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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나의 경영론] 모든 아이디어는 경험에서 나온다

[CEO 나의 경영론] 모든 아이디어는 경험에서 나온다

어머니는 그를 낳고 백일 만에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그가 고등학교 2학년 때 폐암으로 별세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초등학교 교사이던 형 집에 얹혀살았다.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특히 아버지가 죽고 싶지 않다고 애처롭게 말하던 모습을 잊지 않았다. 의대 진학을 결심한 건 그래서였다(시골의 여느 어른들이 흔히 그렇듯 아버지는 애초 그가 검사나 판사가 되길 희망했다). 의사가 돼 암을 정복하고 싶었다.

서울대 의대를 지원했지만 낙방했다. 2지망으로 서울대 치대에 합격했다. 8개월쯤 다니다가 미련 없이 휴학했다. 암을 고치는 의사가 되겠다는 목적과 전공이 달라서였다. 의대와 인연은 결국 닿지 않았다. 세 번 낙방하고 후기로 한국외국어대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갔다. 서울대 치대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의사가 아니라면 차라리 전혀 새로운 걸 하고 싶었다. 대학 시절인 20대도 그의 표현처럼 암흑기였다. 외무고시에 번번이 떨어졌다. 카투사로 군 복무를 마치고 30세가 돼서야 해운공사(현재 한진해운)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내 인생의 20대는 암흑기”윤윤수(66) 휠라코리아 회장의 얘기다. 말 그대로 그의 출발은 미약했다. 지금은 다르다. 현재 세계 70여 개국에서 팔리는 휠라의 글로벌 CEO로 한 달의 절반을 해외에서 보내며 회사를 이끌고 있다. 『내가 연봉 18억원을 받는 이유』라는 책을 쓴 후 30억원이 넘는 연봉을 받던 그는 월급쟁이 사장에서 2005년 휠라코리아 오너로 변신했다. 그 후 2년 만에 이탈리아산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 휠라의 본사를 인수했다.

지난해에는 2007년 휠라 본사를 인수하면서 투자자에게 약속한 대로 기업공개를 해 뭉칫돈을 안겨줬다(2005년 일반 투자자는 주당 7500원에, 2007년 재무적 투자자는 주당 2만원에 주식을 받았는데 휠라코리아의 상장 첫날 주가는 7만원을 넘었다).

젊은 시절 좌절과 실패를 딛고 일가를 이룬 윤 회장은 4월 말 서울 서초동 휠라코리아 본사에서 만난 자리에서 “경험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말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역발상과 번득이는 아이디어 역시 경험에서 나왔다는 설명이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아이디어가 뚝 떨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문제가 생기면 그걸 해결할 방법을 생각하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거꾸로 생각하거나, 생각하는 방향을 조금만 틀면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이때 중요한 게 경험이다. 고정관념의 탈피나 생각의 전환은 교육이나 훈련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주장이다. 박사 학위가 있거나 MBA를 했다고 특별히 나아지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심지어 역발상이나 아이디어는 창의력의 산물이 아니라고 여긴다. 오로지 경험이 성공의 원천이란 것이다. 여기에 열정과 용기, 정직이 조금 더 필요하고….

윤 회장은 경험에서 캐낸 아이디어로 자신의 새로운 비즈니스 역사를 썼다. 대표적 사례가 휠라 본사 인수 건이다. 그는 2007년 3월 휠라 본사를 인수했다. 그 전까지 그는 휠라의 여러 라이선시(라이선스 사업자) 가운데 하나였다. 라이선스 계약은 대개 5년 단위로 한다.

라이선시 입장에서는 장사가 잘되든 그렇지 않든 만료 후 재계약을 장담할 수 없다. 본사인 라이선서 마음에 달렸다. 5년이란 시간도 금방 흘러간다. 라이선시는 언제나 불안하고 마음 편히 투자하기도 어렵다. 1992년 휠라코리아를 세워 별다른 문제 없이 회사를 꾸려 가던 윤 회장도 이런 현실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2005년 휠라코리아 지분을 100% 확보해 휠라 그룹에서 독립한 그는 본사 정복에 나섰다. 문제는 돈이었다. 고심하던 그는 라이선스 계약을 평생 동안으로 연장해주고 평생 낼 로열티의 절반을 현재 가치로 환산해 내도록 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는 세계의 휠라 라이선시에게 “내가 오너가 되면 평생 재계약 걱정하지 않고 비즈니스를 할 수 있게 해줄 테니 로열티의 절반을 선불로 내라”고 했다. 재계약 걱정을 없애주는 대신 매출액의 8%인 로열티 중 4%를 선로열티로 받겠다고 제안했다. 나머지는 4%는 평소처럼 해마다 내도록 했다. 라이선시의 비애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떠올리기 어려운 발상이었다. 을의 어려움을 진심으로 헤아리고 이해하는 갑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대동강 물 팔아 대동강 사들인 꼴윤 회장은 중국·남미·유럽·일본 등의 라이선시로부터 윤윤수가 휠라를 인수하는 조건으로 선로열티를 지급하겠다는 의향서를 받아냈다. 브라질·중국·일본에서 각각 5000만 달러, 유럽에서 1억1000만 달러를 받는 내용이었다. 이 의향서를 모아 외환은행을 찾아갔다. 무형의 라이선스 계약을 담보로 4억 달러에 이르는 인수자금 가운데 4분의 3을 빌렸다. 한국 최초의 기업 인수 방법이었다. 대동강을 사면서 대동강 물을 먼저 팔아 대금을 치르는 식이었다(은행 빚은 약속한 상환 시한인 2008년 6월 말보다 4개월 일찍 모두 갚았다).

2007년 11월 당시 휠라 모델이었던 패리스 힐턴이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윤윤수 회장과 포즈를 취했다.

그는 이미 여러 파트너의 입장을 조율해 사업을 성사시킨 경험이 있었다. 그는 1980년대 초 화승의 수출 담당 이사 시절 휠라의 북미지역 라이선스 사업자인 호머 알티스를 만났다(빚더미 속에 빠져 있다 윤 회장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알티스는 휠라 사업에서 손을 떼면서 1991년 휠라코리아가 출범할 때 본사에 윤 회장을 사장으로 추천했다). 화승보다 한발 앞서 휠라 라이선스를 따내 미국에서 신발 사업을 하던 알티스는 사업 시작 8개월 만에 빚만 50만 달러나 지고 있었다. 사업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휠라 신발 라이선스를 다른 회사에 넘기고 월급쟁이 사장 노릇을 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하늘이 다시 휠라와 인연을 맺을 기회를 줬다고 직감한 윤 회장은 재정 파트너이자 유통업체로 한국의 종합상사를 소개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마침 쌍용 미국지사장이 고교 동창이라 일이 한결 쉬웠다. 윤 회장은 브랜드를 제공하는 휠라 본사, 라이선스 계약자인 알티스, 재정 파트너인 쌍용, 제품 공급자인 한국의 신발업체, 그리고 에이전시인 자신을 포함해 5자 역할 분담론을 기획해 대성공을 거뒀다.

윤 회장이 제조공장을 소유하지 않는 브랜드 비즈니스를 고집하는 것도 경쟁사의 실패를 지켜본 경험에서다. 예를 들어 국내시장에서 나이키·아디다스를 압도했던 토종 신발 메이커 국제상사가 법정관리로 넘어간 데는 몸이 무거웠던 탓도 있었다는 것이다. 부산의 신발공장에 대대적으로 투자했는데 공장을 놀릴 수 없어 계속 돌렸지만 신발이 팔리지 않아 재고만 쌓였다는 경험담이다.

그는 휠라 본사를 인수한 후 생산거점을 중국 푸젠(福建)성 진장(晋江)으로 옮겼다. 진장에서 만든 신발은 기존 광둥(廣東)성 둥관(東莞)에서 만든 제품보다 품질이 다소 떨어졌다. 반면 가격은 훨씬 쌌다. 이곳에서 만든 신발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일자리를 잃어 지갑이 얇아진 미국 소비자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중국에서 신발산업이 가장 먼저 꽃핀 이곳은 짝퉁의 천국이기도 했다. 브랜드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라면 가격 경쟁력이 있더라도 이곳을 꺼렸다. 휠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왜 진장에 둥지를 틀었을까. 윤 회장은 경험상 진짜 같은 가짜를 만들 수 있는 건 그만한 기술력이 있다고 봤다.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가 덮치면서 둥관에서 만든 신발로는 이익을 낼 수 없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양질의 노동력를 싼값에 확보한 윤 회장은 진장이 악명 높은 짝퉁 소굴이란 딱지를 떼는 덤도 얻었다. 진짜 휠라가 들어가니 가짜 휠라를 만드는 공장이 생산을 중단했다. 휠라에서 고발하면 문제가 커지니까 문을 닫은 것이다.



짝퉁 천국에서 신발을 만들다윤 회장은 진장에 계속 머물 생각은 없다. 조건이 맞지 않으면 언제든 공장을 옮긴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언제든 치고 빠질 수 있도록 몸을 가볍게 가져가는 브랜드 비즈니스의 원칙을 철저히 지킨다. 앞으론 생산량의 40%만 진장에서 조달하고 나머지는 인도네시아 등 다른 나라에서 만들 계획이다. 중국 서부 대개발 등의 영향으로 진장 쪽도 인력난이 심해 지고 있어서다. 윤 회장은 다만 디자인은 아웃소싱하지 않는다. 디자인 파워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국내외에서 휠라 브랜드를 관리하고 라이선스 사업을 하는 휠라코리아는 올 들어서도 순항하고 있다. 1분기 연결 기준 매출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5% 늘어난 1471억원, 영업이익은 13% 증가한 205억원을 기록할 전망이다. 증권가의 예상치를 뛰어넘는 수준이다.

가장 큰 시장인 한국과 미국 판권을 현재 100% 보유하고 있는 윤 회장은 세계 4대 스포츠 브랜드로 입지를 다지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펼치고 있다. 반영구적 라이선스 재구매와 지역별 마케팅 차별화 전략이다. 휠라 본사 인수가 급했던 윤 회장은 상장 전까지 글로벌 시장에서 많은 걸 포기했다. 미국의 휠라USA는 직영 체제지만 중국은 안타스포츠와 합작법인을 세워 운영하고 있다. 나머지 지역은 반영구적 라이선스를 줬다.

윤 회장은 지난해 가을 증시 상장 이후 한 달에 절반을 미국·유럽·중국 등을 돌며 반영구적 라이선스를 다시 사들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반영구적 라이선스를 사들여 다시 라이선스 로열티를 받는 방식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반영구적 라이선스 때보다 라이선스 로열티를 더 받을 수 있다. 동유럽·중동·아프리카 지역의 재편은 거의 마무리했다. 영국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존 라이선시인 인티그릭스와 계약을 해지하고 JD스포츠와 새로 손잡았다. 이를 통해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800개의 유통망을 확보했고 로열티 수입도 50% 가까이 늘었다.

윤 회장은 4월 말 독일에서도 새로운 라이선스 계약을 매듭지었다.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지역 라이선스 회사와도 협의하고 있다. LIG투자증권 손효주 연구원은 “유럽 라이선스 교체건이 속속 완료되면서 미국에 이어 유럽시장에서도 휠라의 고성장이 기대된다”고 설명했다. 로열티 수익은 특히 따로 비용이 들지 않아 수익성을 높이는 효자가 될 전망이다. 미래에셋증권 박주비 연구원은 “휠라코리아의 1분기 로열티 수익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5% 늘어난 770만 달러로 예상된다”고 분석했다.

유럽시장을 겨냥한 마케팅 차별화 전략의 핵심은 나라별 공략이 아니라 유통 체인별 접근이다. 윤 회장은 “EU는 하나의 시장이라 프랑스 파트너가 프랑스에서만 팔겠지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달리 미국은 여전히 가격 대비 품질이 좋은 ‘밸류 프로덕트’로 공략할 계획이다. 이 덕에 3년간 적자였던 휠라USA는 지난해 흑자로 돌아섰다. 올 들어 2월까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매출이 50% 늘었다.

이렇게 새로운 라이선스 계약을 하랴, 공장을 둘러보랴 바쁜 그는 출장으로 쌓은 항공사 마일리지만 400만 마일이 넘는다. 세계 70여 개국에서 팔리는 글로벌 기업의 CEO답게 그의 명함에는 한글이 없다.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책 제목인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가 참 맞는 말”이라고 강조하는 그는 요즘 젊은이들이 예전보다 유약하다고 걱정했다. 그는 “책상머리에 머물지 말고 다양한 경험을 쌓아 세계로 나가라”고 경험에서 우러나온 묵직한 한마디를 남겼다.

남승률 기자 namo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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