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lector] 몽유도원도 만든 비운의 예인

2009년 10월 초.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 열흘 동안 긴 줄이 늘어섰다.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특별전. 당시 가장 눈길을 끈 작품은 안견의 몽유도원도(1447년)였다. 일본 나라(奈良)현 덴리(天理)대 도서관에서 빌려온 이 그림은 1986년, 96년에 이어 세 번째로 국내에 전시됐다. 오랜만에 고국에 돌아온 그림이지만 전시기간은 불과 열흘이었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몽유도원도를 보기 위해 박물관을 찾았다. 조선 전기 최고의 산수화로 꼽히는 몽유도원도. 이 작품을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1418~1453)이다.
그린 이는 안견이지만 그림을 탄생시킨 이는 안평대군이다. 인연은 안평대군의 꿈에서 시작한다. 1447년 정묘년 4월 20일 밤, 안평대군은 자리에 누웠다. 정신이 아른해지면서 곧 깊은 잠에 빠졌다. 그는 박팽년과 함께 산길을 걸었다. 우뚝 솟은 멧부리, 깊은 골짜기. 험준하고 심원한 골짜기를 지나 복숭아나무 수십 그루가 있는 화사한 도원에 이르렀다.
안평대군은 안견에게 이 얘기를 해주며 화폭에 옮기라고 했다. 안견은 3일 만에 그림을 그려 바쳤다. 그림은 환상적이고 심오하다. 안평대군의 후원 덕분일까. 자신감이 넘쳐난다. 새로운 시도도 보인다. 두루마리 그림은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스토리가 흘러가는데 이 그림은 그 반대다. 왼쪽 아래에서 시작해 오른쪽 위의 도원으로 이어진다. 도원의 복사꽃은 화려하고 섬세하다. 그림을 본 안평대군은 제목과 발문을 썼다. 몽유도원도 제목의 글씨체는 유려하고 세련미가 넘친다.
시와 그림과 글씨에 조예가 깊었던 안평대군은 옛것을 즐겨 수집했다. 김안로는 이렇게 썼다. “비해당(匪懈堂·안평대군의 호)은 옛 그림을 좋아했고 또한 그 법에도 통달했다. 누군가 그림을 수장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값을 치고 그림을 구했는데 해가 오래되어 수백 축에 이르렀다. 당송대의 고물인 경우 비록 망가진 비단이나 쪼가리 첩이라고 해도 결국 구하여 감상했다.”
꿈으로 이어진 안견과의 인연신숙주는『보한재집(保閑齋集)』의 화기(畵記)에 이렇게 적었다. “비해당은 서화를 사랑하여 누가 조그만 쪼가리라도 가지고 있다 하면 반드시 후한 값으로 샀으며…어느 날 이것들을 모두 꺼내어 나에게 보여주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것들을 좋아하는 성격인데 이것은 병이다. 10여 년 동안 널리 찾아 이만큼 얻었다. 물건의 이뤄지고 무너짐이 때가 있으며 모이고 흩어짐이 운수가 있다’고 했다.”
신숙주가 이 화기를 쓴 것이 1445년이었으니 안평대군의 나이 스물일곱. 열일곱 살부터 서화를 모았다는 말이 된다. 화기에는 안평대군의 소장품 목록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안평대군의 소장품은 산수화 84점을 비롯해 초충도, 인물화, 글씨 등 모두 222점이다. 중국 동진의 고개지, 당의 오도자·곽희, 원의 조맹부·마원 등의 작품이 있다. 안견의 작품도 36점이나 포함됐다. 안평대군은 중국과 우리 명현들의 글씨를 모은 『비해당집고첩(匪懈堂集古帖)』, 자신의 소장품을 모은 『역대제왕명현집(歷代帝王名賢集)』도 간행했다. 『비해당집고첩』을 간행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옛사람의 서법을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 모범으로 삼기 위해 책을 낸다”고 밝히기도 했다.
안평대군은 컬렉터이면서 낭만적인 예인이었다. 그는 경복궁 북문 밖 무계동(지금의 종로구 부암동)에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짓고 당대의 문화인들과 어울렸다. 만 권의 책을 소장하고 문사들을 불러 시서화를 논했다. 달이 뜨면 뱃놀이도 하고 술도 즐겨 마셨다. 안평대군은 무계정사의 못에 연꽃을 심고 주변엔 수백 그루의 복숭아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가 꿈에서 본 것이 바로 이 복숭아나무가 아니었을까.

안평대군은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컬렉터였다. 그는 단순한 컬렉터가 아니라 안견의 팬이자 후원자이기도 했다. 안견의 작품을 36점이나 소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웅변한다. 안견은 안평대군의 컬렉션을 수시로 감상하고 안평대군으로부터 적절한 비평을 받으면서 그림 실력을 키워 나갔다. 그렇기에 몽유도원도가 탄생할 수 있었다.

안평대군은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1453년 계유정란 때 형인 수양대군에 의해 처형을 당했다. 형과의 정치 투쟁에서 패한 것이다. 강화도로 유폐된 뒤 사약을 받고 34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의 컬렉션은 온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몽유도원도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전하지 않는다. 안평대군 컬렉션의 아쉬움이자 비극이다.
몽유도원도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1447년 정묘년 4월 20일 밤, 꿈에서 안평대군은 처음에 박팽년과 말을 타고 도원으로 향했다. 도원에 도착한 뒤에는 신숙주, 최항이 동참했다. 그런데 이것이 좀 수상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했던 박팽년은 현실에서도 죽음으로 안평대군을 지키려고 했다. 사육신이 된 것이다. 반면 뒤늦게 도원에 합류한 신숙주와 최항은 현실에서 안평대군을 버렸다. 운명의 예시 같은 안평대군의 꿈.
한국 최초의 본격 컬렉터안평대군의 비극이 몽유도원도에도 이어진 것일까. 명품 몽유도원도는 현재 이 땅에 없다. 이 작품이 이국땅 일본에 언제 넘어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1893년 11월 일본 규슈 가고시마에 사는 한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 존재를 다시 드러냈다. 이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다 1947년 도쿄의 고미술화랑 유센도 주인이 구입했다.
몽유도원도가 돌아올 기회도 있었다. 1950년 한국인 고미술상이 작품을 들고 부산에 나타났다. 당시 컬렉터였던 손재형(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일본에서 찾아온 사람), 이영섭 등에게 작품을 보였고 구매자를 수소문했다. 그러나 가격이 너무 비싸 새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 결국 몽유도원도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어 1955년께 현재 소장처인 덴리대로 넘어갔다.
당대 컬렉터였던 간송 전형필에겐 이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간송이 그 소식을 들었더라면 틀림없이 작품을 구입했을 텐데…”라며 아쉬워한다. 몽유도원도를 보면 그 운명이 안평대군과 참 비슷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서울 부암동에 가면 안평대군이 살았던 무계정사의 터가 있다. 바로 앞은 현진건의 집터다. 지금은 쓸쓸하지만 500여 년 전 한 컬렉터의 낭만과 열정으로 몽유도원도를 탄생시킨 곳. 당대를 풍미했던 예인이자 한국 최초 컬렉터의 꿈이 아련히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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