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URES WOMeN IN THE WORLD - “난 운동복 입은 외교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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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2월 27일 캐나다 캘거리의 동계 올림픽 현장. 매혹적인 몸매에 붉은색과 검은색 의상을 입은 선수가 새들돔 주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 앞에서 스케이트를 탄다. 여자 피겨 스케이팅 마지막 날 경기다. 그 스케이터의 모습은 매우 아름답다. 입술을 붉게 칠하고 반드르르하게 빗어 올린 머리엔 플라멩코 댄서들의 머리장식을 꽂았다.
그리고 비제의 ‘카르멘’ 선율에 맞춰 음반을 가른다. 그녀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스케이팅을 한다. 까다로운 점프에 성공해서 심사위원들을 감동시키고 금메달을 따내면 프로로 전향해 활동할 기회가 열린다. 만약 엉덩방아를 찧거나 넘어지면 조국 동독으로 보내져 피겨 스케이터로서의 인생은 끝난다. 철의 장막 뒤에 갇혀 다시는 나라 밖으로 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 선수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피겨 스케이터로 꼽히는 카타리나 비트다. 서방에 공산주의의 영광[당시 독일민주공화국(GDR, 동독)과 동구권 국가들은 내부적으로 이미 몰락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을 알리기 위해 파견된 스포츠계의 슈퍼스타다. 세계 피겨 스케이팅계에 혜성처럼 나타나 올림픽 금메달을 두 번이나 따내며 은반의 요정으로 사랑받던 시절부터 독일 통일 이후의 삶까지 그녀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외교관(The Diplomat)’이 최근 ESPN에서 방영됐다.
1988년 캘거리에서 비트가 국가의 후원을 받는 선수로서 마지막 공연을 펼칠 당시만 해도 베를린 장벽 붕괴(약 2년 후에 일어난다)나 소련의 몰락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비트와 동독의 다른 선수들은 자신이 금메달을 따면 조국이 냉전에서 이기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어쨌든 공산주의를 내세우는 동구권과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서방은 수십 년 동안 올림픽 대회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여 왔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정치 체제 전반의 승리를 상징한다고 여겨졌다. 동독의 마지막 서기장을 지낸 에곤 크렌츠는 “요즘 사람들은 스포츠가 정치와 무관한 것처럼 행동하지만 동서가 대립하던 냉전 당시에는 정치가 스포츠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크렌츠는 1989년 에리히 호네커 서기장이 축출된 이후 46일 동안 동독을 통치했다. “우리 운동선수들은 GDR의 존재를 잘 모르던 나라들에 GDR을 널리 알렸다”고 그는 말했다.
동독은 소련을 본받아 화려한 대규모 스포츠 행사에 돈을 쏟아부었다. 어리고 재능있는 선수를 발굴해 스파르타식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시켰다. 동독 선수들은 1980년대 세계 선수권대회를 휩쓸었고, 절제된 행동과 놀라운 강인함으로 어딜 가나 눈에 띠었다. 비트의 동료 스케이터였고 지금은 유명 코치가 된 잉고 슈토이어의 말을 빌리자면 그들은 “운동복을 입은 외교관으로 키워졌다.” 동독의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하는 조국을 빛낼 얼굴들이다.
밝은 갈색 눈과 풍성한 갈색 머리를 지닌 비트는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웠다. “사회주의의 가장 아름다운 얼굴”로 유명했다. 그녀가 카를-마르크스-슈타트(지금의 켐니츠)의 스케이트장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어린 시절부터 동독 정부는 그녀를 특별한 재목으로 눈여겨 봤다.
코치 유타 뮐러(그녀의 딸 가비 자이페르트는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두 번 우승했다)는 비트를 발탁해 킨더운트 유겐트스포르트슐레(소련의 운동선수 공장과 유사한 동독의 스포츠 교육시설)에 들여보냈다. 그리고 집중적인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시켰다. 혹독한 훈련을 견뎌낸 비트는 피겨 스케이팅 신동으로 거듭났다.
“난 경쟁을 좋아했다”고 그녀가 다큐멘터리에서 말했다. “뮐러는 내가 피겨 스케이팅에 지닌 열정을 감지했다. … 창조적인 자세로 노력하고, 관중 앞에 서기를 진심으로 원하며, 특별한 뭔가를 창조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비트는 1982년 유럽 선수권과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은메달을 따낸 것을 필두로 각종 대회에서 메달을 긁어모으기 시작하면서 동독 언론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84년 사라예보 동계 올림픽을 앞두고 이 18세 소녀는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서방의 스포츠캐스터들은 그녀의 카리스마와 요정 같은 외모에 홀딱 반해 카메라 앞에서도 그녀를 좋아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비트에게 “눈부시게 아름답다(stunning)”는 수식어를 달고 “카타리나 여제” “섹시 스케이터” 등의 별명을 붙였다. 우아한 더블 악셀과 부드러운 트리플 루츠 등 빙판 위에서 펼치는 그녀의 연기는 관중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녀는 사라예보에서 미국의 로잘린 서머스를 간발의 차로 누르고 금메달을 따내면서 세계적 유명인사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동독 정부는 리틀 카티(카타리나의 애칭)에 대한 기대가 매우 높았다. 그녀에게 많은 특전이 주어졌다(당시 동독의 재능 있는 운동선수 대다수가 이런 특전을 누렸다). 이런 특전은 그녀를 동독의 보통사람들과 다른 위치에 올려놓았고, 그녀가 계속해서 나라에 충성하도록 만드는 안전장치로서의 역할도 했다. 비트는 여권을 발급 받았고 미국 여행이 허용됐다. 그녀가 미국에 가면 소련 대사관에서 만찬을 열어 환영했고 파파라치가 그녀의 뒤를 쫓았다.
당시 동독 사람들이 자동차를 한 대 구입하려면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10년을 기다려야 했지만 그녀는 단번에 자동차를 갖게 됐다. 그녀의 첫 번째 자동차는 슈타지(동독 비밀경찰)에서 쓰던 푸른색 라다였다. 정부는 또 그녀에게 아파트를 한채 하사했고 그녀 부모 집의 확장 공사를 해줬다. 그리고 휴가를 해외에서 보낼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 대가로 그녀는 공산주의를 찬양했다. 1987년에는 정치인들을 상대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운동선수들은 해외에서도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 우리는 성공의 비결이 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 답은 사회민주주의 체제에 있다. 미래는 우리 사회주의 편이다.”
2002년 비트와 관련된 슈타지 문서 181쪽이 공개되면서 그녀는 동독 정권의 “수혜자”였고 비밀경찰에 협조했으며 국가를 저버리지 않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다큐멘터리는 이 문제를 명확히 짚고 넘어가지 않았다. 감독을 맡은 제니퍼 아놀드와 세나인 케시기는 비트와 관련된 슈타지 문서를 정독했다고 말했다. “놀랍게도 매우 일상적인 내용이 많았다”고 케시기는 말했다.

“ ‘카타리나가 무엇을 원했다, 그녀가 어디에 가고 싶어했다, 누구를 만나러 가야한다고 했다, 누가 그녀와 만났다’ 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녀가 누구를 만났을 때 그 대화 내용을 녹음했다. 대체로 일상적인 생활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녀가 여권을 갖고 싶어한다거나 아파트에 새 커튼을 장만하고 싶어한다는 등. 이것은 그녀가 슈타지의 수혜자로서 그들과 직접 이야기를 주고받은 내용이다. … 하지만 누가 수혜자고 누가 피해자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비트는 자신의 생활에 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슈타지의 형사들과 정기적으로 만났지만 그들의 첩자 노릇을 하진 않았다고 주장한다.

지난해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에 기고한 글에 비트는 이렇게 썼다.
“20년이 지나 그때를 돌아보니 우리는 다른 행성에 살았던 듯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조국에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다. 우리는 지속적인 통제를 받았고 외국 여행길에 올랐을 때는 더 심했지만 그것은 내 생활의 일부가 됐다. ‘우리는 선수들을 보호하고 싶다’는 게 당국의 입장이었다. … 어쨌든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위안이 됐다. 난 동독이 공정하고 훌륭한 사회적 가치관을 지닌 나라라고 믿었다.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느냐고? 자유로운 나라에서? 스스로 그런 질문을 해본 적이 없다. 사실 난 나라에서 대접을 잘 받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가질 이유가 별로 없었다. 다른 우수한 운동선수들처럼 나도 경기에서 승리하면 보상을 받았다. 예를 들면 금전적인 보너스 등이다. 또 미혼인데다 열아홉 살밖에 안 됐을 때 내 명의로 아파트를 세낼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
하지만 비트가 사랑받는 운동선수이자 세계적 유명인사로서 이런 특전을 누리는 동안 슈타지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비밀리에 감시했다. 경찰은 그녀가 집과 스케이팅 훈련장에서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를 도청했다. 그리고 그녀의 친구와 동료들을 정보원으로 활용했다. 심지어 이성 교제를 가로막기도 했다. 그녀의 첫 번째 남자친구는 멀리 있는 군기지로 보내졌다. 비트의 훈련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해서였다.
“동독 정부는 국가가 훈련시키는 사람들에게 많은 돈을 투자했다.” 크렌츠는 매우 사실적인 어조로 다큐멘터리 감독들에게 말했다. “그 사람들이 서방으로 가지 않고 동독에 남아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슈타지는 비트의 동료 선수였던 슈토이어에게 그녀의 행동을 감시하도록 했다.
슈토이어는 열일곱 살 때 슈타지의 비밀회의에 불려가 경찰에 협조하겠다는 문서에 서명을 강요당했다고 말했다. “내 눈엔 ‘감옥’이라는 단어밖에 안 들어왔다.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빨리 서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슈토이어가 다큐멘터리에서 말했다. “난 그저 스케이트를 타고 싶었을 뿐이다. 당시 열입곱 살밖에 안 됐던 나는 겁에 질렸었다.”
비트는 자신과 관련된 문건(총 3000쪽이 넘는다)을 읽으면서 정부가 자신을 얼마나 철저하게 감시했는지 깨달았다고 말했다.
“정말 놀랍고 실망스러웠다. 배신당한 기분이 들었다. 난 정기적으로 경찰을 만나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고 알고 있었고 그들에게 진실을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날 감시하고 있었다니 배신감이 든다. 난 그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을 다 말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했던 게 분명하다. 내 인생의 모든 것을 말이다. … 누군가가 열쇠구멍으로 내 방을 엿보면서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듯한 느낌이다.”
그녀는 슈토이어가 자신을 감시한 일에 대해 그에게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언론을 통해 그를 용서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당시 그의 나이가 어렸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고 했다.
비트는 슈타지로부터 감시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정말 몰랐던 듯하다. 하지만 1988 캘거리 동계 올림픽이 다가오면서 동독의 운동선수로서 피할 수 없는 한 가지 측면이 분명해졌다. 올림픽의 영광이 시들해진 뒤에도 프로로 전향할 수 없다는 점이다. 비트는 대회에 출전하느라 외국에 드나들면서 서방 선수들이 프로로 전향해 아이스쇼와 영화에 출연해 큰 돈을 벌어들이는 걸봤다. 무엇보다 그녀는 스케이팅을 계속하고 싶었다.
비트의 코치 뮐러(그녀의 딸도 프로로 전향하길 원했지만 정부로부터 거절당했다)는 비트에게 프로 전향을 허락해 달라고 당국에 간청했다. “국가가 젊은 사람들이 꿈꾸는 일에 ‘노’라고 말하는 것, 뮐러는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원치 않았던 듯하다.” 비트가 다큐멘터리에서 말했다.
당국은 처음엔 망설이다가 비트가 캘거리에서 금메달을 딸 경우에 한해 그녀의 프로 전향 허용을 고려해 보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벅찬 위업이었다. 그 이전 반 세기 동안 올림픽에서 두 개의 금메달을 따낸 여자 피켜 스케이팅 선수는 노르웨이의 소냐 헤니뿐이었다.
게다가 비트에겐 강력한 라이벌이 있었다. 1985~87년 세계 선수권대회 우승을 주거니 받거니 했던 미국의 데미 토머스였다. 1987년 가을 비트와 토머스는 캘거리 대회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놀랍게도 두 사람 다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을 배경음악으로 택했다. 이로써 두 카르멘의 전쟁이 시작됐다.
비트가 먼저 연기를 펼쳤다. 요염한 카르멘이 힘 넘치는 점프와 우아한 동작으로 관중을 매료시켰다. 비트의 프로그램은 토머스에 비해 보수적이었지만 기술적으로 완벽했다. (그녀의 이 숨막히는 공연 장면이 다큐멘터리의 하이라이트다.) 그리고 쇼트프로그램에서 비트를 앞섰던 토머스가 등장했다.
그녀의 연기에는 비트처럼 극적인 분위기가 부족했고 실수도 여러 번 했다. 마지막으로 캐다나의 엘리자베스 맨리가 자국의 관중 앞에서 일생일대로 멋진 연기를 펼쳤지만 비트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불안한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고 비트는 말했다.

비트가 귀국하자 동독 정부는 약속한 대로 그녀가 프로 스케이터로 활동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녀는 브라이언 보이타노, 브라이언 오서 등 동료 스케이터들과 함께 스페인에서 영화 ‘카르멘 온 아이스’를 찍었다. 영화 촬영은 1989년 가을로 잡혔다. 그러니까 비트가 안달루시아 시골에서 투우사와 담배 파는 소녀들이 등장하는 19세기 오페라 선율에 맞춰 스케이트를 타는 동안 동독 정권이 붕괴했다.
국가에 순종했던 스타 비트는 고국이 시위로 들끓는다는 소식에 매우 혼란스럽고 방향을 잃은 듯 보였다. 당시 한 서방 TV와 가진 인터뷰에서 카메라 앞에 선 그녀는 몹시 불안해 보였다. 늘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오던 그녀에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비트는 경직된 표정으로 국가가 자신에게 운동선수로서 성장할 기회를 열어줬다는 뻔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앞으로 내게 약간의 변화는 있겠지만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편 동베를린에서는 크렌츠가 다큐멘터리에서 말한 대로 “인생 최대의 위험한 정치적 상황”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공산당 선전 담당 비서 귄터 샤보스키가 찰리 검문소를 포함해 모든 국경검문소가 개방됐으며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 국경을 넘을 수 있다고 발표하자 많은 주민이 국경검문소로 몰려가 서독으로 넘어갔다. 크렌츠는 탱크를 동원해 시위대를 진압하고 국경을 다시 폐쇄할지 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결국 그는 국경검문소를 그대로 열어두기로 했다.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지 않아 크렌츠와 공산당 지도부가 사임했다. (크렌츠와 샤보스키는 나중에 탈주자들에게 사살을 명령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살이를 했다.) 그리고 동구권 각국의 정권들이 줄줄이 무너졌다. 1989년 11~12월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벳 혁명이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1년 내에 유고슬라비아가 붕괴했고 루마니아의 혁명군은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그 부인을 총살했다. 그리고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물러나면서 냉전은 막을 내렸다.
비트는 그후로도 연기자, 코치, 올림픽 해설가로 국제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댄싱 위드 더 스타’에도 출연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과거 슈타지와의 관계와 국가에서 받은 자동차와 집 등 특전과 관련해 비난과 의심의 눈초리를 견뎌야 했다. (동독 붕괴 직후 한 언론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녀는 “우리는 특별한 일을 해냈기 때문에 그런 특전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이번 다큐멘터리에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국가가 우리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고 국민들도 그랬다. 하지만 불과 몇 달 사이에 모두가 우리에게 등을 돌렸다. 우리는 달라진 게 전혀 없는데 말이다.”)
비트에게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질문 중 하나는 ‘국민을 감시하고 약간의 반대 기미만 보여도 잔인하게 탄압하는 정부에 그녀가 왜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동조했을까?’ 하는 것이다. 그 답은 젊음과 순진함, 야망, 자부심, 잘못된 정보, 애국심, 용기, 이기심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개인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불의와 전체주의에 대항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특정 시대와 장소에서는 그런 태도가 그다지 문제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조직적인 권력남용이 결부돼 있을 때는 문제가 복잡해진다. 그런 제도하에 살아보지 않고서는 한 개인이 그 안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반응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나는 운이 좋았다.” 비트가 다큐멘터리에서 자신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말했다. “난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 있었다. … 그것이 내 성공의 비결인 듯하다. 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노력한다.” 그녀는 데일리 비스트와 가진 인터뷰에서도 그와 유사하게 실용적인 측면을 보여줬다.
만약 캘거리 올림픽에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 것 같으냐는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 ‘만약에 그랬더라면’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내가 꿈꾸던 일이 현실로 이뤄졌다. 운이 좋았다. 하지만 만약 은메달을 들고 귀국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게다가 1년 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으니 어떻게 됐을지 누가 알겠나?”
다큐멘터리 감독 제니퍼 아놀드의 말을 들어보자. “카타리나는 자신이 유명인사가 됐다는 사실을 굉장히 만족스럽게 여겼던 듯하다. 그녀는 매우 똑똑하고 그 시절에도 사업적인 감각이 뛰어났다. 따라서 체제를 이용해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놀드는 또 국가의 권력남용이 어느 정도였는지 몰랐다는 그녀의 말을 믿는다.
“다큐멘터리 제작을 시작했을 때 우리는 그녀가 체제의 수혜자였으며 당시 돌아가는 상황을 잘 알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고 아놀드는 말했다. “하지만 조사해 본 결과 당시 카타리나 외에도 많은 운동선수가 특전을 받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스케이트장에서 하루 10시간씩 연습을 하다 보면 일반 시민들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자유롭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카타리나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이전엔 동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세나인도 한마디 거들었다. “정보가 흘러넘치는 요즘 같은 세상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동독 주민들은 국가가 통제하는 동독 신문기자들을 통해 뉴스를 접했다. 그들에겐 국제 언론을 접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국경을 통해 간간이 서독 신문이 들어오긴 했다. 하지만 카타리나가 바깥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은 해외 여행을 할 때였다. 그러나 그녀는 운동복을 입은 외교관이었다. 그녀가 외국에 나간 이유는 조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늘 삼엄한 경비 속에 생활했다.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열여덟 살짜리 소녀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스케이팅)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기꺼이 할 각오가 돼 있었다. 이것이 그녀를 비난할 만한 이유가 될까? 또 자신의 미래가 자신을 후원해주던 정부에 의해 가로막힐 뻔했던 스물다섯 살의 여자는 어떨까? 그 정부가 운동선수를 국가의 귀중한 자산으로 여겨 그들을 특별히 보살폈다면?
또 국외로 도망치려는 사람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학살하고 반대자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게 하는 경찰국가였다면? 비트에 대한 평가와 동독의 역사에는 이런 질문들이 걸려 있다. 조만간 쉽사리 풀릴 문제는 아니다. 다큐멘터리 ‘외교관’에 더 가치를 두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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