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RADICALISM | 젊은 지하디의 초상화

RADICALISM | 젊은 지하디의 초상화

이프더카 자만은 영국 포츠머스의 자택에서 터번에 관한 온라인 강의 프로그램을 녹화했다.
그리 오래지 않은 시점의 잉글랜드 남부 해안. 한 영국 청년이 부모의 집에서 웹캠 앞에 앉아 터번 묶는 법에 관한 90분짜리 교습 프로그램을 찍었다. 조명이 형편 없었지만 화질은 그런대로 좋았다. 무성한 검은 머리의 젊은이 모습이 화면에 선명히 잡혔다. 윤기 흐르는 그의 검은 머리는 양쪽 옆과 뒤로 길게 뻗치다가 위로 세운 칼라에 닿은 뒤 스키 점프를 하듯 멋지게 위로 방향을 틀었다. 앞 머리는 더 섬세했다. 얇은 머리카락이 폭포처럼 이마 위로 흘러내려 검은 눈과 우람한 코, 두툼한 입술을 지나 검은 수염에 닿았다.

시리아에서 활동한 이프더카 자만과 IS 지하디 전사들.
그의 이름은 이프더카 자만. 머지않아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싸우다 죽는 유럽 출신 이슬람 극단주의자 세대의 아이콘이 될 청년이었다. 그는 왕실 근위대의 총사, 아니 체게바라와 닮았다.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프더카는 앞을 똑바로 응시하며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봤다. 손가락으로 머리 한쪽을 빗어내린 다음 다른 쪽을 메만지면서 말했다. “아살라무 알라이쿰!” 아랍어 인사말로 ‘알라의 평화가 당신에게’라는 뜻이다. “좋아 … 음 … 어 … 다름이 아니라 터번에 관해 잠시 강의를 하고 싶다. 몇몇 형제가 … 글쎄, 그들이 지금 이 장면을 보고 있는지 모르겠군 … 음 … @ ReflectionofIslam이 그 형제인데 나에게 이 강의를 부탁했다. 그래서 … 그래 못 할게 뭐야 … 좋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프더카는 다시 한번 자신의 모습을 점검하고 여러 차례 머리를 손으로 다듬은 다음 스마트폰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보는 사람이 없으면 강의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화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계속 살피며 가만히 기다렸다. “머리가 너무 엉망이군.” 마치 누군가 보고 있는 듯이 말했다. 곧 동영상 강의를 보는 사람이 하나 둘씩 생겨났다. “좋아. 형제들, 고마워.” 이프더카는 스마트폰을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는 무슬림의 전통 모자인 흰색 타키야를 집어들고 가벼운 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뒤 강의를 시작했다. “좋아. 자, 먼저 모자가 필요하지…”

그때 이프더카는 22세였다. 아버지 에누 미아와 어머니 헤나 초우더리는 방글라데시 출신 이민 1세대였다. 그들은 1981년 영국에 도착해 잉글랜드 포츠머스의 허드슨 로드에 정착했다. 19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생가가 바로 몇 골목 떨어져 있고, 넬슨이트라팔가 해전(1805년 10월 21일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상대로 영국 해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전투)을 위해 출정했던 옛 해군 기지가 걸어서 20분 거리다.

대다수 방글라데시 출신 이민자처럼 이프더카의 부모는 케밥, 비리야니, 탄두리, 향신료 뿌린 칩을 파는 테이크아웃 가게를 열었다. 6파운드(약 1만원) 이상을 주문하면 무료로 배달해줬다. 가게 이름은 ‘메리의 케밥과 마살라’였다. 대영제국 시대가 끝나고 수십 년이 지난 뒤 옛 식민지에서 유입된 수많은 이민자들과 영국 정부가 함께 염원하던 다문화주의의 상징이었다.

포츠머스는 에누와 헤나 부부에게 새롭고 풍요로운 삶의 기본 요소를 제공했다. 남부럽잖은 생계수단, 아담한 집, 무료 병원, 무료 학교(그들에겐 네 자녀가 있었다). 그런데도 정을 붙이긴 어려운 도시였다. 허드슨 로드는 우중충하고 나무 없는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띠 모양으로 도심을 에워싸고 있는 영국의 수많은 지방 타운 중 하나다. 타마나가 맏이로 유일한 딸이며 그 아래로 아들 투힘, 이프더카, 막내 무스타킴이 태어났다. 그중에서 이프더카만이 몽상가였다.

영국 아이들처럼 이프더카도 소년 시절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 이야기에 푹 빠져 지냈다. 물론 큰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그러나 그건 영국 아이들이 영국 괴물과 싸우는 영국 이야기였다. 그의 부모는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어머니 헤나가 그런 이야기를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프더카가 열한 살이 됐을 때 그를 런던 사립학교에 보내 1년 동안 이슬람 교육을 받도록 했다.

효과가 있는 듯했다. 이프더카는 방글라데시의 전통을 받아들이고 따르기 시작했다. 가게 주방 일을 도와 코프타와 난, 푸리를 만들었다. 자미 이슬람 사원의 기도에도 거의 빠지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한 뒤엔 루퍼트머독의 위성방송사 스카이TV의 콜센터에서 취직했다. 그때만해도 이프더카는 예의 바르고 진지한 청년으로 보였다. 동료들과 잘 지내고 고객 전화를 침착하게 받았다. 고객이 모욕적인 이야기를 해도 태연하게 받아넘겼다. 토요일이면 커머셜 로드의 이슬람 선교 부스에서 자원봉사 활동으로 동네의 점잖은 아이들과 함께 행인들에게 코란을 나눠줬다.

그러면서도 이프더카는 몽상을 떨치지 못했다. 이제 그에겐 이슬람 종교가 중요한 새로운 모험이자 몽상의 바탕이 됐다. 소셜미디어에서 그는 자신을 최대의 괴물 ‘사탄’과 맞서는 무슬림 전사 영웅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론 신앙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의 신앙도 그의 고양이에 대한 애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그는 SNS에 고양이 사진을 수없이 많이 올렸다). 어떤 사람은 그의 SNS 표현에서 급진주의의 낌새를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난 무엇보다 내가 정직하다는 걸 진짜 좋아한다”고 이프더카는 터번 강의 중에 말했다.

이프더카가 동성애자임을 암시하는 정황도 있었다. 그의 블로그와 트위터 글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적이 거의 없다. 또 그는 벗은 사진을 게재하는 여자는 ‘팔로우’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 아이들이 그에게 멋지다고 말하면 그는 ‘형제들’에 대한 깊은 감정을 열정적인 글로 표현했다. “솔직히 말해 난 형제 여러분을 정말 사랑한다. 그걸 알아주면 좋겠다. 난 형제 여러분을 너무도 사랑한다. 이전엔 느끼지 못한 감정이다. 우리 형제들이 율법에 따라 살 수 있는 독자적인 땅을 가질 수 있기 바란다. 진정으로. 알라께 감사하나이다.”

그러나 대부분 이프더카는 새로운 정체성이 자신에게 맞는지 시험하는 듯했다. 그는 그 정체성이 이슬람에 순종함으로써 얻는 단순하고 아름다운 진리라고 주장했다. 어떻게 살고 무엇을 먹고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 이슬람이 지침을 주지만 그에겐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는 것이 자신의 정체성이었다. 그가 형제들에게 주는 사랑과 그들이 그에게 주는 사랑에 푹 빠져 그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가 그 자신의 모습이며, 오사마 빈 라덴의 모습이라고 그는 간주했다. 이프더카는 거기에다 판타지 영화 ‘미이라’와 비디오게임 ‘페르시아의 왕자’ 이야기를 더해 자신을 신앙과 죽음의 전사로 보기 시작했다. 그는 무자히드이자 지하디(성전 전사)였다. 알라가 불러준다면 그는 심지어 샤히드(순교자)가 될 수도 있었다.
 지하드로 가는 길
IS는 ‘영감을 주는’ 포스터를 소셜미디어에 올려 젊은이들을 포섭하고 있다.
이프더카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된다면 그건 자신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잔나(알라가 약속한 영원한 낙원)의 밝은 횃불이 어둠 속에서 자신을 인도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잔나는 허드슨 로드와 포츠머스에서 멀리 떨어진, 완벽하고 영원한 천국으로,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중간계(이승)와 ‘해리포터’에 나오는 모든 머글(마법사가 아닌 보통사람들)을 초월하는 세계다. “형제 여러분을 모두 잔나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이프더카는 SNS에 썼다. “잔나에서 고양이를 기른다고 상상해 보라! 거대한 호랑이나 사자가 곁에서 어슬렁거리는 세계…”

이프더카는 2012년 12월 16일 밤 터번 강의를 녹화했다. 그리고 만 1년 후에서 하루가 모자라는 2013년 12월 15일 눈 내리는 시리아 동부의 가즈와 알-카이르에서 급진 이슬람주의 무장단체의 지시로 다른 무장단체와 싸우다가 현장에서 즉사했다. 그의 첫 전투였다. 전투가 시작된 지 단 몇 분만에 전차 포격을 받아 그는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내장이 터져 나왔다. 윤기 흐르던 그의 긴 머리카락은 머리 위로 말려 올라갔다.

2011년 초 민주화 운동이 중동을 휩쓸었다. 이른바 ‘아랍의 봄’이었다. 그러나 명백히 반민주적이고 정치적인 이슬람이 곧 그 시위의 높은 파도를 타며 아랍권 전체에서 권력에 도전했다. 이집트에선 1년 동안 실제로 그들이 권력을 장악하기도 했다. 그 혼란이 시리아로 번졌을 때 시위는 반란으로 변했다. 반군은 알라위파 대통령 바샤르 알-아사드가 이끄는 40년된 독재정권의 막강한 군사력에 밀리면서 자신들을 ‘지하디’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프더카는 중동에 가고 싶다고 자주 이야기했다. 속으론 이미 자신을 지하디로 간주한 듯했다. 2013년 5월 그는 부모에게 아랍어를 배우고 시리아 난민을 돕겠다고 말하고는 터키행 편도 비행기표를 구입했다. 터키에서 버스를 타고 남부의 시리아 접경도시 레이한리에 도착했다. 이프더카는 국경을 어떻게 넘을지 몰랐다. 그러나 그가 런던 킹스칼리지 국제급진화연구센터의 시라즈 마허에게 전한 이야기에 따르면 레이한리로 가는 버스 안에서 그는 수염이 긴 남자에게 자신이 사용하는 무알코올 향수를 써보라고 권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 남자는 이프더카가 지하디가 되려 한다고 짐작했다. 몇 시간 뒤 두 사람은 국경을 넘었고 이프더카는 그가 모는 차를 타고 시리아 북부 도시 알레포로 향했다.

영국의 정치·학예 주간지 뉴스테이츠먼 기고문에서 마허는 이프더카의 목표가 ‘자바트 알-누스라’로 불리는 시리아 반군 단체에 합류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자바트 알-누스라는 이라크에서 활동한 옛 알카에다 영국의 정치·학예 주간지 뉴스테이츠먼 기고문에서 마허는 이프더카의 목표가 ‘자바트 알-누스라’로 불리는 시리아 반군 단체에 합류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자바트 알-누스라는 이라크에서 활동한 옛 알카에다 대원이 많아 시리아의 반군 중 가장 막강한 공식 알카에다 연계조직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 조직은 대원 모집에서 아직도 옛날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신규 대원은 개인의 소개를 받아 엄격한 배경 조사와 사상 검증을 거쳐 선발했다. 그에 반해 이프더카는 어느 누구의 소개도 없이 자원한 지하디였다. 그는 자바트 알-누스라 기지에서 자신을 소개하며 대원으로 받아달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좌절한 그는 커피숍에서 빈둥거리다가 알제리 출신 전사를 만났다. 그는 다른 반군 단체인 ‘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ISIS, 나중에 세를 확장해 ‘이슬람국가(IS)’로 개명했다]’에 소속돼 있었다. 이프더카가 들어보지 못한 단체였다. 그는 킹스칼리지의 마허에게 “잘 알아보니 ISIS는 굉장한 조직이었다”고 말했다. ISIS는 2주 동안 이프더카를 테스트한 뒤 기초 무기 훈련 후 보초 근무자로 배치했다.

ISIS는 대원 선발 과정이 엄격하지 않아 외국 지하디 수천 명이 그 단체에 합류했다. 대다수는 중동과 북아프리카 출신이었지만 이프더카는 영국, 프랑스, 독일, 스칸디나비아, 벨기에, 그리고 남북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온 전사도 만날 수 있었다. 지휘관들은 사담 후세인 아래 이라크군에서 복무하면서 이란이나 미국과 전투를 치른 경험이 있는 베테랑이 많았다. 조직에는 재정, 군수, 발전, 교육, 의료를 관장하는 부서도 포함됐다. 전투 장면과 시리아 정부군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는 학살 장면을 동영상으로 제작한 미디어 팀까지 거느렸다. 그 팀은 트위터, 페이스북, 텀블러, ask.fm 등의 SNS를 통해 서방을 비방하고 ISIS 합류를 선동하는 외국 전사들의 온라인 스트림 방송도 담당했다.

이프더카는 많은 온라인 팔로워와 잘 생긴 외모 덕분에 순식간에 ISIS 미디어팀의 스타로 떠올랐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즐겼다. ‘아부 압두라만 알-브리타니’라는 지하디 이름을 사용하면서 가는 곳마다 바람에 긴 머리를 날리며 렌즈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자신의 사진을 찍었다. 그의 사진 여러 장이 온라인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중 하나에서 검은 터번을 쓴 이프더카는 총을 매고 이슬람의 검은 깃발이 휘날리는 픽업 트럭 뒤에 앉아 사막을 가로지르면서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트위터 글도 널리 칭송 받았다.

“시리아의 지하드는 하루 24시간 일주일 내내 전투만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고 그는 2013년 9월 21일 트위터에 적었다. “이곳의 지하드는 느긋하고 여유가 많아 5성급으로 불린다.” 그의 또 다른 유명한 트위터 글은 지하드의 영웅주의를 부인하는 서방인의 위선을 꼬집었다. 그는 2013년 11월 30일 이렇게 썼다. “조국을 떠나 억압 받는 사람을 위해 싸우는 남자를 두고 그들도 영웅이라고 칭하지만 거기에 ‘무슬림’이라는 단어가 추가되면 그는 바로 테러리스트이자 극단주의자로 몰린다.” 그 직후 이프더카의 트위터 팔로워는 3000명이 넘었다.
 방글라데시 나쁜 녀석들 여단
인스타그램에 올린 IS의 선전 포스터는 신규 대원 모집 방법을 시사한다.
팬들은 이프더카처럼 되고 싶어했다. 아니 그와 닮아 보이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2013년 여름 많은 지하디 지망자가 시리아에 있는 그와 합류하고 싶어했다. 이프더카는 개인적으로 영국의 두 청년 그룹에 관심을 가졌다. 하나는 맨체스터 출신의 3인조로 이프더카가 온라인으로 가까워진 그룹이었다. 무함마드 아잠 자비드, 아닐칼릴 라우피[나중에 ‘아부 라이트 알-코라사니(‘아프간’이라는 뜻으로 자신의 원래 고향을 뜻한다)’로 개명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아부 카카’라는 지하디 이름을 취했다)이었다.

포츠머스 출신의 친구 5명도 있었다. 그중 일부는 이슬람 선교단체에서 이프더카와 함께 자원봉사를 했다. 무함마드 하미두르 라만(영국 할인매장 프라이마크에서 일했다), 마무누르 로시드, 아사드 우자만, 메디 하산(19세의 보디빌딩 팬), 그리고 마슈두르 초우더리(30, 자녀 두 명을 둔 기혼자)였다. 초우더리는 이프더카와 시리아에 가는 방법을 논의하고 자신의 집단에 ‘방글라데시 나쁜 녀석들 여단’이라는 별명을 붙인 장본인이었다.

시리아에 가기는 어렵지 않았다. 두 그룹 모두 휴가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영국-터키 왕복 비행기표를 끊었다. 맨체스터 그룹은 10월 5일 영국을 출발했고, 사흘 뒤 포츠머스 그룹이 뒤따랐다. 터키의 레이한리에 도착한 두 그룹은 이프더카의 도움을 받아 시리아로 건너갈 수 있었다. 아부 카카는 레이한리에서 포츠머스 그룹과 만나자 크게 안도했다고 나중에 텀블러에 썼다. “그들은 이슬람을 이해하고,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알고, 알라의 명령으로 주어진 임무를 인지하는 형제들이었다.”

다음 날 그 8명은 가방을 꾸려 호텔을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국경으로 향했다. 그러나 시리아 국경 경비대는 그들의 영국 여권을 본 뒤 통행료로 무려 6000달러나 요구했다. 아부 카카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크게 낙담하고 호텔로 돌아갔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형제 아부 라이트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일반인은 이런 장면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거다. 이게 바로 이슬람의 형제애가 그토록 아름답고 유일무이한 이유다.”

그러던 중 마슈두르 초우더리가 이프더카의 전화를 받았다. 곧 밴이 도착할 테니 떠날 채비를 하라는 전갈이었다. 그들은 밴을 타고 터키의 한 마을에 도착했다. 그 다음 다른 픽업 트럭이 나타나 그들을 태우고 5분 정도 달리다가 터키군 순찰대를 만났다. 터키군은 그들을 차에서 내리라고 한 뒤 짐을 수색하고는 장갑 한 켤레를 훔쳐갔다. 그러다가 영국 여권을 발견했다. 아부 카카는 “그들이 미소 짓더니 우리 보고 그냥 걸어서 가라고 했다”고 돌이켰다.

그들은 걸어서 국경을 넘어 시리아 쪽으로 건너간 후 다른 반군 단체의 한 전사를 만났다. 그는 그들을 밴에 태워 가까운 읍내로 데려다줬다. “우리가 밴에서 내리자마자 픽업 트럭 한 대가 급히 길모퉁이를 돌아 나와 우리 앞에 멈추더니 아부 압두라만 알-브리타니(이프더카의 지하드 이름)가 뛰어내렸다. 우리가 그를 반긴 만큼 그도 우리를 반가워했다. 우리는 너무도 기뻐 꼭 얼싸안았다. 얼굴 근육이 아플 정도로 한참 동안 싱글벙글했다.“ 그들은 차로 2시간 정도 더 달린 뒤 이프더카의 ISIS 기지에 도착했다. 잠시 휴식을 취한 뒤 그날 전사한 지하디 6명의 시신을 보러 불려갔다. “놀랍게도 그들은 살아있는 듯했다”고 아부 카카는 썼다. “알라의 이름으로 말하건대 그들은 잠든 듯했다. 다만 일반 사람보다 안색이 더 창백했다. 그런 모습은 코란의 구절을 떠올리게 했다. ‘알라의 길을 걷다가 죽은 사람을 죽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들은 결코 죽은 게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 영국인 지하디들은 시리아에서 훈련을 시작했다. 종교 학습과 총기 안전 교육도 함께 받았다. 그러나 며칠 만에 그들은 처음 실망을 경험했다. 마슈두르 초우더리가 지하드를 그만두고 떠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초우더리는 나이가 많아 권위를 세우긴 했지만 형제들은 그를 허풍쟁이이며 믿지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영국 킹스턴 크라운 법원이 그의 진술을 들은 바에 따르면 초우더리는 2012년 사업이 망하자 거짓으로 위암에 걸렸다며 형수를 설득해 싱가포르에서 치료받아야 한다고 2만5000파운드를 받아냈다.

초우더리는 싱가포르에 가서 그 돈을 유흥비로 흥청망청 썼다. 그가 지하디로 시리아에 간 것도 그런 과거에서 벗어나 세상에 이름을 알리려던 계획의 일환에 불과했다. 그는 트위터에서 “10㎞를 쉬지 않고 달리는 등 진짜 제대로 된 훈련인 듯했다”고 썼다. 그러나 전쟁의 현실에 직면하자 초우더리는 덜컥 겁을 먹었다. 그는 곧 터키로 돌아가 런던 개트위크 공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탔다. 그러나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영국 대테러 요원들에게 체포됐다. 그들은 온라인으로 그의 시리아 여행을 추적하고 있었다. 지난해 5월 그는 테러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12월에는 4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그로써 영국 지하디 중 적어도 1명은 허풍쟁이 몽상가로 드러났다. 그러나 나머지는 흔들리지 않았던 듯하다. 그들은 지하디 이름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취하고 온라인 메시지를 통해 전쟁이 마치 영화처럼 멋지다고 주장했다. 아부 라이트 알-코라사니는 자신이 목격한 총격전이 “총알이 쌩쌩 날아가는 소리와 붉은 빛 등 영화 ‘스타워즈’의 장면 같았다”고 말했다.

외국인 지하디 중에서 계속 스타로 남은 사람은 이프더카 뿐이었다. 2013년 11월 그는 영국 공영방송 BBC의 간판 저녁 프로그램 ‘뉴스나이트’에 카메라폰을 통해 원격 등장하면서 한층 더 유명해졌다. 그때는 특수 전 대원처럼 보이려는 듯했다. 검은 비니(두건처럼 머리에 딱 달라붙게 뒤집어쓰는 모자), 수염, 화장먹으로 언저리를 검게 칠한 눈, 긴 머리, 검은 스카프 등. 그는 자신을 ISIS 대원이라고 밝히며 “신의 율법, 알라의 율법을 확립하기 위해 샴의 땅(시리아)에 왔다”고 말했다. 또 자신들이 비무장 포로를 처형하고 참수하지만 ISIS의 거사는 “전적으로 정당화된다”고 덧붙였다. “내가 여기에 있는 게 너무나 기쁜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는 정의로 지배한다.”
 귀국해서 테러리스트가 된다?
시리아 북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자바트 알-누스라의 지하디 전사들.
이프더카는 영국이 자신과 같은 전사들의 귀국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인터뷰를 마쳤다. 영국에선 언론과 정부, 보안기관들이 그들의 재입국을 거부하는 계획을 논의했다. 시리아에서 위험한 새로운 기술과 끔찍하고 무자비한 전투 기법을 터득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이프더카는 영국이나 다른 어떤 나라에도 별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가 시리아에서 6개월 동안 머물렀지만 살상 목적으로 총을 쏜 적은 한 번도 없다. 전투 경험이나 의료 지식도 전혀 없었고, 전술이나 군인 생활도 이해하지 못했으며, 아주 기초적인 총기 사용법만 배웠을 뿐이다. 또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적인 역할을 맡을 수 없었고, 소셜미디어를 열심히 사용했기 때문에 오히려 작전 보안에 골칫거리였다. 영국인 전사들의 지하드는 보초를 서고, 취사를 담당하고, 셀카를 열심히 찍어 홍보하는 것을 의미했다. 한마디로 전투라기보다 자기성찰적인 모험이었다. 하지만 대단한 역할은 맡지 않았다고 해도 그들이 시리아에 있었던 건 사실이고, 또 거기서 아주 잘 지낸 듯이 보였다. 그들은 ISIS의 일부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들이 테러리스트라고 해도 가장 무능력하고 가장 미숙하며 가장 무섭지 않은 존재였을 듯하다. 그러나 무능한 병사라도 군사적 용도는 있다. ‘뉴스나이트’에서 이프더카의 인터뷰가 나간 뒤부터 영국인 지하디들이 총알받이로 배치되기 시작했다. 그들의 명성으로 다른 ISIS 전사들이 질투했거나, 지휘관들이 그들의 충성심을 시험하려 했거나, ISIS의 전투 계획이 전술적 전환을 필요로 했을지 모른다. 2013년 12월 15일 영국인 지하디 중 첫 전사자가 나왔다. 이프더카였다.

지난해 2월 3일 아부 라이트 알-코라사니도 사망했다. 7월엔 포츠머스의 프라이마크 직원이던 무함마드 하미두르 라만이 전사했고, 메디 하산은 복부에 총상을 입었다. 그해 여름 ISIS는 이라크와 시리아의 상당한 지역을 점령한 뒤 ‘이슬람국가(IS)’로 이름을 바꿨다. 그러나 터키 쪽 국경도시 코바니를 점령하려고 전투를 벌이다가 미군 전투기의 지원을 받는 쿠르드족 민명대를 만나 고전하면서 IS 승리의 행진은 멈췄다. 그 전투 중 10월 21일 미군 공습으로 건물이 무너지면서 마무누르 로시드와 아사드 우자만이 부상했다. 로시드는 그 부상으로 며칠 뒤 사망했다. 사흘 뒤 하산도 코바니 전투에서 전사했다.

10개월 동안 영국인 지하드 9명 중 5명이 사망했다. 여섯 번째인 우자만은 심한 부상을 입었다. 일곱 번째 초우더리는 영국에서 옥살이를 한다. 마지만 2명인 맨체스터 출신 지하디 무함마드 자비드와 아부 카카(그는 이프더카가 사망한 전투에서 오른발과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는 몇 달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다.

지난해 8월과 10월 사이 복면을 하고 영국식 말씨를 사용하는 지하디가 미국 언론인 2명과 영국 구호요원 2명을 참수하면서 IS 외국인 전사들의 만행이 부각됐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외국인 지하디의 희생이 훨씬 컸다. 지난해 8월 미국 정부가 재정을 지원하는 웨스턴 지하디즘 프로젝트는 2011년 이래 시리아와 이라크로 건너간 외국 출신 지하디 2000명 중 약 3분의 1이 사망했으며, 사망자가 전체의 절반으로 늘 것으로 전망했다.

요르단 만의 거리 벽에 IS 깃발과 ‘신은 오직 한 분이며 무함마드가 그의 예언자’라는 글이 낙서로 그려져 있다.
영국인 지하디는 자신을 괴물에 맞선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영국과 세계의 대다수는 그들을 괴물로 간주한다. 하지만 둘 다 사실이 아니다.

영국인 지하디의 동기는 너무도 뻔하다. 그들은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했다. 그러나 영국은 그 청년들을 사악한 존재로 본다. 사실 그럴 이유가 없다. 그들의 이야기 대부분이 허구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의 귀국이 제기하는 위협에 관한 부분도 허구다. 시리아와 이라크에 건너간 영국인 500명 중에서 약 260명이 귀국했지만 그중 테러 혐의로 기소된 사람은 40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220명은 왜 기소되지 않았을까? 영국의 대테러 기관도 그들은 마슈두르 초우더리보다도 덜 위험한 존재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대테러 기관의 고위 간부는 귀국한 지하디보다 해외로 나가는 길이 차단된 지하디 지망자들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10월 테러 공격을 감행한 캐나다인 이슬람 개종자 2명이 바로 그 예라고 지적했다. 그중 1명은 퀘벡에서 군인 2명을 차로 쳐 그 중 1명이 사망했다. 다른 테러리스트 1명은 오타와에서 전쟁기념관의 경비병을 쏜 뒤 캐나다 의사당 안에서 경찰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그렇다면 영국인 지하디를 그렇게 우려하는 이유가 뭘까? 영국의 무슬림 인권단체 케이지는 영국의 보안기관들이 공공의 두려움을 누그러뜨리기보단 더 부추겨 엄격한 안보 관련법을 지지하게 하고 추가적인 자원을 할당받는 데 관심이 더 크다고 믿는다. 또 영국 정치인들은 이민에 대한 적대감을 표하는 것이 유권자에게 인기가 있기 때문에 자신이 좀 더 강인해 보이기를 원한다. 게다가 영국 신문들은 그처럼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잘팔리기 때문에 그런 기사를 계속 쓴다.

이런 이야기의 혼동 속에서 부상하는 승자는 누굴까?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 진정한 괴물이다.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을 말한다. 그는 권좌를 지키기 위해 나라를 분열시켰고, 수많은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국민 300만 명 이상을 난민으로 내몰았고, 남아 있는 주민에게 화학무기를 사용했다. 아사드는 언제나 알카에다 퇴치를 명분으로 그런 행동을 정당화했다. 한때는 그런 주장이 허구인 게 분명했다. 그러나 외국인 지하디가 그에게 바라던 적을 만들어줬을 뿐 아니라 국제 동맹관계를 요동치게 만들었다.

지금은 아사드를 후원하는 이란, 헤즈볼라, 러시아가 사실상 사우디아라비아, 페르시아만 국가들,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유럽 전체와 이스라엘의 동맹국이 돼 버렸다. 판타지가 현실로 바뀐 것이다. 유럽의 지하드 지망자 수천 명에겐 거울 속 이미지처럼 거꾸로 보이는 이런 세계가 이프더카의 뒤를 따라 그들의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초대장을 제공한다.

이프더카의 죽음 후 스코들랜드 말씨를 쓰는 젊은 무슬림 남성은 온라인에 올린 오디오 헌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주 기이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친구의 멋진 모습에 진짜 감동했다. 질투심이 났다. ‘터번을 쓰고 잘 생긴 눈과 수염을 가진 이 친구의 모습은 마치 예언자 같았다.” 그는 이프더카를 흉내 내고 싶었다며 “그는 그런 모습이 진짜 ‘쿨’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 필자 앨릭스 페리는 영국의 자생 지하디를 심층 분석한 전자책 ‘원스 어펀 어지하드(Once Upon a Jihad)’를 펴냈다. ] 번역 이원기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가상자산 과세 2년 유예 동의”

2가전도 '구독' 시대...삼성·LG 가전 구독 경쟁 본격화

311월 수출 전년比 1.4% 증가...14개월 연속 '수출 플러스'

4서민 지갑 꽁꽁 얼었다 ...소매판매지수 8개월째 '마이너스'

5'스타벅스의 최대 경쟁자' 스페셜티 커피는 왜 특별한가

6메르켈 전 총리가 말하는 자유

7SPC그룹, '변화 혁신' 강조...삼립 황종현·김범수 공동대표 체제

8이상기후가 물가 끌어올린다...초콜릿·커피 가격 급등

9 트럼프, FBI 국장에 '충성파' 카시 파텔 지명

실시간 뉴스

1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가상자산 과세 2년 유예 동의”

2가전도 '구독' 시대...삼성·LG 가전 구독 경쟁 본격화

311월 수출 전년比 1.4% 증가...14개월 연속 '수출 플러스'

4서민 지갑 꽁꽁 얼었다 ...소매판매지수 8개월째 '마이너스'

5'스타벅스의 최대 경쟁자' 스페셜티 커피는 왜 특별한가