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수 전문기자의 은퇴 성공학 - 현금 중시 본능에 흔들리는 퇴직연금
서명수 전문기자의 은퇴 성공학 - 현금 중시 본능에 흔들리는 퇴직연금
처음에는 우리나라에도 선진국형 퇴직연금제도가 생기는 줄 알았다. 퇴직할 때 직장에서 받는 퇴직금이 노후자금으로 알뜰하게 쓰여질 것이란 기대도 컸다.
하지만 그 기대는 보기좋게 빗나가고 있다. 2012년7월 도입된 개인형 퇴직연금(IRP)에 관한 이야기다. 도입된 지 2년 가까이 됐지만 IRP는 흥행과는 거리가 멀다.
가입의 증가속도가 예상보다 굼뜨고, 이미 가입한 사람들도 투자보다는 예금을 선호해 퇴직금의 증식을 유도한다는 본래의 취지가 흐려지고 있다. 정부는 IRP가 퇴직금의 생활 자금 전용을 막아 노후의 안전장치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정작 퇴직자들은 딴 생각이다. 왜 그럴까.
2010년 출간된 『넛지(Nudge)』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다. 넛지의 사전적 의미는 ‘옆구리를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이지만 여기선 똑똑한 선택을 이끄는 힘을 말한다. 행동경제학의 대가인 리차드 탈러 시카고대 교수와 캐스 선스타인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의 공저다.
두 저자는 넛지의 개념을 어떤 선택을 금지하거나 경제적 인센티브를 훼손하지 않고도 사람들의 행동을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것으로 정의했다. 암스테르담 공항의 소변기에 붙어 있는 파리 모양 스티커라든가 옷가게에서 손님에게 구매 의사를 묻는 것, 살을 빼기 위해 작은 그릇을 사용하는 것, 디지털 카메라에서 ‘찰칵’ 소리가 나는 것 등을 넛지의 활용사례로 소개했다.
우리나라에서도 퇴직연금제도에 넛지를 걸었다. IRP가 그것이다. IRP가 도입되기 이전엔 개인퇴직계좌(IRA)가 있었다. IRA는 가입 자유롭게 한 것으로 원하는 사람만 퇴직금을 이체토록 한 제도.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찾아갔지 연금으로 전환하지 않았다. IRA가 유명무실해진 것이다. 미래의 현금보다는 현재의 현금을 더 선호하는 인간의 본성을 간과한 때문이다. IRP는 IRA에 넛지를 넣어 퇴직금이 자동이체 되도록 한 것이다.
노후자금으로 쟁여놓아야 할 퇴직금을 미리 빼서 쓰지 말라는 뜻에서 약간의 강제성을 가해 현금 선호본능에 대응한다는 의미가 컸다. 만약 퇴직 이후 대출금 상환이나 목돈이 필요한 경우 IRP를 해지한 뒤 일시금을 찾아 쓰도록 했다. IRP를 언제든지 해지할 수 있는데도 일단 퇴직금을 IRP로 이동하게 만든 이유는 중간에 인출 확률을 낮출 수 있다는판단에서였다. 정부도 내심 이런 효과를 기대하며 퇴직연금제도 마침내 뿌리를 내릴 것이라 생각했다.
빗나간 선진국형 퇴직연금제도?하지만 정작 시행해 놓고 보니 현실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 퇴직연금 시장에서 IRP 비중이 지난해 9월 말 현재 9.0%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2년 말보다 0.5%포인트 증가에 그친 것이다. 금액으로는 6조5484억원으로 전체 금융자산에 대한 비중은 0.2%에 불과한 실정이다. 더욱이 IRP 해지율은 70~80%대로 이 제도가 도입되기 이전인 2012년 1월부터 8월까지의 48%보다 오히려 증가했다. 일부 은행에선 퇴직자들이 IRP 이체신청서를 쓰면서 동시에 해지신청서도 작성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넛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이 역시 현재의 현금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성향과 관련이 깊다. IRP제도는 퇴직금을 전부 이체한 다음부터는 부분 인출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퇴직자는 퇴직금을 전부 IRP에 맡겨놓던가 아니면 전부 찾아 써야 한다. 이런 양자택일의 경우 대부분의 퇴직자들은 후자를 택하게 마련이다. 손 안의 새가 숲 속의 새보다 나아서다.
소득흐름이 끊기는 퇴직 이후 자녀 대학등록금이나 결혼, 창업이다 해서 뭉텅이 돈이 필요한 상황에선 IRP계좌에 아무리 거금이 있다 하더라도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다. 만약 부분 인출을 허용해 퇴직금 가운데 필요한 만큼만 찾아 쓰고 나머지는 노후재원으로 남겨두도록 했다면 IRP는 지금보다 훨씬 유용한 노후장치가 됐을 법하다. 넛지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어느 정도는 인간의 행동에 제약을 가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넛지의 공동 저자 선스타인 교수는 지난해 말 『심플러』라는 책을 냈다. 넛지가 이론편이라면 심플러는 응용 및 실천편이랄 수 있다. 선스타인 교수는 이 책에서 어떤 정책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인 ‘선택적 거부(Opt-out)’가 너무 쉬워도 넛지가 고장 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개인은 변화를 싫어하고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을 찾는 약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택적 거부를 용이하게 하면 새로운 정책이 먹혀 들기 어렵다는 것이다.
선스타인 교수는 일례로 2010년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은행들이 당좌예금 초과 인출금에 높은 수수료를 제공하는 관행에 제동을 걸려다 실패한 것을 들었다. FRB는 예금주가 당좌대월 프로그램에 명시적으로 가입한 경우에만 수수료를 부과하도록 조치했다. 이에 은행들은 계속 초과 인출 수수료를 받으려고 예금주들이 가능하면 선택적 거부를 쉽게 할 수 있도록 꾀를 냈다.
‘내 계좌에 현금자동인출기와 직불카드 초과 인출 한도를 계속 적용 받도록 한다’와 ‘내 계좌가 현금자동인출기와 직불카드 초과 인출 한도를 적용 받지 않도록 한다’라는 두 가지 질문을 내놓고 고르도록 했다. 예금주들은 변화를 싫어하기 때문에 당연히 첫 번째 질문에 ‘예스’라고 답했다. 이렇게 해서 은행들은 당좌대월 프로그램에 예금주의 명시적 가입을 유도하면서 수수료 징수도 지속할 수 있었다.
정치권에서 IRP활성화 추진IRP도 마찬가지다. 퇴직자가 계좌를 해지하는 데 별다른 제약이 없다. 그러다 보니 이체계약과 동시에 해지하는 가 하면 이체 후에도 중도해약 사태가 생기는 것이다. 퇴직금을 IRP에 자동이체 해주면 대부분이 연금으로 쓸 것이라는 것은 애당초 순진한 발상이었다. 가입자들의 운용상의 문제도 발견된다. IRP적립금은 예·적금, 국공채 등 원금보장형 비중이 86%에 달한다.
주식형 펀드라든가 혼합형 펀드 등 투자상품의 비중은 14%에 불과하다. 최근 주식시장 침체로 리스크 회피 경향이 강하게 작용한 탓이다. 그러나 저금리 기조 아래 안정성을 추구하는 운용방식으로는 적립금을 불리기가 요원하다. 오히려 물가상승을 감안하면 원금이 쪼그라들 수 있다. 노후자금은 저금리의 위험을 피할 수 있도록 투자를 통해 마련해야 한다는 건 기본에 속한다. 우리의 IRP에 해당하는 미국의 401K의 경우 투자상품 비중이 50%가 넘어 한국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IRP활성화 차원에서 일시금 인출에 대한 페널티 부과, 연금에 대한 세제혜택 제공, 주식 직접투자 허용 등 다양한 방안이 정치권과 정부 일각에서 강구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어떤 경우든 근로자들이 자연스럽게 일시금이 아닌 연금을 선택해 IRP가 은퇴저축수단으로 자리 잡도록 하는 넛지가 필요해 보인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