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설계로 감성을 담는다
손 설계로 감성을 담는다
‘스윽스윽’
가느다란 선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다. 때로는 곧게, 때로는 구부러지는 손끝에서 금세 숲 속 건물이 완성됐다. 손으로 건축물을 설계하는 인의식(56) 연미건축 대표의 솜씨다. 1980년대 후반 건축설계업에 컴퓨터가 처음 도입된 이후 CAD(컴퓨터를 이용한 설계) 도면이 보편화됐다. 하지만 인 대표는 건축설계를 시작한 78년부터 지금까지 컴퓨터를 쓰지 않고 손으로 도면을 그려왔다.
7월16일 서울 방배동 사무실에서 만난 인 대표는 “컴퓨터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나타낼 수 있어서”라고 ‘손 설계’의 이유를 말했다.건축설계는 크게 4단계로 이뤄진다. 대략의 형태를 거칠게 그린 기획설계도, 이를 좀더 구체화한 초기 계획설계도, 세부 내용을
표시한 후기 계획설계도, 실제 공사에서 쓰이는 실시설계도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치수가 정확하게 표기된다. 일반적으로 건축물 인허가를 위해 컴퓨터로 그린 실시설계도를 쓰지만, 인 대표는 규모가 작은 프로젝트일 경우 4단계를 모두 손으로 소화한다.
“컴퓨터 프로그램이 입체적으로 표현해 준다고 해도 모니터에 갇힌 2차원입니다.재질감을 표현하기 어려워요. 손으로 그리면 힘의 강약, 펜의 속도, 떨림에 따라 다른 느낌이 나타납니다. 색연필, 마카, 파스텔등 스케치를 하는 재료마다 다양한 질감이 있어요. 또 같은 연필이라도 매끄러운 종이,거친 종이에 그릴 때 각기 느낌이 다르죠.”이른바 연 대표가 얘기하는 ‘감(感)’이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아이디어를 바로 그릴 수 있다는 것 역시 손 스케치의 장점이다.“첫 느낌이 중요해요. 처음 건축주의 얘기를 듣고 한 스케치는 미완성이지만 그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수많은 CAD 도면 사이에서 손으로 그린 도면은 건축주들의 흥미를 끈다고 한다. 한계도 있다. “아무래도 컴퓨터 작업보다 정밀도가 떨어지겠지만 규모가 작은 설계는 정확하게 합니다.”
감정 표현, 익숙함 외에 인 대표가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또 있다. 건축설계는 기술이 아닌 정신적 작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뇌에서 생각한 것을 신경이 전달해 손끝에서 그림이 나오는데요.이때 생각한 것을 넘어 잠재의식에 가라앉아 있던 아이디어까지 함께 표현됩니다. 생각한 이상의 결과가 나온다는 거죠.”
느낌과 순간의 생각을 강조한 ‘아날로그설계도’는 실제 건축물에서 자연주의로 나타난다. “설계할 때 항상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생각합니다.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장치를 만드는 것이 건축설계 디자인입니다. 형태는 영원하지 않아요. 한가지 형태를 고집하면 과거의 것이 돼버립니다. 인간이 성장하듯 건축물도 같이 변화해야 합니다.”
건축물이 변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자 설명이 이어졌다. “가령 2004년에 설계한 금강휴게소는 지열로 냉난방을 하고 자연채광이 충분히 들어오게 했어요. 또 비가 올 때와 햇빛이 비칠 때 휴게소 주변의 나무 색이 다르거든요. 이런 자연의 작은 변화까지 소재, 색상, 디자인에 반영했죠.” 금강휴게소는 그 해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을 받았다.
인 대표가 설계한 덕평휴게소 역시 고속도로 휴게소의 새로운 발견이라 불리며 지역 명물이 됐다. 이 휴게소의 1층 바닥은 외부의 바닥과 그대로 이어진다. 내외벽의 수직 패턴은 휴게소 주변에 서식하는 리기다 소나무 숲을 모티브로 디자인했다. “주변숲을 가능한 그대로 휴게소 안에 가져오려고 애썼어요. 비용이 많이 들었지만 그만큼 효과가 있다고 봅니다.”
주택을 설계할 때는 건축주와 교감이 필요하다. 그는 설계 전 100가지 문항이 넘는 조사를 한다. “키가 작은지 큰지, 왼손잡이인지, 오른손잡이인지 신체적 조건은 물론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아야 미래의 삶을 상상해볼 수 있으니까요.” 잠재된 아이디어를 손으로 스케치하듯 건축주의 무의식을 끄집어내야 가장 편안한 공간을 설계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인 대표는 부인 장명희 대표와 함께 ‘미를연구한다’는 의미로 87년 연미건축을 설립했다. 장 대표와는 고(故) 김수근 건축가의 건축사무소 공간에서 직장 동기로 만났다.사업 초기에는 직원을 50명 넘게 거느리고 대형 프로젝트를 여럿 맡았다. 하지만 사업을 확장하느라 정작 중요한 설계에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했다. 인 대표가 회사 규모를 줄이고 본격적으로 손 스케치에 매달린 것이 이 맘 때다.
한 해에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5~6건. 모든 설계에 부부가 직접 관여한다. 직원은 10명 남짓이지만 2005·2007 한국건축가협회상을 비롯한 2007 한국건축문화대상 공공부문 대통령상, 2011 한국건축문화대상 주거부문 대통령상 등 큰 상을 받으면서 업계의 실력자로 떠올랐다.
인 대표에게 꼭 설계해보고 싶은 건축물이 있냐고 묻자 “특정한 건물보다 좋은 건축주, 시공사를 만나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 바람이다”며 “ ‘건축계의 노벨상’ 프리츠커상을 받은 건축가 페터 춤토르처럼 혼을 담은 설계를 하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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