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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 솟은 현대 건축의 걸작

베이징에 솟은 현대 건축의 걸작



렘 콜하스는 1944년 11월 네덜란드의 항구 도시 로테르담에서 태어났다. 당시 도심은 거의 파괴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고 있었지만 완전히 끝나진 않은 상태였다. 나치 독일은 네덜란드의 도시 지역에 식량 공급을 차단했다. 수만 명이 굶어 죽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지금도 당시를 ‘굶주린 겨울(the Hunger Winter)’로 기억한다.

“부모님은 극단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식량을 구해야 했다(My parents needed to find extreme ways of getting food)”고 콜하스가 돌이켰다. 우리는 새롭게 살아난 도시 로테르담이 내려다 보이는 그의 회사 OMA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아버지는 실험용 쥐를 갖은 수단을 동원해 많이 구입했다(My father succeeded to buy a number of laboratory rats). 언젠가 그 쥐들이 집으로 배달

됐다.

그때는 전기도 끊어졌다. 부모님이 아파트에 들어왔을 때 뭔가가 있다고 느꼈다. 그들이 성냥불을 붙이자 죽은 쥐들이 피라미드처럼 쌓여 있었다(they lit a match and there was a heap, a kind of pyramid, of dead rats).” 그런 어린 시절을 거친 콜하스는세계 최고의 도시개발 전문가(urban theorist)이자 건축가 중 한 명으로 성장했다. 그는 개인적 경력과 여러 역사적 사건이 얽힌 프로젝트로 상도 많이 탔다. 2000년에는 동료들의 최고 찬사(the ultimate accolade by his peers)로 간주되며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Pritzker)까지 받았다.

그런데도 그는 겸허한 인상을 준다(he still comes off as modest). 이례적으로 키가 큰 사람들이 갖는 특이한 수줍음(peculiar shyness that some very tall people have) 때문일지 모른다(그의 키는 198㎝다). 콜하스는 시애틀부터 모스크바까지 상징적이고 눈길을 끄는 건축물을 설계했다.

그가 영어로 말할 때는 네덜란드어 억양과 구문이 뒤섞여 있지만(speaks with a Dutch accent and syntax) 영어로 글을 쓰면 촌철살인의 경구가 쏟아진다(a torrent of brilliant staccato aphorisms). 그의 건축 추세에 관한 에세이는 하나 같이 간결한 문구의 자극적인(succinct provocations) 제목이다. ‘혼미한 뉴욕(Delirious New York)’ ‘거대함(Bigness)’ ‘쓰레기 공간(Junkspace)’ ‘지루한 도시(The Generic City)’ 등.

그러나 미래 세대는 콜하스라고 하면 거대하고 기념비적이며 시대역행적이고 논란많은(massive, monumental, contrarian, and controversial) 하나의 건물을 떠올릴지 모른다. 중국의 국영 CCTV 본사다. 그의 로테르담 사무실에서는 그 건물을 ‘타워’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들이 붙인 별명은 ‘루프(loop, 고리)’다. 지난 5월 공식 개장한 그 건물은 베이징의 도심 상업구역에 대지 20만㎡ 위에 건설됐다.

그 건물은 높이가 다르고 기울어진 두 개의 거대한 통기둥(colossal)이 꼭대기에서 각이 진 거대한 가교(enormous angular bridge)로 연결된 형태다(가장 높은 부분이 234m다). 줄잡아 거의 9억 달러가 들었다고 한다. 콜하스는 건축 비용이 얼마인지 “전혀 모른다(no idea)”고 말했다. 분명한 점은 CCTV 건물이 현재 베이징의 스카이라인을 지배한다는 사실이다. CCTV가 중국의 전파를 지배하듯이 말이다.

콜하스는 자신의 배경 때문에 중국에 특별한 유대감(a particular sense of affinity)을 갖는 듯하다. 그는 역사, 전쟁과 고통, 복잡성, 모호성(ambiguity, 콜하스가 아주 좋아하는 단어다), 혼돈(chaos)에서 벗어나는 질서(order), 그리고 혼돈 속의 질서를 깊이 이해하며 늘 미래를 향한 야심적인 비전을 갖는다.

콜하스는 전후 암스테르담의 폐허를 놀이터 삼아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친은 늘 바쁜 기자이자 소설가로 30년 동안 매년 소설 한 권씩 펴냈다. 그의 조부는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콜하스가 어렸을 때 가장 매료됐던 건물은 옛 시립 공문서 보관소였다(전쟁 도중 레지스탕스가 폭파했다). “우린 늘 건물 잔해 속에서 놀았다(We always played in the ruins)”고 콜하스가 돌이켰다. “우리는 집에서 불러도 가지 않고 언제나 어머니가 와서 우리를 데려가야 했다(My mother always had to come and get us).”

콜하스가 여덟 살이었을 때 가족이 인도네시아로 이주했다. 그 때문에 그는 평생 인구 밀도가 높은 곳(densely populated places)과 복합적인 문화(overlapping cultures)를 좋아하게 됐다. “난 신이 났지만 부모님은 그렇지 않았다(I really thrived there, and my parents didn’t)”고 콜하스가 말했다. “그래서 일찍부터 독립심과 강단이 생겼다(so it created a kind of premature emancipation, which really made me very decisive).

집안을 대신해서 내가 중국인 시장에서 장을 봤다. 내겐 환상적인 시간이었다(I did the family shopping in the Chinese market. I had a fantastic time).” “그러면서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민족, 다양한 생활방식, 행복해지는 다양한 방법을 알게 됐다(It made me at an early age aware of very many different peoples, many different ways of living, many different ways of being happy). 신앙심을 갖는 다양한 방법(many different ways of being religious)도 알았다.

여덟 살 때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를 봤고 실제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우리는 인도네시아 학교에 다녔고 어느 정도 인도네시아식 삶을 살아야 했다(We had to live more or less an Indonesian kind of life).” 그러다가 열두 살 때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갔다. 콜하스는 불행했다. “갑자기 네덜란드가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돼 있었다(Suddenly, Holland was ‘organized’)”고 그가 돌이켰다. “그런 인식이 충격이었다(a shocking awareness).”

콜하스는 기자로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대본작가의 길을 모색하기도 했다(소프트 포르노의 대부 러스 마이어를 위한 시나리오를 썼으나 제작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콜하스는 일찍부터 건물과 도시도 ‘스토리’를 갖고 있다(buildings and cities had narratives too)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본과마찬가지(like scripts)”라고 그가 말했다. 그래서 그림만이 아니라 언어로서도 도시 환경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영국에서 건축학교에 다닐 때 그의 논문 주제 중 하나는 베를린 장벽이었다. 그는 책 ‘혼미한 뉴욕’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1972년 뉴욕에서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책이다. 당시엔 “뉴욕은 최악의 도시였다(it was the pits)”고 그가 말했다. 그러나 흥분과 모험, 인간애, 그리고 가능성의 거대한 창고이기도 했다.

40년 뒤 콜하스는 중국의 놀라운 가능성에 매료됐다. “가장 인상 깊은 문명 중 하나를 가졌던 나라다(a country that had one of the most impressive civilizations). 거의 어떤 나라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진 문명이다. 자체가 경외감과 특권을 준다(So that, in itself, gives a sense of awe and privilege). 그외에도 중국은 거대한 혼란의 근대사를 가진 나라지만 그런 혼란을 극복하려는 엄청난 노력을 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콜하스는 중국인들의 “믿기 힘들 정도의 투지와 조직적 능숙함(incredible determination and organizational competence)”을 지적했다. “중국은 거대한 건설 공사를 해낼 능력도 있다. 서방에서는 이제 그런 공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CCTV 건물을 이야기할 때는 한술 더 뜬다. “중국인들은 결코 생각할 수 없지만 지을 수는 있는 건물인 반면 서방 사람들은 생각할 수 있지만 결코 지을 수는 없는 건물이다(it’s a building that the Chinese could never have thought of but that we in the West could never have built).”

1990년대 중반 하버드에서 강의를 하는 동안 콜하스와 학생들은 주강(珠江) 삼각주를 견학했다. 중국인들이 어떻게 도시를 완전히 새로 건설하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젊음과 에너지가 이런 공사들을 가능케 한다는 사실에 감명 받았다. 그래서 2002년 CCTV 본사 신축 공모에 참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중국이 어떤 나라인지 대충 감을 잡고 있었다(I knew more or less what to think about China)”고 콜하스가 돌이켰다. 물론 중국 정권은 민주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 전 6년 동안 중국은 많은 사람을 빈곤에서 구해 더 나은 삶을 누리게 했고, 그들의 삶에서 선택의 자유가 많아졌다.”

2002년의 그 순간 콜하스도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바로 전 해에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가 테러로 붕괴됐다. 그는 그 쌍둥이 빌딩을 “매우 아름다우며, 뉴욕을 다른 차원으로 승화시켰다(lifted New York on a different plane)”고 생각했다. 미국은 정서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세계의 뛰어난 건축가 다수가 그 자리에 들어설 새로운 임시 타워(a new, palliative tower)의 설계를 두고 경쟁을 벌었다.

콜하스는 그 공모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 출신이 아닌 건축가가 해야 할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또 그 프로젝트를 둘러싸고 급변하는 정치와 변수가 아주 큰 어려움이 되리라고 판단했다. 대조적으로 중국의 권위주의 체제는 한번 결정하면 그대로 밀고 나가기 때문에 비교적 믿을 만한 확실성이 있다(By comparison, Chinese authoritarianism has a kind of ruthless, and comparatively reliable, clarity). 아무튼 그는 CCTV 프로젝트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콜하스는 정치적 비판을 예상했다. 중국 공산당 정치국만이 아니라 아랍 국가들의 왕자들까지 고객인 그는 독재 정권을 위해 일하기를 더 좋아하느냐(whether he prefers to work for authoritarian regimes)는 질문을 잘 얼버무렸다. 그는 몇 달 전 한 독일 기자가 그 질문을 하자 이렇게 받아 넘겼다. “내 입으로 그렇게 인정하도록 하지는 못할 거다.”실제로 콜하스는 시리아 정권의 만행 증거가 늘어나자 그 나라에서 박물관을 지으려는 야심적인 계획을 포기했다.

CCTV 본사는 중국 정부의 가장 강력한 선전 도구의 핵심이다(the center of the most powerful propaganda arm of the Chinese state). 이 건물의 거대함(enormity)은 조지 오웰식으로 묘사될 수 있을 정도다. 따라서 CCTV는 냉소적인 표현이 아닌 한 ‘자유의 타워(Freedom Tower)’로 불릴 여지가 없다. 그러나 콜하스에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overriding) 고려 사항이 있었다.

“중국은 21세기 전반부의 최대 화두(China is the biggest story of the first part of the 21st century)”라고 콜하스가 말했다. “우리 모두 그 결과에 큰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기회가 있을 때 중국의 이야기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it is crucial to participate in it when you have an opportunity).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I mean it’s as simple as that).”

중국 정부는 세심한 균형을 고려해 CCTV 본사 설계 공모의 최종 후보들을 선발했다. 중국 건축회사 5개, 외국 회사 5개(미국 회사 2개, 유럽 회사 2개, 일본 회사 1개)였다. 콜하스는 계약을 따낸 뒤 중국 회사 중 하나를 자기 팀에 합류시켰다. 프로젝트 초기에 그 회사 직원 10여 명이 로테르담 사무실에서 콜하스와 함께 일했다. “그들은 네달란드 음식이 너무 형편 없어서 아예 아래층에 중국 식당을 차렸다(They started aChinese restaurant downstairs, because they thought Dutch food was so horrible)”고 콜하스가 돌이켰다.

그러다가 작업이 베이징으로 옮겨졌다. 프로젝트 감독이 CCTV의 부사장 21명 중 한 명에게 경과를 보고하고, 그 부사장은 사장에게 보고하며, 또 사장은 중국 최고 지도부에 보고하는 체제였다. 콜하스는 중국측과 조율하기 위해 2010년까지 거의 매달 한 번씩 베이징을 방문했다.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복잡한 각 부분을 조화시키는 지휘자와 비슷했다(a little like an orchestra conductor, pulling together the massive structure). 건물이 올라가면서 콜하스의 흥분도 고조됐다.

프로젝트가 거의 완공돼 가던 2009년 특급 호텔과 극장이 들어서기로 돼 있던 자매 빌딩에서 느닷없이 화재가 발생했다. 베이징의 밤하늘을 밝히며 치솟는 지옥의 불길이 CCTV 빌딩 벽에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a towering inferno illuminating the night sky of Beijing and throwing ominous shadows on the walls of CCTV). 그때가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고 콜하스가 말했다. 중국 춘절(음력 정월 초하루) 축하행사에서 사용한 폭죽이 그 건물에 튀면서 불이 났다.

“활력과 사기의 문제였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건물이, CCTV가 거의 완공됐기 때문이었다. 축하 행사가 악몽이 돼버렸다.” 콜하스는 다시 중국 측과 긴밀한 조율로 “그 악몽을 극복했다(we were able to overcome that nightmare)”고 말했다. 그 모든 기초 조사, 계획, 자금, 노동에다 이런 사고까지 겪었으니 이제 남은 꿈은 뭘까? 콜하스는 지적이고 미적인 혁명주의자로서 자신의 빌딩을 통해 중국인들이 자신과 세계를 보는 방식을 바꾸기를 기대한다.

그는 로테르담의 자기 사무실 중 수족관이라고 부르는 회의실에서 CCTV 건물의 모형을 뜯어보며 이렇게 말했다. “중국인들은 안정에 과도하게 집착한다(The Chinese have an enormous obsession with stability). 중국의 수도에 이처럼 중요한 건물, 각도에 따라 달라 보이고(a building that is not the same from any angle) 이동하면서 보면 계속 형태가 변하는 건물을 세운 것 자체가 이전에 중국에 없던 창의성의 경험을 제공한다.”

콜하스는 이 건물이 “전적으로 불안정한 에너지(totally unstable energy)”를 갖고 있으며 “그게 나의 진정한 보람”이라고 말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CCTV 건물의 사진(딸 찰리 콜하스가 찍었다)은 근로계층의 거주지와 옛 황궁 자금성의 대조적인 스카이라인 너머로 기둥이 높이 솟아오른 모습이다.

콜하스는 “이 건물은 주변의 모든 풍경, 가난한 사람과 부자 모두와 잘 어우러지는 신비한 능력을 갖고 있다(the building has almost a mysterious ability to associate itself with almost anything around it, with both the poor and the rich)”고 말했다. 과연 그런 면이 중국의 문화와 역사를 반영하는지, 렘 콜하스 자신의 문화와 역사관을 반영하는지는 현재로선 판단하기 어렵다(Whether it reflects more the culture and history of China at this point, or of Rem Koolhaas, is hard to 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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