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토리텔링·나만의 캐릭터·강단 돋보여

1971년 9월 영국 런던에서 나온 전설적 이야기 하나.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당시 영국 조선사인 A&P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과 협상 테이블에 마주앉았다. 롱바톰 회장은 낯선 한국 기업인을 쌀쌀맞게 대했다. “한국에 어떤 잠재력이 있습니까?
몇 번 반복한 이야기이지만 곤란합니다.” 그를 매개로 영국 바클레이즈 은행에서 돈을 빌려 조선소를 지으려던 한국 관계자들은 낙담했다. 그때 침묵을 지키던 정 회장이 나섰다. ‘탁~’ 탁자 위에 뭔가를 올리는 그를 향해 롱바톰 회장은 “이게 뭐냐”고 물었다.
정 회장은 “한국 지폐인데 여기 그려진 건 거북선이라는 철로 만든 함선”이라며 “우리는 영국보다 300여년 앞선 1500년대에 철갑선을 만들었다”고 답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롱바톰 회장은 지폐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 배를 실제로 전쟁에서 썼단 말입니까?”
정 회장은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한국은 이처럼 역사적으로 우수한 기술력과 훌륭한 아이디어를 가진 나라입니다. 지금도 잠재력은 충분합니다. 자금이 확보되면 훌륭한 조선소와 선박을 만들 수 있습니다.” 정 회장의 당당한 말에 잠시 고민에 잠긴 롱바톰 회장은 이내 활짝 웃었다. 정주영 회장의 조선 신화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한국 현대 경제사에 ‘왕회장’으로 이름을 남긴 정주영 회장은 판단력·추진력뿐만 아니라 영업력도 뛰어났다. 이 유명한 일화를 보면 그의 영업 DNA에 스토리텔링 능력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500원짜리 지폐 한 장에 그려진 거북선을 토대로 자신만의 비전을 제시했다. 듣는 이가 호기심을 갖게 만든 이야기로 자신의 잠재력과 강점을 설명하고 영업 성과로 이끌었다. 이후 그는 영국 은행을 움직여 조선소와 선박을 짓고 한국을 세계 조선산업 1위로 만들었다.
세일즈 달인들은 이런 스토리텔링 능력을 중요한 영업 DNA로 꼽는다. 이야기야말로 사람 마음을 움직이고 기업이나 제품의 장점을 잘 설명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26세 100억 부자』의 저자 심현수 한국영업인협회장은 고려대 졸업장을 포기하고 길거리 노점상을 비롯해 다양한 영업 현장을 체험한 자신의 이야기를 평소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는 “효율적인 전화·문자 멘트도 영업에 꼭 필요한 요소”라고 강조한다. 이야기라는 옷을 입고 사업 파트너나 고객에게 친근하게 다가설 때 영업에 성공할 확률이 그만큼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럴 땐 본인만의 고유한 캐릭터를 갖는 것도 효과적이다. 대표적인 예가 애플의 전성기를 이끈 스티브 잡스다. 그는 새로운 제품을 내놓을 때마다 자신이 직접 나서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복장은 언제나 같았다. 검정색 티에 낡은 청바지와 운동화. 기업의 CEO는 언제나 말끔한 고급 정장으로 이미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종전의 공식을 과감하게 비틀었다.
대신 청바지와 운동화라는 ‘젊음’의 이미지를 ‘혁신’으로 대변되는 애플의 경영 키워드와 연결했다. 그가 프레젠테이션에 나올 때마다 사람들이 ‘이번엔 또 어떤 혁신적인 제품이 나올까’라고 주목한 이유다. 잡스의 캐릭터가 곧 애플의 혁신 정신을 알리는 데 기여한 것이다.
국내 재계에선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이 젊음의 캐릭터를 잘 활용하는 인물로 꼽힌다. 그는 1955년생으로 50대 후반이지만 평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젊은이들과 소통을 즐긴다. 6월 현재 박 회장 트위터 팔로워는 15만9000명에 이른다. 대기업 오너가 직접 트위터를 운영하는 건 이례적이다. 이러 노력 덕에 중후장대 업종에 기반을 둔 두산그룹의 이미지는 ‘젊고 친근한 기업’으로 바뀌었다. 재계 관계자는 “박용만 회장은 창업 2세이지만 웬만한 영업통 못잖은 영업 DNA를 가졌다”고 설명했다.
별명은 이런 캐릭터를 굳히는 데 도움을 준다. 증권업계에서 영업통으로 손꼽히는 김경규 LIG투자증권 대표는 별명이 ‘LG’다. LG그룹 기획조정실과 LG투자증권 법인영업본부장을 거친 이력 때문이 아니다. 영업 현장에서 솔선수범하며 강인한 모습을 보인 그의 모습에 감명 받은 주변에서 ‘리틀 자이언트(Little Giant)’의 앞 글자를 따 ‘LG’라고 불렀다.
그는 2008년부터 LIG투자증권 영업을 총괄 지휘하면서 작은 거인다운 열정을 과시했다. 올해 신년사에선 “증권업계가 어려운 상황에 임원들이 리더십을 적극 발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발품·근성도 주요한 영업 DNA스토리텔링 능력과 캐릭터가 PR의 효율성을 중시하는 최근 들어 주목 받은 영업 DNA라면 ‘발품’과 ‘근성’은 그야말로 전통적인 DNA다. ‘사람 장사’라 할 만큼 인맥을 넓히는 과정이 중요한 영업 세계에선 기본이다. 이런 면에서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은 전통의 영업 DNA 하나로 재계 손꼽히는 그룹 총수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팔던 방문판매 사원 출신이란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는 전국 각지로 출장을 갈 때 식사비와 숙박비를 따로 챙겨가지 않았다. 계약금을 따내야만 먹고 잘 수 있도록 독하게 자기 암시를 건 것이다.
독한 근성으로 살아남은 윤 회장은 판매왕에 올랐다. 1980년 직원 7명에 자본금 7000만원으로 웅진씽크빅의 모태인 웅진출판을 만들었다. 이후 정수기 대여 사업에 뛰어들어 방문판매 개념에 착안한 ‘코디’를 앞세워 코웨이를 1위 기업으로 이끌었다. 발품 팔아 제품의 사후관리까지 책임지는 코웨이 특유의 영업 방식에 소비자들은 매료됐다. 재계 30위권으로 키운 웅진그룹 신화가 무너졌지만 그의 영업 DNA만은 지금도 전설로 통한다.
발품과 근성만큼이나 ‘강단’도 중요한 영업 DNA다. 1990년대 무렵 아프리카 앙골라에선 국영 조선사인 소난골이 해외 조선사를 물색했다. 그러나 내전으로 치안이 불안정한 앙골라에 투자하려는 기업은 거의 없었다. 이때 대우조선해양의 한 영업부장이 출장을 자원했다. 그는 현장에서 앙골라에 잠재력이 있음을 확인하고 적극 영업에 나섰다. 소난골은 다른 기업이 외면할 때 투자를 약속한 대우조선해양을 신뢰했다. 이후 수주가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지난해 4월 CEO에 취임한 고재호 대우조선해양 사장의 영업부장 시절 일화다. 조선업계 소문난 영업통인 그의 성공 비결은 강단이다. 강단을 보여주는 일화는 또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업황이 나빠지자 일부 그리스 선주는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선박을 발주했다. 당시 선박사업부문장이던 고 사장은 “우리가 제시한 가격이 싫으면 그만두라”며 맞섰다. 제조원가를 비롯한 객관적 자료를 보여주며 선주들을 설득한 끝에 좋은 가격에 수주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브랜드 미디어
브랜드 미디어
아들들 죽음 내몬 40대 가장…아내와 ‘계획범죄’ 정황
세상을 올바르게,세상을 따뜻하게일간스포츠
이데일리
이데일리
[단독] ‘아일릿 탈퇴’ 영서, 혼성그룹으로 재데뷔... 테디랑 손잡았다 [종합]
대한민국 스포츠·연예의 살아있는 역사 일간스포츠일간스포츠
일간스포츠
일간스포츠
李 대통령, 정책실장에 김용범…경제수석에 하준경(상보)
세상을 올바르게,세상을 따뜻하게이데일리
이데일리
이데일리
[마켓인]새정부 출범에 불확실성 해소…대체투자 탄력 붙는다
성공 투자의 동반자마켓인
마켓인
마켓인
와이투솔루션 美 합작법인, 기업가치 3억달러 평가받는 배경
바이오 성공 투자, 1%를 위한 길라잡이팜이데일리
팜이데일리
팜이데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