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RAVEL] ESCAPE 사랑의 섬 카프리
많은 섬이 그러하듯 이탈리아 나폴리만에 있는 카프리 섬도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간직해 왔다. 고대 로마 시대 티베리우스 황제의 별궁이었던 빌라 요비스 궁전터가 여전히 섬의 동쪽 끝을 지키고 섰다. 털가시나무가 늘어선 절벽 위 곳곳에는 벨에포크(1871~1914년 서유럽이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던 시기)에 지어진 별장들이 눈에 띈다. 당시 카프리는 유럽 동성애자의 천국이었을 뿐 아니라 갈수록 산업화와 폭력에 물들어 가던 유럽 대륙의 성역과 같은 곳이었다. 기인과 부유한 몽상가들이 자신의 몸에 깃든 악마를 몰아내려고 이곳에 모여들었다. 릴케(오스트리아 시인)는 카프리를 사랑했고, 노먼 더글러스(영국 작가)는 카프리를 문학작품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오스카 와일드(아일랜드 극작가)와 헨리 제임스(미국 태생 영국 작가)는 한때 아나카프리에 있는 스웨덴 정신과의사 악셀 문테의 별장인 산 미켈레에 머물렀다. 1920년대에 카프리는 방탕한 레즈비언들의 천국이었다. 이 섬을 성(性)적인 것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일은 매우 자연스러워 보였다. 카프리는 사랑의 섬이었다.
지금도 카프리엔 (각종 신용카드로 무장한) 연인들이 모여든다. 하지만 요즘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모습은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기던 과거 여행객들의 모습과 대조적이다. 나폴리에서 출발한 수중익선(水中翼船)에서 당일치기 관광객이 쏟아져 나온다. 그룹별로 다른 색깔의 모자를 쓰고 귀에 통역용 이어폰을 꽂은 이들은 마치 중세의 탁발승들처럼 그룹을 지어 천천히 움직인다. 그중에서도 러시아 관광객들이 가장 기이하다. 블랙 사바스(영국 헤비메탈 그룹)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와 비치웨어를 입고 머리에 헤드폰을 쓴 러시아 관광객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가이드를 따라 광장을 지나간다. 그들에게서는 도무지 즐거운 기색이 보이지 않아 왜 이곳에 왔는지 의아할 정도다.
카프리에는 페라가모, 로베르토 카발리 등 명품 패션 브랜드 매장이 즐비하다. 각종 브랜드 매장이 모여 있는 야외 아웃렛처럼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어떻든 상관없다. 어차피 요즘 사람들은 멀리 여행을 가서도 평상시 이용하는 브랜드의 매장에서 쇼핑을 하기 때문이다. 이게 ‘여행’의 수수께끼다. 하지만 쇼핑이 전부는 아니다. 카프리를 아끼고 좋아하는 부자들은 사치와 낭비로 부를 과시하는 데만 몰두하진 않는다. 우리는 광장을 지나 트라가라 거리를 따라 푼타 트라가라 호텔 쪽으로 갔다. 아이젠하워와 처칠이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비밀회담을 연 곳이다. 이곳의 빼어난 경치는 이미 잘 알려졌다. 금송(金松)과 금작화가 빽빽이 늘어선 현기증 나는 석회암 절벽 밑으로 보석 같은 바닷물이 넘실거린다. 절벽 위에서 꼬불꼬불 난 길을 따라 바닷가까지 걸어서 내려갈 수 있다. 독일의 강철 사업가 프리드리히 알프레트 크룹이 만든 길이다. 카프리를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변모시킨 사람은 크룹과 자크 페르장(프랑스 시인) 등 세련된 취향을 지닌 백만장자 동성애자들이었다. 카프리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크룹은 1902년 18세의 이발사 겸 아마추어 뮤지션 아돌포 스키아노와의 관계가 들통나자 목숨을 끊었다. 크룹은 자신의 요트 퓨리탄이 정박해 있던 바닷가에서 현지 젊은이들과 주연(酒宴)을 즐겼다고 알려졌다.
페르장의 아름다운 별장 빌라 뤼시스는 빌라 요비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황금 모자이크가 새겨진 흰 기둥들과 타일을 붙인 아편굴이 온전히 보존돼 있다. 이 별장의 이름은 플라톤의 ‘대화’ 중 남자의 사랑의 본질을 파헤친 ‘뤼시스’ 편에서 따왔다. 페르장 역시 1923년 샴페인에 코카인을 섞어 마시고 자살했다. 그의 집에는 판[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목신(牧神): 염소의 뿔과 다리, 귀가 달린 반인반수(半人半獸)의 괴물]으로 분장한 그의 연인 니노 세자리니의 사진이 가득하다. 이교도적인 동성애가 마침내 이곳에서 안식처를 찾은 셈이다.
해질 무렵 가파른 절벽을 올라 허물어져 가는 별장들과 오렌지 나무 사이로 난 뒷골목을 돌아다녔다. 파 요리를 안주 삼아 그레코 디 투포 와인을 홀짝이고 있자니 카프리라는 이름이 이 섬의 절벽들을 쏘다니던 ‘염소’에서 유래했다는 말이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매미 울음소리와 종소리, 사방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를 듣고 있자니 판과 자연의 관능적인 측면에 탐닉했던 페르장의 마음을 알 듯했다.
카프리의 도로 대부분이 보행자 전용이다. 또 골목마다 ‘청결과 고요’의 미덕을 지키라는 이색적인 팻말이 붙어 있다. 트라가라 거리에 있는 빌라 말라파르테는 장-뤼크 고다르 감독의 영화 ‘사랑과 경멸’(1963)의 배경이 됐던 곳이다. 지붕이 계단식으로 된 이 오렌지색 건물은 원래 이탈리아 언론인 크루지오 말라파르테(무솔리니에 의해 여러 차례 투옥됐다)의 집이었다.
20세기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푼타 트라가라 호텔은 한때 엔리카 만프레디 백작부인의 별장이었다. 트라가라 전망대를 굽어보고 있는 이 호텔은 오렌지색 외벽과 선인장 숲이 어우러져 우아하면서도 소박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드러나지 않게 은근히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기던 예전의 카프리 섬과 더 잘 어울리는 곳이다. 실내로 들어가면 벽 곳곳에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고 우고 리바(스페인 조각가)의 조각 작품과 고풍스러운 지구본 등의 장식이 눈에 띈다. 객실 테라스에 나와서 잠을 자도 되는데 마치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섬뜩할 정도로 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바다를 둘러싼 작은 만(灣)들을 따라 우뚝 선 절벽들이 꼬불꼬불 끝없이 이어진다. 독일의 시인이자 화가인 아우구스트 코피시가 1826년 이 섬을 처음 ‘발견’했을 때 그는 이 신비스러운 만과 숲에 매료됐다.
카프리가 관능적인 분위기의 신비스러운 섬으로 인식되게 된 이유는 뭘까? 이런 인식은 티베리우스의 전설과 깊은 연관이 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에 대해서는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다. 티베리우스에게 적대적이었던 역사가 겸 전기 작가 수에토니우스는 티베리우스를 자신이 좋아하는 섬에 갇혀버린 나이 든 호색한으로 그렸다. 수에토니우스가 지어낸 이야기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매일 널찍한 로마식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작은 물고기’라고 불리는 어린 소년·소녀들로 하여금 자신의 가랑이 사이를 헤엄치면서 혀나 이로 성기를 자극하도록 해 쾌락을 느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 덕분에 티베리우스의 궁전은 광적인 타락의 상징이 됐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였던 티베리우스가 카프리에서 겸손하고 소박하게 살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사람들은 티베리우스를 생각할 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상한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는 절대권력과 수수께끼 같은 섬 생활이 만들어낸 괴물이 됐다. 카프리는 10년 동안 로마제국 통치의 중심지가 됐지만 당시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하다. 이 섬은 로마 제국의 통치자를 도취시켰고, 20세기 초 쾌락을 추구하는 관광객들은 이런 개념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카프리에서는 여전히 관능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빌라 요비스와 빌라 뤼시스 사이로 난 외진 길에는 아이리스와 야생 아스파라거스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이 길을 걷다 보면 땅에서 관능적인 열기와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하다. 정원에서는 커다란 레몬들이 자라고 딸기나무 사이로 우뚝 선 흰 기둥들은 고대 크레타 섬의 별장들을 연상케 한다. 밤에 우리는 바닷가를 따라 아르코 나투랄레(거대한 바위가 비바람에 침식돼 이뤄진 천연 아치)로 가는 오르막길을 걸었다. 중간에 고대 로마 시대에 신전으로 사용하던 동굴을 구경하고 계속 올라가다 보니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레스토랑 ‘르 그로텔레’에 다다랐다.
섬의 반대편 끝자락 아나카프리에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건물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호텔이 있다. 러시아 왕자 에마누엘 불락의 거처였던 이 호텔은 베수비오산과 나폴리가 바라다보이는 300m의 절벽 위에 서 있다. 빌라 산 미켈레 바로 아래쪽에 위치한 이 호텔은 수수하고 단순미를 자랑하는 이탈리아 5성급 호텔 중 하나다. 객실 발코니에선 수백, 수천 년의 역사를 기억하는 에메랄드빛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매들이 보인다. 주세페 레스타가 운영하는 아름다운 레스토랑에서는 조개와 킹크랩을 곁들인 오징어 먹물 파스타와 차가운 피앙코 디 아벨리노 와인을 맛볼 수 있다. 도심의 레스토랑에서는 감히 흉내 내지 못할 깊은 맛이 느껴진다.
요즘 카프리에는 식기 상점과 고급 속옷 매장이 즐비하다. ‘맞춤 샌들 판매’라고 쓴 간판도 수없이 늘어섰다. 이런 광경에 눈살을 찌푸릴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난 카프리를 오염시키고 변질시키는 소비주의와 심지어 블랙 사바스의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러시아 관광객들도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카프리의 밤바람이 여전히 바다 내음과 솔 향기를 실어다주니 말이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호텔에 서 있는 실물 크기의 아우구스투스 동상은 불락 왕자가 로마에 있는 빌라 리비아의 동상을 그대로 복제하도록 의뢰해 제작한 작품이다. 카프리는 여전히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의 섬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내게 카프리는 인도를 떠올리게 한다. 한낮의 들판, 흐드러지게 핀 양귀비 꽃과 시클라멘, 그리고 야생 로즈메리. 이런 것에서 옛 인도의 이교도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겨난다.
[필자는 작가로 최근 ‘방콕의 나날들(Bangkok Days)’을 펴냈다.
번역 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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