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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의 성(性)은 너무 위험하다’

‘이화의 성(性)은 너무 위험하다’

“기다리다 지치고 지쳐 달이 떴는지 해가 떴는지 모를 때쯤 돼서야 삐쭉 내미는 그 얼굴 한 번에 또 다시 님 발자국 좇는 게 여인네라고 했지라. 그것이 여자라는 업보여. 가슴 속에 정 심어 놓고 물 뿌려가며 가꿔온 여인네의 벌이랑께. ”

만화가 김동화(63) 씨의 ‘황토빛 이야기’는 여인들의 사랑, 그리움, 그리고 기다림을 그린 작품이다. 1940년대 한 시골 마을, 남편을 일찍 여의고 홀로 주막을 운영하며 일곱살짜리 딸을 데리고 외롭게 살아가는 어머니는 어느 날 주막을 찾은 한 장돌뱅이에게 마음을 준다. 그녀는 기약 없이 떠돌아 다니는 그 사내를 기다리며 그리움만 키운다. 딸 이화의 첫사랑은 스님이다. 바깥 나들이가 자유롭지 못한 그를 그리워한다. 이화에게 찾아온 두 번째 사랑인 유학생 도련님은 바람처럼 잠시 머물다 가고, 씨름꾼 머슴 덕삼은 열일곱살이 된 이화를 탐하던 주인과 다투고 마을을 떠난다.

여성의 의사표현이 지금처럼 자유롭지 못하던 그 시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기다림뿐이다. 이화는 낮에 낙엽을 쓸어 모아 군불을 때며 마음을 태우고, 어머니는 밤이면 밝게 빛나는 박꽃을 심어 사랑하는 이가 찾아오기를 기도한다. 이처럼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면서도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는 근대 여성의 삶을 아름다운 그림과 투박한 전라도 사투리로 그려낸 이 작품은 ‘The Color of Earth’라는 제목으로 2009년 미국에서 출판됐다(로렌 나 옮김, 퍼스트세컨드 펴냄).

하지만 미국의 학부모들은 지난해 이 작품을 ‘도서관 퇴출’ 도서로 건의했다. ‘노출, 성행위 묘사, 성교육(nudity, sexually explicit, sex education)’이 주된 이유였다. 전미도서관협회는 매년 ‘가장 많이 퇴출 요청을 받은 책(Frequently Challenged Books)’을 조사한다. ‘황토빛 이야기’는 지난해 ‘가장 많이 퇴출 요청을 받은 책’ 2위에 올랐다. 1위는 로렌 미라클의 ‘TTYL’, 최근 영화화되며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베스트셀러 ‘헝거게임’이 3위다(뉴스위크 한국판 4월 25일자 16쪽 참조).

이 목록은 전미도서관협회의 지적자유사무국(Office for Intellectual Freedom)이 전국의 도서관을 통해 1990년부터 매년 집계한다. 학부모들이 어떤 책을 학생들에게 빌려주지 말라고 도서관에 요청했는지를 기준으로 한다. 자유로운 독서를 권장하고 일방적인 검열을 비판하려는 목적이다. 학부모들이 문제의 책으로 꼽은 이유는 ‘성행위 묘사’가 가장 많았고(20%), ‘공격적 언어 사용’(16%)이 그 다음 순서였다.

‘황토빛 이야기’에 이어 4위에 오른 ‘동생이 생겼어요(My Mom’s Having A Baby!)’의 작가 도리 힐레스타드 버틀러와 6위 ‘앨리스(Alice)’의 저자 필리스 네일러는 미국의 대표적인 청소년 문학가이며 5위 ‘짝퉁 인디언의 생짜 일기(The Absolutely True Diary of a Part-Time Indian)’를 쓴 셔먼 알렉시는 미국 최고의 도서상인 ‘전미도서상’ 수상자다. 1932년에 출간된 올더스 헉슬리의 고전SF소설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가 7위, 퓰리쳐상 수상작인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는 10위다. 청강문화산업대학교의 박인하 교수(만화학부)는 “오히려 권장도서 목록을 보는 듯하다”고 말했다.

‘황토빛 이야기’의 서사 구조는 소녀 이화의 성장기다. 남자는 돌출된 성기가 있는데 왜 자신에게는 없는지조차 모르던 이화가 성(性)에 눈을 떠가는 과정이 작품의 근간을 이룬다. 코네티컷주에서 한 중학교 도서관의 사서로 일하는 페이스 밀러는 아마존 닷컴에 올린 서평에서 “이 책은 9세~12세 연령에게 결코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이화가 친구 봉순에게 자위를 배우는 장면을 예로 들었다. 봉순은 어른들의 놀이를 알려주겠다며 이화를 은밀한 곳으로 데려가 이화에게 스스로 성기를 만져보게 한다.

비평가들은 ‘황토빛 이야기’를 높게 평가한다. 국내에서 2003년 총 3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된 이 작품은 지난 4월 서울신문과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선정한 ‘한국만화 명작 100선’에 뽑혔다. 2006년 프랑스의 대형 만화전문 출판사 카스테르망이 불어판을 출간했고 이후 이탈리아, 스페인에도 차례로 수출됐다. 2007년 프랑스의 베스트셀러 소설가 뮈리엘 바르베리는 당시 한국으로 김동화 씨를 직접 찾아와 “꼭 만나보고 싶었다”며 ‘황토빛 이야기’는 “시적인 미감이 강렬한 작품이다. 서양은 그런 미감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고 극찬했다. 김 작가가 2008년 프랑스에서 열린 ‘앙굴렘 만화 페스티벌’에 참가했을 때 유럽의 만화 애호가들이 길게 줄을 서서 김 작가의 사인을 받았다고 한다.

미국 평단의 반응도 뜨거웠다. 전미청소년도서관서비스협회(YALSA)는 ‘황토빛 이야기’를 ‘2010년 10대를 위한 만화 소설’ 목록에 포함시켰다. 도서비평 전문지 북리스트(Booklist)도 “서정적이며 매우 아름답게 묘사된 만화(a lyrical and exquisitely visualized manhwa)”라는 평과 함께 ‘2010년 청소년을 위한 만화 소설 10선’에 올렸다. ‘황토빛 이야기’ 영어판의 편집자 칼리스타 브릴은 “출판할 때부터 논란이 있으리라 예상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성(sexuality)은 성장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황토빛 이야기’는 그 요소를 아주 솔직하면서도 긍정적으로 다뤘다.”

하지만 이 만화에 이의를 제기한 미국 학부모들은 바로 그런 솔직함에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로렌 미라클의 TTYL이 좋은 사례다. 16세 소녀 3명의 이야기를 다룬 이 책은 2009년 퇴출 목록 1위, 2008년 3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많은 학부모가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반면 저자 미라클은 소녀 독자들에게 ‘큰언니’라 불리며 하루에 수백 통의 팬레터를 받을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무슨 내용이기에 이렇게 반응이 엇갈릴까? 한 대목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고등학생인 한 소녀가 대학생들의 파티에 몰래 참가한다. 술을 잔뜩 먹고 취한 그녀는 옷을 벗었다가 나체 사진을 찍히는 수모를 당한다. 미라클은 그런 학생들의 실상을 그대로 묘사하되 무절제한 음주를 경고했다. 미라클은 데일리비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이 소설을 읽은 고등학생이 ‘그런 파티에 가서 조심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내 역할은 다한 것”이라고 말했다.



‘황토빛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다. 김 작가는 “어린 아이가 처녀로 변하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일곱살 이화가 남자 아이들과 다른 자신의 몸에 갖는 호기심, 자위의 쾌락, 남자와 입 맞추고 포옹하면서 느끼는 두근거림까지 숨김 없이 담으려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화는 결코 선을 넘지 않는다. 마을을 떠나는 머슴 덕삼과 기차역에 앉아 밤을 새우면서도 입맞춤 한번으로 돌아서는 이화의 모습은 플라토닉 사랑에 가깝다. 하지만 이화는 남자와 둘이 밤을 지샜다는 이유만으로 어머니에게 매를 맞는다.

김 작가는 자신의 책이 미국에서 논란이 됐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미국 학부모들이 그의 작품에 이의를 제기했다는 말을 듣자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 정도 수위가 문제될 줄은 몰랐다”며 “기성 세대가 젊은이를 너무 모른다”고 했다. “아이들이라고 무조건 보고 따라 하는 건 아니다. 스스로의 행위를 어느 정도는 판단할 수 있으며, 또 그런 판단력을 길러주는 게 부모의 역할이다. 아이를 보호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눈과 귀를 막는 게 능사는 아니다.”

물론 학부모들에게는 자녀들이 읽을 책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지적자유사무국의 부국장 데보라 콜드웰은 “부모가 가족이 읽을 책을 선택하는 건 자유지만, 다른 가족의 읽을 권리까지 빼앗을 수는 없다”면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정보를 제한하는 검열은 시민의 사회 참여를 제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인하 교수도 “학부모나 교육계의 민원은 항상 타당하리란 편견이 있다”고 지적했다. 전미도서관협회의 이번 목록은 그들의 청원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을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줬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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