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anagement - 엄석대가 전교 1등한 비밀 따로 있다

“엄석대는 평균 98점으로 전 학년에서 1등을 했고 나머지는 모두가 전 학년 10등 밖이다. 나는 오늘 이 수수께끼를 풀어야겠다.” 새로 반을 맡은 6학년 담임 선생님은 달랐다. 그는 3월 말 일제고사 성적을 보고는 낌새를 챘다. 선생님은 반 아이들을 불러내 모질게 매를 때렸다. 교실의 지존이던 엄석대부터 맞았다. 비참하고 무력하게. 비로소 아이들은 깨달았다. 어제까지 크고 건장했던 우리반 급장은 간 곳 없고, 자기들 또래의 평범한 소년 하나가 볼품없는 벌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1987년 발표됐다. 당시 군사정권에 기반한 권력에 저항해 국민들이 민주화를 거세게 요구하던 때였다. 시대상황과 맞물리면서 이 소설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작가 스스로 밝힌 것처럼 이 소설은 그 시대의 우화다. 오랫동안 권력에 숨죽인 수많은 ‘한병태’는 나의 이야기였다.
자유당 정권이 막바지 기승을 부리던 1950년대, 나(한병태)는 서울의 명문 국민학교를 떠나 한 작은 읍의 국민학교로 전학 왔다. 좌천된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서다. 서울 출신의 눈에는 보잘것없는 국민학교. 하지만 새 반의 환경과 질서는 낯설었다. 급장 엄석대는 교실의 권력을 좌지우지했다. 엄석대는 주먹도 셌지만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추인 받은 권력을 지녔다.
나는 오기로 저항하기로 했다. 하지만 녹록치 않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누구와 싸워야 할 지, 무엇을 놓고 싸워야할 지 막막하다. 마침내 나는 담임 선생에게 엄석대의 비리를 고발한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집단 따돌림이다. 몇 달 버티던 나는 저항을 포기한다. 엄석대의 권력을 인정해주자 모든 게 편해졌다. 나는 엄석대 성적을 둘러싼 엄청난 비리를 알지만 과거와 같이 고발정신을 발휘하진 않는다.
꾸미고 또 꾸미다 모두 망가져때마침 6학년으로 진급했다. 바뀐 담임은 급장선거에서 몰표를 얻은 엄석대를 의심한다. 그리고 3월 첫 일제고사 때 엄석대 성적에 얽힌 비밀을 눈치챈다. 엄석대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던 아이들은 엄석대가 선생님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보고서야 제 목소리를 낸다. 급장 재선거를 하던 중 엄석대는 학교를 뛰쳐나간다. 그리고는 26년이 흘렀다. 나는 사설학원의 강사가 됐다. 그리고 휴가날 우연히 엄석대를 목격한다.
작가는 등장인물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엄석대는 정당성과 정통성이 없는 권력을, 엄석대 주변의 분단장 급의 상위 그룹은 지식인 출신의 관료 내지 행정기술자다. 엄석대의 행동을 용인해준 첫 번째 담임 선생님은 미국, 그가 보여준 건 미국의 1970,80년대 경제정책인 ‘독재자와의 왈츠’다. 두 번째 담임 선생은 경직되고 권위주의적인 이념이다. 그가 아이들의 의식을 일깨워 주는 방법은 폭력성이다. 1980년대 정통성 없는 정권에 맞서 화염병을 던지던 대학생들의 시위가 떠오른다.
절대권력이던 엄석대가 무너진 것은 시험부정이 발견돼서다. 그는 반 아이들에게 주요 과목을 떠맡겨 전교 1등의 성적을 유지했다. 아이들은 자신이 맡은 과목의 시험을 치면서 이름을 지우고 그 위에 ‘엄석대’라는 이름을 썼다. 성적을 잘 나오도록 하는 것, 그러니까 ‘분식(粉飾)’을 했다는 얘기다. 분(粉)과 식(飾)은 모두 ‘꾸미다’라는 의미다. 분식이란 꾸미고 또 꾸민다는 의미다.
경제에서 분식회계란 회계조작을 말한다. 기업의 재정상태나 경영실적을 실제보다 좋게 보이도록 재무제표상 이익을 부풀리는 행위다. 기업의 재무상태가 좋지 못하면 투자자나 채권자들이 불안해한다. 이들을 속이기 위해 만든 거짓 장부다. 당연히 불법이다. 팔지 않은 상품을 판 것처럼 매출을 높이거나 창고에 쌓인 재고물품의 가치를 높게 평가해 자산가치를 실제보다 높게 매긴다. 혹은 위험성이 큰 매출 채권의 대손충당금을 적게 잡아 이익을 부풀리기도 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대우그룹은 41조원에 달하는 분식회계를 한 것이 드러났다. 대우그룹 회계장부는 그룹 회장용, 계열사 사장용, 언론용이 따로 있었다고 말할 정도로 부실했다. 2003년 SK글로벌의 분식회계 사건은 국제사회에서 국내 기업의 신뢰성을 크게 떨어뜨렸다. 분식회계는 우리뿐 아니다. 미국 엔론은 엄청난 분식회계로 오랫동안 투자자를 속였다가 대형 금융사고를 일으켰다.
엄석대의 실제 성적은 80점 정도다. 사회나 자연, 두 과목 정도만 진짜 자기 성적이다. 엄석대가 ‘나’를 이긴 첫 시험에서 그는 98점을 받았다. 그러니까 18점이 ‘분식’돼 있었다.
분식회계는 한번 시도해 성공하면 중간에 멈추기 힘들다. 회계는 연속성이 있기 때문에 일단 손을 대면 좀처럼 되돌리기 어렵다. 발각되지 않기 위해서 다음 회계도 분식해야 한다는 의미다. 전년과 올해 재무제표가 크게 다르다면 의심을 받을 수 있다.
6학년으로 올라가고, 담임 선생님은 석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에게 더 이상 물건을 ‘빌려달라’는 소리조차 하지 않았던 석대다. 나는 생각한다. ‘내 생각에 그때 석대는 시험지 바꿔치기의 위험도 충분히 알고 있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그것만은 그만둘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격이 되어, 가는 데까지 달려보는 수밖에 없었다. 공부 쪽을 포기하는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길은 아니었지만 그러기에는 ‘전교 1등 엄석대’로서 2년에 가까운 세월에 대한 부담이 너무 컸다.’
분식회계는 ‘기호지세’의 속성분식회계가 적발되면 기업은 시장에서 신뢰를 잃는다. 믿지 못할 기업에 돈을 댈 투자자가 있을 리 없다. 분식회계를 없애기위해 금융당국은 외부감사를 강화한다. 하지만 작정하고 속이려 든다면 외부감사들도 이를 알아채기 힘들다.
분식회계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요 원인이 됐다. 2010년 세계경제포럼(WEF)이 산출한 국가경쟁력에서 우리나라의 감사·회계부문 투명성은 139개국 중 95위에 그쳤다. 우리나라가 2011회계년도부터 국제회계기준(IFRS)을 도입한 것은 낙후된 회계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다.
이익을 일부러 축소하는 가짜 장부도 있다. 세금을 적게 내거나 근로자들에게 임금을 적게 올려주기 위해서다. 역분식회계(逆粉飾會計)라 부른다. 역분식회계도 회계조작이다. 분식된 재무제표를 보고 투자해 손해를 봤다면 투자자는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낼 수 있다. 분식회계에는 2007년부터 집단소송제가 도입됐다.
엄석대가 시험지 바꿔치기를 하면서 시험 답안을 써준 학생들은 성적이 떨어졌다. 이 때문에 엄석대는 전교 1등이지만 나머지 학생들은 전 학년 10등 밖으로 쳐졌다. 엄색대 성적 분식으로 급우들이 받은 피해는 너무 컸다.
작가 이문열은 이 작품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1987년 이상문학상을 받았고 수백 만권이 팔려나갔다. 20개국 15개 언어로 번역출판 됐다. 1992년에는 박종원 감독이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했다. 26년이 흐르는 사이 이문열씨는 수 차례 정치권에 휘말리면서 논쟁의 대상이 됐다. 작가가 이 작품을 쓸 때의 날카로운 문제의식이 오늘날에도 필요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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