지원자격 중 하나로 ‘미인대회 출전 또는 수상자’를 내걸어 논란이 일었다. 이 회사는 이외에도 ‘경력직 승무원’‘국내외 메이저 항공사 출신’ ‘모델, 탤런트, 영화배우, 연극배우 경력자’ ‘MC, 아나운서, 앵커, 리포터 경력자’도 조건에 포함시켰다. 모두 외모가 돋보여야 하는 직업들이다.

▎지난 8월 20일 서울고용지원센터에서 열린 ‘2010 유통·물류 채용박람회’에서 구직자들이 이미지 메이킹, 메이크업, 면접 요령 등을 상담받고 있다.

▎지난 8월 20일 서울고용지원센터에서 열린 ‘2010 유통·물류 채용박람회’에서 구직자들이 이미지 메이킹, 메이크업, 면접 요령 등을 상담받고 있다.

채용 담당 부서의 관계자는 “대외협력 업무는 ‘서비스 마인드’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조건을 걸었다”며 “승무원·모델·탤런트·아나운서·쇼호스트·미인대회 출전자들은 모두 ‘일대 다’의 대면 경험이 있는 이들이라 넣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가 ‘예쁜 분만 오세요’라고 공고한 건 아니지 않으냐”고 반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알려지자 “결국 예쁜 사람을 뽑겠다는 것 아니냐” “전략기획이나 대외협력 업무와 외모가 무슨 상관이냐”는 비판이 일었다.

끊이지 않은 외모차별 논란에 인사담당자들은 “능력이 똑같다면 외모를 무시할 수 없지만 공식 평가대상이 아니다”(3대 대기업 중 한곳), “호감을 주는 인상이면 유리하지만, 외모가 점수로 반영되지는 않는다”(3대 은행 중 한곳)고 주장했다. 이번 조사에서도 인사담당자들은 최종 면접에서 ‘자신감·실력·외모·학력·잠재력으로 평가 분야를 나눌 때 외모를 가장 먼저 고려하겠다고 응답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10.4%는 2순위로, 17.4%는 3순위로, 33%는 4순위로 꼽았다. “외모를 아예 무시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런 인사담당자들인 만큼 열에 일곱은 법률로 입사지원서에 증명사진 부착을 금지하지 말아야 한다고 답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가 최근 루키즘에 더욱 깊이 빠져 왔다는 사실은 미용성형시장의 급성장에도 나타난다. 2002년 5000억원(삼성경제연구소 추산)이었던 한국의 미용성형시장 규모가 2010년엔 3조원가량으로 늘었다. 8년 사이에 6배로 늘었다는 말이다. 글로벌 제약사인 독일 머츠 에스테틱(Merz Aesthetics)의 아시아 지역 지사장 애런 킴은 최근 홍콩에서 열린 아시아 미용성형학회에서 이처럼 한국 성형시장의 급격한 팽창을 전하면서 이에 발맞춰 적극적으로 한국 시장에 진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국내 미용성형 시장의 급팽창을 전적으로 구직자들의 성형 증가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취업문이 좁아지면서 성형을 결심하는 사람이 늘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지난 8월 20일 서울고용지원센터에서 열린 ‘2010 유통·물류 채용박람회’에서 만난 박세라(24)씨는 “오랫동안 성형을 고민하다가 망설였는데 재취업을 결심하면서 코를 고쳤다”고 했다. “성형 후 자신감도 붙고 이제 어느 면접에 가도 외모 때문에 불이익을 받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고 그가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의 한 유명 여자대학 졸업생도 “다른 사람보다 노력은 거의 10배 가까이 했다고 생각하는데도 서류전형부터 면접까지 줄줄이 떨어졌는데 나중에 얼굴성형을 한 뒤로는 사정이 백팔십도 달라졌다”고 말했다. 취업철이 되면 대형 성형외과나 대학가의 메이크업 숍이 붐비는 이유가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강남의 한 유명 성형외과의 홍보팀 관계자는 “(취업 하려는) 대학생뿐 아니라 이미 취업한 직장인들도 회사에서 외모 때문에 불이익을 받거나 비교당한 일이 있다며 성형을 결심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요즘은 학부모들의 인식도 꽤 많이 바뀌었다. 아이들에게 미리 성형수술을 시켜주려고 방학을 이용해 병원을 찾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이어 “방학이 시작되면 환자가 150~160% 정도 늘어난다”고 덧붙였다. 이 병원의 홈페이지의 ‘성형후기’ 게시판에는 “성형수술을 받은 뒤 취업에 성공했다”는 감사의 글이 심심찮게 올라오기도 한단다.



국가인권위원회에 접수된 여성들의 상담사례에서도 루키즘에 찌든 우리 사회의 단면은 그대로 드러난다. “저는 공연 강사를 육성해 파견하는 교육기관에서 인턴으로 3개월 동안 일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경영자가 미혼여성 강사만 보라면서, 날씬하지 않고 예쁘지 않을 경우 일을 제한적으로 주겠다는 신체규정을 만들었다고 통보했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 항의했는데 오늘 회사를 나가라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건물의 미화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최근 회사에서 살찐 미화원들이 산업재해를 많이 당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적절한 체중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6개월~1년의 무급휴가를 보내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습니다.”

정치권은 뒤늦게나마 채용이나 직장에서의 외모 차별에 주목했다. 정옥임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 6월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사업주들이 채용 시 입사지원자들에게 증명사진을 붙이거나 제출하게 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내용이다. 그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이력서에 증명사진을 붙이도록 하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일본 뿐”이라며 “취업시장에서 실력이나 직업적 소양보다 외모를 중시하게 된 관행 중 하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 의원은 “ 9월 정기국회 회기 내에 상정, 본회의에서 통과되도록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법률적인 접근보다 “사회적인 인식을 바꾸는 게 먼저”라는 지적도 있다. 이구경숙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처장은 “사회 각 분야에서 창의성이 중시되면서도 유독 아름다움의 기준만 제자리걸음”이라며 “외모가 상품화되는 데서 나아가 경쟁력으로까지 인식되는 건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의식 확산이 중요하다. 성 상품화를 부추기는 미디어와 인재를 채용하면서 아직도 외모를 보는 기업들부터 나서서 관행을 깨야 한다”고 강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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